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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눅 6:21; 눅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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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눅 6:21; 눅 23:28)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눅 6:21)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지난 한 주간은 우는 주간이었습니다. 170여명이 강원도 속초시 주변의 동해안 해변가로 여름수련회를 갔는데 교인들의 간증에 우리는 여러 번 울었습니다. 그분들의 아픔 때문에 울었고, 그분들이 믿음 안에서 승리하는 모습을 보고 감격스러워 울었습니다. 지난 금요일에 있었던 연합속회 시간에도 유명한 탤런트 김명국 집사의 간증을 들으며 또 울었습니다. 아들을 얻은 기쁨도 잠시 세 살 때부터 림프성 백혈병을 앓기 시작하여 6년 동안 병상에 누워 있다가 많은 감명을 주고 2005년에 하늘나라로 간 그분의 아들 얘기는 우리 모두를 울게 했습니다. 처음 병이 났을 때는 친척 친지들이 함께 걱정해주며 병상을 찾았으나 1년, 2년이 지나면서 찾는 이들의 발길이 뜸해지더니 엄청난 치료비 때문에 도움을 요청하자 전화까지 받지 않는 야속함에 더 많은 고통을 겪었다는 그의 간증은 우리 모두를 같은 아픔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했습니다.

여러 번 울었는데도 가슴은 시원합니다. 오히려 울기 이전보다 더 기쁘고 더 가벼워졌습니다. 그분들의 간증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과 구원의 길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눈물은 분명 슬플 때 납니다. 아플 때 납니다. 고통스러울 때 흘러내립니다. 그런데 울고 나면 무언가 뚫리는 기분을 갖게 됩니다. 왜 그럴까요? 눈물의 성분은 염소와 나트륨이 대부분이고, 나머지는 단백질, 칼슘, 칼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흘리는 눈물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답니다. 기초눈물, 반사성 눈물, 그리고 감정적 눈물이 그것들입니다. 기초눈물은 언제나 안정적으로 분비되어 안구를 부드럽게 하는 윤활기능을 하고 세균이나 이물질을 세척하고 눈에 영양을 공급하는 기능을 하는데 울지 않아도 하루에 약0.6cc의 눈물을 분비한답니다. 이 눈물이 나지 않으면 안구에 심각한 질병을 가져오게 됩니다. 

반사성 눈물은 양파를 썰 때나 눈을 찔렸을 때 나오는 눈물을 말합니다. 먼지나 연기 같은 것이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양파를 썰 때 눈에 해로운 휘발성 화학물질이 나와 기체 상태로 눈에 들어가기 때문에 씻어내려고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세 번째 감정성 눈물은 감정의 지령센터인 뇌에서 신호를 보낼 때 나오는 눈물입니다. 앞의 두 눈물은 예방이나 치료의 역할을 하는데 비해 세 번째 눈물은 수수께끼의 눈물이라고 합니다. 교감신경이나 부교감신경이 자극을 받아 눈물을 흘리라는 명령을 전달하면 눈물샘에서는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은 감정에 매우 크게 좌우되지만 두 신경은 서로 다른 업무를 분담하고 있답니다. 평상시와 분노하고 있을 때는 교감신경이, 기쁠 때와 슬플 때는 부교감신경이 작용합니다. 교감신경이 작용했을 때의 눈물은 칼륨과 이온이 적고, 부교감신경이 작용했을 때는 그것들이 많아집니다. 교감신경에 의한 분노의 눈물, 억울한 눈물은 수분이 적으므로 맛이 진하고 짠맛이 많지만, 부교감신경에 의한 슬픈 눈물이나 기쁜 눈물은 약간 싱거운 이유가 여기에 있답니다. 

제가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눈물은 후자, 즉 기쁠 때나 슬플 때 흘리는 눈물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는 뇌의 부교감신경이 작용해서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하는데 과학적으로는 감정과 뇌의 관계, 그리고 눈물샘과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정확히 정리하지 못한 듯합니다.

오늘 봉독한 성경은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장차 웃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눅 6:20은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 나타나는 8복(마5:1-12)을 누가복음 식으로 표현한 말씀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눅 6:20-26의 말씀을 마태가 참고하여 산상수훈의 8복을 예배의식에 맞게 썼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내용이 엇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읽은 말씀도 산상수훈의 8복 말씀과 매우 흡사합니다.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눅 6:21)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는 사람이요, 훗날 웃을 날이 있을 것이라는 위로와 소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애통하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기쁠 때 나오는 눈물이 아니라 슬플 때 나오는 눈물을 의미하는 말씀임이 분명합니다. 


