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형통보다는 성숙 (창 35:1~5)

  • 잡초 잡초
  • 333
  • 0

첨부 1


형통보다는 성숙 (창 35:1~5)


오랜 옛날 어느 나라에 왕이 사냥을 다녀온 후 
신하들에게 울퉁불퉁한 땅바닥에 자기 발에 상처가 났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길에 쇠가죽을 깔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한 신하가 왕에게 말했습니다. 
`폐하, 그것은 아주 무모한 발상입니다. 
 왕의 발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쇠가죽 두 조각만 있으면 될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왕은 신하의 말대로 쇠가죽으로 신발을 만들어 신었습니다. 
그러자 더 이상 울통불퉁한 땅바닥을 불평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환경이 변해야 내가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먼저 변해야 환경이 변화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말씀을 통해 은혜가 되기를 바랍니다.

위와같이 우리의 관심은 형통에 있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신앙의 성숙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성숙 즉 우리의 신앙인격, 그릇만 바로 되어지면 
         하나님이 더 잘 알아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실례는 오늘 본문말씀의 주인공 
       야곱의 생애를 통해서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다가 만나는 삶의 문제들이 
       야곱의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붙들려지는 
              나의 신앙의 성숙을 향한 전환점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야곱의 가정에 큰 문제가 다가왔습니다. 
야곱에게 문제가 왔습니다. 굉장히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1. 지금 야곱의 가정이 당한 어려움이 무엇이며 
       우리에게 주는 신앙적  교훈은 무엇일까요?(참조/창34장)

왜 이런 절박한 상황을 맞게 되었습니까?
표면적인 이유는 
야곱은 세겜 땅에서 엄청난 사건에 휘말리게 됩니다. 
창34장이 그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는데요, 
야곱의 하나밖에 없는 딸 디나가 성안에 여자들을 구경하러 나갔다가
       세겜성의 추장에게 성폭행을 당한 것입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야곱의 아들들의 무자비한 복수극이 시작되는데
디나를 연애하는 세겜 추장에게 결혼을 미끼로 
        성안 남자들 모두에게 할례를 요구합니다. 
할례를 행한지 3일 째 되는 날, 세겜의 남자들이 고통 할 때에 
그들은 세겜 성을 공격하여 모든 남자들을 죽이고 
      그리고 모든 가축과 재물을 약탈합니다. 
세겜 추장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응징이지만 
     한 사람의 범죄에 대한 복수치고는 너무나 잔인한 행동들입니다. 
그리고 성폭행에 대한 복수심으로 출발된 그들의 행동이 
       급기야는 도둑질로 변질됩니다. 
       뿐만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할례의식을 속임수로 사용하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일로 인해서 야곱은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자신과 너무나 닮은 `속임수에 능한 아들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낙담합니다. 
그리고 `사방에 있는 이방 민족들이 복수해 오지 않을까?`해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이고
야곱이 세겜에서 절박한 상황을 맞게 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개입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지금 야곱이 머물러 있는 세겜을 떠나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세겜은 야곱이 머물러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이미 창31:에서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정신없이 머슴살이 하고 있을 때

창31:13을 보십시오.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분명한 하나님이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벧엘로 가려고 하다가 세겜 땅에 정착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창33:18-19을 보세요.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러 
 성 앞에 그 장막을 치고  
 그 장막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일백 개로 사고` 
야곱은 아예 세겜 성에 땅을 사고 장막을 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안주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왜 일까요?

일반적으로 평가한다면 세겜은 살기에 참 좋은 곳이었습니다. 
벧엘은 해발 800m가 넘는 높은 곳이지만, 
       세겜은 낮고 풍성한 목초지가 펼쳐져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경제적으로도 번창한 곳이었습니다. 

때문에 창34:1에 보면 
야곱의 딸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나갔다`고 했는데 
그녀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킬만한, 말하자면 휘황찬란한 곳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환경 요소 때문에
        야곱도 세겜에 정착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세겜은 유혹의 장소였습니다. 
롯이 에덴동산 같고, 애굽과도 같았던 소돔과 고모라를 택함으로 
          엄청난 낭패를 맛보아야 했듯이
세겜 또한 야곱에게는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세겜은 결코 야곱이 머물러서는 안 되는 곳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세겜에 제법 오랫동안 머물고 맙니다. 

