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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얍복강 나루터에서 (창 32:2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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얍복강 나루터에서 (창 32:24~32)


요즘 북경 올림픽에 전 국민의 시선이 다 쏠려있습니다. 28개 종목에서 302개의 금메달이 있는데 여기서 금을 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금을 딴 선수들이 대견해 보이기도하고 그들이 금을 따기까지의 지난날의 삶의 스토리가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기도 하지 않습니까? 

우리 수영 사상 첫 금메달을 안겨준 박태환 선수가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예선에서 제대로 몸에 물 한번 담가 보지도 못한 채 부정 출발자로 실격 당하는 그 어린 선수의 모습은 우리로 안타까움을 갖게 했습니까? 그런 그가 4년 뒤에 기라성 같은 선수들을 제치고 금을 거머쥐니까 온 나라가 열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연히 저 선수는 금을 따겠다고 기대했던 선수가 메달을 놓쳤을 때 그 아쉬움이라는 것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이게 인생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인생에는 성공과 실패가 함께 공존한다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사람은 어느 누구도 항상 성공만 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누구도 평생 실패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기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인생에 닥쳐오는 성공과 실패를 잘 관리하는 지혜를 배우는 것입니다. 성공은 계속 유지 발전시키고, 실패는 잘 극복해서 성공을 바꿔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을 보게되면 야곱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야곱이 어떤 사람입니까? 지금까지 노력해서 안 되는 것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은 다 이루었기에 불가능을 몰랐습니다. 출생서열까지 바꾸면서 축복을 가로챘고 원하는 여인을 얻고자 14년이나 봉사하며 재물을 얻기 위해 또 6년을 머슴살이로 보내면서 재물을 모았던 입지 전형적 인물이 아닙니까? 분명 성공 신화에 나올법한 삶의 스토리가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 가출을 해서 20년 만에 거부가 되어 고향으로 가는 그는 분명 세상 잣대로 성공자였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꿈꾸던 가문의 족장이 되기 위해 고향으로 가는 중에 야곱이지만, 그의 귀향의 발길은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20년 동안 그의 마음 한 구석을 짓눌러왔던 형에 대한 두려움이 그를 온통 뒤덮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토록 무서운 형 에서와의 대면을 피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32:7절에 보면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라는 말씀 속에 지금 야곱이 어떤 심정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이제 형의 환심을 사기 위해 형 에서에게 먼저 선물을 보냅니다.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지요. 그 내용물이 본문 13-15절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거기서 경야하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암염소가 이백이요 수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수양이 이십이요 젖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나귀가 열이라.” 이 정도의 가축은 한 도시가 그 도시를 포위하고 위협하는 외국군대로 하여금 되돌아 갈 마음을 품을 수 있게 하는 재산이었습니다. 게다가 각 가축마다 암컷과 수컷을 같이 보낸 것은 증산의 가능성으로 인해 선물의 가치를 한층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수의 가축을 내놓아서라도 에서의 감정을 풀어보고자 했을 만큼(32:20) 에서에 대한 야곱의 두려움은 컸던 것입니다.

그러고도 불안해서 가족과 재산을 삼분대로 나눕니다. 1소대 하인의 자식들과 그 재산을, 2소대 레아의 자식과 그 재산을, 3소대 사랑하는 여인 라헬의 그 자식과 재산을 그리고 자기는 맨 꽁지에 섭니다. 여차하면 모든 가족과 재산을 버리고 도망이라도 갈 수 있을 만큼 멀리 떨어져 따라옵니다. 그러다가 한 나루터에 머물게 됩니다. 선뜻 나루터를 넘기가 편치 않습니다.

22-24절에 보면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네며 그 소유도 건네고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여기 홀로 남았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야곱은 이 고독하고 두려운 밤을 지내면서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합니다. 이제 자기의 인생을 어느 누구도 책임을 지지 못하는 자기만의 자리입니다. 정말 정신 없이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밤을 지새는데 잠이 오지 않습니다. 잠을 이룰 수 없는 이 밤에 괴로움과 고민이 야곱을 계속 안타깝게 만듭니다.

