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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몸으로 사랑하는 사람 (신 6:5, 마 22:34~40, 눅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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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사랑하는 사람 (신 6:5, 마 22:34~40, 눅 10:37)


사람은 하늘로부터 삶을 부여 받았다. 그 삶은 살아있는 삶이어야 한다. 참으로 그 삶은 훌륭한 것이다. 그 삶이 오늘을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몸으로 사람을 사랑한다는 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과거를 사는 사람 중에 한 번의 삶으로 영원을 살아 삶에 감동을 주는 사람들을 본다. 이들을 일컬어 삶을 가꾸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자기는 소설을 읽지 않는다고 한다. 소설보다 더 흥미 있는 것은 사람 사는 이야기이기 때문 이란다’ 사람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이 사는 사랑이야기란다. 사람의 몸의 주성분이 물이다. 또한 그 사람의 존재의 주성분은 사랑인 것이다. 사람의 존재 여부는 그 사람의 마음에 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마음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몸(肉)은 그 형상이 육체로 남아 있기에 보고 알 수 있지만 마음은 그 형상이 없기 때문에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코로 냄새를 마실 수 도 없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분명히 존재함을 안다. 마음은 몸으로 드러난다. 사람의 특징은 사랑이다. 우리는 사랑의 마음을 갖고 있다. 옛 사람들은 ‘사람’을 ‘사’이라고 했다. 사람이 되는 특징은 사람이 사랑을 가져야 된다는 의미로 ‘사람’을 일컬어 “(목숨을) 살리다”는 말로 ‘사랑’이라는 말인 살아있는 것으로 말한다. 사람의 생기의 힘은 사랑이다. 사람의 목적은 사는데 있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목숨을 연명하는 생존 만에 의지하지 않고 사랑하고 싶어 하는 사랑의 욕구도 알게 한 것이다. 그럼으로 자기의 사랑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사람은 행복할 수가 없다. 그럼으로 사람은 사랑을 주고 싶고 또한 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사랑을 해보면 그 사랑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음을 알게 된다. 이것은 사람의 이성과 의지가 한계에 있기 때문인 것이다. 사랑하는 마음이 쓰이는 때에는 몸이 항상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사노라면 몸과 마음의 분리에서 삶에 갈등이 생기게 된다. 

우리가 선을 원하면서도 선을 행하지 못하고 악을 원치 않으면서도 악을 행하게 된다. 곧 이것은 사람의 선과 악의 갈등이요 양심의 갈등인 것이다. 사람은 항상 자신과의 싸움에서 자신을 억압하지 못한 일로 상심하고 불안 해 함을 안다. 이것은 인간의 삶이 근원적으로 생물학적인 의미의 생존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며 거기에 인간생활이 사랑으로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 사람은 생물로서 목숨을 부지하기위하여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어야 하며 또한 인간으로서 삶의 가치를 갖고 향유하는 것도 있어야 함을 아는 것이다. 사람이 세상살이를 살아가는데 저마다 사람 사는 이야기가 있다. 

그 사람 사는 이야기는 실타래처럼 얽인 세상살이의 끈을 한 가닥 한 가닥 풀어내면서 사람의 참된 의미를 되살리게 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사람과 생명이 만나고 사람이 생활을 만나서 정과 따스함이 샘솟는 이야기들을 만들어 가면서 사람과 가장 접목해 있는 음식, 문화, 생활, 이웃, 가족 등에 초점을 맞추어 항상 사람들 옆에서 친구처럼 함께하는 소박한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KBS 2TV 다큐미니시리즈 ‘인간극장’에 ‘사랑이 꽃피는 민들레 국수집’이 방영 된 바 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는 사람에게는 꽃이 지닌 아름다운 향기, 자태와 더불어 아름다운 영혼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하고 싶다. 

몸은 영혼을 담은 그릇으로 표현한다. 사람이 사랑하는 작은 마음은 우주만큼의 큰 사랑이 있기 때문임을 알게 한다. ‘인간극장’은 사람이 삶의 현장에서 일구어내는 사랑의 이야기로 생동감이 넘쳐흐르는 이야기를 여기 소개한다. 인천의 화수동 골목 한 구석에 자리 잡은 ‘민들레 국수집’이 있다. 3평 남짓한 좁은 공간이지만 불황 중에도 날로 손님이 늘어가는 이 국수집에는 ‘몸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거기 주인이며 가톨릭 수사(修士)인 서영남(53세)씨로 그는 25년간의 수도사 생활을 접고 환속(還俗)하여 평신도가 되어 사회의 밑바닥에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을 돕고 싶은 마음에서 살아간다. 