찬485장 4절에
[ 큰 풍파 일어나는 것 세상 줄 끊음일세!
  주께서 오라 하시면 내 본향 찾아가리 ] 이해되시죠?

 문제는 문제가 아니라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가 문제입니다.
문제가 문제의 해결점이 있다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 환난을 당한 야곱이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나갑니까?


2. 가정에 환난을 당한 야곱은 해결책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1절)

과연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일찍이
창28:15절에 루스 광야에서 잠자다가 꿈 속에서 하나님 만났을 때
“네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할렐루야

비록 야곱의 간사한 기질 때문에 당한 낭패였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을 선택한 사랑 때문에
        야곱이 낭패을 당하자 하나님이 찾아오신 겁니다.

1절에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  

이렇게 문제의 해결의 가장 빠른 길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벧엘로 올라가라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실 일이 있고 하실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벧엘은 창28:10-22절에 형 에서를 피할 때에 하나님을 만난 곳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시고 은혜를 주신 곳이 바로 벧엘입니다. 
엄청난 문제 가운데 있는 야곱에게 빨리 벧엘로 올라가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벧엘 되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하나님 자신을 알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시고 부르심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이 계획을 발견한 자만이 결국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벧엘로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벧엘로 올라갈 때에 하나님께서 평안을 허락하시고 보호하십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꼭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면 
야곱은 창30:30절에 보면 야곱이 외삼촌 라반에게 하는 말이
“나는 언제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야곱은 밤낯 더위 추위 가리지 않고 내 집을 세우기 위해 달려온 삶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야곱을 통해
       벧엘에서 하나님의 집을 세워 그곳에서 단을 쌓고 하나님을 섬기며
       너로 말미암아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하여금 벧엘로 올라가라는 명령속에는 

1) 처음 신앙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야곱이 형을 두려워하여 도망갈 때 벧엘 광야에서 잠도 못 잤겠지만 
꿈속에서 하나님 만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리라는 위로와 약속의 말씀을 듣고 
         새 힘이 나고 평강을 얻게 되었습니다. 
처음 예수를 믿고, 처음에 구원의 진리를 발견하고 구원의 감격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뻐했던 그 순수한 믿음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처음 믿음, 처음 사랑, 처음 열심을 되찾아야 합니다.
세겜이 아무리 살기 좋은 곳이라 해도
       하나님의 은혜와 도우심이 없으면 참 평안이 없습니다. 

우리도 처음 신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처음의 순수한 믿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처음 믿을 때 그 신앙으로, 처음 세례 받을 때의 그 마음 자세로, 
      처음 직분을 받을 때의 자세로 돌아가야 합니다. 

세기적인 대부흥사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청소년 시절에 어느 집회에 참석을 했습니다. 

강사가 설교를 한 다음에 
`오늘 예수를 믿기로 결심한 사람은 앞으로 나오십시오`라고 청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손들고 일어나서 앞으로 나갔습니다. 
이때의 일을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맨 앞자리에 서 있던 그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바보스럽고 우매한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 내면에서 그 무엇인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삶의 방향을 전환시켰으며 삶의 차원을 변화시켰고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평안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부흥사 생활을 하면서 
‘이 감격이 세계적인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 받은 이유이며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이런 감격을 체험하도록 하기 위해서 힘썼다“
 고 고백했습니다.


2) 벧엘의 서원을 잊지말라는 것입니다. 

  벧엘의 서원이 무엇입니까?
  그곳에 하나님의 전을 짓고 하나님을 잘 섬기며 
         반드시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왜? 하나님의 전을 세우고 하나님 잘 섬기라고 합니까?
    바로 하나님 백성이 복을 누리는 비결인 것입니다.
야곱은 내 집을 세우기 위하여 정신없이 달려 왔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약속의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 실패의 자리에 있는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집을 세우기 위하여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는 것입니다.

미국 LIFE지에서 천년동안 백명의 가장 위대한 인물을 발표했습니다.
여기 우리나라 사람이 들어있겠습니까?
     여기에 아시아 인은 한명도 들지를 못했어요.