그때 웬 사람이 자신을 공격합니다. 야곱은 형이 보낸 첩자가 왔구나 생각하고 필사적으로 싸웠을지 모릅니다. 야곱은 이때껏 한번도 누구에게 져 본적이 없었습니다.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사람이었습니다. 실패라고는 몰랐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못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공격하던 그 사람은 자신의 환도뼈를 쳤습니다. 환도뼈는 허벅지와 엉덩이 사이에 연결되는 뼈를 가리킵니다. 환도 뼈를 치니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닥에 나뒹굴었습니다. 그래도 뭐 야곱의 기질이 어디 가겠습니까? 다리를 질질 끌면서도 끝까지 상대방을 놓치 않았습니다. 26절에 보시면, 야곱에게 싸움을 걸어온 자가 "나로 가게 하라' 는 표현이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물고 늘어졌으면 이런 표현을 하겠습니까? 여기 26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나를 축복하십시오. 이제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를 축복하십시오." 이것은 절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아침!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지금 야곱이 홀로 남아있던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얍복강 나루터입니다. 얍복이란 ‘비운다, 몽땅 털어 버린다. 쏟아 버린다’는 뜻입니다. 얍복 나루터는 지금까지 쌓아왔던 자기인생을 철저히 비우는 장소입니다. 벗어야 입을 수 있고, 비워야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습니다. 야곱에게 있어 얍복강 나루터는 그의 삶 전체를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인생의 전환점이 됩니다. 이 나루터는 결코 자신의 것을 내려놓지 않고는 건널 수가 없는 현장입니다. 여러분,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직도 여러분 가운데는 내가 무엇을 해 볼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 나오지만,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의지하고 더 믿어요. 자신이 가진 경험! 물질! 명예! 물론 이것이 중요하고 필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환도 뼈를 다치기 전에 야곱은 특별히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도움이라는 것, 그것은 자기 한계를 느낀 사람들이나 나약한 사람들이 찾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모든 일이 잘 먹혀들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의 그 풍요로움과 부가 있었습니다. 오늘의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사는 것, 그것이 야곱의 인생철학이요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오던 그 날 밤 환도 뼈가 부러질 때 자기 한계를 깨달았습니다. 노력하고 애써서 얻은 성공도 어느 한계에 부딪히면 사라지고 결국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 흙으로 돌아갈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동안 최선을 다했지만 환도 뼈가 부러진 야곱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진정한 자기 실체와 자아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오늘 야곱은 자기 환도뼈 친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인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전 우주에 유일한 신이십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가장 권세 있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가지신 분이요, 하늘에 있는 자들이나 땅에 있는 자들, 그리고 땅 아래 있는 자들이 그 발 앞에 엎드려 영원토록 찬송해야 될 영광의 주님, 승리자 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친히 와서 야곱의 환도뼈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야곱을 풍요로운 환경 따라 그대로 두었다면 파멸에 빠지고 말았을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개입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야곱의 축복을 흩뜨려 버리셨습니다. 모든 요소의 핵심이 된다는 환도뼈를 쳐서 힘줄을 끊었습니다. 왜입니까? 환도뼈를 치심으로 야곱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깨닫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에게는 갖가지 축복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축복을 주시는 자와 동행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분명 이 자리는 그의 삶의 실패처럼 느끼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실패처럼 여겨지는 자리에서 다시 일어납니다. 야곱은 이렇게 외칩니다. 26절에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야곱은 이 나루터에서 발버둥과 매달림의 차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진정 누구를 위해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야 될지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신앙은 발버둥이 아닙니다. 신앙은 매달림입니다. 여기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지금까지 자신이 했던 성공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성공이 아니지 않았습니까?

옥스퍼드 대학의 맥그래스 교수가 쓴 '내 평생에 가는 길'이란 책에 보면 인생을 묘사한 한 구절이 참으로 제 마음에 와 닿습니다. 인생에 대해서 그는 “짧고 상쾌한 산책일 줄 알았던 것이 미처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마라톤으로 바뀐다.” 어린 시절, 철이 없을 때는 인생이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걷는 산책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좀 더 걷다 보면 미처 준비가 안 된 채 달려야 하는 마라톤이 되어 버립니다. 이 마라톤을 달리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쳐 쓰러지고 탈락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절망에 빠지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는 인생길입니다.
요즘도 리더십을 위해 쓰여진 책 가운데 꾸준히 읽히는 책 가운데 밥 포드의 「하프타임」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가운데 "성공추구에서 의미 찾기로 바꾸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공만을 찾아서 몸부림치는 인생의 신기루 같은 성공은 인생의 모든 가치를 파괴시키고 우리를 허무 속에서 떨게 합니다. 사람이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결산이 가까울수록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의미 있는 일에 내 삶을 바치며 살아 왔느냐 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느냐, 내 이름이 남느냐, 그런 것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가까워질수록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서, 의미와 보람과 기회를 발견하고 "하나님, 정말 하나님이 주신 일 대문에 내 인생은 보람 있었고, 신바람 나고, 놀라운 인생이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내 평생의 보람 있는 가치를 발견하여야 합니다.