여자는 어머니 밖에 모르던 그가 5년 전 결혼하였다. 아내는 재소자들을 후원하다가 친분을 쌓았던 강 베로니카이고 그의 딸과 함께 국수집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고 있다. 아침10시부터 저녁5시까지 누구든지 와서 식사를 할 수 있는 무료 급식소 민들레 국수집은 절망에 처한 사람들에게 해결책을 마련하고 스스로 일어날 힘을 주기위해 밥을 무료로 준다는 영남 씨는 가난한 사람들끼리 서로 돕고 살면 부자는 되지 못해도 살아가는 삶에는 희망이 있는 세상이 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삶을 실천한 사랑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그의 일상의 생활은 감사가 넘치는 그의 삶의 모습에서 ‘몸’이 갖는 뜻이 그리하듯이 얼굴로부터 발끝까지 이르는 육체를 몸으로 지칭하건데 ‘몸으로 사랑하는 사람’임을 알게 한다. 항상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사람을 대할 때 최선을 다하는 그의 모습은 수사(修士)보다 사랑의 사람에 그 모습을 보게 한다. 민들레 식구들은 대체로 파란만장한 노숙 경력을 접고 민들레 국수집의 서빙담당이 된 사람으로부터 알 콜 중독자들, 주식전문가로 일하다가 경제적인 파탄으로 이곳에 기거하는 사람으로 채워지고 매일 국수집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음에 잔잔한 감동의 이야기들이 있음을 보는 것이다. 

민들레 국수집의 조미료는 사람의 사랑이다. 주인 서영남씨는 자기 집에서는 고기반찬은커녕 식사 한 끼에 세 가지 반찬도 많다고 하는 그가 국수집에 오는 손님에게는 친절한 마중과 찾는 이들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 진짜 사골 국물에 유기농 시금치까지 온갖 좋은 재료를 아끼지 않는 그의 사랑의 몸이 사랑의 조미료가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친히 몸으로 하는 조미료는 사랑임을 알게 한다. 이것은 몸으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우리 주변에는 많은 성직자가 거드름을 부리고 행세(行世)하는 권위들을 본다. 그러나 이들과 대조적으로 여기 또한 성직을 환속(還俗)하고 속세(俗世)인 민중들의 삶의 현장에 내려와 친히 ‘사람의 사람’으로서 ‘사랑의 사람’되어 삶을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예수의 삶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허병섭 목사를 본다. 그는 경남 김해에서 출생하고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가 되어 1988년에 기장 서울노회에 소속한 목사직을 반납하고 환속(還俗)하여 ‘노가다 미장이’가 된다. 그의 삶을 엿보면 70년대 서울 신설동 창녀촌을 무대로 소외계층의 삶을 그려 낸 영화 ‘어둠의 자식들’과 ‘꼬방 동네 사람들’ 여기에 빈민 목사로 등장하는 공병수 목사의 역은 바로 그 실제 인물이 허병섭목사 이다. 세인들은 그를 가리켜 ‘도시빈민의 대부, 살아있는 예수, 길 잃은 목자, 목사직 버린 달동네 성자’로 평하며 청계천 꼬방 동네에서 중량천 뚝방으로 서울의 어두운 그늘을 찾아 가난한자의 벗이고 형제이고 아버지였던 허병섭!이 있다. 

그는 그들과 똑같이 입고 자고 먹으면서 목사이기 전에 한 사람의 빈민으로 살며 그들과 애환(哀歡)을 함께 한다. 가난과 절망과 자기 멸시에 빠져있던 자들에게 그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도록 이끌었다. 병든 자들에게 무료진료를 알선하고 집 없는 이들에게 공동주택조합을 만들어 내 집 마련의 방법을 가르치고 당국의 무자비한 철거정책에는 몸으로 맞서 싸웠다. 이가 곧 ‘몸으로 사랑하는 사람’임을 보여준다. 유신정권에서는 유신체제를 반대하기에 온갖 고초를 몸으로 겪으며 50일 이상 영어(囹圄)의 몸으로 취조와 고문을 받았다. 월곡동 달동네에 세운 민중교회 ‘동월교회’를 세워 몸과 영혼의 안식처를 마련하고 또한 달동네의 가난한 맞벌이 부부들에게 탁아소도 만들어 주민들 스스로가 마을 자치공동체에 참여하여 자립할 수 있도록 자치민의 의사를 반영하기도 하였다. 