1등이 누구냐? 하면 에디슨이예요. 
에디슨이 전기를 발명한 것이 인류에 가장 큰 공헌을 했다는 것입니다.
2등은 콜롬버스입니다.
신대륙을 발견한 것이 세계를 발굴한 것이나 같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마틴루터예요.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므로 그 후에 문예부흥도 일어나고 
       산업혁명이 일어나서 온 세계가 눈을 뜨게 되었다는 것입다.
네 번째는 지동설을 주장한 갈리레이입니다.
       갈릴레이는 그 때까지 사람들의 우주관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근대미술의 아버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입니다.
     다빈치는 사실 우리가 화가라고만 생각하는데 
      이 사람도 위대한 과학자요, 또 건축가요, 조각가요, 화가입니다. 
  얼마나 훌륭한 인물인지 모릅니다. 

여기 공통적인것이 뭐예요? 
1) 바로 세계에 영향력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2) 이 다섯 명이 다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한 사람들입니다. 

내 집을 세우려고 한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집을 세우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그로 말미암아 세계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것 보면 우리는 참 스케일이 작아요.

외국 영화를 보면 우주 하고 싸우고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데
한국 영화는 용의 눈물같이 맨날 우리끼리 싸우고 울고 하는 것 있지요. 
하나님의 집을 세우려는 하나님을 섬기는 위대한 인물이 많이 나와야 
         이 민족이 앞서갈 줄 믿습니다. 

3) 벧엘에서 단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단을 쌓는 것은 예배생활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벧엘로 올라가는 생활을 과거의 부끄러운 죄를 청산하고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서 
올바른 자세로 하나님께 제단 쌓는 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저도 여행을 다니다 보니
     가장 불편한 것이 무엇인가 하며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벧엘의 하나님을 만나러 올라가는데 
       먼저 정돈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3. 야곱은 하나님 만나러 벧엘로 올라가기 위하여 먼저 취한 결단이 무엇이며              
이런 조치는 우리의 신앙성숙에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2절)

야곱은 벧엘로 나아갈 때에 자신과 주변을 잘 정리했습니다.
2절에 “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어라” 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자신이 얼마나 정결치 못하고 부정하면,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하지 못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외에 의지하던 우상들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다 버리고 바꾸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할 때는 그런 것이 자신에게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이 역사하지 못할 많은 부분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참된 축복을 받으려면 3 가지를 해야 합니다. 

1) 이방신을 버려라.

즉 우상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외에 섬기던 신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가족 가운데는 라헬이 친정에서 훔쳐 온 드라빔이 있었습니다.
형상이 있는 것도 버려야 되지만 무형의 우상도 있습니다. 
돈이나 명예나 권력 등이 
      인간을 강력하게 사로잡고 있는 것이므로 우상입니다. 

수24:14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우상을 섬기지 말 것 강조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기라 
 너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을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너희가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우상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인데, 
우리들에게도 우상이 있다면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니만큼 
철저히 제거하고 단절시켜야 하나님이 기뻐하심을 기억합시다. 
이런 개혁이 필요합니다. 

2) 자신을 정결케 하라.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라는 말입니다. 
 우상과 세속으로 때 묻은 몸과 마음을 완전히 씻어 깨끗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패역했던 사상과 온갖 더러운 생각들을 다 버리라는 뜻입니다.  
몸과 마음으로 유일하신 하나님만 믿는 신앙을 회복하라는 뜻입니다.
정결한 마음은 하나님께 복 받을 마음입니다. 

3) 의복을 바꾸어야 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 되고 천국 시민된 사람들은 
      외적인 삶의 모습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롬13:12-14절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어라-그리스도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스타일이 아니라 
             예수 스타일이 되어야 함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 만나러 가기 위해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회개가 얼마나 중요한지요? 
회개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회개를 통하여 
     우리를 깨끗하게 용서하시고 
      언제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셨습니다. 

오늘 야곱이 취한 결단은 바로 회개의 3요소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1) 버리라  
2) 정결케 하라
3) 삶의 자세를 바꿔라

우리가 이렇게 진정으로 회개할 때 
       하나님의 뜻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당한 환난을 통해 무엇을 계획하고 있습니까?


