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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하는 마음 (눅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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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마음 (눅 11:5~8)


오늘 봉독한 말씀은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우리는 이 비유에 앞서 있었던 두 가지 사건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하나는 11장 초두에 기록된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셨을 때 한 제자가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하는 요청에 따라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일입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본문 말씀과 같이 기도에 대한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기도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으로 기도의 주요 내용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다음은 이 비유를 통해서 어떠한 심정을 가지고 기도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진정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지녀야 할 마음 자세가 상세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내게 한 친구가 있는데 그가 여행 중에 나를 찾아 왔습니다. 그 친구가 낮에 온 것이 아니라 온 식구가 잠자고 있는 한 밤중에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매우 시장하고 피곤에 지쳐 있었습니다. 당장 빵을 만들어 대접할 수는 없고 해서 하는 수 없이 나는 옆에 살고 있는 친구 집에 가서 문을 두드립니다.

 ‘친구여! 미안하지만 떡 쇳덩어리만 빌려주게나 여행 중에 있는 내 친구가 갑자기 왔다네’---여러분!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거 너무하지 않습니까? 친구가 어떤 친군지 모르겠지만 한 방중에 찾아 온 것이나, 또 자기 문제도 아니고 남의 문제를 가지고 옆집까지 찾아와 빵 좀 달라고 소란케 하니-----해도 해도 너무한 일입니다. 한끼 굶으면 어떻습니까?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도 아닙니다.

 먹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챘으면 좀 사양하면 어떻습니까? 그런데 먹겠다고 죽치고 앉아 있는 그 친구나, 없으면 그만 둘 것이지 옆집까지 찾아가서 잠자는 사람 다 깨워 놓으니----이거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 같습니다. 숨이 넘어가는 일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무리 봐도 우리가 볼 때에는 긴박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긴박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어쨌던 꼭 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비유로 기도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상황에 있다면 우리는 옆집에 가서 빵을 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이런 것 저런 것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기도에 방해되는 것이 무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대체 왜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까?
  
1).교만 때문입니다.
     
나 혼자 해결하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 하다가 되면 되는 것이고, 안되면 그만둔다는 식의 고집이 기도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다가 정작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주여’하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요,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입니다. 작은 일이건 큰 일이건 언제나 하나님과 의논하며 기도하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마음대로 하다가 정 안되는 일만 하나님께 가지고 나와 기도하려 합니다. 혼자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있는 한 기도는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인간 만사가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사실입니다.
 
잠16:1,9절에 보면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고 하였고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 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37:5절에서 권면하기를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적은 일이나 큰일이나 겸손히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나 혼자 해결하겠다는 생각은 바로 교만인데 이 교만은 불 신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2).인본주의적 생각 때문입니다.
     
사람이 형편과 처지를 잘 살피고 깊이 생각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너무 인간 본위로 생각하니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을 것같이 생각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 하나 때문에 다른 사람을 희생하거나 나 하나를 위해서 하나님의 크신 질서를 깨뜨릴 수 없지 않느냐’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굉장히 하나님을 생각해 드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왕하20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아 왕의 기도를 들어주시기 위해서 자연법칙을 일시 변경시켜서라도 응답의 징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사사기 6장에도 보면 기드온이 ‘나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표를 보여 달라고 할 때에도 자연법칙을 일시 잠재하시고 기적으로 확증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여호수아 10장에 보면 여호수아가 아모리 연합군과 전쟁 중 이스라엘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낮 시간 연장을 위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태양과 달을 잠깐 머물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역사는 인간의 좁은 이성과 지식의 범위 안에서만 역사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초자연적이요, 초 이성적인 방법으로 역사 하실 때도 있는 것입니다.
 이를 떼면 모든 사람이 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 집 잔치만을 위하여 좋은 날씨 달라고 기도해서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끔찍이 하나님의 어려운 형편을 생각해 드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딱한 사정을 생각해 드리자는 것입니다.

