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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마 1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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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마태복음 11:2-15)


지난 주일에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왕의 아들의 결혼 잔치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를 가지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천국은 마치 아들의 혼인잔치에 손님을 청한 어떤 임금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결혼잔치에 처음 초청된 사람들은 의도적으로 왕의 초청을 거절하였습니다.   왕의 호의를 무시할 뿐 아니라 왕의 심부름꾼들을 모욕하고 죽이기까지 하면서 왕의 초청을 끝내 거절하였습니다.  

오래 참고 기다렸던 왕은 드디어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였으며, 길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다가 잔치 자리를 채우게 하였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비유는 처음 택함을 받고 부름을 받은 유대인들은 천국 복음을 가지고 온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하고 살인함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자격을 상실 당하고 오히려 그 복음은 유대인을 넘어 이방인들에게 전달되었고 오늘 우리가 그 잔치에 초청을 받은 사람이 되었음을 비유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일에 말씀 드리는 중에 잠깐 언급한 것처럼, 한 가지 여전히 속 시원하게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습니다.  이미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면 악이 물러가고 정의가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세상이 새롭게 달라져야 하는데 어찌하여 세상에는 여전히 죄악이 성행하는가?  어찌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사람들이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고 멸시를 받으며 심지어 죽임을 당하는가?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것이라면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일까 하는 의문입니다.

예수님보다 앞서 세상에 등장하여 천국 복음을 전하며 예수님의 길잡이 역할을 했던 세례 요한은 헤롯의 부정을 책망하였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에 갇힌 세례 요한은 제자들에게서 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에 대하여 답답함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선지자들이 예고하였고 이스라엘 민족이 수백 년에 걸쳐 기다렸던 오실 그이가 나사렛 예수라고 믿었던 요한이었습니다.   그리고 요단강에서 예수께 세례를 베푼 후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요한은 가슴이 벅차 오르고 드디어 예언이 성취되었고 고생한 보람이 있다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이런 확신 속에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였던 요한이었지만 제자들을 통해 그 동안 예수님이 하시는 일의 내용을 듣고 혼란이 생겼습니다.   정말 그가 오실 그분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오실 그분은 죄악된 세상을 정의로운 칼로 심판하고 이스라엘을 영광스럽게 회복시키는 위엄과 능력으로 가득한 왕으로 등장하리라 기대했는데 그와는 달리 나사렛 예수는 너무도 부드럽고 유약하게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갈릴리 동네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이적을 행하였다고 하며, 각종 병자들을 고쳐주고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쳐준다든가 죽었던 소녀를 다시 살게 하였다고 합니다.   세리와 같은 죄인들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고 마시기도 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불 같은 심판을 기대했는데 세상의 약자들과 버림받은 사람들과 친구하며 그들에게 이러한 방식으로 자비와 긍휼을 베푸는 나사렛 예수가 성경에 예고된 그분과 어떻게 어울리는지 도무지 연결이 되지 않아 혼란이 일어났고 과연 그가 오실 그분이 맞기는 한 것인지 의혹이 생겼습니다.  

비록 헤롯의 허물을 책망하다가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있지만 이제 곧 정의로운 심판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며 기다리던 세례 요한은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견디다 못한 요한은 이 의문에 대하여 분명한 해답을 듣고 싶어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당신이 과연 오실 그분이 맞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으면 하나님의 정의가 악을 물리치고 악을 엄하게 심판해야 하는데 어찌 악은 여전히 세력을 떨치고 의롭게 살려는 사람들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   하나님 나라는 아직도 너무 멀리 있던가 아예 오지 않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이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오늘 본문 줄거리이며 2 천년 기독교 역사 속에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며 살다간 신앙의 선배들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의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칭찬하신 것처럼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사람이 없지만 그 위대한 세례 요한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현실 세계에서 드러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미쳐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요한 역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유대교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유대인들이 그러한 것처럼 세상에 단 한 번만 오실 메시야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그토록 위대한 선지자였지만 아직 감추인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몰랐습니다.   세상에 처음 오실 때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선포하러 오셨고 다시 오실 때 드디어 하나님 나라의 왕권으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영원한 그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이라는 이 비밀이 그에게는 가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이를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질문하였던 것이고 예수께서는 여인이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이 없지만 천국에서는 지극히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크다고 하셨습니다.   

요한이 우리보다 지혜가 부족하거나 믿음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예수께서 가지고 오신 하나님 나라 왕권의 비밀에 대한 눈이 아직 열리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다른 유대인과 분명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많은 유대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영접하지 않았지만 요한은 그분을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임을 믿고 그의 길을 예비하였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 극진한 칭찬을 받을 만한 충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에게조차 감추어진 이 천국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들은 비록 세상에서는 요한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미미한 사람일지라도 이 점에서는 요한보다 큰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그 왕의 다스림 속에서 새 생명을 얻어 살게 되었으니 그런 점에서 요한보다 더 큰 복을 누리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영광스런 복을 나의 것으로 삼고 있습니까?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이 듣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이번 8월15일은 광복 63주년 기념일이며 동시에 대한민국 건국 제60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날입니다.   광복절이 되면 과거 일본에게 빼앗겼던 나라의 주권과 자유를 회복함이 얼마나 복인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도 일본이라는 나라에 억압된 백성으로 살고 있다면 어찌 이런 자유를 누릴 수 있겠습니까?  세계인의 축제라고 저렇게도 난리를 치는 올림픽 경기에 떳떳하게 나라의 이름을 가지고 나갈 수 있겠습니까?   자유와 주권이 이렇게 좋은 겁니다.  

