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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당한 사람 (엡 3: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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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한 사람 (엡 3:12~13) 


  사람마다 각기 다른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주 전문적으로는 16개의 성격 유형을 말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피플 퍼즐(people puzzle)이 제시하는 4가지 유형으로 나눕니다. 

  첫째 주도형 스타일로 담즙질입니다. 목적 지향적이고 불도저 같은 추진력을 가지고 주도권을 잡는 스타일입니다. 둘째, 사교형 스타일로 다혈질입니다. 기발한 아이디어를 가졌고 낙관적이고 외향적이어서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갑니다. 셋째, 안전형 스타일로 점액질입니다. 모험을 싫어하고 안정적이며 사람과의 원만한 관계를 중요시합니다. 넷째 신중형 스타일로 우울질입니다. 매사에 꼼꼼하고 철저하며 지나칠 정도로 신중합니다. 여러 가지 기질을 놓고 어떤 기질은 좋고 어떤 기질은 나쁘다고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기질이건 당당함을 첨가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당당하다는 것은 의젓하고 번듯하게 확신과 신념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하게 나아감을 얻느니라”(12절) 

  오늘 읽은 성경은 당당한 사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당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 담대한 사람입니다. 

  담대한 사람이란 강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심령이 강하고 담대해야 하는데, 양같이 순해야 하고 착하고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람들은 약하지 않고 강했습니다. 신약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강합니다. 

  옳은 것과 강한 것이 싸우면 무엇이 이길까?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깁니다. 강한 사람이 좋은 사람을 이깁니다. 대개 좋은 사람은 모질지 못하거나 맺고 끊는 것이 약합니다. 선거에서 부시가 케리를 이겼습니다. YS가 DJ를 이겼습니다. 노무현이 이회창을 이겼습니다. 이긴 자는 모두 강한 자였습니다. 

  아무리 옳고 좋아도 약하면 집니다. 옳으냐 그르냐보다 강하냐 약하냐가 승부를 결정합니다. 악바리가 약바리를 이깁니다. 착하다는 소리를 듣는 옳은 사람이 나약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사람이 특히 교회에 많은 것 같습니다. 

  “그 사람 착해”라는 말을 들으며 떠오르는 이미지는 “약한 사람”입니다. 선한 것이 좋고 옳은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선하기만 하고 강함이 없는 것은 뼈대 없는 인체와 같습니다. 마음이 여리고 착한 사람은 못된 사람에게 당하기만 합니다. 착한 사람을 보고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법 없으면 못 살 사람입니다. 그는 법의 보호를 받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나약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두려워말고 놀라지 말라”(수1:9)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담대하라”(행23:11)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십니다. 굳세게 하시고 강하게 하십니다(벧전5:10). 성령은 “급하고 강한 바람”으로 묘사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은혜 속에서 강하라고 하였습니다(딤후2:1).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깁니다. 옳은 사람되는 일도 중요하지만 강한 사람되기도 힘써야 합니다.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가 잘 되어야 합니다. 영혼이 잘 됨 같이 육체도 강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마10:16) 하셨습니다. 뱀 같은 지혜가 없는 양은 이리에게 먹히는 밥입니다. 강한 사람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긴 사람이 강합니다. 강하기야 다윗보다 골리앗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골리앗을 이겼습니다. 강하기는 사울왕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사울왕을 이겼습니다. 당당한 사람은 강한 자요, 이기는 사람은 강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을 얻느니라”(12절) 담대함을 얻으라!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 당돌한 사람입니다. 

  당당한 사람은 당돌합니다. 당돌함은 조금도 거리끼거나 어려워함이 없는 태도입니다. 당돌하다는 말은 윗사람에게 좀 무례하고 태도가 공손하지 못하고 건방지다는 뜻으로도 사용됩니다. 그러나 적극적인 면에서는 당당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했습니다. 감히 어떻게 저주받은 자로 취급되는 죄인 예수의 시체를 요구합니까? 성경은 그의 당당함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하니 이 사람은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막15:43-) 주위를 살피고 눈치를 보면 나설수 없었습니다. 당당하지 못하고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60년대 주먹세계를 주름 잡았던 김두환씨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출연하여 사회자로부터 “어떤 사람이 잘 싸우느냐”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걸걸한 목소리로 하는 말이 “싸움은 빠른 놈이 잘하지, 그런데 빠른 놈은 힘센 놈을 못 당하고, 힘센 놈은 기술 좋은 놈 못 당하고, 기술 좋은 놈은 배짱이 센 놈을 못 당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믿음에 따라 행위가 달라집니다. 인간은 신념의 동물입니다. 분명한 신념체계가 확립될 때 당돌해집니다. 왕후 에스더가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에4:16) 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도하면서 얻은 당돌함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사람을 당돌하게 하는 것은 믿음에서 나오는 용기입니다. 그의 당돌함이 소수민족인 이스라엘 백성을 구했습니다. 다윗은 당돌했습니다. 다윗이 사울왕에게 말하는 것 좀 보세요.  “다윗이 사울에게 고하되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심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첬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삼상17:32,36) 

