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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수평적 관계에서 수직적 관계로 (창 28: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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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적 관계에서 수직적 관계로 (창 28:10~19)
  

지금 우리는 예배당 건물 안에 앉아 있습니다. 사방이 벽으로 가로막혀 밖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만약 우리가 사방이 탁 트여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들판에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멀리 지평선이 보일 것입니다. 그게 들판이 아니고 바다라면 수평선이 보이겠지요. 가슴이 시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넓은 들판에 있다고 해서 언제나 가슴이 시원한 것은 아니겠지요. 
오늘 읽은 말씀에 보면 한 넓은 들판에 어둠이 찾아올 무렵, 한 남자가 땅에 누운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이삭의 아들 야곱입니다. 그가 땅에 등을 붙이고 눕자, 그의 몸도 땅과 함께 수평이 되었습니다. 

저는 종종 <땅에 눕는 것>을 생각하곤 합니다. 엊그제 한 교우님의 장례식이 있었는데, 관이 땅에 내려지는 것을 보면서 <땅에 눕는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땅에 눕는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누구나 죽으면 땅에 눕습니다. 본문의 야곱은 마치 죽음과도 같은 힘든 상황에서 땅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 밤에 야곱은 괴로움으로 잠들지 못했습니다. 단지 잠자리가 불편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그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어쩌다 노숙을 하는 처지가 되었나? 어쩌다 집을 떠나게 되었나? 이 넓은 들판에 말붙일 사람 하나가 없구나!> 탁 트인 들판에 누웠지만, 그의 마음은 감옥에 갇힌 사람보다 더 답답하였습니다. 

