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위대한 결말 (행 14:19~28)

  • 잡초 잡초
  • 256
  • 0

첨부 1


위대한 결말 (행 14:19~28)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된 후 그는 평생을 온전히 전도 사업에 일생을 바쳤습니다.
그는 전도 활동을 위해 세 차례에 걸친 전도 여행을 하였는데 일차 전도 여행에 대한 기록이 13장-14장에 걸쳐 수록되어 있으며, 오늘 본문 말씀은 일차 전도 여행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무슨 일에 있어서든지 시작도 중요하지만 마지막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시작이 좋았어도 마지막이 좋지 않으면 실패자가 되지만, 시작은 좀 어설펐어도 마무리가 잘 되면 성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은 성공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결말이 훌륭하였기 때문입니다.

1. 사도 바울은 진리를 끝까지 고수하였습니다.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고친 후 그 곳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착각하고 경배하려 했을 때, 그들의 어리석은 행동을 막으면서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려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만 섬기게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제사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만일 모른 체 하고 그대로 두었더라면 아마 사도 바울은 저들에게 극진한 환대와 굉장한 지지를 받으며 평안히 지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을 절대로 방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① 전도자가 지나친 영광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배신행위요,② 인간을 신격화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 행위요,③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사도는 저들의 잘못된 행동을 극력 저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루스드라인 들은 얼마 후에 이고니온과 안디옥에서 몰려온 유대인 불량배들의 선동에 휘말려 바울을 돌로 처 죽여 성밖에 내다 버렸습니다.
얼마 전만 해도 신으로 떠받들려 했던 저들이 돌로 처 죽여 성밖에 내버렸으니 실로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만일 그들의 제사를 받아들이고 신으로 행세를 했더라면 바울을 해코자 했던 유대인들이 오히려 돌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해명 때문에 제사를 드리려던 사람들로부터 돌 세례를 받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끝까지 하나님의 진리를 바로 전하려다가 오늘 이런 참변을 당하게 된 것이니 그의 일차 전도 여행의 결말은 참으로 훌륭하였습니다.

녹두 나물은 쉬기를 잘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이를 숙주나물이라고 합니다. 단종 때 신숙주의 변절을 비꼬아 하는 말입니다. 박해가 무서워서, 죽음이 무서워서 변절을 하고 살아 남는다고 해도 그는 욕된 삶을 면치 못하였을 것입니다.

형편 따라 신앙과 지조를 버리지 말고 바울처럼 돌에 맞아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끝까지 옳은 건 옳다 하고, 아니 건 아니라 하여 진리를 고수한다면, 그래서 쓰러진다면 그것은 장한 결말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진리 파수의 굳건한 신앙을 본받아 살아야 할 것입니다.


2. 바울은 전도의 여정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고 그 시신을 끌어다가 성밖에 버리고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죽은 줄만 알았던 바울이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쑤시고 저리고 아픈 몸을 이끌고 더베로 향해 전도하러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범인 같으면 아마 이런 경우에 실망과 좌절에 빠져 자리에 눕거나 아예 전도를 포기하고 조용한 휴양지로 후퇴하여 평안한 여생을 계획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툭툭 털고 일어서서 담대한 믿음으로 더베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전도는 그에게 있어서 생명보다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20:24절에 보면 그의 신앙적 결단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찢기고 아픈 몸을 이끌고 생명을 다하여 더베를 향하여 전도의 여정을 계속합니다. 여러분, 목석이 아니라면 이 광경을 보는 자는 눈물 없이 볼 수 없고,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는 달려갈 길을 다 마치기 위하여 믿음을 끝까지 지켰고 그 일을 마치기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이 때 루스드라 청년 한 사람이 바울에게 뜨거운 감동을 받고 자신도 바울과 같은 주의 종이 되기를 결심하고 후일에 그를 따라 나섰는데 그가 바로 디모데인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 보면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될 때도 있고 환난과 역경으로 좌절과 낙심에 빠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돌무더기 속에서 다시 일어나 더베로 나간 사도 바울처럼 주님만 향해서 앞으로 앞으로 전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바울과 같이 우리의 결말도 숭고한 결말이 될 것입니다.


3. 전도 지를 다시 찾는 바울의 열심입니다.

더베에서의 전도 활동을 통해서 많은 제자를 얻은 두 사도는 드디어 귀로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지금까지 전도한 고장을 한 곳,한 곳 다시 방문하며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아마 다른 사람 같으면 그 동안 당한 일들이 지겨워서라도 속히 돌아가서 쉬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전도한 사람들을 살펴보고 권면하기 위해서 다시 방문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두기지 감동적인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 원수를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은혜 받은 일에 대해서는 잘 잊어버리고 좀 언짢은 일에 대해서는 잊으려고 하질 않습니다. 그러나 두 사도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귀로에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 버가 등지를 재차 방문했는데 이곳은 핍박을 받은 곳들로서 두번 다시 발을 드려 놓기 싫은 곳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 곳을 들렸습니다. 원한을 오래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정신입니다.

