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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복절] 형제가 어울려 함께 사는 모습 (시 13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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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가 어울려 함께 사는 모습 (시 133:1~3)


오늘은 광복절 63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광복절이란 우리 민족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벗어난 것을 기념하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경축하는 날로 8월 15일입니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었고, 대한민국은 독립하였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우리 정부는 일제의 강점으로부터 벗어난 날과 독립국으로서 정부가 수립된 날을 기념하기 위해 49년 10월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매년 8월 15일을 광복절이라고 하여 국경일로 지정하였습니다. 

‘광복’이라는 말은 ‘빛을 되찾다’는 뜻으로 ‘빼앗긴 주권을 도로 찾았다’는 말이고, ‘잃었던 국권을 회복하였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금년은 건국60주년을 맞이하는 뜻 깊은 해입니다. 그래서 지금 정부와 여당 일각에서는 광복절이라고 하지 말고, 건국절이라고 개명하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광복회를 비롯한 시민 사회단체에서는 건국절로 하자는 안에 반대하고 있는데, 이름을 바꾸는 것이 쉽고, 단순한 일이 아니고 건국절이라고 부르게 되면 일제에 대한 광복의 의미는 완전히 희석되고 만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찬반양론이 있을 수 있지만, 광복절을 고수하면 반일이요, 건국절로 하면 친일로 몰아버리는 국론의 분열로 이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국론분열로 인하여 어려웠던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세계는 무한 경쟁이란 운동장에서 생존을 위하여 처절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도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나가서 승리해야 합니다. 좁고 좁은 집구석에서 형제간에 싸우고, 질시하고 반목할 여유가 없습니다. 넓은 세계로 나가서, 대한민국을 빛내고, 승전보를 전해주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시133편 1절의 말씀을 개정역에서는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했습니다. 새번역성경으로 읽어봅니다.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이다지도 좋을까, 이렇게 즐거울까! 형제들 모두 모여 한데 사는 일! ”라고 하셨습니다. NIV 성경에서는 이 말씀을 시작하면서 “ How good and pleasant”라고 했습니다. 

“아, 좋다. 아, 즐겁다. 형제들이 하나 되어 함께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 성경에는 “보라”라는 말이 없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했는데, 개역개정역에서는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원문을 잘 살린 번역인데, “보라”라는 말은 히브리어 “히네”라는 말로 감탄사입니다. 이 감탄사를 “보라”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우리 성경이나, 새번역, 공동번역 모두 다 잘 번역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에서 “이다지도 좋을까, 이렇게 즐거울까!” 새번역에서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가 연합하고, 형제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이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일이요, 즐거운 일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 믿음의 형제들은 각 사람이 개성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각기 고유함과 독특성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형제요 자매이기에 서로 어울려 함께 살아가면, 그것이 세상에 없는 아름다움이요, 즐거움이요, 좋은 일입니다. 

시133편은 “다윗의 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표제가 있습니다. 우리 시에는 제목으로 떼어놓고 있지만, 원문 성경에는 1절에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다윗의 시”라고 시작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갈 때에, 모든 성도들은 형제의식을 가지고 성전에 올라가야 합니다. 한 분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아버지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형제요, 자매들이 되었기에 형제는 사랑해야 하고, 우애해야 합니다. 여러분, 형제요, 자매들입니다. 형제자매라는 말이 얼마나 좋은 말이요, 우리들이 누구냐 하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성전공동체를 위한 시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입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우선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신앙생활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코람데오-Coram-Deo”라는 말을 합니다. 라틴어로 Coram 이라는 말은 ‘-의 앞에서’라는 뜻이고, Deo라는 말은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coram Domino”라는 말도 있는데, “주님 앞에서”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눈동자 아래에서 신실하고 온전하게 행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행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행동은 하나님이 보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나의 아버지로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바른 관계를 가지려고 합니다. 우리 많은 성도들이 코람데오의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주님 앞에서는 온전하게 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이란 하나님 앞에서, 주님 앞에 내가 서 있다는 인식이 자라나면서 나 말고 다른 사람도 서 있다, 우리들이 서 있다, 우리 공동체가 서 있다는 생각도 가져야 합니다. 나라는 개인, 혼자에서 출발하지만, 결코 나 혼자로만 머물지 아니하고, 우리, 공동체성을 가질 때에 온전한 신앙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으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나와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종적인 관계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말하지만, 십자가에는 횡적인 관계를 바르게 가져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 이웃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마22장에 보면 예수가 사두개인들도 대답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소문을 듣고, 바리새인들이 몰려왔습니다.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물었습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이때에 예수님은 하나만을 대답하지 않으시고, 두 가지를 말씀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22:37-38)라고 했습니다. 

