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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미인과 박사 (단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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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과 박사 (단 1:1~21)
  
      
우리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미모가 중시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요즘에 유행하는 단어들이 얼짱, 몸짱입니다. 전에는 들어보지도 못한 단어들입니다마는 얼짱이라는 말은 얼굴이 짱이다, 몸짱은 몸이 짱이다 이런 뜻입니다. 이것을 어느 정도는 애교로 받아들일 수 있고 또 문화적인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문제는 이것이 일률적인 미의 기준으로 사람들에게 요구되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것을 기준으로 아름다움을 정하고, 이것이 아름다운 것이고 이렇지 못한 것은 아름답지 못하다, 이렇게 되니까 이제는 모든 사람이 아름답기 위해서 문화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들, 또 미디어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들을 따르려고 애를 쓰고 이러지 못하면 아름답지도 못하고 또 사랑받지도 못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엄청난 상처를 주고 또 사람들을 미혹하고 또 그릇된 방향으로 이 나라를 이끌어 가고 그리고 그것이 정신 건강에 큰 지장을 줄 수도 있습니다. 

과거에는 성인잡지에서나 볼 수 있었던 사진들을 이제는 인터넷 어디를 가든 바탕화면에 버젓이 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의 모든 연예인들이 경쟁적으로 선정적인 사진을 찍고 또 그것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그것이 아름다움인 것처럼 그것이 바람직한 여성상인 것처럼 경쟁을 하고 있고 과거에는 스트립쇼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류의 댄스를 이제는 거의 모든 연예인들이 경쟁적으로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고 과거에 동방예의지국으로 알려졌던 우리나라의 대중문화가 이제는 선정적으로, 노출 위주로, 감각적으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쪽으로, 또 추하고 이런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 보면 되지 않느냐, 남이 하는 것 보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이것은 엔터테인먼트에서 끝나는 것 뿐만이 아니고 일련의 미의 기준을 만들어서 그것을 강조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이지 않으면 아름답지 못한 것이다, 이렇게 해야 아름다운 것이다, 이렇지 못하면 아름답지 못하다, 이렇게 하게 되면 그것은 거짓을 진실로 가장해서 그것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 되고 이것이 장차 우리나라의 도덕과 문화와 정신 건강과 신앙에 얼마만큼의 부정적인 영향을 줄지 미처 내다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유럽의 어떤 나라에서는 너무 마른 모델을 기용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습니다. 너무 마른, 밥을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여자들이 있지요. 아주 마른 몸매를 가진 모델들을 기용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여자들이 그런 모델들을 보고 그것이 아름다움인양 생각하기 때문에 무리하게 다이어트를 하고 그래서 거식증에 걸리고 늘 자기가 비만이라고 생각하고 살을 빼려고 하고 이것이 국민의 건강이나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해서 저체중인 모델을 기용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한 나라도 있습니다. 이것은 지혜로운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 옛말에 제 눈에 안경이라고 아름다움은 다양한 것입니다. 다양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아름다움은 일률적인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아름다움이 일률적인 것이라면 하나님이 실수했다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게 만들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증언하는 것은 전도서 3장 11절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셨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외모든 그의 타고난 재능이든 그의 성격이든 이 모든 것이 우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지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기를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라고 했습니다. ‘God made everything beautiful in its season - 때를 따라서 아름답게 하셨다’라고 했습니다. 아름다움은 그러므로 한 종류에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건강한 것이 아름다운 것이고 발랄한 것이 아름다운 것이고 행복한 것이 아름다운 것이고 또 친절함에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고 따뜻함에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고 이런 모든 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탈리아의 배우인 이사벨라 로셀리니는 말하기를 ‘아름다움은 내면의 자신감에서 나온다.’라고 했는데 아주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감이 있는 사람은 보기에도 아름답습니다. 행복한 사람, 웃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움에도 시즌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말씀에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라고 한 것입니다. 학생은 그러므로 학생일 때는 아름다움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학생은 공부하고 건강하게 자라기만 하면 됩니다. 이제 아름다움을 드러낼 때가 옵니다. 그때가 되면 멋을 부릴 줄도 알고 옷을 골라 입을 줄도 알고 그래서 꽃에 물이 오르는 것처럼 얼마든지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그것을 염려할 필요 없습니다. 너무 일찍 미모와 또 이성에게 내가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생각하게 되면 그것은 때를 어기는 것이고 정말로 배워야 되고 또 기다려야 될 때 앞서가게 되는 것이 본인에게 유익하지 못합니다. 

