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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즐거워하며 기뻐하리라 (합 3: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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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워하며 기뻐하리라 (합 3:17~19)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8) 

신앙생활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입니다. 이 기쁨과 즐거움은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환경과 조건에서만이 아니라, 기뻐할 수 없고 즐거워 할 수 없는 환경과 조건에서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항상 하는 기쁨과 함께 환난 중에도 할 수 있는 즐거움을 말씀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4:4)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7)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롬5:3)

우리는 성서본문에서 도저히 즐거워 할 수 없고 기뻐할 수 없는 환경과 조건에서 즐거워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하박국 선지자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자신과 그의 민족이 당한 환난과 시련 속에서 신앙적인 회의와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계시다면 어떻게 그렇게도 악이 도처에 횡행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과, 의가 악을 이기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러한 현실에 대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는데도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을 더욱 힘들게 하는 의구심은 그래도 자기민족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으로 그래도 바벨론 보다는 의로운 백성일진데,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으로 하여금 자기민족을 징벌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박국은 그런 현실에 대하여 괴로워하기도 했고 슬퍼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박국이 이렇게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합3:17,18)
  
하박국은 극한 괴로움과 슬픔의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즐거워 할 수 있고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하박국이 가진 즐거움과 기쁨 속에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하박국은 어떻게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되셨기에. 
  
하박국은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라고 것은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비참한 현실 중에도 실망과 절망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와 그의 민족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의 소출이 없고 외양간에 양과 소가 없는 비참한 형국일지라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신앙생활 중에 회의가운데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는 불평과 원망가운데 있음을 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셨을까? 그렇게 되면 안 되지 않는가? 하나님을 믿는 생활에 무엇이 잘되었는가?........” 우리는 이러한 현실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어렵습니까? 매사가 불만스럽습니까? 억울합니까? 괴롭습니까?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말해야 합니다.
   
시편의 저자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되심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자랑인지를 시와 노래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18:2)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시115:9)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시118:6)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9:35-36)
  
예수님은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10:11)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목자가 되시면서, 반석과 방패와 바위와 요새와 구원의 뿔이 되시는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무성치 않고, 열매가 없고, 소출이 없는 것과 양과 소가 없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기에 절박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우리는 결코 실망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혹시나, 기대대로 되지 않았을지라도, 가난하든지, 실패를 당하든지, 환난과 고생을 겪을지라도 그것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저에게는 95세의 아버지가 게십니다. 아버지는 목회자로 우리 자식들에게 넉넉한 뒷받침을 해주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어려운 조건 중에도 행복하게 성장했던 것은 아버지가 내 아버지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 그 분이 내 아버지이시기에 어깨를 펴고 자신 있게 성장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 하나님이라고 하기 전에 우리에게 당신이 먼저 우리의 하나님이시라고 하십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었느니라.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니라.”(민15:41)
  
어떤 조건이나 환경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하시기에 적극적이신 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참 신앙은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 되심을 기뻐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믿음을 주셨기에 
  
어느 한 가정이 해수욕장에 놀러갔습니다. 어린 아들은 수영하는 재미에 자꾸만 깊은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불안한 어머니는 심하게 꾸중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은 불평하면서, 왜 아버지는 깊이 들어가도 말리지 않으면서 자기만 야단치느냐고 투덜댔습니다. 그 때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보험에 들었단다.” 
  
