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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혜롭고 미련하라 (롬 16: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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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롭고 미련하라 (롬 16:17~20) 
 

똑똑한 바보

오늘은 그동안 함께 살펴본 ‘겸비(兼備)한 신앙인’ 네 번째 주제로 “지혜롭고 미련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가끔 학교 뒷산에 올라보면 참 마음이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제가 공부한 신학교 뒷산은 지금은 워커힐이라는 대형 호텔이 자리 잡고 있지만 사실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아차산’(해발 285m)이라는 이름으로 불려 왔습니다. 이 아차산에 올라서 보면 앞으로는 드넓은 한강이 펼쳐져 있고, 뒤로는 병풍처럼 서울을 둘러싼 산들이 자리 잡은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입니다. 그래서 이 아차산은 삼국시대로부터 이곳을 차지하려는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진 장소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아차산에 올라보면 지금도 남아있는 아차산성 터는 그 옛날 바보 온달 장군이 전사한 곳이라는 전설도 남아있는 제법 유명한 장소입니다.

오늘은 바보 온달 이야기를 좀 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도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는 어려서부터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고구려 평원왕의 딸 평강공주는 울보여서 그 어머니가 “너 자꾸 울면 바보 온달이에게 시집 보낸다”고 했는데 그만 평강공주가 이 말을 정말로 믿고 궁궐을 나와 바보 온달이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평강공주는 궁궐을 나올 때 몸에 지니고 나온 금팔찌로 병든 말을 사서 잘 길러 준마를 만들고 그 말로 온달이 무술을 연마하게 했습니다. 나중에 왕이 개최한 사냥대회에서 이 온달이 큰 활약을 보여 왕의 사위로 인정받고 고구려의 장군까지 되었다는 전설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줄까요? “역시 남자는 장가를 잘 가야 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옛날 어떤 광고에 나온 문구처럼 “역시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역사가들은 이 바보 온달 이야기를 좀 다르게 봅니다. 온달에게 붙은 ‘바보’라는 호칭은 정말 잘못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온달은 바보다 아니었다는 것이지요. 무슨 뜻일까요?

온달이 정말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어수룩한 바보였다가 부인 잘 만나 갑자기 똑똑해 진 것이 아니라 본디 아주 똑똑한 사람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왜 이렇게 똑똑한 사람에게 ‘바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을까? 바보 온달 이야기가 나온 삼국사기에 보면 당시 사람들이 온달을 바보라고 부른 이유는 지능 때문이 아니라 외모 때문이었습니다. 가난한 온달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떨어진 옷과 헤어진 신발로 시장을 오가며 밥을 구걸하다가 바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바보라기보다는 오히려 효자 온달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가난하게 바보 소리 듣고 살던 온달이 하루아침에 영웅이 된 것은 평강공주와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평강공주가 온달에게 큰 도움이 된 것은 틀림없겠지만 본디 똑똑하고 능력도 있던 온달이 다만 가난한 평민이라는 이유만으로 천대를 받다가 공주와 결혼하면서 일약 장군으로 도약하게 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역사학자들이 지적하는 것은 당시 고구려가 철저한 계급사회였기 때문에 이렇게 일약 출세한 온달 이야기가 평민들에게는 영웅담이었지만 당시 기득권 세력이었던 귀족층들에게는 이 평민이 갑작스럽게 등장한 것은 위협도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달의 입장에서는 ‘영웅 온달’보다는 ‘바보 온달’의 이미지를 갖는 것이 고구려 귀족들의 견제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이었을 것이므로 그 스스로도 잘난 척을 삼가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라는 학설입니다. 말하자면 온달은 진짜 바보가 아니라 때를 기다리며 일부러 바보인체 했던 ‘똑똑한 바보’였다는 것이지요.


또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이번에는 아주 똑똑한 사람 이야기입니다.

제가 아는 목회자 중에 참 똑똑하고 올곧은 분이 있습니다. ‘올곧다’는 말은 “마음이 바르고 곧다”는 뜻을 가진 순 우리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품이나 품성이 올곧은 것이 참 중요합니다. 아무데나 휩쓸리지 않고 이익이나 손해에 약삭빠르지 않고 늘 중심을 지키며 꼿꼿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렇게 꼿꼿하고 올곧은 분들이 계시고 이런 분들은 대개 주변의 존경을 받지요. 게다가 이 분은 아주 똑똑한 분입니다. 사람들이 다 알아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납니다. 어려서부터 공부도 탁월하게 잘 했고 명문 대학을 졸업한 후 누구보다 뛰어난 실력으로 줄곧 앞에 서서 달려온 분입니다. 그런데 이 분 교회에 큰 분란이 일어나고 목회가 너무나 어려워졌습니다. 