96년 허병섭은 흙에서 깨닫는 밀알의 삶으로 살기 위해 무주로 내려가 흙에 씨를 뿌리고 흙이 되돌려 주는 되로 거두는 땅을 사랑하는 사람 농부인 허병섭이 되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생명의 씨앗으로 일구어 만인에게 살아있는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예수가 전한 복음은 살아있는 삶을 보여 주는 것으로 그는 이 실천을 몸소 행하는 것이다. 복음의 씨앗이 이 땅에 떨어진지 1세기를 지나 중반이 되었다. 한국 교회는 선교의 기적이라고 평가 받을 만큼 급성장을 했다. 그러나 교회의 급성장에 따르는 부정적인 현상들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오늘날 목사의 권위와 신뢰는 땅에 떨어졌고 교회는 이미 정신적 사회적 영향력을 상실했으며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의 자녀보다 더 세속적인 타락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예수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가르침, 선포, 치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셨지만 교회와 신학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그것을 가리키는 그의 손가락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에 대한 무익한 신학적인 논쟁만을 했다. 이것은 생명의 복음이해에 대한 이상(異常) 있음을 알게 한다. 오늘날 교회를 바라보는 눈들이 곱지 않다. 교회가 자신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물질적 성장주의와 기복신앙, 집단적 이기주의, 물량적 성공주의, 사회적 책임성의 결여, 목회자의 자질문제 등으로 사회적 신뢰를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우리나라 국가 주요 지도층 100명의 종교현황을 조사한 결과 가톨릭교 20명, 개신교 42명, 불교 9명, 무종교 26명, 기타 3명이라는 통계를 보았다. 바닷물은 염분이 5%만 들어 있어도 썩지 않는다고 한다. 가톨릭과 기독교의 사회인사가 절대적인 수를 차지하는 것을 보며 이들의 신앙을 살피는 여기에 대한 책임은 어디에 있는지 생각의 기회를 가지게 된다. 예수의 삶을 살리는 빛과 소금의 삶은 무엇일가? 그것은 자신의 몸을 낮추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상대에게 유익을 주어야 한다. 이것은 이웃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다. 또한 선한 청지기와 같이 몸으로 자기에게 맡겨진 직무와 주어진 대가 이상을 감당하는 것이다. 

빛과 소금은 자기 자신의 몸을 사르는데 있음을 알게 한다. 소금은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 빛은 어두움을 밝혀 주는 힘이다. 건강한 사람의 혈액에는 항상 0.9%정도의 염분이 있어 몸의 생리작용을 원활하게 해준다. 빛은 어두운 길을 가는 사람에게 길의 방향을 잡아주고 응달진 쪽에 빛을 비쳐준다. 여기에 소개한 두 사람의 삶의 이야기의 주인공들의 실례를 들었다. 즉 가톨릭의 수사(修士)와 기독교의 목사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위해 스스로 자기의 직분을 내려놓고 환속(還俗)하여 몸으로 사랑의 화신(化身=추상적인 특질이 구체적인 것으로 바뀌는 일)이 되는 것을 보았다. 

이와 관련하여 루터가 ‘독일 그리스도인 귀족에게 보내는 글’에서 베드로전서2장9절에 근거하여 주장한 ‘만인제사장직’에 대하여 알게 한다. 루터는 이 논문에서 세례를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제사장이며 안수 받은 목사와 평신도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동의한 슈페너는 루터가 말한 만인제사장직을 ‘영적 제사장직’으로 부르고 그들은 거듭난 사람으로서 세속화한 교회를 개혁할 수 있는 소금과 누룩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실제로 성직자의 특권은 이미 성령의 강림으로 폐지되었다고 한다. 구약시대에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졌던 성령의 은사가 오순절 사건을 통하여 (행2;1-13)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짐으로서 예언자와 제사장의 특권은 폐지되었다는 것이다. 

목회자와 평신도는 지배와 복종의 관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받아들이는 주체와 대상이 아니라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목회자와 평신도는 다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선교의 주체임을 차제에 밝히는 것이다. 오늘날 이 시대는 다원화되고 다양한 사회와 다문화 시대이다. 이러한 사회에 목사가 팔방미인이 되어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담당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비효율적임을 아는 것이다. 목회자와 평신도들이 다 같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하나님의 선교를 이룰 때 교회의 세속화는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이미 때가 찼다. ‘네 이웃의 삶’을 이룸은 곧 주님의 삶이 나의 삶이 되는 것이다(마태22;39). ‘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도들의 고백과 같이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 사람임을 간증(干證) 한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 6;8)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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