4. 하나님은 야곱이 당한 환난을 통해 무엇을 계획하고 계십니까?(3절)

3절 “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벧엘로 올라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 가운데도 벧엘로 올라가는 한 사람을 원하십니다.
벧엘로 올라가는 한 사람이 됩시다.
벧엘로 올라가 거기서 하나님께 단을 쌓겠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삶은 우리에게 `구원의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흔히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의 삶은 
     무엇이나 형통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는 일이 잘되고, 혹시 좋지 않은 일이 생기더라도 
                 기적적으로 잘 해결되는 삶을 꿈꿉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병이 들었어도 치유함을 받고, 
       사업에 어려운 일이 생겼어도 잘 풀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질병과 가난으로부터 해방된다고 말합니다. 
        근본적으로 이 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삶이 항상 형통함과 부요함만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구원의 삶이란 형통하고 부요 할 때도 하나님만 바라보고, 
       십자가와 환난이 있어도 하나님만 바라보는 삶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구원의 삶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는 삶은 버림받은 삶이고, 
           하나님과 관계있는 삶은 구원받은 삶인 것입니다. 

구원이란?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며 많은 것을 소유했는가? 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이란 얼마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고 친밀한가로 평가해야 합니다. 
어려움과 문제가 생기면 처음 신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초로 돌아가야 합니다.
운동을 하다가  잘되지 않으면, 기초부터 다시 합니다.
      기교를 부리려 하지 말고, 기본의 폼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좋은 성적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무엇이 잘못되고 있으면, 
우리는 기본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하나님과 바른관계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더 성숙해 지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의 집 벧엘로 올라가 단을 쌓으려고 하듯이
       교회에서 드려지는 예배가 회복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의 성숙의 회복은 
       이렇게 예배로 되어진다는 것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야곱의 이런 결단들이 어던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5. 야곱의 이러한 결단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습니까?(4-5절)

야곱의 결단이 얼마나 단호했던지
4절에 보니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이방 신상과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내어 놓으니

1)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 나무 아래 다 묻어버립니다.

   가장 한 사람의 결단이 온 가솔들에게 묵혀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어버렸다는 것은
       신앙적 의미를 가진 행동입니다.
세겜의 상수리나무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살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처음 도착한 곳이 창12:6절에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 아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기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약속하셨습니다.
뒷날 여호수아가 수24:27절에 
가나안 정복을 완성한 다음에 백성들을 모아 
`우리는 여호와만 섬기겠나이다` 하는 약속을 받아냅니다. 
여호수아는 큰 돌을 가져다가 세겜의 상수리나무 아래 세우고 
`보라 이 돌이 우리에게 증거가 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하신 모든 말씀을 이 돌이 들었음이니라 
그런즉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을 부인하지 못하도록 이 돌이 증거가 되리라` 
고 선포했습니다.
이와같이 야곱이 이방신상과 온갖 잡동사니들을 
         세겜의 상수리 나무 아래 묻어버렸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단호한 신앙의 결단을 말하는 것입니다.


2) 이렇게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순종했을 때에 
         즉각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본문 5절입니다.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 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적하는 자가 없었더라` 
야곱이 얼마나 두려워하였나요? 
피의 복수극으로 말미암아 
     그들 또한 그러한 복수를 당할 것을 두려워하였지만, 
오히려 하나님께서 사방에 있는 이방 민족들이 두려워 떨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있는 최선의 방어책이 무엇입니까? 
     칼이나 총 같은 군사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나 권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함으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새롭게 임하시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지금 사고와 위험이 많은 세상 가운데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늘 회개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함께 벧엘에 거한다면 걱정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있는 손길의 보호 아래 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야곱에게 새로운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10절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니라` 
교활하고 죄악된 세상적인 술수와 속성을 의미하는 야곱이라는 이름. 
그 이름을 더 이상 부르지 아니하고 
   이제는 `이스라엘이라 부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완벽하고 완전한 인간으로, 
     다시는 죄와는 상관없는 사람이 되었기에 
            이스라엘이라 부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헬라어에 새롭다는 뜻을 나타내는 형용사 두개가 있습니다. 
`네오스라`는 말과 `카이노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네오스는 시간적으로 새것, 즉 시간상 새로운 것을 의미합니다. 
새해를 맞이했다는 것은 
달력상 새해라고 부르고 시간적으로 새롭게 시작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지만 카이노스라는 말은 
질적으로 또는 본질적으로 따라서 새것이라는 뜻입니다. 
세겜에서의 야곱의 경험처럼 우리도 질적으로 변화된 모습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즉 형통보다 성숙을 택하는 신앙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