인생을 길게 봤을 때 너무 일찍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본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청소년들이 목말라 하는 것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인데 어른이 돼 보시니까 그게 그렇게 좋습니까. 어른이 돼 보신 분들, 어른이 되고 어른의 책임을 지는 것이 그렇게 좋습니까. 오히려 어렸을 때가 그립지 않습니까. 그때가 좋았지요.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그곳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그게 그리운 것이지요. 그러나 그건 어른이 되니까 깨닫는 것이고 청년일 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서 안달을 하는데 그러나 때가 되면 어른이 될 것입니다. 서두를 필요 없습니다. 아이일 때는 아이처럼 사는 것이 정상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건강한 것입니다. 

요즘의 문제는 너무 일찍 어른이 되고 신체적으로 또 다른 면으로 어른의 흉내를 일찍 내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아이가 어른의 흉내를 내다보니까 그렇다고 해서 어른처럼 책임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것이 없는 상황에서 어른의 흉내를 내려고 하다보니까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고 자신이 감당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에는 다 때가 있습니다. 돈 버는 것이든 사랑이든 성공이든 열매 맺는 것이든 다 때가 있는 것이고 요즘은 디지털 시대라고 해서 모든 것을 빨리 빨리 이루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아날로그도 아닌 원시적인 방법으로 역사하십니다. 그게 바로 심고 거두는 원리입니다. 심고 거두는 원리는 농사에서 사용하는 원리인데 이것은 디지털도 아날로그도 아니고 지극히 원시적인 방법이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 방법을 통하여 우리의 삶에 역사하시고 우리에게 그 방법을 통하여 때를 분별하고 기다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서두를 수 없습니다. 

아직 봄인데 가을에나 익을 열매를 요구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이든 인격이든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이든 우리가 소원하고 기도하는 일이든 인스턴트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조숙한 것은 그것은 진짜가 아닙니다. 때가 아닌데 열매가 맺힌다면 그건 진짜 열매가 아니에요. 가짜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삯군이요 거짓 목자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때가 되지 않았는데 일찍 나타난 열매는 가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시는 일을 결코 사람의 기호에 따라서 서두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원리를 믿고 그대로 이루어질 줄을 믿어야 됩니다. 심으면 자랄 것이고 자라다보면 열매를 맺을 줄 믿어야지 제대로 심지도 않고 열매를 바라는 것은 미련한 것입니다. 부지런히 심어야 됩니다. 젊었을 때, 아직 힘이 있을 때, 능력이 있을 때, 기회가 있을 때 부지런히 심으면 그것이 말씀이든 믿음이든 사랑이든 수고든 순종이든 부지런히 심으면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날이 옵니다. 그러니까 부모님들이 자식에게 하시는 말씀이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어릴 때, 학생일 때 너무 일찍 남자친구, 여자 친구를 사귀지 마라 앞으로도 얼마든지 기회가 온다. 그러나 지금은 공부해야 되는 때인데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앞으로는 공부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정말로 맞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공부뿐만이 아니고 신앙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아마 예수님에게도 고독한 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당연하지요.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독신으로써 고독한 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 세상이 논리를 따라서 ‘나는 고독하지 않겠다, 나는 고독함을 피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한다면 그럼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에는 고독할 때가 있고 기다릴 때가 있고 또 때로는 희생해야 될 때가 있고 아플 때가 있고 또 기다려야 될 때가 있고 그리고 하나님이 그 시절만을 허락하시는 것이 아니고 아프고 힘든 때가 있었기 때문에 이제 형통하고 또 열매를 거두고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할렐루야! 눈물로 씨를 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역사를 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전도서 3장 11절에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 때를 따르는 것입니다. 아름다움도 젊었을 때는 젊었을 때의 아름다움이 있고 나이가 들면 관록의 아름다움이 됩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칠십세 정도가 되었을 때 그의 미모가 알려져서 애굽의 바로도 사라를 탐내고 아비멜렉도 사라를 탐냈다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그 나이에 사라가 젊은 스타일의 미모를 가졌겠습니까. 천만의 말씀이지요. 칠십세요 이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나이라는 것을 본인도 알고 남편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칠십세 나이의 사라의 미모를 말하는 것은 어떤 젊음의 미모를 말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애굽의 바로의 눈과 아비멜렉의 눈에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아름답게 보였어요. 물론 남의 아내가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이 우리에게 암시하는 것은 뭔가 나이가 이미 많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여성에게는 그 나이에만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남들에게 매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그게 아니고 사라가 그 나이에 이십대의 아름다움을 가지려고 애를 썼다면 그것은 오히려 추함이 되었을 것이고 천박함이 되었을 것입니다. 요즘 아름다움의 모델이라고 내세우는 많은 것들은 그건 정말로 아름답지 않고 천박합니다. 추합니다. 어둡습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보이지 않고 결코 밝아 보이지 않고 선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선한 분이시고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은 선하고 밝고 거기에는 생명이 있고 기뻐하는 것이지 어두우면서 행복하지 못하면서 감각적으로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다니엘과 그 세 친구가 다 남자들입니다마는 바벨론에 그들이 끌려가서 바벨론의 기준에 의해서 미모를 갖출 것을 요구 받습니다. 어떻게 보면 남자에게 미모를 요구하는 것이 좀 어색하게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마는 오히려 지금 이 시대와 잘 맞물린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시대는 여성뿐만이 아니고 남자들도 미모에 대해서 엄청나게 신경을 쓰는 시대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꽃미남이니 킹카니 이런 시대로 이제는 남자와 여자를 막론하고 다 아름다워지고 미모에 신경을 쓰는 시대가 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천년 전의 사건이 마치 오늘날처럼 새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 네 사람은 지혜롭고 머리도 좋고 유능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으로서 이방문화가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 그들의 신앙에 기준에 의하여 맞설 수 있는 용기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후에 다니엘서를 읽어보면 다니엘은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자 굴에 던져지고 세 친구는 왕의 우상에 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풀무 불에 던져지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아직은 그 일이 생기지 않았습니다마는 그것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이들이 이방문화에서 이방문화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것을 거부할 줄 아는 용기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이 1장 말씀에서도 바벨론의 이방문화가 그들에게 어떤 미의 기준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 5절을 보면 ‘왕이 지정하여 자기의 진미와 자기의 마시는 포도주에서 그들의 날마다 쓸 것을 주어 삼년을 기르게 하였으니’ 그 이방문화와 기준에 의해서 이들을 키우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과 그 세 친구가 그것을 거부합니다. 8절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다니엘은 바벨론이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가다가는 자기를 더럽히게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에요. 세상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들을 그대로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우리를 더럽히게 됩니다. 영적으로도 그렇고 도덕적으로도 그렇고 우리를 더럽히게 됩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더럽히면서까지 세상의 보는 눈에 아름다워지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누구 좋으라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그들이 마음을 정하고 뜻을 정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에 분명한 목적이 없고 용기가 없고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뜻을 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충 대충 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우리도 끌려가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뜻을 정하면 거기에서 분명한 목적이 나타나고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는데 뜻을 정하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이목, 의견, 세상의 풍습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자기의 아이덴티티가 분명하고 또 자신의 원칙이 분명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뜻을 정해야 됩니다.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뜻을 정해야 됩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뜻을 정해야 됩니다. ‘나는 육신이 아니라 성령을 좇겠다.’ 뜻을 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다, 나는 사람을 낚는 어부다, 나는 하나님의 종이다.’ 뜻을 정하는 것입니다. 