저는 처음에 너무도 궁금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길까? 실력도 출중하고 너무나 올곧고 인품도 좋은 분인데 왜 이런 어려움이 생길까 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런저런 소식을 들으면서 깨달았습니다. “아, 너무 똑똑해서, 너무 올곧아서 문제로구나” 하고 말입니다. 너무 똑똑하다보니 자신의 판단이나 생각을 지나치게 신뢰한 것입니다. “내가 결정하는 것이 늘 옳다”고 확신한 것입니다. 또 지나치게 성품이 올곧다보니까 도무지 타협이란 것을 모릅니다. 유연성이 부족합니다. 남을 잘 품지 못합니다. 그래서 유연한 나무가 잘 휘지만 부러지지 않고 너무 단단한 나무는 힘을 주면 부러지는 것처럼 때로는 전혀 주변과 어울리지 못하고 부러지는 때가 있더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두 종류의 사람에 대해 소개했습니다. 한쪽 편은 온달 형의 ‘똑똑한 바보’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좀 모자라 보이고 어수룩해 보이지만, 그래서 때로는 남들에게 ‘바보’ 소리도 듣지만 실은 속이 꽉 찬 사람들입니다. 또 한 편은 ‘자타가 공인하는 똑똑이’들입니다. 분명 누가 봐도 똑똑합니다. 능력도 실력도 출중합니다. 성품도 올곧습니다. 그런데 자꾸 남과 부딪치고 갈등을 일으킵니다. 그렇다면 우리 크리스천들은 과연 세상을 살면서 이 둘 가운데 어느 쪽을 본받아야 더 하나님 뜻에 합당하게 살 수 있을까요? 이와 똑같은 문제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도 등장합니다.


로마교회의 거짓 교사들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가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입니다. 그런데 이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 로마교회는 상당한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마치 오늘날 한국 교회가 신천지 같은 수많은 이단들 때문에 큰 혼란을 겪고 있는 것처럼 당시 로마 교회도 거짓 교사들이 등장해 교회를 혼란에 빠뜨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를 어지럽히는 거짓 교사들을 주의하고 그들에게서 돌아서라고 경고합니다.

그렇다면 이 거짓 교사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른데 이들을 영지주의라고 부르는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이단이라는 분도 있지만 대개 율법주의자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유대교의 율법을 지켜야한다고 주장한 사람들이라고 봅니다. 아무튼 이들은 사도 바울이 가르친 복음과는 다른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전파하면서 로마 교회 성도들을 현혹하고 교회를 혼란에 빠트린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읽은 본문 17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사도 바울은 먼저 이들 거짓 교사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지적합니다. 이들이 주로 하는 일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사도 바울이 가르쳐준 바른 복음, 바른 교훈을 거슬러 다른 교훈을 가르쳤습니다. 

둘째 이들은 교회 안에 ‘분쟁’을 일으켰습니다. 여기서 ‘분쟁’이라는 낱말은 원어에 보면 쪼개어진 틈, 분열을 뜻합니다. 즉 이들은 로마 교회 안에 심각한 분열이 일어나게 만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이들은 ‘거치게’ 한다고 했습니다. 이 ‘거치게’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칸달론’입니다. 이 말은 ‘덫, 함정, 길에 놓아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란 뜻입니다. 여기서 영어의 스캔들이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연예인들이 스캔들이 나면 그들 앞날에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까? 이 스캔들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거짓 교사들은 로마 교회 성도들을 잘못된 길로 가게 해서 죄에 빠져 걸려 넘어지게 만든 것입니다. 이 세 낱말에 나타난 것처럼 로마 교회의 거짓 교사들은 성도들을 다투고 갈라지게 했습니다. 순진한 성도들을 넘어뜨리고 망하게 하려고 든 것입니다. 평화를 깨고 분열을 조장합니다. 이것은 분명 사탄의 역사입니다. 절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닙니다. 