  인간에게 내재해 있는 속성은 “긍정”보다는 “부정”이 강합니다. 말씀과 기도가 부정을 긍정으로 바꿉니다. 긍정 지수를 높이면 부정은 약해지기 마련입니다. 부정적인 사람은 짜증나게 하지만 긍정적인 사람은 생명을 줍니다. 긍정적인 사람과 만나고 긍정적인 말을 듣고 긍정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영국에서 한쪽 팔이 없는 켈리 녹스라는 여성이 패션 모델로 선발되었습니다. 그는 선천적으로 왼쪽 팔꿈치 아래가 없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혼자 옷을 입고 식사도 한 손으로 하게 했습니다. 다섯 살 때 한 손으로 자전거 타기를 했습니다. 의수를 하고 다녔는데 일곱 살 때부터 거추장스럽다며 의수 없이 팔을 드러내고 다녔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한번도 장애라는 말을 해본 일이 없다고 합니다. 그는 두 팔을 다 가졌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 일이 없습니다. 그는 유명한 말 한마디를 했습니다. “할 수 없다는 생각만 하지 않는다면 뭐든지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걸 내가 증명하고 싶다” 그는 당당한 사람입니다. 당돌하기 바랍니다. l 


  󰊳 뻔뻔한 사람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뻔뻔한 사람이란 파렴치한 사람이 아닙니다. 무례하고 막돼먹은 사람이 아닙니다. 뻔뻔하다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부끄러운 짓을 하고도 염치없이 태연한 것입니다. 염치없다는 것은 체면 차릴 줄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체면은 남을 대하면서 자기 입장에서 지켜야할 최소한의 몸가짐입니다. 뻔뻔하다는 말 자체는 좋은 뜻으로 쓰이지 않는 말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에게 물어 보겠습니다. 이런 말이 좋은가 나쁜가 생각해 보세요. “주눅들지 않는다. 깡다구가 있다 배짱이 두둑하다. 넉살이 좋다. 용감하다. 붙임성이 좋다. 집요하다. 낯을 가리지 않는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범하다. 자유롭다. 앞장선다. 자신감이 넘친다” 

   뻔뻔하다는 말 자체는 좋지 않으나 위에서 했던 말은 뻔뻔한 것입니다. 뻔뻔함의 사전적인 의미는 부정적이지만 실제적으로는 긍정적인 성격을 말합니다. 뻔뻔하다는 말은 비판하는 소리이고 경쟁자가 상대를 깎아 내리는 말입니다. 비난하는 입장에서 “뻔뻔해”이지만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당당해”입니다. 

  한 대학생이 여대생을 쫓아 다녔습니다. 전차를 따라 탔는데 이 한 마리가 염색해서 입은 군복 어깨 위를 기어갑니다. 이를 잡아 그 남학생의 손에 주며 “나를 쫓아다니지 말고 이나 잡으라”고 망신을 주자 여학생들이 깔깔대며 웃었습니다. 그러나 남학생은 태연하게  “이 녀석을 잡으려고 전국에 지명 수배령을 내렸는데 잡아줘서 고맙습니다. 제가 한 턱 소겠습니다.” 하며 넉살을 떨었습니다. 두 사람이 만나 대화가 잘 되어 잘 사귀다가 결혼에 이르렀습니다. 누가 망신을 줘도 창피한 줄 모르는 뻔뻔이의 승리였습니다. 연애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자신감이 있고 당당한 뻔뻔함이 왜 나쁩니까? 목표에 대한 집념과 용기 있는 태도가 어떠냐구요? 자신의 신념과 믿음에 대한 표현이 ‘당당하자’는 것입니다. ‘조심해 조심해’ 에서 살지 말고 ‘당당해 당당해’ 에서 살자는 말입니다. 뻔뻔함이 자기 보호수단이요, 자기 생존 비결입니다. 자신감의 반대는 열등감입니다. 열등감을 가지게 되면 소극적이고 의기소침해집니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학대하고 고민하며 좌절합니다. 

  열등감은 당당하지 못하게 합니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뒤로 물러갑니다. 나서지 못하고 스스로를 고립시킵니다. 얼핏보면 겸손인데 실상은 열등감입니다. 열등감은 반드시 극복해야할 장애물입니다. 내가 받아들이고 하지 않으면 열등감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어느 야구 선수의 말을 좋아합니다. “그래 나 못생겼다. 어쩔래! 나는 지금까지 잘난 얼굴로 공을 치는 놈은 못 봤다” 얼마나 멋있는 사나이 입니까? 우리 아버지는 ‘쩟쩟하다’는 말을 자주 하셨습니다. 당당한 사람을 보고 그러셨습니다. 자식들이 쩟쩟하기 바래서입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13절) 바울이 감옥 간 것으로 인해 실망하거나 낙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위축되지 말고 당당하라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누구도 당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했습니다(행6:5).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행했습니다.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은 누구도 당하지 못했습니다(행6:8,10). 그는 어디서나 당당했습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죽음도 비겁하게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순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당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당당하시기 바랍니다. 당당한 사람은 담대합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강하고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당당한 사람은 당돌합니다. 뻔뻔합니다. 예수님은 저주받은 자로 취급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뻔뻔하셨습니다(히12:2). 비리비리 하지말고 빵빵하고 당당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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