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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복절] 민족부활의 비전(2) (겔 37: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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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부활의 비전(2) (겔 37:1~14)


지난 7월 24일 열린 아세안지역 안보포럼(ARF)이 싱가포르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여기서 의장국인 싱가포르가 금강산 총격사건의 조속한 해결과 북한이 주장하는 10.4선언에 기초한 남북대화 지지를 포함시킨 의장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남북양측의 항의를 받고 두 문구를 다 삭제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대다수의 국민들은 당황했습니다. 왜냐하면 10.4선언은 기본적으로 대북경제지원 문제로 남북당사자 간의 현안문제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의장성명에서 금강산 사건만 언급되는 것이 순리이기 때문입니다. 

금강산 관광특구에서 북한군이 우리 관광객을 정조준 해 사망케 했는데도 불구하고 북한의 태도에 대해 분노를 금할 길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ARF같은 국제회의에서 우리의 입장을 호소하는 것은 당연하다하겠습니다. 
북한은 의장성명에서 금강산 사건을 삭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사실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여러 분야에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외교역량에 대해 담당자에게 그 책임을 묻지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Ⅰ. 기독교와 민족주의

민족주의(Nationalism)는 국민주의, 국가주의라는 말과 같은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민족주의는 민족성의 절대 우위를 위하여 절대 가치를 성립시키는 사상체계입니다.
근대 한국에서의 민족주의 활동은 한일합방 이후에 일본 군국주의자들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백성들의 구국운동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993년 8월 4일 중국 상해 만국공묘로부터 봉환된 박은식(임정 제 2대 대통령), 신규식(임정 국무총리), 김인전(목사, 임정 의정원 의장), 안태국(임정 국무의원), 노백린(군무총장) 임정 각료 5위가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이 중에 김인전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목사라고 하는데 감회가 새롭습니다. 기독교 입장에서 볼 때 역사상에 나타난 민족주의는 기독교를 배척했습니다. 유대 민족주의가 그러했고 독일 게르만 민족주의가 그러했고 일본의 군국주의가 한국교회를 박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가 민족주의의 선봉이 된 것은 부인할 수 없으며 여기에 한국적 기독교의 희비가 공존하는 것입니다. 민족주의자들은 국권 회복이라는 차원에서 일본과 싸웠고 신사참배는 정신적 굴욕감에서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독립운동과 함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신앙자유와 계명 준수라는 차원에서 싸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과 민족주의자들은 신앙자유와 인권회복이라는 공약수 앞에 어쩔 수 없이 힘을 합하여 일본과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적 민족주의 운동을 경계합니다.

기독교는 민족적일 수는 있어도 기독교가 곧 민족주의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민족주의 그 자체는 구원을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들 중에 상당수가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일제 강점기로부터 8·15 해방은 일제의 압제에서 정치적 승리라기보다는 신앙승리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조국통일의 과제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의 역사는 선민 역사의 중심부에 늘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받는 고통 때문에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은 끊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라고 한 에스겔 37장 11절의 고백은 그들의 비참한 상황을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마른 뼈가 다시 사람으로 되어서 일어나는 이상을 보여주신 다음에 이제는 두 막대기가 하나가 되는 환상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에게 [막대기 하나를 취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유다와 그 짝 이스라엘 자손이라 쓰라]고 했습니다. 또 [다른 막대기 하나를 취하여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과 그 짝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고 했습니다(겔 37:16-17). 이것은 남북으로 분리되어 포로생활을 하는 백성들을 하나님에 의하여 하나로 통일시켜 주시겠다는 계시입니다.

백성들이 무슨 뜻이냐고 물으면 이스라엘 자손들을 열국에서 모아서 고토로 돌아가게 하고 한 나라를 이루고 한 임금이 다스리게 하겠고 다시는 둘로 나누어지지 않는다고 하라고 했습니다(37:21-22). 
이것은 남조 유다와 북조 이스라엘이 하나가 될 것을 보여주는 통일계시입니다. 이 계시는 민족사적인 비젼(소망)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을 수직관계에 두고 백성들을 수평관계에 둡니다. 민족주의는 민족을 수직관계에 두고 국가를 수평관계에 두고 있습니다. 


Ⅱ. 민족화합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해 되는 것입니다.

본문 37장 19절에 『 …한 막대기가 되게 한즉 내 손에서 하나가 되리라 하셨다 하고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하나가 된다는 말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the absolute sovereignty of God)에 의해서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연계와 도덕계를 초월해서 관계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말할 때 하나님은 최고의 입법자요 또 자연법칙을 지으신 분이라는 단순한 법적 술어보다는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지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워필드(B.B. Warfield)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칼빈주의자는 모든 현상 배후에서 하나님을 발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현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태도로 자기 전 생애를 살아가며 구원문제에 있어서 자아 의존을 배제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란 말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 의지(뜻) 자유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지(뜻) 적용의 자유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지(뜻) 적용의 결과 성취의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①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심에 있어서도 주권적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내어 이스라엘 지도자로 삼았습니다. 여호수아 군대가 요단강 도하작전을 성공하게 하셨습니다. 다니엘을 사자의 이빨에서 구해내셨는가 하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평소보다 칠배나 뜨거운 풀무불 속에서 구해 내셨습니다(단 3:27). 스데반을 돌에 맞아죽게 했는가 하면 베드로를 감옥에서 구출하셨습니다.

