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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라 이 사람을 (삼상 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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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이 사람을 (삼상 9:1~10)


삼상 8, 9장은 이스라엘 정치체제의 대전환을 다루고 있습니다. 

가나안 정착 이후 350여 년간 이스라엘의 정치체제는 각 지파를 중심으로 한 지방분권적인 신정체제였습니다. 
이 시대를 사사시대라고 합니다. 
사사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직접 다스렸습니다. 

여러분, 사사들을 아시지요? 
기드온, 삼손, 이런 사람들이 사사입니다. 
사사들은 지파 내부의 분쟁을 조정하는 재판관 역할을 했습니다. 
사사들은 외부의 침략이 있을 경우 군사 지도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사는 비세습적인, 비정규적인 지도자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백성들은 세습적이고 정규적인 왕을 세워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정치체제는 중앙집권적인 왕정체제로 전환됩니다. 

드디어 초대 이스라엘의 왕인 사울왕이 등장하게 됩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삼상 8장을 통하여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 마땅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 대신 왕을 세워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경고합니다. 
“그 왕은 틀림없이 너희를 종으로 삼을 것이라.”고. 
그래도 이스라엘은 왕을 세워달라고 막무가냅니다. 

삼상8:19-20절에서 그들의 얘기를 들어보십시오.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여러분, 보십시오. 
19.20절 두절에‘우리’라는 말이 몇 번이나 되풀이 됩니까? 
일곱 번이나 되풀이 되지요. 

‘우리’라는 말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표현입니다. 
‘우리’라는 말이 되풀이 되면 될수록 이스라엘이 얄밉습니다.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을 배신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배역함에도 불구하고 삼상 9장에 이르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삼상9:16절을 읽습니다.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아보았노라 하시더니.” 

여러분, 저가‘내 백성’이라는 단어를 강조해서 읽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내 백성’이라고 몇 번이나 반복합니까? 
세 번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내 새끼’라고 세 번씩이나 반복합니다. 

삼상8장 19-20절과 삼상9:16절을 보면,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배신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애틋한 마음이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이런 말씀을 읽다보면 감탄이 저절로 나옵니다. 
‘우리’라는 말을 일곱 번씩이나 반복하면서 외면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은‘내 백성’이라고 세 번이나 반복하며 껴안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배알도 없나 봅니다. 
짝사랑도 아니고 이게 뭡니까? 
그러면서 “내 백성의 소원이라면 할 수 없지 뭐” 하시면서 왕을 세워주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하나님의 태도에서 우리 어버이의 마음을 읽습니다. 
자식들의 태도가 영 못마땅하지만 자식의 소원이라면 못이기는 체 들어주는 어버이 마음 말입니다.
 
때때로 딸이 아버지의 뜻에 반하는 결혼을 고집할 때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런 놈한테 너를 시집보내려고 그렇게 정성껏 키운 것은 아니다. 안 된다!”라고 야단칩니다. 
딸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고생해도 내가 고생할 테니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떼를 씁니다. 
그러면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부모는 속이 상하고, 못마땅하지만 딸의 의견을 무시할 수만은 없습니다. 

혼수를 장만하는 날입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통장과 도장을 내놓으면서 딸을 향한 아버지의 깊은 속마음을 드러내고 맙니다.
“이왕 준비하는 것이니까 쓸 만한 것으로 제대로 장만하라.”고. 
이 속 깊은 아버지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대우하더라는 것입니다. 

‘로라’ 이야기가 있습니다. 
캘리포니아에 있었던 실제 이야기입니다. 
로라라는 소녀가 가출했습니다. 
로라의 어머니는 백방으로 딸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누가 로라를 봤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LA 어느 지역에서 창녀 노릇을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LA 지역이 얼마나 넓습니까? 
어머니는 딸의 사진을 넣은 전단지를 만들어 배포해볼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걸렸습니다. 
‘자기 얼굴이 들어간 이 전단지를 보면 딸이 얼마나 창피스러워 할까?’ 
어머니는 고심 끝에 전단지에 자신의 사진과 이름을 적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썼습니다. 
“이 사진의 엄마가 딸을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사흘 후에 로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린 것입니다. 

