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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적 지도자의 동역자 (출 17: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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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지도자의 동역자 (출 17:8~16)


고인이 되셨지요. 
별세신학을 주창하신 ‘이중표’ 목사님이 마지막 병상에서 교인들에게 하신 진솔한 고백이 있습니다. 

“교인들에게 미안할 뿐입니다. 교인들을 마음 아프게 하고, 교인들의 눈에서 눈물을 뺐으니 목회자로서 할 일이 아니죠. 정말 미안합니다.” 

목회자는 언제나 목자의 심정과 그가 가진 인간적인 한계 사이에서 괴로워합니다. 
목자로서는 마땅히 해야 하지만 인간적인 한계 때문에 그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감당하지 못함으로 늘 “미안한 합니다.”라는 말을 달고 삽니다. 

‘자주 심방을 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갖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더 좋은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심정은 늘 가난한 집 어머니의 심정과 같습니다. 


 오늘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듬에 이르렀을 때였습니다. 
르비듬은 현재 ‘페이란 오아시스’ 지역인데 지금도 울창한 대추야자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시나이반도 최대의 오아시스로서 그 곳을 시나이의 진주라고 불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곳에 이르렀을 때에 아말렉 족속이 공격해왔습니다. 

아말렉 족속은 가나안땅 남부지역에 살고 있는 부족으로서(창36:11-12) 시나이 반도에 출몰하여 그곳에 산재해 있는 금광, 터어키석광, 구리광을 습격하여 재산을 탈취해 가곤했습니다. 
아마 르비듬에는 그들의 파견 기지가 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장정들을 선발하여 아말렉과 맞서 싸우라고 명령하고, 자기 자신은 산위에 올라가서 손을 하늘을 향하여 들고 있었습니다.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힘이 빠져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습니다. 
전투의 승패가 창과 칼이 맞부딪치는 군사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손에 있었습니다. 
이 설명할 수 없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아론과 훌이란 사람이 양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고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게 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이 이겼습니다. 

모세는 이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여 제단을 쌓아 예배를 드리고, 그 제단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성지 순례 중 르비듬 골짜기에 들어서면 그 때의 전투 모습이 되살아오는 듯합니다. 
산 아래 골짜기에 뽀얀 먼지를 일으키며 엎치락 뒷치락 싸움판이 벌어지는 것 같고, 저 산 위에 모세가 손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아멜렉과의 전투는 부족 간의 싸움이긴 하지만 거기에는 영적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이제 몇 가지 교훈을 얻습니다! 


1.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아말렉은 이스라엘 중 누구를 공격하였는가? 입니다. 

본문 8절에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듬에서 싸우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본문에서는 ‘아말렉이 이르러’라고 간단히 말하고 있지만, 신25:17-18절에 보면 상당히 구체적으로 그 정황을 설명해 놓았습니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너를 길에서 만나 너의 피곤함을 타서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느니라.”
누구를 쳤다고 했습니까? 

‘너의 피곤함을 타서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느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본대를 친 것이 아니라 ‘피곤해서 뒤쳐져 따라가는 약한 자들을 쳤다.’고 했습니다.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사탄은 누구를 공격하는가? 사탄의 목표가 되기 쉬운 존재가 누구인가? 
신앙생활을 하긴 하는데 피곤해서 뒤쳐져 따라가는 약한 성도들이란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사탄을 ‘굶주린 사자’로 묘사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벧전5:8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굶주린 사자가 어떤 짐승을 먹이감으로 정할까요?
동물의 왕국에서 보셨잖아요! 

다리의 근육이 잘 발달하고, 먹음직스럽게 살이 포동포동 찌고, 털에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짐승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짐승 떼 중에서 이상하게 딴전을 피우고, 잘 따라가지 않고, 뒤쳐지고....... 이런 짐승을 공격합니다. 

사자가 공격을 시작하면 쫒기는 짐승은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살아나려고 애를 쓰지만 이내 목덜미가 물려 죽고 맙니다. 


베드로가 시험들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막14:54절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하속들과 함께 불을 쬐더라.” 