물론 하나님 사랑하는 계명이 첫째 되는 계명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말씀하십니다.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9-40)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두 계명을 받고 있습니다. 온 율법과 선지자들이 말씀하신 대강령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의 이웃은 형제자매들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사랑하는 계명은 정말 잘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잘 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형제사랑입니다. 문제는 이웃 사랑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참으로 사랑하고 자기를 높이고 돌아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웃은 잘 살든지 못 살든지, 병들어 죽어가든지, 아파서 신음하든지 상관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철학적으로 설명하면 나 혼자는 항상 점에 불과합니다. 넓은 도화지에 점 하나만 찍고 있습니다. 그러나 점과 점이 이어지면서 선을 이루고, 그 선이 원을 그리고 점과 점이 모아지면서 아름다운 그림을 형성한다는 말입니다. 나 혼자는 항상 잘하는데, 이웃과 화목할 줄 모르고, 홀로 고독을 즐긴다고 하면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나만을 생각하지 말고, 우리 가정만 생각하지 말고, 우리는 우리의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고, 돌아볼 수 있어야겠습니다. 지난주에 독거노인들에게 바나나를 사다드렸습니다. 얼마나 탐스럽고, 맛이 있는지, 참 좋아들 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두 가지의 이미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아름다운 그림 두 장을 그려보아야 합니다. 첫 번째로는 모세가 자기의 형 아론을 성별하여 대제사장으로 세우는 그림입니다. 모세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거룩한 옷, 에봇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관유를 제조하였는데, 감람유-올리브유에, 액체 몰약을 섞고, 육계, 창포, 계피를 섞어 성전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관유를 제조하였습니다. 모세가 대제사장 아론을 세울 때에 제사장의 옷을 입히고, 아론의 머리에 관유를 부었습니다. 머리 위에 부은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을 타고 흘러서 그 옷깃까지 흘러내렸습니다. 성전 마당에 모인 많은 백성들 앞에서 아론은 지금 대제사장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관유는 보배로운 기름입니다. 그 보배로운 기름이 머리 위에 부어지고, 얼굴을 타고, 수염을 타고 흘러내려 옷깃에도 흘러내렸습니다. 수염이란 남자의 아름다움과 명예와 권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지금 다윗은 형제와 자매가 함께 어울려서 형제애를 나누며, 살아가는 모습이 마치 아론의 머리 위에 부어진 기름이 수염을 타고 흘러내리고 그 옷깃에도 흘러내리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우선 흘러내리는 것이 좋아 보이고, 그 향기가 사방에 퍼져가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종이 지금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결심하고 대제사장의 직임을 감당하겠다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관유가 머리만 적시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타고 흘러 수염을 적시고, 수염에서 옷깃으로 기름이 흘러내려갑니다. 

흘러내려가는 것을 중요하게 보셔야만 본문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앙과 사랑이라는 나 혼자로 그치지 않고 흘러내려가야 합니다. 나만을 적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적시도록 흘러내려가야 합니다. 기름은 분명히 머리 위에 부어졌는데, 수염도 적시고, 옷깃도 적시면서 흘려 내려갑니다. 

형제 사랑은 기름이 흘러내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가정의 형제들은 보배로운 기름으로 살찌우고, 기름으로 윤기가 나고, 기름이 흐르고 흘러넘치므로 풍요하고 아름다운 가정, 사랑과 웃음이 넘치는 아름다운 교회, 사람 살만한 아름다운 사회를 이루어야 합니다. 기름이 나만을 위하여 고여 있는 것이 아니라, 흐르고 흘러내려가야 합니다. 

다윗은 형제 우애와 사랑을 또 하나의 그림으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 그림은 헐몬의 이슬이 시온 산에 내림 같다고 하셨습니다. 헐몬이란 이스라엘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만년설이 쌓여 있는 헤르몬산입니다. 

같은 성경인데 여러 번 ‘헤르몬’이라고 하였는데, 이 시편133편에서는 ‘헐몬’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헤르몬이라고 발음해야 됩니다. 신명기3:9에는 헤르몬을 시돈사람들은 ‘시룐’이라 부르고, 아모리사람은 ‘스닐’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헤르몬산을 시온산이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신4:48에 보면 “그 얻은 땅은 아르논 골짜기 가장자리의 아로엘에서부터 시온 산 곧 헤르몬 산까지요”라고 했습니다. 한 때는 헤르몬 산을 시온산이라고 불렀습니다. 

신4:48에 나오는 시온산이란 “높은 산”이라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의 시온산과 다른 시온산입니다. 헤르몬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산이었습니다. 헤르몬 산은 해발 2,815m로 산에 올라가면 팔레스타인 전토가 내려다보입니다. 이 산은 매우 높다보니, 지중해에서 올라오는 습한 구름이 이 산에 부딪치면서 비를 뿌리게 하거나 눈이 내리게 하여 헤르몬산은 만년설로 덮이고, 여름에는 눈이 녹아 강물을 이루는데, 물이 흘러내려 강산을 적시면서 갈릴리 바다를 이루고, 다시 요단강을 흘러가면서 사해를 이루게 됩니다. 헤르몬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팔레스타인인 온 땅을 적시면서 강토를 푸르게 하고,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시온산은 “치욘”이라고 발음해야 하는 이름입니다. 치욘이란 말은 양지바르다는 말이요, 아람어에서는 산등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루살렘 남동쪽에 있는 등성이를 가리키는 말인데, 후에는 예루살렘 전역을 시온산이라고 하였습니다. 