어떤 슬픔이 찾아왔을 때 눈물이 납니까?

첫째는 병들어 몸이 아플 때나 삶을 실패했을 때 슬피 웁니다. 너무 괴롭고 너무 고통스러워 웁니다. 신학생 시절에 오류동에 있던 원호병원에 나가 자원봉사자로 일을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나라가 가난하니, 열악한 환경의 병원이었습니다. 6.25 상이용사나 월남전에서 부상을 당한 환자들이 몰려오는 곳이었습니다. 화장실도 청소하고 휠체어도 밀어주며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오후에는 강당으로 모이게 하여 예배도 드리고 위문공연도 했습니다. 어느 날 병실을 방문하는데 스무 살 갓 넘은 청년이 제 손을 잡고 “선생님, 너무 아파요. 잠을 잘 수가 없어요. 그래도 걸을 수만 있다면 참을 수 있겠어요. 그런데 오늘 이 두 다리를 짤라야 한답니다. 못 참겠어요. 못살겠어요.” 흐느껴 울었습니다. 아파서 울고 괴로워서 울고 너무 절망스러워 울었습니다.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는지 만나고 싶은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둘째로 사랑하는 이와 헤어질 때 슬피 웁니다. 다시는 볼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어서 웁니다. 더구나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나면 영원히 볼 수 없어 더 슬피 웁니다.

제가 아는 이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여인의 남편은 사람이기를 포기한 이처럼 못된 남편이었습니다. 술과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했습니다. 툭하면 아내와 자녀들을 구타했습니다. 아내가 날품팔이로 벌어오는 돈을 강탈하다시피 하여 노름판으로 달려가는 이였습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아내가 죽었습니다. 치료한번 제대로 못했습니다. 하관예배를 드리는데 못된 남편이 통곡하며 “나를 혼자 두고 가지 말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나 혼자 못살아요. 나랑 같이 가자”하며 관을 따라 땅속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조객들이 혀를 차며 “이제 와서 뉘우치면 무엇하냐”면서 수군댔습니다. 그때 남편을 잘 아는 사람이 “그래, 같이 묻어. 혼자 살면 무얼 하겠어. 무덤에 함께 묻혀 빌어야지”하며 냅다 떠다밀었습니다. 관속으로 함께 들어가겠다고 몸부림치던 그이가 관 위에 떨어지더니 용수철처럼 뛰어 나왔습니다. 함께 묻어 달라던 그이가 아마 자식들 때문에 뛰어 나왔겠죠?

두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 온 분이 있었습니다. 서른 살에 남편을 잃고 자식들에게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큰 딸이 미국의 시민권을 얻어 어머니와 두 남동생을 이민초청을 한 것입니다. 작은 아들은 불효막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툭하면 술이 취해 어머니께 대듭니다. “날 위해 무얼 해줬나? 가난한 주제에 왜 날 낳았느냐 말이야?” 언젠가 주일예배를 드리고 밖에 나오니 교회 마당에서 삿대질하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습니다. 업어치기로 집어던졌습니다. “네가 사람이야?” 사람을 만들기 위해 당당히 혼구멍을 준 것입니다. 그런데 훗날 그 어머니가 “그때 목사님 너무 섭섭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하며 서운해 하는 것을 보고 다시는 교인자녀들을 업어치기 안했습니다. 

맏아들은 효자입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아들입니다. 어머니에게는 남편겸, 아들겸, 친정아버지 같은 어른스런 아들이었습니다. 그 아들이 공사판에서 사고를 당했습니다. 5층 난간에서 드라이빗 공사를 하다가 땅에 떨어져 뇌파열로 죽었습니다. 바로 그날이 남편이 죽은 날이었습니다.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비상연락을 받고 달려갔습니다. 하얀 시트를 젖혔더니 평안히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의 이마에 십자가를 그으며 “생명을 주신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어 가시는 이도 여호와시라. 사랑하는 아들을 곁에 두고 싶으셔서 하나님이 데려가신 줄 믿습니다. 그런데도 이해가 안 됩니다. 그의 어머니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임종기도를 이렇게 드렸습니다. 연락을 받고 그의 어머니가 달려왔습니다. 보자마자 실신했습니다. 하관을 하는데 관을 붙들고 놓질 않습니다. “아이고 하나님, 아이고 하나님, 서른 살 젊은 나이에 남편 데려가 청상과부 만들더니 금쪽같은 내 새끼 왜 또 뺏아 갑니까? 장가한번 들지 못한 내 아들 왜 죽이셨습니까?” 죽은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더니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몸부림치는 그 여인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혹시 목사가 잘못해서 교인들이 형벌을 받는 것은 아닌가? 별별 생각이 다 났습니다. 30대 젊은 목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너무 가슴이 아팠습니다.

