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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날마다 죽노라 (요 15:2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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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날마다 죽노라 (요 15:29~34)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강조하고 있는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성도들의 부활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건이었다고 한다면 예수님을 따르고 믿는 사람들도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이 땅에 살면서 희망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할까요? 그냥 이대로 살다가 죽을 거야, 이렇게 이 땅에서의 삶을 끝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직장생활 하는데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면 연봉도 올라가고 승진도 한다는 이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 이런 희망을 가지고 일을 하면 재미가 있을 것입니다. 꿈이 있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연봉도 안 오르고 승진도 안 되는 직장에 다닌다면 그 직장에 오래 다니시겠어요? 사업을 하는데 사업이 잘 되서 지금보다 훨씬 더 규모가 커질 거라는 희망을 갖고 한다면 더 열심히 사업을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도대체 끝이 보이지 않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사업 열심히 하시겠습니까?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돈이 아니고 권력이 아니고, 명예가 아니고 희망입니다.

빅터프랭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독일의 나찌 시절에 나찌에 반대했다가 감옥에 갇힌 베를린 대학교의 음대피아노과 교수였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나찌에 저항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는데요.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수용소에서 삽니다. 하루 종일 고된 노동을 하고요. 저녁이면 자리에 돌아와 다른 사람들이 다 잘 때, 빅터프랭크는 자기가 자는 뒷머리 선반에 피아노 건반을 그려놓고 다른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혼자 연주를 합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지만 그는 건반을 연주하면서 음악에 도취합니다. 그러면서 언젠가 내가 석방이 돼서 학교로 돌아가 피아노 앞에서 연주할 날이 올 것이다. 그를 끝까지 살아있고 강하게 만든 것은 희망이었습니다. 사람이 이 땅에 살면서 희망을 갖는 것은 그를 강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행복하게 기쁘게 만들어 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살아가는데 남들처럼 잘 먹고 잘 입고 호위호식하지는 못 하지지만, 평범하게 살아가지만 그러나 나는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는 달리 내가 죽고 난 다음에 분명히 내가 부활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상급을 받는다는 확신을 갖고 산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행복한 인생의 주인공이 됩니다. 이런 마음이 있으니까, 이런 신앙이 있으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죽어도 부활에 대한 희망도 없고 아무런 미래에 대한 확실한 보장도 없다면 신앙생활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였듯이 주님을 따르는 우리도 똑같이 부활한다. 사도바울은 부활에 대한 희망이 너무나도 강하였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노인이면서도 세계를 다니면서 복음을 증언했고 참수형을 당하면서까지 복음전하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가 가지고 있던 부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을 강하게 만들었던 부활신앙,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 가운데서 부활신앙이 갖고 있는 몇 가지 중요한 사항을 우리들에게 또 다다시 강조합니다.


첫 번째는, 세례를 우리가 왜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9절에 보면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조금 우리가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 본문을 놓고 많은 의견을 제시합니다. 간단하게 얘기해서 예수를 믿지 않고 죽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을 위해서 가족이나 친구나 이웃들이 대신 세례를 받아준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하고는 맞지 않지요? 안 믿고 죽은 사람이 있는데 그를 위해 기도한다고 그 사람이 연옥에 있다가 천국에 가는 것, 우리는 믿지 않습니다. 예수 믿지 않고 죽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을 위해 대신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그 사람의 죄가 사해지고 천국에 간다는 것을 우리는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이 나오게 된 것은 이 때 당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교인들 가운데 기독교 신앙인 가운데 내가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을 위해 대신 세례를 한 번 더 받아 주면, 그 사람의 죄가 사해진다거나 용서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 신학적인 논쟁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의 관심은 세례를 받는 것의 의미를 이야기 합니다.

잘 아시는 데로 세례란, 물속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본래 밥디서라는 헬라어 단어 ‘세례를 베풀다’, ‘침례를 베풀다’라는 말은 ‘물에 잠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침례를 받으셨습니다. 물속에 들어가셨지요? 그런데 그 초대교회에서 하루에 많은 사람들이 거듭나 예수를 믿게 되자 교회가 그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침례를 줄 수 없어서 약식으로 머리에 물을 뿌리다 보니까 이것이 세례란 의식으로 바뀌었지만 본래 의미는 물속에 잠기는 것입니다. 물속에 잠기건, 머리에 물을 뿌리건 간에 관계없이 우리는 세례를 받습니다.