그가 이처럼 들판에서 노숙을 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가 수평적 관계 속에서 고통받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수평적 관계>가 무엇입니까? 여러분, 고개를 숙여 아래를 보지도 말고, 고개를 들어 위를 보지도 말고, 똑바로 주변을 보십시오. 그 때 무엇이 보입니까? 그 때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다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서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서로를 보는 시선은 땅과 평행선을 이룹니다. 땅이 수평이듯이, 서로를 보는 시선도 수평입니다. 수평적 시선으로 바라볼 때 보이는 사람들과 맺는 관계, 그것이 수평적 관계입니다. 결국 수평적 관계란 <사람들과의 관계>입니다. 야곱은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고통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어떤 인간 관계에서 고통을 받고 있었을까요? 우선 <야곱과 아버지 이삭과의 관계>가 있었습니다. 야곱은 그 아버지와 원만한 관계에 있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본래 야곱은 에서와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호탕하고 사냥도 잘하는 남자다운 큰 아들 에서를 좋아했습니다. 반면에 야곱은 성격이 조용했고, 형님처럼 바깥 사람이 아니라 집 안에서 조용히 무언가를 하길 좋아했습니다. 야곱도 형님처럼 해 보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잘 되지 않았습니다. 타고난 성격을 고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늘 그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조심스러웠을 것입니다. 쉽게 아버지에게 마음에 있는 말을 쏟아놓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늘 멀리 있는 분으로만 여겨졌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인간관계로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좀 친해지고 싶은데 잘 안됩니다. 마음으로부터는 가까운데 막상 대하면 어렵습니다. 잘 해보려고 애를 쓰는데, 자격지심 때문인지 이상하게 자신을 안 좋게 여기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입니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모습으로 바꿔 보려고 노력하지만, 타고난 성격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래서 늘 불편하고 조심스럽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내놓고 뭐라고 야단을 치는 것도 아니건만 홀로 고민하면서 상처를 받습니다. 아마 이런 관계 때문에 힘들어하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야곱에게 상처가 된 것은 <형님 에서와의 관계>였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였지만, 둘은 너무도 달랐습니다. 에서는 나다니길 좋아했고, 사냥을 좋아했습니다. 야곱은 안에서 집안 일을 살피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에서는 치밀한 성격은 아니었고, 실수할 때도 있고, 정말 중요한 것을 가벼이 여기는 때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대표적 예가 <죽 사건>입니다. 하루는 사냥터에서 돌아온 에서가 매우 시장했는데, 마침 야곱이 죽을 쑤고 있었습니다. 에서가 죽 한 그릇을 달라고 하자, 야곱은 맏아들의 권한을 넘기라고 요구했습니다. 맏아들이 아버지의 명예와 권한과 재산을 물려받던 당시에 맏아들의 권한은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에서는 별 생각 없이 <그래, 오늘부터 네가 맏아들이라고 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야곱이 맹세하라고 하자, 맹세까지 했습니다. 아마 <아무리 맹세해도 먼저 태어난 내가 맏아들이지, 네가 맏아들이겠느냐?>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죽 한 그릇과 장자권을 바꾸는 생각이 가벼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축복 사건>이 발생합니다. 어느 날 늙은 이삭이 에서에게 <짐승을 사냥하여 요리를 해 오면, 그 요리를 먹고 축복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삭의 아내인 리브가가 그 말을 들었습니다.리브가는 평소에 에서보다 야곱을 사랑했기 때문에, 야곱에게 알려줍니다. <지금, 아버지가 형에게 축복하려고 한다. 형은 지금 사냥하러 나갔으니, 형이 돌아오기 전에 그 복을 네가 차지해야 한다. 어서 빨리 염소 새끼를 가져오너라. 네 아버지가 좋아하는 요리를 해 줄 테니, 네가 형 대신 복을 받아라> 야곱은 어머니가 만든 요리를 가지고 형을 가장하여 아버지에게 가져갑니다. 이삭은 나이가 많아 눈을 잘 보지 못했기 때문에 야곱의 손을 만져 보았으나, 야곱은 이미 짐승 털을 손에 입혀서 털이 많은 형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이삭은 야곱을 에서로 생각했고, 마음에 있는 축복을 다하여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에서가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이 드러났습니다. 에서는 동생이 자기 대신 복을 가로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때부터 에서는 야곱을 죽일 생각까지 했습니다. 창세기 27장 41절에 보면 에서의 이런 마음에 대하여 말씀하기를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이게 야곱과 에서의 틀어진 관계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관계를 <경쟁 관계>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누가 아버지를 계승할 것인가를 두고 경쟁 관계에 있었습니다. 물론 당연히 에서였겠지만, 두 사람이 쌍둥이였으므로, 문제가 복잡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단어 중에서 <경쟁>이란 단어처럼 자극적인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경쟁! 그것은 누구에게나 기회를 준다는 측면에서 많은 이들의 피를 끓게 만듭니다. 출신이 좋지 않아도 기회만 주어지면 성공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사람들은 경쟁에서 이기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다 보니 경쟁은 과열되고, 그 과정에서 반칙을 쓰게 됩니다. 서로 사랑해야 할 사람들끼리 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 틀어지게 됩니다. 경쟁은 그 안에 많은 좌절과 실패, 고통을 담고 있습니다. 경쟁에서 이긴 사람이야 기쁘겠지만, 진 사람은 말이 아닙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까? 
  