② 재물을 얻게 하심도 주권적입니다. 신명기 8장 18절에 『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고 했습니다.

③ 병을 고쳐주심도 하나님의 주권에 있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에 있는 환자들 가운데서도 38년 된 병자에게 고침을 주었습니다(요 5:1-9).

④ 무생물을 통치하심에 있어서도 주권적입니다. 창세기 1장 3절에 『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라고 했습니다.

⑤ 비이성적인 동물세계에 대한 통치도 주권적입니다.
출애굽 당시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로 왕과 애굽 사람들에게 10가지 재앙을 내릴 때 비이성적인 동물을 사용했습니다(출 8:1-10:20).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도둑질 하는 헤롯을 작은 벌레로 거꾸러뜨리시는가 하면 하나님의 총회에 공적으로 도전하는 고라 자손들을 땅을 갈라지게 하여 매장시켰습니다. 벧엘에 있는 젊은 아이들이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고 조롱할 때 두 암콤을 내어 보내어 저들을 죽게 했습니다(왕하2:23∼25).

⑥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도 주권적입니다. 잠언 16장 9절에 『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고 했습니다.

⑦ 천사(영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도 주권적입니다(대상 21:15, 27; 행 12:11). 하나님은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천사를 보내어 그를 출옥시키도록 했습니다(행12:11). 하나님은 천사장 미가엘을 보내사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게 했습니다(유 1:9).

⑧ 하나님은 악인들에 관해서도 주권적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그 계획이 성취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창 37:18). 하나님은 탐욕에 눈이 어두운 선지자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그의 뜻과는 반대로 이스라엘을 축복하도록 했습니다(민 23:8-10). 하나님은 바로 왕을 감동시켜 요셉을 총리로 삼게 했습니다(창 39:3-4). 하나님은 에서를 감동시켜 야곱을 죽이려고 달려왔던 노한 에서의 400마성이 오히려 야곱의 환영대가 되도록 했습니다(창 33:4). 하나님은 에스더를 통하여 왕을 감동케 하므로 죽음 직전의 유대인들을 구해내게 하셨습니다(에 5:2). 하나님은 악인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연단하는 도구로 사용하시기도 하십니다.

이렇게 이 세상 역사는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까지, 보이지 아니하는 것에서부터 보이는 것까지 주관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민족의 통일은 절대로 하나님의 손에 의한 하나님의 섭리적인 주권적 역사에 달려 있습니다.


Ⅲ. 민족화합에는 거국적인 성결운동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본문 37장 23절에 『 그들이 그 우상들과 가증한 물건과 그 모든 죄악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 범죄한 모든 처소에서 구원하여 정결케 한즉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고 했습니다.

오늘 이 유다 백성들의 바벨론 포로생활은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범죄는 그 아들 르호보암과 그 신하 여로보암을 갈라놓았습니다. 북조 이스라엘은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다가 앗수르에게 나라를 빼앗겼습니다. 남조 유다도 예외 없이 우상숭배에 익숙해 있었습니다. 이것이 망국으로 치닫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사적으로 볼 때 한국교회가 오늘에 이르기까지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 회개운동이 시대 시대마다 사건 사건마다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907년 1월에 평양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날 때 평양 장대현 교회에 모인 사경회는 약 10일간 계속 되었습니다. 매일 밤 천오백 명에서 이천 명의 성도가 모인 가운데 그래함 리(G. Lee, 이길함), 블레어(W. N. Blair, 방위량) 선교사 외에도 길선주(1869-1935)등 한국인들이 크게 봉사하였다고 했습니다. 죄를 회개하라는 길선주 전도사의 설교는 크게 역사했다고 합니다. 

이 당시 회개 운동에 대해 김양선은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죄는 거의 다 고백되었다. 사람의 체면은 이제 다 잊어버리고 오직 이 때까지 자기들이 배반했던 예수를 향하여 주여 나를 버리지 마옵소서라고 울부짖을 뿐이었다.(중략) 심지어 어떤 여 성도는 청일 전쟁 때에 어린 아기를 업고 도망가다가 무거워서 빨리 갈 수 없어 아기를 나무에 부딪쳐 죽게 하고 혼자서 달아났던 참혹한 일을 자백했다"(이상규 한국 교회사에서 본 회개운동 중에서)고 했습니다. 

그 다음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운동이었습니다. 이것은 제23회 총회(총회장 홍택기)가 가결한 신사참배에 대해 한국교회가 범한 공죄로 생각하고 거국적인 회개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이 때 학생신앙운동(S.F.C.)도 회개운동에 동참하여 매주 토요일 제일영도교회(한명동 목사 시무) 사택에서 기도회로 모이기 시작한 것이 학생신앙운동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6·25 동란 속에 일어났던 회개운동은 명백한 성격을 가지고 일어났습니다. 이를테면 회개할 이유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6·25 동란의 원인을 신사참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해방 후 어지러운 한국교계의 분열과 싸움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권리와 의무에 대해 철저히 우정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교회 안팎에서 먼저 성결해야합니다. 그러나 작금에 나타나는 현상들은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실정입니다. 지난 정부 때 부정과 비리를 가려내는 과정에서 부정부패 자들 중 3분의 2가 기독교인이라고 했습니다(교연 93.6.26).