20절에 보세요.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고 했지요? 우리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은 반드시 평강을 이루어야 합니다. 반면 사탄은 ‘참소(헐뜯기=이간질)하는 자’로서 평강을 깨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말로는 하나님을 찾고 겉으로는 교회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열매가 평강이 아니라 다툼과 분열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사탄의 역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사탄을 따르는 자가 되지 않으려면 단호하게 이들을 살피고 떠나라고 ‘권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권한다’는 말은 권고나 권면의 의미가 아닙니다. 강력한 경고입니다. 즉 이런 거짓 교사들을 대할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이것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이단을 만났을 때 해야 할 행동이기도 합니다. 첫째로 “잘 살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살핀다’는 말은 원어에 보면 눈을 똑바로 뜨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눈을 똑바로 뜨고, 두 번째 “그들에게서 떠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떠난다’는 말은 ‘단번에 돌아선다’는 뜻입니다. 즉 이런 이단의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을 만나면 절대 현혹되지 말고 눈을 똑바로 뜨고 잘 살펴서 절대 현혹되거나 흔들리지 말고 단번에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하는 말이 얼마나 겉보기에는 그럴듯한지 모릅니다. 겉으로 하는 말은 너무도 번지르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인 눈을 똑바로 뜨고 잘 살펴보면 그들의 가르침일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깨닫게 되기에 잘못된 것을 알면 절대 주저하지 말고 단호하게 그들에게서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똑똑하고 말 잘하는 거짓 교사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만 된다면야 뭐가 문제겠습니까? 그대로만 된다면 세상에 누가 이단의 유혹에 빠지겠습니까? 이게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쉽지 않은가? 이 거짓 교사들이 너무 똑똑하기 때문입니다. 로마 교회의 거짓 교사들은 너무 많은 지식을 가진, 한마디로 너무 똑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똑똑할 뿐 아니라 또 말까지 잘합니다. 18절 뒷부분에 나온 것처럼 이들은 온갖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어느새 쏙 빠지게 되어 이들의 지식과 달변에 속아 넘어간 성도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이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에 찾아오는 이단들을 보십시오. 성경을 얼마나 잘 아는지 모릅니다. 말은 또 얼마나 잘합니까? 그래서 “이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자칫 그들의 거짓 교훈에 넘어가기 쉬운 것입니다. 세상에서 좀 배웠다는 사람들,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이 거짓 이단에 빠지는 일도 많습니다. 그러니 똑똑하다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입니까? 지식을 자랑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우리가 하나를 배워도 바로 배워서 바로 사는 것이 중요하지 남들보다 지식이 더 많고 하나라도 더 배우고 학력이 더 높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똑똑하기로만 따지면 이단보다 더 똑똑한 사람 없습니다. 말 잘하기로 따지면 그들처럼 말 잘 하는 사람들 없습니다. 다만 그 지식과 똑똑함이, 그 달변이 바른 길로 가지 않고 잘못된 길로 가고, 또 자신만 망치는 것이 아니라 남도 망치고 하나님의 교회를 분열시키고 성도들을 이간질하는 데 사용되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18절부터 보면 이들 거짓 교사들의 결정적인 특징 하나가 나옵니다. 다같이 읽어볼까요?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이런 거짓 교사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말로는 하나님 찾고 겉으로는 예수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예수님 아닌 자기들의 배(만족)만 섬기는 자들입니다. 즉 복음을 구실 삼아 실상은 자기의 만족만을 추구하는, 자기 이익에 빠른 약삭빠른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아마 너무 똑똑해서 계산이 빨라서 그럴 것입니다. 꼭 이단이나 거짓 교사들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있습니다. 겉으로는 교회 잘 다니고 신앙생활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 주인이 누구냐?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 배요 자기 이익인 것입니다. 똑똑하다보니 계산이 빨라서 교회를 다녀도 절대 손해 안 보고 늘 이득 되는 일만 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결코 이단이나 거짓 교사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거짓 교사를 물리치는 방법

이제 남은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똑똑하고 말 잘하는 거짓 교사, 이단들을 어떻게 물리칠 것인가? 아니, 나아가 우리도 그들처럼 예수님이 아닌 내 배를, 내 이익을 주인으로 삼고 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가 정말 예수님만 주인으로 삼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사도 바울은 19절에서 아주 분명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함께 읽지요.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사도 바울은 일단 로마 교회 성도들이 순종을 잘하는 성도들이라고 칭찬합니다. 일단 하나님의 말씀에 잘 순종하고 지도자들에게 잘 순종하는 성도들이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순종을 통해 어떤 유혹도 잘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순종 잘하는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처럼 순종 잘하는 성도들은 이렇게만 하면 어떤 거짓 교사들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한 사람이 되면 된다.”

이 말은 지혜로움과 미련함을 함께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무조건 올곧아서도 부러지기 쉽고, 무조건 유연하면 타락하기 쉬운 것과 마찬가지로 늘 지혜롭고 똑똑하기만 하면 그 지식 때문에 교만해져서 거짓 교사들처럼 되기 쉽고, 무조건 미련해서는 도무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 때로는 지혜로워야 하고 때로는 미련해야 하는데 어떨 때 지혜롭고 어떨 때 미련해야 하는가? 선한 일에는 지혜롭고 악한 일에는 미련하고 굼떠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한 일에는 아주 판단력이 빠르고 빨리 반응해야 하지만 악한 일을 보면 미련하고 굼떠서 느려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미련하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두 주 전 나눈 말씀 중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 10:16) 할 때 이 “순결하라”는 말과 같은 낱말입니다.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자세를 가지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 20절에서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했습니다. 같은 뜻이지요.