오늘 여기 윤 장로님이 계십니다. 미국에 살던 아들 윤 군의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셨습니다. 마흔 한 살 난 젊은 아들을 잃고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여러분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장례기간 동안 사흘을 모시고 식사를 했는데 장로님답게, 믿음의 가문을 세우는 신앙인답게 잘 이겨내셨습니다. 하나님도 대견해 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크신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셋째로 회개할 때 웁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길이 잘못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눈물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 후회스러워서입니다.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인생이어서 웁니다. 또 회개할 때 우는 것은 지금이라도 깨달을 수 있어서 웁니다. 감사해서 흘리는 눈물입니다. 어느 신경이 작용해서 우는지는 모르나 회개할 때 많은 눈물을 흘립니다.

지난 주간에 속초지역의 바닷가에서 가진 수련회는 너무 좋았습니다. 따거운 햇볕 아래에서 모래비치를 뛰기도 하고 시원한 바닷물 속에서 동심으로 돌아가 물놀이를 하는 것도 좋았지만 아침 저녁으로 간증을 들으며 신앙훈련을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어느 여자 권사님의 간증은 가슴을 쓰리게도 하고, 아리게도 하고, 눈물도 나게 했습니다. 

경상북도 영양에서 낳았는데 너무 가난해서 잘 살아보려고 서울에 온 모양입니다. 양장점에 취직해서 예쁜 미래를 꿈꾸고 있었는데 건너편 맞춤집 총각이 접근해 왔답니다. 키도 크고 잘난 체격인데다 폼나게 주름잡은 옷을 입고 삐까삐까한 구두를 신고 유혹하니 시골처녀가 담박에 넘어간 모양입니다. 단칸방을 얻어 시작한 신혼살림이 처음부터 기대를 벗어났습니다. 술에 젖어 살고, 술만 취하면 주사가 별나서 살림살이는 모두 다 부셔야 술이 깨는 성미였던 모양입니다. 직장도 집어치우고 리어카에 채소를 싣고 다니는 행상인 주제에 정신을 차리고 돈을 모아도 힘들텐데 술주정뱅이에 살림마저 주기적으로 부수는 남편이니 어찌 살겠습니까? 

쥐 잡으라고 통장이 나누어준 쥐약을 마셨답니다. 술 취한 남편은 쥐약 먹은 아내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나가버려 이웃집 사람이 병원에 데려가서 응급처치를 받게 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죽을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아들 하나가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술 취한 남편이 아내 앞에서 칼로 손가락 세 개를 잘랐습니다. 아마 본인도 자신에게 실망스러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서 이 여인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겠습니까? 동이에 담았다면 수 십 동이는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성령님이 그 가정을 변화시켰습니다. 남편이 회개하고 지금은 세상에 둘도 없는 남편이 되었습니다. 온갖 궂은 일 다 도와주며 아내를 섬기고 있습니다. 좋은 가게도 주셨고 집도 주셨습니다. 아들도 결혼해서 두 명의 손주까지 주셨습니다. 이번 수련회에서도 부엌의 쓰레기는 그분이 다 치워주셨습니다. 아내의 명령이라면 땅 끝까지도 달려 갈 남편이 되었습니다. 홍금숙 권사님의 간증입니다. 남편과 함께 지금 우리와 같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게도 많은 세월동안 흘렸던 아내의 눈물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아내의 눈물은 그 가정을 복 받게 했습니다. 세상의 방법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남편 김회철 씨를 교회의 집사로 만들어 하나님을 섬기게 했습니다.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후에 웃을 것이니라.”(눅6:21)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골고다를 오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너희와 너의 자녀를 위하여 울라”(Do not weep for me; Weep for yourselves and for your children). 

그렇습니다. 우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나를 위하여 우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남편을 위하여 우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아내를 위하여 우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자녀를 위하여 우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친구를 위하여 우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우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와 함께 예배드리며 우는 이는 복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 윤은희 장로님의 눈물도 복이 있을 것입니다. 실컷 울읍시다. 예수님 앞에서 웁시다. 울고 또 울읍시다. 복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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