그런데 아직도 목에 걸린 가시와 눈엣가시처럼 껄끄러운 문제들이 두 나라간에 남아 있습니다.   잊을 만 하면 우리 국민들의 속을 확 뒤집어놓는 말을 하는 일본 때문에 분통이 터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말도 안 되는 일로 어깃장을 놓는 일본 사람들의 행동을 보다 듣다 못해 분한 마음에 미움이 입으로 툭 터져나올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런 놈들을 왜 그냥 두시는가? 라는 불평입니다.  그래서 일본에 지진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저걸 어쩌나 하는 걱정과 불쌍함보다는 이 참에 일본 땅이 바다에 폭삭 가라앉아버리라고 악담을 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정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이 눈에 보여야 정말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왔나 보구나 그렇게 인정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 뿐 아니라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우리 어른 세대들이 일본에게 억압을 받을 때 고통 속에서 부르짖었던 것처럼 로마의 압제에 항거하여 주권회복을 위하여 얼마나 목을 매며 그 해방의 날, 구원의 날, 심판의 날을 부르짖으며 기다렸겠습니까?  로마라는 제국이 한 순간에 땅 속으로 꺼지고 바다에 던져지기를 얼마나 고대하고 또 기다렸겠습니까?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하나님의 백성을 짓밟고 수탈하던 로마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자부하던 유대 나라가 먼저 그 흔적도 없이 무너졌습니다.  이스라엘은 지도에서 사라져 버렸으며 그렇게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던 백성들은 나라 없는 백성으로 세계 곳곳에 뿔뿔이 흩어져 1900여 년 동안 비참한 설움을 당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도대체 악을 징계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정의는 어디에 있으며 그의 나라는 어떤 모습으로 이 땅에 임하였다는 말인가 이것이 많은 사람들 특히 그리스도인들의 의문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그 질문에 뭐라고 답을 주고 있습니까?   그저 침묵만 하고 있을까요? 세례 요한이 예수께 질문했을 때 주신 주님의 답변이 오늘 우리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너희가 요한에게 가서 나로부터 보고 들은 것을 전해주라.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였습니다. 이사야 35장에서 선지자로 예언한 말씀을 인용하심으로 오시리라 예고된 그분에 대한 약속이 오늘날 나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요한에게 분명히 전해주라는 대답이었습니다.   

세상에 죄가 들어온 결과 세상에는 각종 어두움의 그늘이 드리워졌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에 대항하는 사단은 본래 아름답게 창조되었던 인간 세상을 질병과 사고와 죽음의 권세로 억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이 어두움의 통치권 아래 신음하는 불행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죽음과 전쟁과 질병 앞에 두려워 떨며 살아야 하는 세상 나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시기에 사단이 왕 노릇 하는 이 어두움의 세상으로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 오시는 순간 사단의 세력은 그 힘을 잃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이 자라갈수록 사단의 통치영역은 좁아지기 시작하였고 죄악의 힘은 약화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는 곳마다 귀신이 물러가는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각종 병자들을 치료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이 세상의 진정한 왕이 누구이심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주님 앞에서 사단은 더 이상 왕 노릇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보이신 이적은 다만 이적을 보이기 위함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왕이 이 땅에 임하셨음을 보이시기 위한 증표였습니다.  진정한 왕이 오셔서 그 동안 죄로 가리워진 사람들의 영의 눈이 뜨이고 영의 귀가 열리며 영의 입이 열려 이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들을 수 있고 말하고 볼 수 있으며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게 되었음을 증명하는 이적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시리라 예고된 그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의 권능이며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비로소 시작되었음을 선포하는 사건들이었습니다.   

어두운 방에 작은 빛이 들어오면 그만큼 어두움은 물러갑니다. 더 큰 빛이 들어오면 어두움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의 빛, 세상의 빛이 들어오자 그 동안 세상을 어두움으로 다스리던 사단의 세력은 그 힘을 잃기 시작하였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고 어두움의 세상 권세를 쥔 사단의 권력은 곧 사망입니다.  그러나 빛과 생명의 주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사단의 세력은 기가 꺾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귀신들이 쫓겨나고 죽은 자가 일어나는 사건이 그 증거였습니다. 사단은 더 이상 죽음으로 사람들을 위협하고 자기 수하에 묶어둘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그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3일만에 부활하시는 순간 사단은 그 권세를 잃고 꼬리를 내렸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세상의 진정한 왕은 누구인가를 선포하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왜 아직도 사람들은 죽음의 세력 앞에 무기력합니까?   예수께서 주신 생명의 능력에 대한 확신과 불신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사망이라는 사단의 통치권에 굴복하여 종 노릇 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망을 이기는 빛의 사람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사는 사람은 그를 왕으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더 이상 사단의 통치권 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 나라 왕의 통치 영역 속에서 그의 백성과 신하로 삽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그리스도인은 주께서 가신 그 길을 따르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와 해방입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여전히 고난을 당하여야 합니까?  우리의 세상은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스며 들어와 있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사단의 불의가 투쟁을 하는 세상입니다.  세상은 아직 사단의 통치권에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가 사단의 불의를 물리치고 있다는 승전보가 들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진행 중입니다. 예수께서 처음 오심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구원을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 이것이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임함이 너무 늦어지는 것 같아 조바심을 내는 우리에게 성경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키 워드입니다. 지금은 심판의 때가 아니라 구원의 때입니다. 아직 문을 열고 사람들이 들어오기를 기다리시는 시기입니다. 