1901년 전국적으로 흉년이 들어 나라에서 세금 감면 조치를 했는데 윤덕영 황해 감사가 이 해 5천만 냥을 과징하고 5만곡의 곡식을 더 거둬들여 파직을 당했습니다. 이것을 교회가 고발한 것입니다.

1899년 3월 1일자 “대한 그리스도인 회보”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새로 난 북도 군수 중에 어떤 유세력한 양반 한 분이 말하되 예수교 있는 고을에 갈 수 없으니 영남고을로 옳겨달란다니 어찌하여 예수교 있는 고을에 갈 수 없느뇨 우리교는 하나님만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교다. 교를 참 믿는 사람은 어찌 추호나 그른 일을 행하며 관장의 영을 거역하리요 그러나 관장이 만약 무단히 백성의 재물을 뺏을 지경이면 그것은 용이히 뻬앗기지 아닐터이니 그 양반의 갈 수 없다는 말이 이 까닭인듯"(이만열 한국기독교사 특강에서 인용). 당시 한국 교회 초창기에 기독교인들의 윤리 생활은 지금과는 좀 다른 면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윤리와 도덕은 아무리 강조해도 과하지 아니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도덕성은 미덕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조국 통일이라는 명제가 혹시 민족주의자들의 상투적인 말처럼 들리는 것을 우리는 원치 아니합니다. 조국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의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권을 믿고 소망하는 우리는 거국적인 성결운동을 전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성결케 될 때 통일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나라는 불교, 유교, 천도교 샤머니즘 여타 자율주의 종교들로 인하여 고통을 받은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어 이 한반도에 예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를 영접함으로 이 나라가 축복의 새 장을 연 지 어언 100년이 넘었습니다. 초창기 기독교는 국민정신을 개조하고 일본 천조대신에 항거했습니다. 유물주의 공산주의와 싸웠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G.N.P. 이만 불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상대적 빈곤감으로 인한 불만은 옛날보다 더 한 것 같습니다.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은 되었으나 민족적으로 우리현실은 불행하게도 분단이라는 아픔을 가지고 있습니다. 통일의 소중함을 우리 모두는 공감하고 있습니다. 어떤 정치인은 이 민족이 통일이 되지 아니하면 희망이 없다 단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방의 열강들은 우리의 통일에 대하여 진정한 표현을 애써 억제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 민족이 살길은 절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먼저 성결운동을 명하셨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연약들을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오늘 한국교회 성도들과 지도자들의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그 어떤 정치적인 역량보다 우선되어야 합니다. 회개는 선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으로부터 평강을 선물로 받습니다. 회개의 열매는 주님의 몸 된 교회부흥으로 나타납니다. 진정한 교회부흥이야말로 이 나라의 소망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내가 그 범죄한 모든 처소에서 구원하여 정결케 하리라]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이 땅에 그 누구도 정결하다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결케 되는 일은 정결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얼마 전 국회에서 어떤 정치인이 우리의 주적이 북한이라고 했습니다. 이 방송이 나가자 북한에서는 선전포고라고 비약시켜 선동을 조장했습니다. 물론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정치인 개인의 말이 남한을 대표하는 대표성은 없는 것입니다. 성급한 남북통일은 금물이지만 그러나 남북통일은 우리의 소망입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지금 일본이 독도를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은 작금의 국론분열과 절대 무관하지 아니합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2007년 일본의 국가위상을 GDP의 2.24배로 잡는 반면 한국의 위상은 GDP의 0.29배로 잡았습니다. 일본의 GDP는 우리의 4.5배가 됩니다. 단순계산하면 일본의 국가 위상은 우리의 35배가 넘습니다. 
35분의 1밖에 안 되는 나라가 35배 앞선 나라의 전략을 막아낸다는 것은 산술적 계산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 갑자기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습니다. 그러나 독도가 우리의 영토라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우리나라 한승수 총리도 7월 29일 독도를 방문한 자리에서 상대방의 호적에 엄연히 입적되어 있는 남의 아들을 자기 아들이라고 우기는 격이라고 일소에 부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국제 사회의 소리가 어떻든 관계없다고 하는 자리에서 머물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일본보다 매우 늦었지만 집요하게 외교적 노력을 기우려야 합니다. 외교력이 있는 사람들을 등용시켜야 합니다. 묘안이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자진해서 나와 주어야 합니다.

국제사회에서 독도를 중간수역으로 간주(看做)한 지금 우리는 이 난맥상을 풀 수 있는 방법은 싸워서 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에는 이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조국의 영토가 타국에 의해 찬탈(簒奪)의 위기에 있는데 좌우파가 어디 있으며 여야가 어디 있겠습니까. 안보문제에 있어서 지위고하가 어디 있으며 농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스스로 정답을 찾지 못할 때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다. 다만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실 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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