뜻을 정하면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용기와 능력이 나타납니다. 뜻을 정하지 못한 사람은 남의 눈치를 보고 남들이 말하는 데로 세상 흐르는 데로 적당히 같이 흘러가면서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뜻을 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거기에서 방법이 나타나고 그리고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나타나고 그리고 그 뜻대로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내기를 겁니다. 12절에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진미를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보이는 대로 종들에게 처분하소서’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것까지는 하겠는데 그 결과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비교에 대해서는 상당히 주저하는 그런 면이 있지만 이건 믿음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번 테스트 해 보자, 비교해 보자는 것입니다. 미모든 지혜든 결과든 이런 것에 있어서 과연 누구의 방법이 더 효과적이고 누가 더 옳은지를 비교해 보자는 것입니다. 비교할 수 있습니다. 그랬더니 15절에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진미를 먹는 모든 소년보다 나아 보인지라’ 여기에 믿음의 결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누가 믿음은 눈에 볼 수 없고 이 세상에서 확신할 수 없다고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행한 것이 때로는 그 결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서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홍해가 갈라지고 죽은 자가 일어나고 소경이 눈을 뜨는 것처럼 다니엘이 뜻을 정하고 내기를 했더니 하나님이 그에게 은총을 주셔서 세상의 방법을 좇는 사람보다도 ‘더 얼굴이 아름답고 살이 더 윤택하고 나아보인지라’ 당연히 그렇지 않겠습니까. 

신앙과 미모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 분들은 회개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실수했다고 생각하신 분들은 회개하셔야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하게 지으셨고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아름다움을 찾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내가 이것을 통해서 얼마든지 흡족하고 여기에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어야 됩니다. 

이건 미모뿐만이 아니고 학문이든 지혜든 다 마찬가지입니다. 다니엘이 내가 나를 더럽히지 않겠다, 더럽히지 않으면서도 지혜롭고, 더럽히지 않으면서도 형통하고, 더럽히지 않으면서도 아름답고.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형통, 인간이 자기도 기쁘고 하나님도 기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함께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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