우리는 고난이나 기쁨을 내 중심으로 생각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하면 온 세상이 다 어둡고 섭섭하게 여겨집니다. 그래서 오늘이라도 당장 이 악한 세상이 심판을 당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면 나 역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해를 끼쳐 상처를 받은 그 상대방이 하나님께 나의 허물을 고소할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군가 나로 인해 억울함을 당하여 하나님께 호소하며 정의로운 심판이 임하기를 기대하고 있다면 이 세상은 벌써 심판으로 끝장이 나고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고난이 나에게는 지겹고 두렵고 이해가 되지 않아 의혹이 생기고 슬프지만 내가 지금 겪는 이 고난의 시간에 세상 한편 내가 알지 못하는 곳의 어떤 영혼이 구원을 얻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전율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독생자를 보내심으로 내가 그분을 믿어 그의 자녀가 되게 하셨고 지금도 그리고 언제 마칠 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내일이라는 시간에도 여전히 하나님 나라의 자녀와 백성을 불러 모으시는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나라가 시작하였고 지금 자라가고 있습니다.  언제까지요?  주님이 재판장으로 다시 오시는 날까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세상의 불의가 투쟁을 합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본을 보이셨던 그 삶을 본 받아 그가 걸으신 길을 따라갑니다. 거기에는 당연히 고난이 있고 핍박과 재난과 억울함과 비웃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은 더 이상의 투쟁은 없습니다. 악은 소멸하고 오직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권만 있을 뿐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는 죄 가운데서 구원 받는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지만 왕이 오시면 오직 심판이 있을 뿐 더 이상 구원의 기회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날이 언제입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한 채 이 세상의 부조리와 맞서고 또 순간마다 흔들리는 나 자신과 싸우며 인내함으로 그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고민이고 어려움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사단의 나라는 지금도 복음을 믿고 돌아오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인하여 그 통치 영역을 빼앗기고 있으며 그에 반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날마다 자라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힘만 의지하고 내 노력과 공적을 자랑하기에 바쁜 철없는 나를 위하여 2천 년을 기다리셨고 어쩌면 또 다른 천 년과 2천 년을 기다리시며 구원 받을 자를 기다리실지 그날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나를 구원하시려고 기다리시고 심판을 보류하신 것처럼 북한과 중국에 그리고 일본에 있는 영혼들에게도 천국 복음이 선포되고 그들 중에 하나님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모으시기 위하여 얼마나 더 오래 기다리실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날의 임함은 오직 하나님께 달린 일입니다. 오늘 심판이 시작되면 내일 구원받을 자는 더 이상 기회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은 보류됩니다. 심판을 연기하고 기다리심은 정의로운 심판이 없음이 아니라 구원 받을 자를 더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오래 참음과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하나님의 오래 참으신 사랑 때문에 제가 예수를 알고 믿게 되었으며 여러분이 그의 자녀로 사는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항과 거절이 도리어 우리에게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음은 사도 바울이 말한 위대한 역설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 장본인들이 유대인이지만 동시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장 먼저 받고 핍박과 고난 중에 그 복음을 이방 세상에 전한 자들 역시 예수님의 제자들과 유대인들이 아닙니까?  그들이 비록 역사 속에서 고난 받는 민족의 상징적인 표본이 되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구원의 복음을 세상에 알리셨고 오늘 우리가 그 복음 안에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유대인보다 더 나은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나의 눈을 열어 보게 하시고 귀를 열어 듣게 하시며 앉은뱅이처럼 내 삶의 자리만 고집하던 나를 일으켜 세워 영원한 그 나라를 향해 걷게 하시고 문둥이처럼 썩어 문드러졌던 나의 인생을 깨끗하게 고쳐주시고 죽었던 나의 영혼을 살리시고, 많은 것을 가진 것 같았지만 실상 아무 것도 갖지 못한 가난한 나에게 복음을 전하신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그 비밀을 발견하고 그 나라를 사모하며 들어가게 된 것이 기적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문을 열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께서 지금도 문 열어놓고 기다리시며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시며 초청하십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지요?  이 놀라운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이 시간도 찬양합시다. 오신 그리스도는 오시리라 약속하신 그분이시고 다시 오실 그 영원한 나라의 왕이십니다.   죄와 사망을 이기고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선물하신 그분의 은혜를 따라 오늘 나에게 주어진 삶을 그분과 함께 그리고 그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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