왕을 세워달라는 이스라엘의 요구에 응하시는 하나님의 결정에서 우리는 이런 어버이의 마음을 읽습니다. 

본문 말씀에 좀 더 집중하려고 합니다. 
삼상 9장은 하나님이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하는 내용입니다. 
사울은 어떤 사람이었기에 지도자로 선택되었을까요?(질문) 
궁금하지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의 일단이 오늘 우리가 읽은 ‘암나귀 잃은 사건’입니다. 

사울을 지도자로 선택하는 마당에 하나의 신변잡기에 불과한 ‘암나귀 잃은 사건’을 이처럼 길게 기술한 것은 뭔가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교훈이 있기 때문입니다. 
‘암나귀를 잃은 사건’은 사울의 인간됨을 드러내줍니다. 
그런 사울의 인간됨이 하나님의 눈에 들었다는 거지요. 

이제 한 구절씩 살펴봅시다. 

1) 4절 “그가 에브라임 산지와 살리사 땅으로 두루 다니되 찾지 못하고 사알림 땅으로 두루 다니되 없고 베냐민 사람의 땅으로 두루 다니되 찾지 못하니라.” 

에브라임 산지는 가나안 땅 중앙부에 위치한 산악지대입니다. 
‘살리사’ 땅은 에브라임 산지의 북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살리사’란 이름은 ‘세 개’라는 뜻입니다. 
아마 그 지역이 이렇게 표기된 것은 우기에만 물이 흐르는 와디가 세 개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알림’은 문자적으로 ‘여우나 자칼 같은 들짐승’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사알림은 여우들이 많이 사는 황무지나 사막지대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베냐민 사람의 땅을 두루 다녔다는 것은 베냐민 지파의 땅을 전반적으로 수색하였음을 나타내줍니다. 
이스라엘의 지리를 모르는 여러분이 이 지역들을 눈으로 그리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지명들을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하는 이유를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울 일행은 잃어버린 암나귀들을 찾기 위하여 멀고도 위험한 지역을 헤매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4절에 ‘두루 다닌다.’는 말은 히브리어 동사로 ‘아바르’인데 네 번이나 반복되었습니다.(한글 개역성경에서는 두 번째 동사가 번역되지 않았음) 

“그가 에브라임 산지와 살리사 땅으로 두루 다니되 찾지 못하고 사알림 땅으로 두루 다니되 없고 베냐민 사람의 땅으로 두루 다니되 찾지 못하니라.” 

이런 표현을 통하여 사울과 그의 사환이 아버지 기스의 명을 좇아 산과 계곡, 그리고 사막 지대를 찾아 헤매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그려줍니다. 
사울 일행은 대충 찾아보다가 포기하고, 시원한 그늘에서 시간만 보낸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종종 걸음으로, 때로는 뛰면서 성실히 책임을 감당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책임감이 있는 사람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을 잘 아시지요? 
사회적인 특권과 지위를 누리는 귀족은 그에 합당한 책임과 희생을 감당해야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반대 의미로 ‘노블레스 멜라디’(Noblesse Malady)라는 말이 있습니다. 
귀족으로서의 특권과 지위를 누리면서도 귀족의 신분에 어울리는 책임과 희생이 없는 이기적인 귀족들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병든 귀족’이라는 의미의 ‘노블레스 멜라디’라는 말을 듣는 사람은 귀족으로서 수치가 아닐 수 없지요.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망극하신 사랑의 은혜를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성령의 지도와 도우심의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교회 안에서 집사요, 권사요, 장로요, 목사라는 직분과 직책을 받았습니다. 
정말 죄인이었던 우리에겐 어울리지 않는 영광이지요. 
문자 그대로 영적으로 ‘노블레스’가 되었습니다. 
영적인 귀족이 되었습니다. 