한 마디로 손해도 좀 보고 살자는 말입니다. 희생도 좀 하고 살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몰라서 당하는 것과 알면서 당하는 것은 정말 다릅니다. 몰라서 당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다 알지만, 손해 보는 줄 알지만 일부러 미련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이 바뀝니다. 그 누구도 손해 보거나 희생하려고 들지 않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방법입니다. 좀 바보가 되고 좀 손해도 보고 사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 아니면 누가 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마 5:39-41) 

이게 바로 바보 되라는 말 아닙니까? 이 말씀 바로 앞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사는 방법이지요. 정신 똑바로 차려서 절대 손해 안 보고 혹시 누가 내게 손해를 끼치거나 해를 입히면 똑같이, 아니 아예 몇 배로 갚아주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전혀 다른 기준을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바보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이 주고 더 크게 손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예수님도 바보가 되셨습니다. 때리면 맞는 바보, 십자가를 지는 바보가 되셨습니다. 얼마든지 십자가에서 내려와(마 27:4) 천군천사를 동원해 그들을 쓸어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매 맞고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에 달립니다.

그런데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봅시다. 이렇게 손해 보고 스스로 바보 되는 것이 정말 약한 방법일까요? 정말 이렇게 사는 사람은 늘 손해만 볼까요?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간디도 힌두교도였지만 산상수훈을 읽으면서 일찍이 스스로 바보 되는 법을 배웁니다. 때리면 맞고 가두면 갇히는 비폭력 무저항주의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기를 쓰고 저항해도 꿈쩍 않던 영국이 이 산상수훈에서 배운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주의에 결국 두 손 들고 항복하고 맙니다. 이 방법이 가장 바보같이 보이고 가장 약하게 보이지만 실은 가장 강한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 미련하고 바보 같은 방법으로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만약 그 때 십자가에서 내려와 그 무서운 힘으로 로마와 유대인들을 싹 쓸어버렸다면 예수님의 이름은 위대한 혁명가로 남을 수는 있었겠지만 영원히 세상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정말 세상을 이기고 변화시킬 힘은 이 미련하고 바보 같아 보이는 십자가에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1장에서 미련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미국의 철강왕 카네기의 회사에 늘 웃고 입에 남에 대한 칭찬을 달고 다니는 챨스 슈와브라는 노무자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늘 회사에서 가장 먼저 출근하는 카네기보다 회사에 먼저 와 있었습니다. 늦게까지 일하는 사람 중에는 언제나 챨스 슈와브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카네기는 그에게 100만 불의 보너스를 줍니다. 사람들은 사람만 좋지 능력도 별로 없어 보이는, 어쩌면 좀 어리숙해 보이기까지 한 일개 노무자에게 어떻게 저런 큰돈을 주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훗날 이 노무자가 미국 최고의 철강회사 유나이트 스틸사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그의 사장 취임식에서 카네기가 축사를 했습니다. “일개 노무자가 어떻게 이 회사의 사장이 될 수 있는지 의아하십니까? 그러나 그의 곁에서 그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어떻게 일하는지를 꾸준히 지켜본 사람이라면 지금 오늘 이 자리는 당연히 스와브의 자리라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입만 열면 항상 남을 칭찬해 주고, 남의 장점을 찾아내는 재주를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든 조그마한 장점이라도 발굴해 내어 칭찬을 했던 것입니다. 미련해 보이는 자가, 바보 같은 사람이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고, 수많은 똑똑한 자, 말 잘하는 자들보다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것입니다. 미국 판 온달 장군입니다.

혹 이런 생각이 드십니까? 아니, 그러면 지금 저 사람이 나를 속이는데 가만히 앉아 당하라는 말입니까? 저 인간이 나를 밟는데 그대로 밟히라고요? 나를 비난하고 저렇게 상처 주는데 당하고만 있으라고요? 예, 그러면 됩니다. 나는 바보니까요. 예수 안 믿는 남편 구원하고 사랑하는 가족 구원하려면 참고 또 참아야 하는데, 자존심이고 뭐고 다 꺾어야 하는데 그래도 좋다고요? 예,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아니 교회 안에서조차 너도 나도 똑똑한 사람이 되려 하고, 절대 남에게 지지 않고, 절대 손해 안 보고 살려고 하는 시대에 하나님은 미련한 자들, 스스로 바보 된 자들, 기꺼이 손해 보고 희생하는 자들을 통해 교회를 바꾸어 가고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십니다. 세상은 똑똑한 사람, 능력 있는 사람, 잘난 사람을 세워 일을 하지만 하나님은 미련한 자들과 바보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이들을 통해 정말 세상이 바뀝니다. 나를 박해하던 사람이 돌아올 것입니다. 매 맞고 손해 보고 당하면서도 나를 때리는 사람, 나를 박해하는 사람을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배운 것 없어도 많이 배운 사람들을 뒤집어 놓고 가진 것도 없어도 부자들을 바꾸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똑똑한 바보의 힘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기꺼이 미련한 자, 바보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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