여기 얍복강 나루터에서 주님이 물어 보십니다. 27절에 보시면 “네 이름이 무엇이냐?' 여러분! 하나님이 몰라서 물어보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야곱 자신으로 하여금 자기 이름을 고백함으로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야곱이란 말은 그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 먼저 나오는 형을 시기하여 '발뒤꿈치를 붙들고 나왔다'는 데서 생긴 이름입니다. ‘약탈자, 사기꾼, 강도’라는 뜻입니다. 왜 그러한 이름을 지었습니까? 야곱은 형님과 쌍둥이로 출생할 때 뱃속에서부터 형의 발꿈치를 붙들었습니다. 그는 신경질이 나서 2등을 못하는 사람입니다. 1등이 아니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절대 양보가 없는 사람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의 목적을 쟁취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 음성 앞에 부끄럽지만, 자기의 이름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예, 약탈자 야곱입니다. 네, 간사한 야곱입니다. 예, 저는 나하나 잘되는 것이라면 남을 짓밟고서라도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 고백 앞에 하나님은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28절에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이 이야기 속에서 가장 의미 깊은 것은 야곱이 하나님으로부터 새 이름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새 이름을 얻는다는 것은 그의 존재와 성격과 사명과 삶이 바뀐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을 가진 새 야곱이 탄생한 것입니다. 더 이상 남을 속이고 꾀를 부리며 자기의 욕심을 따라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이 아니라, 자신과 자기 가족의 생명의 안위를 오로지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인간입니다. 하나님을 속이며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뺏어낸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싸워서, 즉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복을 받아내는 인간으로의 변화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때의 상황을 호세아 선지자는 호세아 12장 4절에서 이렇게 주석하고 있습니다.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자신의 재주가 아니라 이제 하나님 그분을 의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간사한 자기 꾀가 아니라 내 수단, 내 요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더라”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는데 왜 웁니까? 기뻐 뛰어야지 왜 웁니까? 이 눈물은 가슴 깊이 숨겨두었던 자신의 속내를 들어내 보이는 눈물이었습니다. 꼭꼭 잠궈 두었던 가식를 털어 내는 눈물이었습니다.

억척스럽게 사는 것 같지만 그럴수록 더 외롭고 힘들었던 자신의 인생에 대한 진실한 고백의 눈물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억척스러워 보였고 강해 보였지만 속에는 깊은 불안과 한없이 약한 모습이 숨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숨길 수 없는 부끄러움을 토하는 눈물이었습니다. 가장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야곱은 환도 뼈가 부러진 다음에야 진실한 기도, 제대로 된 씨름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씨름은 야곱의 인생을 바꾼 새벽의 씨름이었습니다. 여기가 장소적으로 얍복 나루터였다면 시간적으로 새벽녘이었습니다. 내 인생을 버티어 주던 환도 뼈가 부러지는 얍복 나루터! 어둠이 물러가고 동이 터 오는 이른 새벽! 거기서 야곱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절대 전환기를 경험한 야곱은 얍복 강가를 브니엘이라 이름지었습니다. 이제 이 브니엘의 아침을 보십시요. 31절을 보십시오.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란 뜻입니다. 이제까지 태양은 나를 감시하고 나를 책망하는 두려움의 얼굴이었습니다. 이제 내가 깨지고 하나님 만나고 은혜를 체험하고 나니 어제 떠올랐던 그 태양이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얼굴이었습니다. 사랑의 얼굴이었습니다. “하나님, 내 환도뼈 잘 치셨어요.” 야곱은 일평생 절뚝거릴 때마다 얍복강 나루터를 건넙니다. 어거스틴은 말했습니다. “위풍 당당하게 불의의 길은 걸어가는 것보다 절뚝거리며 의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축복이다.”

사랑하는 성도의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와 있습니까? 여러분의 현 주소는 어디입니까? 아직도 남의 발꿈치를 잡으려고 남보다 먼저 되려고 몸부림치고 계십니까? 아직도 튼튼하다고 착각하고 있는 자신의 환도뼈나 의지하면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에서의 추격에서처럼 무언가에 불안하게 쫓겨다니고 있습니까? 모든 것이 다- 떠나가 버렸습니까? 그래서 이제는 대단히 고독한 자리에 서 계십니까?

아곱을 사랑으로 추격해 가신 하나님께서는 지금 여러분을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을 일대일로 만나길 기다리십니다. 우리를 자녀로 선택하시고 죄악가운데서 구원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현재 모습에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더 한층 성숙한 모습으로 이끌어 올리길 원하십니다. 더 귀한 그릇으로 빚어가길 원하십니다. 하나님보다 더 의지했던 여러분의 환도뼈는 무엇입니까? 

한번도 인생을 바꾼 새벽의 씨름 맛을 보지 못한 사람이 계십니까? 이 아침!! 여러분, 지금 야곱의 그 곤고함에 처해 번민하는 분계십니까? 그렇다면 지금이 여러분이 여러분 인생의 얍복 나루에 서신 때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 때가 바로 하나님을 만나실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씨름해야 할 때입니다.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모든 문제의 해결을 얻으려고 해야 할 때입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만군의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께 항복하면서 두손들고 기도해보십시오. 내 마음속에 숨어 있는 문제의 뿌리도 밝혀 주실 겁니다. 깎고 다듬어 주시는 주님의 손길도 보여 주실 겁니다. 더 나아가 브니엘의 아침을 밝히는 태양처럼 우리의 어두운 문제마저 책임지고 해결해 주실 겁니다.

여러분이 이 얍복강 나루터에서 다시 일어설 때 브니엘의 아침 햇살이 비쳐올 것입니다. 분명 태양은 태양인데 어제의 그 태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얼굴 - 브니엘의 태양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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