영적인 귀족에게도 그에 합당한 책임과 희생이 요구됩니다. 
이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되느냐 아니면 ‘노블레스 멜라디’가 되느냐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왕으로 선택한 것은 그의 책임감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2) 5절 “그들이 숩 땅에 이른 때에 사울이 함께하는 사환에게 이르되 돌아가자 내 부친이 암나귀 생각은 고사하고 우리를 위하여 걱정하실까 두려워하노라.” 

삼일간의 수색은 헛수고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사환에게 집으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이유는 아버지가 잃어버린 암나귀보다는 3일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는 자신들을 더 걱정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당시에 산지를 여행하다가 맹수의 습격을 받거나, 타지방에 여행하다가 도적떼를 만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자신을 걱정하실 아버지를 생각하는 아들 사울의 태도에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울의 인격이 은은하게 묻어납니다. 


효도에는 ‘諒知’라는 것이 있습니다. 
양지의 사전적 의미는 ‘살피어 앎’입니다. 
즉 부모님의 심정을 헤아려서 받들어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아들이 어머니의 발을 씻어 드리는 것이 효냐? 아니면 어머니가 아들의 발을 씻기도록 가만히 놔두는 것이 효냐?’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언뜻 보면, 어머니의 발을 씻어드리는 것이 효인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속마음을 헤아려, 늙으신 어머니가 자식의 발을 씻기시면서 사랑을 주고 싶어 하신다면 그렇게 하도록 해드리는 것이 효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울의 마음가짐이 돋보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다른 사람의 입장을 배려하는 태도를 놓치지 않습니다. 
사울이 지도자로 선택 받은 데에는 이런 타인을 향한 깊은 배려도 중요한 요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6절 “대답하되 보소서 이 성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존중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라 그가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응하나니 그리로 가사이다. 그가 혹 우리의 길을 가르칠까 하나이다.” 

이 말은 종인 사환이 주인인 사울에게 건의한 내용입니다. 
사울이 독선적인 사람이었다면 사환은 아예 이런 건의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울의 지위는 집안의 종에 불과한 사환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 사환의 얘기조차 귀담아 듣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되어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이런 태도는 사울이 열린 마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훌륭한 리더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공동체가 발전하려면 좋은 생각들이 많이 쏟아져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대체로 이런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은 튀는 구성원으로부터 많이 나옵니다. 

지도자는‘예스 맨’보다 이렇게 튀는 구성원을 피곤하다고 여길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런 엉뚱한 아이디어들을 비웃거나 무시하기 쉽습니다. 
“뭘 안다고 헛소리야. 지금 하는 일이나 잘해!” 
이렇게 핀잔을 받으면 구성원들은 침묵하게 됩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두 사람의 생각이 똑 같다면 그 중의 한 사람은 필요 없다.” 

우리는 지난 수요일에 사도바울이 그렇게 혁혁한 선교열매를 거둔 것은 그에게 신실한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사도바울을 위해서라면 목이라도 내놓겠다는 브리스가와 아굴라 (롬16:3-4), 사도바울의 보호자였던 뵈뵈(롬16:1-2), 사도바울을 영적인 아버지로 모셨던 디모데(딤전1:18)가 바로 그런 동역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이 열린 마음을 갖지 않았다면 바울 곁에 이런 동역자들이 붙어있었겠습니까? 

오늘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의 신변잡기에 불과한 ‘암나귀 잃은 사건’을 통하여 사울의 인간됨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인간됨이 하나님의 눈에 들었다는 사실도 알았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사람 세우심에 대하여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지난주간 본문을 묵상하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은 신령한 자들만, 하나님 사촌 쯤 되는 사람들만 지도자로 세우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울을 지도자로 세우시는 것을 보면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적인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십니다. 

즉 자기 일에 책임감이 있는 사람, 남의 입장을 배려하고 남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 듣는 귀와 열린 마음을 가지고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 그래서 지극히 인간 냄새가 나는 사람을 지도자로 세운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신앙생활의 초월적인 면을 강조하다보면 현실에서의 인간다움을 상실하거나 소홀히 여길 우려가 있습니다.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남의 입장을 배려하고 남의 마음을 헤아려 주십시오. 
듣는 귀와 열린 마음을 가지고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그의 나라를 위하여 귀히 쓰실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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