둘때로, 세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사도바울은 로마서 6:4에 이런 얘기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그렇습니다. 물속에 들어가는 침례를 받게 되면, 물속에서 잠깐 동안 숨을 쉬지 않습니다. 물속에서 몇 분 동안 숨을 안 쉬고 계실 수 있나요? 기네스북에 보니 7분 몇 초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1분 이상을 견디지 못합니다. 물속에 있다는 말은 숨을 안 쉰다는 말이고,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침례를 받을 때 물속에 들어갑니다. 그 말은 물속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 나는 죽는다. 나는 죽었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상징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례라는 의식 자체가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지만, 세례 받기 이전에 그 사람이 여러 사람 앞에서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나의 죄가 용서되었음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습니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고백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이 구원받았다는 것을 상징으로 보여주기 위해 세례를 받습니다. 세례는 상징인데, 물속에 들어가는 그 순간 세례 받기 이전에 삶을 모두다 물속에 장사 지낸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믿기 전에 술 먹고 담배피고 나쁜 짓하고 거짓말하고 몸과 영혼과 육체를 더럽혔던 모든 예수 믿겠다고 다짐하는 그 순간 물속에 다 들어가 장사지내고 물 바깥으로 다시 나올 때는 이제 과거의 더럽고 추한 모든 것들은 물속에 흘려보내고 깨끗이 씻고 이제 새 사람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세례를 받는 순간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물속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 예수님과 함께 죽고, 다시 나오는 순간 우리는 예수님과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지요?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부활 신앙을 믿는 것은 내가 부활 신앙을 믿기 이전에 가졌던 나의 과거의 더럽고 추악한 모든 것들을 물속에 묻는 것을 땅 속에 묻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나오면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17 사도바울은

“그런즉,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세례를 받으셨나요? 세례를 받으셨으면 세례받기 이전의 여러분의 삶과 받은 이 후의 삶이 확연히 달라야 합니다. 과거의 삶은 죽이고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이 경계가 모호해서는 안 됩니다. 경계가 모호하다는 말은 이 사람이 도대체 예수 믿는 사람인지, 예수 안 믿는 사람인지, 예수 믿기 이전과 이후가 전혀 구별이 되지 않는 이 모호한 인생! 하나님도 헷갈려 하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간혹 가다 아주 중병에 걸렸다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환우들을 방문해 보면, 수술을 잘 해서 회복이 되시는 분들을 보면,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목사님, 다시 살아난 것 같아요.” 제2의 인생을 살아가다는 말도 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전에는 중병에 걸려서 사경을 헤매다가 이제는 죽음을 목전에 뒀고, 나는 이제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을 했는데 하나님 은혜로 제2의 인생을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로 보면 영적인 부활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전에 삶하고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세례는, 이렇게 과거의 삶을 물속에 수장시키고 그리고 일어나는 순간, 물속에서 나오는 순간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부활신앙을 믿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것과 아울러 이 땅에서 과거의 삶이 아닌 새로운 변화된 삶을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것, 이것이 바로 부활 신앙인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누가 여러분을 볼 때 저 사람은 예수 믿기 이전과 예수 믿고 난 후의 삶이 전혀 다른 것이 없다 만약에 사람들이 그렇게 대한다고 한다면 부활신앙이 부족한 것이 아닐까요? 
 
지금 여기서 고생하고 위협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모든 것을 감수하며 신앙생활 할 수 있다고 사도바울은 고백합니다. 본문 30절에 보면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사도바울은 언제든지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나는 사역한다고 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고린도전서4:11-13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이 외에도 고린도후서 11:23-24절까지 사도바울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오면서 느끼고 경험한 위험과 어려움과 고난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가 떠다니고 사도바울처럼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수십 번 맞았고 파선의 위험을 당하고 물위에 1주일 동안 떠다니고 뱀에게 물리고 불에 대고 감옥에 갇히고 동족에게 위협을 당하고, 살의 위험을 당하면서 복음을 증언하다가 결국에는 로마에서 참수형을 받은 이런 사람, 또 있나요?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증언하는 이 일로 인하여 위협과 고난의 삶을 얼마나 많은 경험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사도바울이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렇게 강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게 했을까요? 다른 것이 아니고 부활신앙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여기서 죽는다고 한다면, 죽는 것이 끝이라고 한다면 이렇게 고생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이, 정해진 짧은 인생, 여기가 다 라고 한다면 즐기고 먹고 마시고 편하게 살자,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이 땅에서의 삶이 끝이 아니라 죽어서 하나님의 나라 영광스런 십자가, 영광스런 면류관을 받을 것이라는 부활에 대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힘들고 어려워도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생활 하시면서 교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사역 때문에 밤 새워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노는 데는 밤새우고, 일하는 데는 밤을 새우고, 돈 버는 데는 며칠 밤씩 새지만 정말로 주님 때문에 밤을 새워 본 적이 계십니까? 주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주님 때문에 피를 흘리고 주님 때문에 땀을 흘리고 주님 때문에 빈 털털이가 되어 보고, 주님 때문에 애써보고 수고하고 힘써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사도바울은 그런 고난과 수고와 위협을 경험하면서도 참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가 끝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에게 상급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부활신앙은 오늘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합니다. 여기가 끝이 아니니까 하나님의 나라에서 분명히 나를 위한 생명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으니까, 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칭찬을 받을 것이니까, 사도바울은 그런 믿음 때문에 오늘의 위험과 어려움을 극복 할 수 있었습니다. 