2). 믿는 형제를 잊지 않았습니다.
원수는 쉽게 잊었지만 믿는 형제는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찾아보고 싶고 위로해 주고 싶고 축복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일일이 방문한 것입니다.
전도란 결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앙이 계속 성장하여 진리 위에 굳게 설 때까지 돌보는 책임적인 봉사인 것입니다.

그의 전도 여정은 멀고도, 고달프고, 피곤한 길인지라 돌아오는 길만은 발걸음을 재촉하여 하루 빨리 돌아오고 싶었겠지만, 오히려 전도한 곳을 하나 하나 일일이 찾아보고 돌아가는 바울을 생각해 볼 때에 정말 존경할 만 분입니다.
 
그것은 원수에 대한 관용과 사랑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랑의 사람이라면 모든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는 관용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일에 있어서든지 서로 관용하지 아니하고는 사랑으로 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일이나 사람의 일은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일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도에 대한 책임감과 그 일에 대한 성실성이 넘치기에 머리가 절로 숙여지는 것입니다. 사실 존경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면에서 나타나는데 하나는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구속된 거룩한 백성이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들이기 때문에 서로 존경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이 희생과 관용으로 그의 몸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조용히 나 자신을 살펴봅시다. 잊어야 할 것은 오래 기억하고 있지는 아니한가? 그리고 기억해야 할 것은 쉽게 잊어버리고 감사보다는 원망을 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리고 바쁘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일을 무책임하고 불성실하게 하지는 않는가? 이러한 일이 있는 한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는 존경의 대상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겸손히 우리의 잘못을 회개하고 바울처럼 끝까지 회생하며, 너그럽고 관용하며, 성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니까 할 수 없어서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절로 머리를 숙여 피차 존경할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4. 바울은 감동적인 마지막 보고를 하였습니다.

두 사도가 자기들을 선교사로 안수하여 파송한 안디옥 교회에 돌아와서 교회 앞에 드린 보고는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1). 신실을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을 무슨 일을 부탁 받고도 통 그 결과를 보고 할 줄 모르는 이가 있습니다. 책임감이 없고 성실치 못한 사람이라는 평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보고하는 것이 뭐 자존심이나 깎기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사실 그것은 되지도 못하고 된 줄로 아는 교만 때문입니다.

두 사도가 안디옥 교회에 돌아온 후 선교 활동의 결과를 보고한 것은 두 사도의 겸손한 미덕과 책임감과 성실성을 충분히 입증한 것으로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이러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교회로부터 계속 존경과 심임을 받지 못하는 것은 교회의 사랑이 식은 때문이기보다는 나 자신의 신앙 인격과 성실성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이 마지막까지 감동을 줄 수 있으며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성의가 엿보였기 때문입니다.
두 사도는 그 동안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보고하였습니다. 모든 보고를 했다는 말을 자세한 보고를 했다는 말이고, 자세히 보고를 했다는 말은 보고를 성의 있게 했다는 뜻입니다.
무슨 일에나 성의 없이 하는 것처럼 불쾌감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반면에 성의가 담겨 있는 것은 무엇이나 보는 사람을 유쾌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 사도의 보고에서 그들의 성의를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많은 감동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점을 꼭 배워야 할 것입니다.

3). 정직한 보고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 여행을 하는 동안 놀라운 기적도 있었고 많은 결신 자도 생겼고 특히 이방의 전도 문이 크게 열리고 무서운 환난도 능력으로 극복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하나도 사도들 자력으로 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직하고 겸손한 보고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지극히 당연한 보고이지만 사람들이 하도 속임수를 많이 쓰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도들의 정직한 보고에서 가슴이 뭉클해지도록 감동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언제나 정직합니다. 하나님은 있는 그대로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올 때마다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존경받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큰 일을 해내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정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사람을 쓰십니다. 능력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을 원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장중에 붙들리기만 하면 능력의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능력의 사람으로 쓰임 받고 큰 일을 해 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지식이 있고, 똑똑해서가 아닙니다. 학식과 경험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겸손히 모든 것을 믿음으로 맡기고 모든 일에 정직하고 성실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이 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도 바로 이러한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정직한 사람은 시종이 여일 합니다. 시작도, 마지막도 변함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일을 다 믿음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감정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생각이나 경험으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다 변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변함이 없는 금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능력의 장중에 붙들어 의의 병기로 사용하실 뿐만 아니라 큰 은혜와 복을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엡6:24절에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에 충성하며 맡은 사명을 끝까지 잘 감당하는 자에게 은혜와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결말이 좋아야 합니다. 출발이 찬란했어도 결말이 좋지 않으면 전공이 수포로 돌아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작이 미흡했어도 결말이 훌륭하면 지난날의 좀 부족한 것이 있어도 다 잊어버리기 마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차 전도 여행의 결말을 훌륭하게 장식한 두 사도들처럼 우리도 우리의 결말을 아름답게 해야 할 것입니다. 금년에 우리의 시작이 좋았던 것처럼 금년 말에도 좋아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에 우리의 마지막이 훌륭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하루하루의 한 사건의 결말을 아름답게 이루어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