세 번째는 <야곱과 어머니 리브가와의 관계>입니다. 어머니는 야곱 편이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야곱이 복을 얻도록 도운 사람이 리브가입니다. 리브가와 야곱은 무슨 동맹 관계처럼 보입니다. 그 후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 하는 것을 알고 야곱을 피신시킬 계획을 세운 사람도 리브가입니다. 리브가가 야곱에게 외삼촌의 집으로 피신하라고 말합니다.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 하니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피신하여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 그리고 리브가는 남편 이삭에게는 형제간의 불화는 숨기고, 야곱을 고향으로 보내 아내감을 구하게 하자고 말합니다. 당시 에서는 헷 여인과 결혼했기 때문에 리브가가 그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삭도 아내의 제안을 좋게 여겼습니다. 결국 리브가의 수완으로 야곱은 겉으로는 아내 를 구하기 위한 명목으로, 실제로는 형을 피하기 위해 외삼촌 집으로 떠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외삼촌 집으로 가는 도중에 들판에서 노숙하는 야곱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리브가는 야곱에게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리브가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고통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지만, 그 사랑은 정당한 방식의 사랑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를 속이게 만들었고, 형의 것을 가로채게 하였고, 자신도 남편을 속였습니다. 그녀는 결국 두 자식으로 하여금 원수가 되게 했습니다. 그 고통은 고스란히 야곱에게로 돌아간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비뚤어진 사랑의 동맹에 들어갈 때가 있습니다. 단지 <그 사람이 날 생각해 준다>는 한 가지에 감격한 나머지, 그와 자신이 어떤 옳지 못한 일을 하는지에 대해 생각지 못합니다. 둘이 함께 일을 꾸밉니다.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우리는 좋은 친구>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세 관계, 아버지 이삭과의 관계, 형 에서와의 관계, 어머니 리브가와의 관계, 이것이 야곱을 힘들게 하는 관계들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모두 야곱의 인생에 고통을 가져왔습니다. 이런 왜곡된 관계만 아니었다면 그가 들판에서 노숙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것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야곱과 같은 고통을 겪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와를 주신 목적은 서로 사랑하며 살도록 하신 것인데, 뜻밖에도 죄가 이 세상에 들어온 후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 원수가 됩니다. 서로 힘이 되어 주어야 할 사람들끼리 괴롭게 합니다. 욕망, 교만, 시기, 미움, 질투, 원한....이런 것들은 모두 인간 관계에서 오는 것들입니다. 만약 로빈슨 크루소처럼 혼자 산다면 이런 것들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현대판 무인도로 들어가거나 깊은 산 속에서 혼자 살면 되겠습니까? 그러나 이것도 불가능한 문제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존재 가치가 어디서 발견됩니까? 존재 가치는 관계에서 발견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총각이 처녀에게 <나와 결혼해 주세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했을 때, 그 처녀는 가슴이 설레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가치 있는 여인임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사랑 받는 사람의 기쁨입니다. 회사가 날 필요로 하고, 가족이 날 기다리고, 주변 사람들이 나를 요긴하게 여기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 우리는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임을 확신하고 기뻐하게 됩니다. 살 맛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인도에 혼자 산다고 해 보세요. 혼자서는 아무 관계도 생기지 않고, 관계가 없으면 우리의 가치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냥 혼자 먹고 자는 삶이라면 동물과 다를 게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살 필요가 있는가를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딜레마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떠날 수도 없고, 안 떠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그렇게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깊은 상처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다시 야곱 이야기로 돌아옵시다. 다음 날 아침 야곱은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일어선다는 것을 상상해 보세요. 수평으로 누워 있던 사람이 일어서자 땅과 수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야곱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지난 밤 베고 자던 돌멩이를 세웠습니다. 그가 일어서자, 돌도 일어섰습니다. 지난밤에는 야곱도 땅과 하나되어 누웠고, 돌도 땅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침이 되자 더 이상 땅과 수평으로 눕지 않게 되었습니다. 사람도 일어섰고, 돌도 기둥처럼 일어섰습니다. 이제는 수평이 아니라, 수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야곱의 몸만 일어선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야곱의 마음이 먼저 일어섰습니다. 더 이상 고통과 절망 중에 누워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는 힘을 내어 일어나 주어진 삶을 향해 걸어가기로 작정했습니다. 땅에 눕는 것은 죽음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일어섰습니다. 일어선다는 것은 생명을 뜻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는 죽은 자의 모습에서 산 자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는 어떻게 일어설 수 있었을까요? 그 용기는 어디서 생겼을까요? 그 용기는 다름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그가 고통 중에서 간신히 잠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셨습니다. 꿈에 보니 사다리가 세워져 하늘과 그가 누워 있는 땅을 연결하고 있었습니다. 유명한 교부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이 사다리에 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다리는 야곱이 세운 게 아닙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하늘에 닿을 사다리를 세울 수 없습니다. 사다리는 하나님께서 내려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에게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라고 요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하늘의 사자들을 내려보내 주셨습니다.세워진 사다리, 그리고 그 위를 오르내리는 하나님의 천사들, 이게 바로 놀라운 은총입니다.