헐몬 산에는 항상 이슬이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비가 오지 않아도 아침에는 대기의 냉각현상으로 인하여 이슬이 가득 내렸습니다. 낮에는 덮고, 저녁에 춥게 되면 모든 식물에 이슬이 내립니다. 나뭇가지와 잎들은 이슬을 머금고 그 날의 수분을 공급받게 됩니다. 오늘의 이슬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지역에 장마비가 내려서 강산을 적시는 것이 아니라, 새벽이슬로 인하여 모든 식물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장대비와 소나기를 맞아 옷을 적시는 것이 아니라, 이슬비에 옷을 적시는 것을 봅니다. 보슬비가 내리거나 이슬비가 내리면 밖에 나가서 활동하면서 옷을 적시는데, 옷이 젖는 줄도 모르고, 그 옷을 적시는 것을 봅니다. 

시110:3에는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새벽이슬이 얼마나 소중하였으면, 청년들을 말하면서 새벽이슬이라고 비유한 것입니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형제들이 우애하고 사랑을 나누고, 서로 연합하고 어울려서 살아가는데, 그 모습이 강산을 적시며, 생명을 누리게 하는 이슬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첫 그림은 기름이 흘러내리더니, 두 번째 그림은 이슬이 내리고 있습니다. 

형제가 연합하고 동거하는 것을 보시는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시기로 약속하셨는데, 곧 영생의 복을 주셨습니다. 3절 하반절에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거기서”는 우리의 시온, 우리의 가정, 우리의 교회에서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데, 영생의 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구원의 은총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영생이란 영원한 생명입니다. 천국에 가서 누릴 생명입니다. 하나님이 가지신 생명이 영생인데, 아들 예수님으로 인하여 우리에게도 주어졌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누릴 영생은 얼마나 풍요하고 안전하고 영원합니까? 하나님과 함께 장막에 거하면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십니다. 그곳에서는 항상 찬송이요, 감사요, 감격스럽게 살아갑니다. 우리의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좋고, 풍성한 생명입니다. 너무나 좋다고 하니, 좋아서 걱정이고, 너무 좋을까 보아 걱정입니다. 별것을 가지고 걱정입니다. 우리는 그냥 감사만 해야 합니다. 

그런데 형제 사랑, 형제 우애, 우리 공동체의 사랑을 영생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가 가진 2008년도 교회 표어가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교회”입니다. 생명을 소유한 교회가 아니라, 누리는 교회요, 그것은 생명을 즐기라는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 가서 지낼 생명도 좋지만, 지금 우리는 천국의 생명을 소유하였고, 지금도 우리 모든 성도들이 함께 누리고 살아야 합니다. 

저는 때로 “어디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성목사님도 이북입니까?” 평양노회의 교회에서 시무하니, 이북사람이냐, 이북출신 성도들이 많다는 소문 때문에 혹시 목사님도 이북출신이려니 하여 물어보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 “어디냐”고 물으면 그 사람이 무안할 정도로 쳐다보면서 “한국 사람입니다”라고 합니다. 이 좁은 땅 한반도에서 무슨 지역을 나누고 가르자는 것입니까? 미국 같으면 남부냐, 동부냐, 서부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땅이 넓다보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면 안 됩니다. 

저는 비온 후에 공중에 아름답게 수놓는 무지개를 보면 정말 아름답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무지개의 색을 분해해보면 7가지 색깔을 가지고 있습니다.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 보라색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각각 개성을 가지고 있고, 색깔도 다릅니다. 

저는 강력한 빨강이나, 초록보다는 보라색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색깔이 모여 햇빛이 되고, 세상을 환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다양성과 일체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양한 성격, 다양한 삶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형제자매는 어울려 살고, 함께 거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번 전교인수련회 때에 은혜와 감동을 받은 것도 있고, 고치고 개선해야 할 것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주강사이신 김 목사님이 “여러분, 교회 안에 차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김목사님이 놀랄 정도로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되었지, 당신의 원하는 대답이 아니니까 다시 물었습니다. “교회 안에 차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그 때,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대부분의 대답은 분명히 “없습니다” 였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힘을 주어 “교회 안에 차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한 두 분이 목사님의 원하는 대답이 “있다”고 해야 될 것 같다고 판단하시고, 한 두 분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는데, 그제야 “교회 안에 차별이 있지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아니 초지일관해야지요. 그래야 우리 교회가 성숙한 교회요, 주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예, 아직도 차별이 있을 것입니다. 왜 없겠습니까?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에 누가 그런 말을 물으면, 우리 교회는 차별이 없고, 형제 사랑만 넘치는 교회라는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형제의 연합, 가정의 화목은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형제들은 먼저 화목하고, 하나 되고, 서로 협력하는 공동체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가정은 세상에 없는 화목한 가정을 만들고 싶어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 공동체도, 우리 민족 공동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상적인 공동체로 만들어가야 하겠습니다. 

연합과 일치 속에는 평화와 안정과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 가정공동체는 영원한 생명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 공동체도 영원한 생명, 풍성한 생명을 소유하고 누리고 즐겨야 합니다.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 우리 교회와 성도들의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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