여러분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은행에 저축된 예금통장을 믿습니까? 아니면 보험증서를 믿고 있습니까? 믿지 못할 것을 믿고 꼭 믿어야 할 것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데서 우리는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돌보시고 인도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는 데, 인간의 불행이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믿음으로 이 세상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을 알게 됩니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이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기에 우리는 기뻐하며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 저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박국은 회의의 고민 속에서 슬퍼하고 괴로워했습니다. 이런 하박국에게 하나님은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합2: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답입니다. 이것저것 설명하는 것 보다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을 가질 때 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납득되게 설명하기 이전에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하신 일을 믿는 믿음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이스크림을 형과 동생이 먹고 있습니다. 형은 얼른 먹어치우고는 동생에게 한입만한입만 하면서 빼앗아 먹습니다. 마지막 조금 남은 아이스크림을 가지고 가위바위보 게임으로 사기를 쳐서 마지막 아이스크림 까지 빼앗아 먹습니다. 그 때야 동생은 자기아이스크림을 형이 다 빼앗아 먹은 것을 알고는 아버지가 계신 룸을 향하여 크게 울음을 터트립니다. 그 울음은 슬픔이 아닙니다. 형을 향한 억울함의 하소연보다는 울면 또 사주시는 아버지를 향한 믿음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 믿음은 슬픔이나 억울함이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을 가진 당당함입니다. 믿음은 우리로 어떤 어려운 환경과 조건에서도 기쁨과 즐거움 안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내게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먼저 믿으려는 의지를 가져야 합니다. 믿으려는 의지를 가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믿음이기에 우리를 기뻐하게 하고 즐거워하게 하는 것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기에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악인이 번영을 누리고 의인의 고난을 당하는 현실에 대하여 슬퍼하고 괴로워 할 때에, 악인의 번영과 의인의 고난이 일시적인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악인의 번창과 의인의 고난은 그 결과가 더딜지라도 기다리라고 하시면서 지체되지 않고 곧, 그 결과가 다가올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합2:3) 하나님의 역사는 반드시 승리하게 하는 역사이며 최종의 역사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역사임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역사를 합력하여 인간구원의 역사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결국은 선의 역사를 만드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8:28)
  
우리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확신하기에 슬픔과 괴로움의 조건과 환경가운데서도 오히려 기뻐하며 즐거워하면서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깨닫고 확신했던 하박국은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19절) 고 노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높은 곳에 다니는 사슴처럼 승리하도록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이기에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확신 속에 살아가는 사람은 기쁨과 즐거움을 만들어내는 감사의 고백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에게는 ‘감사합니다.’ 하는 고백이 떠나지 않습니다.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더욱 더 기뻐하며 즐거워하면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어느 날 사단이 자신의 사업을 그만두기위하여 그동안 사용했던 모든 도구들을 경매에 붙이기로 했습니다. 사단은 멋진 양탄자 위에다가 자기가 인간들을 미혹하게 하고, 망하게 하고, 약하게 하고, 타락시키는데 사용했던 여러 가지 도구들을 진열해놓았습니다. 그런데 모든 도구 중에 은으로 만들어진 쐐기가 유난히 반짝이며 눈길을 끌었습니다.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도대체 저것은 무엇이며 어디에 쓰는 것입니까? 그러자 사단은 자못 자랑스럽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 도구는 내가 가장 아끼는 것이었으며, 또 가장 많이 사용한 것으로 저것의 다른 이름은 ‘절망’이라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이 예수 믿고 훌륭한 성도가 되면 그는 그리스도를 섬기며 봉사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저 쐐기를 그의 마음에 박으면 그는 이내 절망하고 낙심하여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 되고 말지요.” 
  
이 말을 듣고 있던  누군가가 다시 물었습니다. 
“저....  혹시, 그 연장을 사용해도 넘어가지 않는 사람은 없었나요?” 

그러자 사단은 머뭇거리며 대답했습니다.    
“그야 물론 있지요. 극소수이긴 하지만 그들은 내가 이 연장을 써도 절대로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항상 마음속에 감사한 마음을 품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명과 그 삶에 대하여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며 감사하기에 항상 기뻐하고 즐겁게 살아가지요. 그러기에 내가 그들을 아무리 어려운 형편으로 만들고 저 빛나는 쐐기를 박아도 오히려 더욱더 감사하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지요. 그들이야 말로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요!”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로 ‘기쁨의 삶이고 그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삶’ 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온전한 기쁨과 즐거움을 소유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예배에 참여하신 여러분들께 새로운 기쁨과 즐거움을 넘치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나타나는 잘못된 현상 중 하나는 기쁨과 즐거움을 잃어버렸다거나 그 기쁨과 즐거움을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기독교인들은 거룩함을 어두움과 무뚝뚝함 그리고 무거움과 굳음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거룩 하려고 말이 없고, 과묵하고, 얼굴이 굳어 있고, 근엄한듯하고, 무뚝뚝하게 행동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안에서 기쁨을 누리고 있다면, 우리는 얼굴이 환하고, 입에 웃음이 배어 있고, 말의 표현이 따뜻하고, 활기 찬 모습을 가질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이 알아야 할 최고의 거룩은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모습입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 먹고 마시며 기쁨과 즐거움으로 헌시하며 수고하는 것입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기에 더욱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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