네 번째는, 부활의 소망이 없는 사람은 매일 먹고 마시고 산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32절에,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부활신앙이 없는 사람은 인생이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해 여기서 먹고 마시고 즐기고 다 합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부활신앙이 없는 사람은 소비하는 인생입니다. 젊어서 열심히 돈을 버는데 돈을 벌 때마다 매일 먹고 쓰고 하는 것으로 돈을 다 소비한다고 한다면 나이 들어서 노후를 어떻게 준비 하시겠어요? 그러나 반대로 젊은 시절에 소비하지 않고 투자하는 사람은 나이 들어서 안락한 노후를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이 땅에서의 삶이 마지막이고 끝이고 다라고 생각하니까, 여기에 모든 것을 다 소비하고 맙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을 믿는 사람은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투자합니다. 소비하는 사람은 얻을 것이 없지만, 투자하는 사람은 나중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아름다운 상급 면류관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여기서 먹고 마시자는 죽은 다음에 다시 사는 삶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소비주의 향락주의로 빠지게 되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있고 영원한 삶이 있고 부활을 믿는 사람은 소비보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투자합니다. 시간을 투자하고 재물을 투자하고 재능을 투자하고 눈물을 투자하고 탐을 투자합니다. 투자하게 되면 반드시 원금+이자가, 더 좋은 것이 그를 기다릴 줄 믿습니다.

마지막, 부활신앙이 있는 사람은 이 땅에 살면서 경건한, 성결한 삶을 살게 됩니다. 본문 34절에 보면,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부활신앙이 없는 사람은 여기가 다니까 여기서 마약하고 술 먹고 sex하고 여기서 쾌락하고 먹고 마시고 소비하는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에 인생이 더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죄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지만, 부활 신앙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가서 내가 행한 모든 것들을 일일이 다 심판 받게 될 것을 알기 때문에 깨끗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죽어서 끝이라고 한다면, 심판도 없다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그러나 죽은 다음에 부활하여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모든 것들을 일일이 다 보게 된다면, 어찌 이 세상에서 더럽게 살 수 있나요? 죄를 짓지 않고 의롭게 깨끗하게 성결하게 사는 삶, 이것은 바로 내가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간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깨끗하게 의롭게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사도바울은 자기 자신을 매일매일 날마다 죽인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죽인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이 말은 자기 자신의 생각, 감정, 고집, 원한 이런 것들을 다 내려 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에서는 자기 자신을 내려놓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남과 싸워 이기려고 하지만 성도는, 부활의 신앙이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죽이려고 합니다. 참습니다. 인내합니다. 견디지요! 

어느 부부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남편이 아내를 따라오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남편에게 좋지 않은 버릇이 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데도 술만 먹으면 주사가 있습니다. 욕하고 아내를 때리고 아이들한테 끔찍한 짓을 하고, 남편의 이런 행동으로 아내는 늘 괴로워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 남편이 몸쓸 병이 걸려 얼마 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이 남편이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려 가면 회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인생을 새롭게 하나님이 살려달라고 그 동안에 지었던 모든 죄악을 용서해 달라고, 병상에서 얼마나 하나님께 울부짖어 기도했는지 모릅니다. 의사도 손 논 그의 질병 앞에서 그는 눈물로 하나님 앞에 회개기도를 하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받으시고 그의 인생에 새로운 삶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그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퇴원하고 난 다음에 그는 그가 퇴원하기 전에 그가 가지고 살던 삶을 하나둘씩 끊어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술 먹고 담배피고 때리고 욕하고 거짓말 했던 세상의 쾌락을 다 끊어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좋았던 친구들이 다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돈만 있으면 달라붙었던 여자들도 다 떨어져 나갑니다. 친구들이 봅니다. 그 친구 많이 변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 사람이 무슨 재미로 살아갈까요?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내 자신을 죽이게 하옵소서. 세상의 쾌락을 다 끊게 하옵시고 세상의 재미를 다 끊게 하시고 ‘나’라는 존재를 죽여주시옵소서. 하나님은 그가 드리는 기도를 들으시고 그의 인생을 하나하나 세상적인 것을 끊어내고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그의 영을 살려 주셨습니다. 

죽어 썩어 없어질 이 육신을 살리는 것이 중요할까요? 아니면 영원히 살게 될 영혼을 살리는 것이 중요할까요?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썩어 없어질 육신을 살리는 일에 관심이 많지만 하나님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은 썩어 없어질 육신을 살리는 것 보다 영원히 살게 될 영혼을 살리는 일에 관심을 가질 줄로 믿습니다. 

자신을 매일 쳐서 복종시키고 죽이시는 연습을 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영원한 나라에서 여러분을 아름답게 살리시게 될 줄로 믿습니다. 

매일매일 나는 죽노라. 사도바울처럼 나는 날마다 죽노라. 우리가 우리를 죽이면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그래서 이 부활의 신앙이 여러분 자신의 더러운 삶을 매일매일 죽이고 영원한 삶을 향하여 살아가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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