(예).어떤 생각 많은 분의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이들이 대학 시험을 앞두고 꼭 합격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계속하고 있는데 마음 한편에 좀 이상한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내 아들이 합격하면 어느 아이 하나는 떨어질 것이 아니냐 것이었습니다. 내 아들 합격하게 해 달라는 것은 한 아이 떨어지게 해 달라는 것과 같은 것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하다 마음이 복잡해져서 기도하지 못하고 말았답니다. 참말로 걱정도 팔자입니다.

 본문의 내용도 이와 같습니다. 자기 배가 좀 고프다고 해서 어려운 형편을 보면서도 죽치고 앉아서 기다리는 친구나, 이런 친구에게 빵 하나 주기 위해서 온 식구가 잠을 설치며 그 불편을 치러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피차에 질서를 깨뜨리지 말자는 생각을 가질 만 합니다. ‘이 부족한 인간의 사소한 생각까지 들어주시겠는가?’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기도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구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다 아신다고 했으니 아시면 주실 터이니까 따로 기도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합니다.
아주 이지적이고 현명한 생각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 한 장만보고 두 장을 보지 않은 데서 나오는 생각입니다. 오늘 본문 다음 말씀을 보면 무어라고 했습니까?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기 전에 다 아십니다 마는 구하기 전에는 주시지 않는 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던지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3).체면을 너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도할 만한 사람인가, 기도 응답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가---지레 겁을 먹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누군들, 무슨 체면으로 감히 하나님 앞에 나와 입이라도 벙긋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죄인인 줄 알면서도 채면 없이 나와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를 보고 어떤 분이 말하기를 예수 믿는 사람들은 체면도 없다는 것입니다.
 
‘죄짓고 회개하고, 죄짓고 회개하고, 그렇게 몇십 년을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잘못했다고 하는 것도 한 두번이지 같은 것을 가지고 몇 번이나 회개할 것이냐, 그렇게도 체면이 없는 사람들이냐’고 말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체면 같은 것이 없습니다. 체면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나올 수가 없습니다. 체면 있는 사람은 기도하지 못합니다. 나 같은 죄인이 무슨 낯으로 감히 하나님 앞에 손을 내밀겠습니까? 나를 낮추는 것으로 착각케 하는 체면이 기도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입니다. 체면 차리는 것이 겸손히 아닙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인정하는 마음이 바로 겸손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51:17절에서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체면 차리는 마음이 아니라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통회하는 마음, 곧 상한 심령입니다. 사실 우리 민족은 체면 때문에 망한 민족입니다.‘양반은 곁불도 쬐지 않는 다는 그 체면’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자녀들을 볼 때에 무슨 자격이 있어서 ‘내 사랑하는 자녀’입니까? 무슨 자격이 있어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줍니까? 아닙니다. 사실 자녀들이야말로 부모님 앞에 염체 없고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남의 아이들이 집에 오면 체면을 곧잘 차립니다. 만일 내 자식이 체면만 차리고 점잖게만 군다면 얼마나 징그럽겠습니까? ‘막내야! 여기 떡도 있고 빵도 있으니 마음대로 먹으라’할 때 ‘어머님! 어머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에 이 못난 녀석 황송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먹을 자격이 없으니 그만 두겠습니다’라고 한다면 아마 그 어머니는 기가 막힐 것입니다.