이 구절에서 ‘멀찍이’ 라는 거리를 나타내는 부사를 사용한 의도를 파악하십시오. 
이 “예수를 멀찍이 좇아갔다”라는 구절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시험과 타락의 늪에 빠져 들어가는 드라마의 서장입니다. 

베드로는 ‘멀찍이 좇아가다가’ 시험에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를 안 믿으려고 한다면 모르지만 믿으려한다고 하면 가까이 따라갑시다! 
이왕 믿을 바에야 열심히 적극적으로 믿읍시다! 
똑같이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가 그 결국엔 마귀의 밥이 되고 말았다면 얼마나 분통이 터지는 일입니까? 


2. 두 번째 살펴보아야 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은 아말렉의 공격을 어떻게 대처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모세는 이렇게 대처했습니다. 

1)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9절을 보세요!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그들은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골짜기에서 전투하는 부대와 모세를 중심으로 산꼭대기에서 기도하는 부대로 나눴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전투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기도만 하지 않았습니다. 

미신과 기독교의 다른 점이 여러 가지 있지만 그 중의 하나가 인간의 책임성입니다 
미신은 인간의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책임을 묻습니다. 

비근한 예로 대학 입시를 앞둔 수험생이 ‘열심히 공부했던 안했든 붙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미신적 태도입니다 
‘열심히 공부하여 붙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기독교적 태도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책임을 묻습니다. 
모세도 골짜기에서 싸울 전투부대를 내보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오 하나님, 벼락이라도 쳐서 저 아말렉을 전멸시켜 주십시오. 한국에는 벼락 맞아 죽는 사람도 많다 덴데......”라고 기도만 하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고 좋은 성적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우리 기독교에는 없습니다. 
그런 것을 기대한다면 다른 데에 가서 알아봐야 합니다. 

열심히 공부하면서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세요.” “잘 암기할 수 있도록 암기력을 주세요.” “수험장에서 떨지 않도록 담대함을 주세요.” “ 잘 생각나도록 차분함을 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업도 마찬가지예요. 직장생활도 마찬가지이고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손을 든다’는 것은 기도한다는 얘기입니다. 
딤전 2:8절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인간의 노력은 필요조건은 될 수 있지만 필요충분조건은 되지 못합니다. 
전쟁의 승패는 기도에 달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승패, 목회의 승패, 선교의 승패, 사업의 승패, 학문의 승패가 기도에 달렸습니다. 
믿으시길 바랍니다. 


2) 두 번째로 대처한 것은 그들이 함께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12절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모세라도 피곤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강한 지도자라도 피곤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강한 사업가라도 피곤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강한 호주라도 피곤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모세 또한 상처 받기 쉽고, 실망하기 쉽고, 격려가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한 인간일 뿐입니다. 
아론과 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영적지도자들의 좋은 동역자가 되십시오. 
사도바울이 그렇게 혁혁한 선교열매를 거둔 것은 그에게 신실한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위해서라면 목이라도 내놓겠다는 브리스가와 아굴라 (롬16:3-4), 사도바울의 보호자였던 뵈뵈(롬16:1-2), 사도바울을 영적이니 아버지로 모셨던 디모데(딤전1:18)는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들이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들을 도와 동역하는 자들에게는 남다른 은혜를 경험하는 축복을 주십니다. 

가나의 혼인잔치 자리에서(요2:1-11)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을  체험한 사람은 주님의 사역을 도와 물을 떠온 하인들뿐이었습니다. 


3. 함께 동역한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그 결과는 ‘여호와 닛시’였습니다. 
‘닛시’라는 말은 ‘깃발’이라는 뜻입니다. 
깃발은 승리의 표시이구요. 
따라서 ‘여호와 닛시’라는 말은 ‘하나님은 나의 승리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누가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셨습니까? 하나님입니다. 
누가 우리에게 승리를 주십니까? 하나님입니다. 
누가 우리로 장애물을 극복하게 하십니까? 하나님입니다. 

시험 중에 있는 교우 여러분, 
낙심 중에 있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 때문에 승리하실 줄 믿으십시오. 

여호와 닛시! 
하나님은 우리의 승리가 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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