여러분,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다리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다리는 수직으로 세워집니다. 사다리는 땅과 수평으로 눕지 않습니다. 이 사다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가 무엇입니까? <야곱아, 왜 절망 중에 누워 있느냐? 넌 왜 사람들만 보느냐? 날 보라. 하늘을 보라. 수평만 보지말고, 위를 보라. 나와 관계를 맺자. 너와 내가 맺는 관계는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관계요, 이것은 수직적 관계이다. 이젠 하늘을 보라. 사람들을 보고 절망하지 말고, 날 보고 힘을 내라! 사람들이 네 가치를 인정하지 않아도, 난 언제나 널 사랑한다. 넌 내 것이다. 눕지 말고, 일어서라. 힘을 내라!> 이런 말씀이었습니다. 

상상해 보세요. 수평의 들판, 그 위에 누운 한 사람, 그러나 하나님은 수직의 사다리를 세우시고, 그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하나님은 절망의 수평선 위에 소망의 수직선을 세우신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를 눕게 만들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일으키십니다. 

그 때부터 야곱은 옆을 보던 사람에서 위를 보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수평적 관계 중심으로 살지 않고,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후에도 그는 외삼촌과의 관계로 인해 어려웠습니다. 형님 에서를 다시 만나야 할 때도 힘들었습니다. 사랑하던 아들 요셉을 잃었을 때도 힘들었습니다. 그 후에도 사람들은 계속 야곱을 힘들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그로 하여금 일어설 수 있게 힘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벧엘의 체험은 야곱의 평생에 힘이 되었습니다. 하늘과 연결되는 체험을 한 사람들은 평생 사람들로 인해 어떤 어려움을 겪어도 하늘의 하나님이 날 지키신다는 한 가지 확신으로 이기게 됩니다. 야곱은 평생 자기 마음의 들판에 은총의 사다리를 품고, 그 날 밤의 체험으로 살아갔습니다.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의 들판에도 사다리가 세워지길 축원합니다. 수평적 관계로 인해 아프십니까? 사람들 때문에 시험받고 계십니까? 가족, 이웃, 친구, 동료들이 힘들게 하고 있습니까? 그럴 때 하늘을 보십시오. 수직적 관계를 세워 나가십시오. 하나님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우리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때가 있지만, 때로는 우리를 사람으로 취급도 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지만,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의 가치를 인정하십니다. 

성경의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생의 들판에 은총의 사다리가 세워지는 것을 체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요셉은 절을 받는 꿈을 연속해서 꾸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존귀하게 세우실 것을 알았고, 그것이 평생 동안 그를 인도했습니다. 형님들에게 팔려 노예로, 죄수로 고생하는 인간 관계의 고통속에서도 그는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내밀어주시는 손을 붙잡고 살아갔습니다. 모세는 호렙산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리 그를 힘들게 해도, 그 하나님을 붙잡고 극복하였습니다. 다윗에게는 사무엘이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운 일이 그러했고, 사도 바울에게는 다메섹 도상에서 태양 빛 보다 더 밝은 주님의 빛으로 비추임을 받은 일이 그러했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불치병으로 고생하던 중 3 시절, 어느 교회 예배 시간에 목사님께서 <이 앞에 학생 한 명이 일어섰습니다. 저 학생을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과 함께 수천 명의 사람들이 보내 준 박수 소리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두 주일 후 저는 완치되었습니다. 그 때의 일은 절망의 들판에 세워진 사다리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때 이후 때로 힘들고 어려운 일들, 오해받고 좌절한 일들이 많았지만, 그럴 때마다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등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손을 내밀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성도 여러분, 누워 계시지 마십시오. 사람들 때문에, 세상 때문에 포기하지 마십시오. 일어서십시오. 수평이 절망이라면, 하늘과 우리를 연결시키는 은총의 사다리는 소망의 수직입니다. 십자가 앞으로 나오십시오. 십자가는 하나님의 세계와 우리를 연결해주는 은총의 기둥이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의 가치를 발견하십시오. 그 하나님 앞에서 야곱처럼 일어나 당당하고 기쁘게 살아가시길 기원합니다. 

올바른 수직의 관계는 우리를 올바른 수평의 관계로 인도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붙잡는 사람은 사람들과의 관계로 잘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했기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했고, 요셉은 자신을 팔아버린 형들을 사랑할 수 있었고, 바울은 자신을 비방하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수직을 통해 수평으로, 하나님을 통해 얻는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우리에게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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