아이는 아이다워야 합니다. 자녀는 자녀다워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방 사람이나 하나님 앞에 체면 차릴지 모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체면 차릴 것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저런 체면 무릅쓰고 우직하게 기도해서 성공한 대표적인 인물로 야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누가 저를 죄인이라고 하건,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라고 하건 복을 받아야겠다는 한가지 마음으로 천사와의 씨름과도 불사했습니다.
얍복 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의 모습이란 참으로 우직하기 짝이 없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야곱의 대단한 끈기를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러한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본문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친구를 위하여 빵을 얻으러 가니 그 집안에서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었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 없느니라’라고 이렇게 나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래도 가겠느냐’고 하는 생각의 가능성을 미리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 그렇게 나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온 당신의 친구인데 배가 고프든 말든 나와 무슨 상관이냐, 밀떡이라도 남겨 놓을 것이지 그렇게 모조리 먹어 치우며 살림을 하느냐’이런 말을 듣게 될까 봐 문을 두드리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 좋은 일을 하겠다고 다른 사람 괴롭힌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아니냐는 생각까지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불과 몇 시간 후면 아침 빵을 만들어 먹게 될 터인데 그것을 못 참아 그러느냐’는 말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체면, 저런 체면 다 생각해 보니 그까짓 빵 얻으러 가지 않으면 될 것 아니냐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 사람은 단순한 마음으로 구합니다. 그저 단순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먼길을 걸어와 피곤하고 몹시도 배고파하는 친구에게 무엇이라도 빨리 먹여야겠다는 일념뿐입니다. 마음에 비상히 걸렸습니다. 여러분! 내가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에게 주기 위해서 비상을 걸어 본적이 있습니까? 나의 일을 위해서는 빚을 내서라도 해결을 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돈을 꾸어 본적이 있습니까?
 이 사람은 친구의 배고픔을 헤아려 이것을 초비상으로 생각하고 모든 체면을 불구한채 이웃에게 가서 간청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있지 말아야 할 두 가지 마음이 있습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아주 단순한 마음입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과 사랑의 마음입니다. 믿음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단순한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믿고 요구할 때에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단순하게 믿습니다. 그리고 사랑도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단순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어린 자녀가 사랑하는 아버지께 구하는 것과 똑같은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할때에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한 믿음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구하면 되는 것입니다.

남을 위하여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기도 중에 가장 위대한 기도는 남을 위하여 드리는 기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나 자신을 위한 기도는 정욕에 빠지기 쉽고 욕심에 기울어지기 쉬운 것입니다. 우리는 특별한 때에 철야 기도도 하고 금식 기도도 합니다. 물론 내 가정, 내 자신을 위해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는 더욱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다음은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모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사모하는 마음속에서 간절한 기도가 나옵니다.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고 하였습니다.
간청함 다시 말해서 그 간절함 때문에, 그 강한 요청 때문에 주신다는 뜻입니다. 받을 자격이 없다 하더라도 좋고, 질서가 깨어지고, 체면이 짓밟히는 소리를 듣게 된다 할지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1-13절에 보면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고 친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눅18:1절 이하에 보면 악한 재판관과 과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재판관이 악하여 들어주지 않을 지라도 그 과부의 계속되는 간청 때문에 결국 들어주었는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너희의 간절한 기도를 왜 안 들어주겠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절대로 외면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단순한 마음, 곧 믿음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간구 해야 합니다

(예).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때로 우리 기도에 대하여 더디 주실 때가 있다. 더디기는 하지만 거절하시지는 않는다. 오랫동안 기도하면 더 큰 은사를 주신다. 빨리 주실 때는 그 가치를 모른다. 은사와 그 응답의 큰 가치를 알게 하기 위하여 은사 주시는 것을 잠시 늦추는 때가 있는 것이다.’ 사실 그렇습니다. 많이 기도한 후 응답 받게 될 때에 더 큰 감사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성도의 경건을 이루는데 제 일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루의 생활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쳤습니다. 막1:35절에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이렇게 일찍 일나셔서 제일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새벽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사람을 만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만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날을 하나님께 맡기고 시작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맡기고 열심히 일하신 후 저녁에 기도로 하루를 마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경건과 성도로써 하나님의 보다 큰사랑과 축복을 받는 비결이므로 우리 주님께서 거듭, 거듭 본 보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한달 새벽기도를 통해서 신앙생활에 경건을 이루며 여러분이 간구 하는 기도의 모든 소원이 주안에서 이루어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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