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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님의 인격성 (요 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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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님의 인격성 (요 3:1~8)

 
오늘부터 몇 주일은 성령님의 사역에 관한 말씀을 연속으로 전하려고 준비를 했습니다. 몇 주일 계속 출석하시면 성령님의 사역에 대한 대략적 영적 지식을 알 수 있으니까 그렇게 아시고 마음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성경말씀을 보면 유대 사회에서 관원이 된 니고데모라고 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인생에 가장 중대한 문제를 의논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관원이라 함은 유대 나라의 최고급 공무원을 말하는 것으로써 국무의원 정도의 지식 계급이고 권력 계급의 사람이 됩니다. 이 사람은 바리새인이요 국가를 움직이는 72명의 산헤드린 공회 회원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젊은 나이에 그 나라에서 최고로 출세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권력 계급에 있었으므로 사는 것도 아주 부요하게 잘 사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사람은 별로 답답할 것이 없을 것 같은데 그의 마음에 해결이 안 되는 영혼의 괴로움이 생겨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오늘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분명합니다. 

당시 유대인의 권력 계급은 예수님과는 적대 관계에 있었으므로 니고데모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밤에 1대1로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를 예수님께 오늘 말씀에서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부르는 말로 “랍비여!”라고 부르는데 랍비라고 하는 단어는 그 사회에서 최고 존경받는 종교지도자에게 붙여주는 존칭어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랍비의 말은 절대 순종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이것은 “보통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여주신 메시야로 나는 믿고 있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행하시는 것은 하나님만이 행하시는 일을 지금 행하고 계십니다.” 표면상의 모든 이적을 메시야만이 행할 수 있는 일이라고 고백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오늘 내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오늘 저녁에 가정 교사식의 성령님에 대한 설명을 자세하게 들려주시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람이 영생을 얻으려면 성령으로 거듭나야 되느니라.” 

그러면 성령은 누구시며 무엇을 하시며 하시는 일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우리가 보면 됩니다. 보통 우리 기독교인들이 혼동하는 것이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세 분같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셋은 하나라고 해서 삼위가 일체라는 말을 씁니다. 다만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셨기 때문에 인간이 되신 예수 안에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또, 성령의 역사는 구약 시대부터 있어왔는데 마가의 다락방 오순절 때부터 성령의 역사가 있는 것으로 생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구약 시대 성령의 역사를 보면 아예 창세기 1장 1~2절에서부터 나타나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이렇게 성경이 시작되는데 거기서 하나님의 신이란 무엇이냐? 바로 이 단어가 성령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욥기 33장 4절에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시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시편 104편 30절에 보면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의 영이란 바로 성령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인간 구원 역사에 필요한대로 인간에게 나타나셨음을 성경이 증거하여 주는 대목들입니다. 구약에서 애굽으로 간 요셉을 보고 바로왕이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오?” 감동을 받아서 나라의 모든 권한을 그에게 맡겨주는 내용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거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신이란 뭐냐? 곧 성령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히브리 민족의 이동이 너무 힘이 들었을 때 하나님은 “내가 내려가서 너와 함께 하시리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내려온 인격체, 곧 성령이 모세에게 임함을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민수기 11장 17절에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신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이 강림의 신이 곧 성령의 역사를 말하는 것으로 구약 전체에 나타나 있는데 구약에서는 특별히 어떤 개인에게 초능력적 힘이 부여되었던 사실들을 많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기드온이라는 사람은 300명이라는 사람을 가지고 12만 명의 적군을 물리친 역사를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에게 그런 힘이 있을 수가 있을까? 그 이유를 성경이 답변하고 있습니다. 사사기 6장 34절에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그때부터 그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자로 변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더 잘 기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삼손입니다. 300명의 군대도 없었습니다. 혼자서 블레셋 군을 번번이 격파한 전쟁 영웅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사기 14장 6절에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그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에 사로잡힌바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러한 큰일을 할 수가 있었다는 겁니다. 

반대가 있습니다. 이 성령이 사람에게서 떠나면 어떻게 되는가? 삼손은 그때부터 아무 힘이 없어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무기력자가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내게 임하면 하나님이 계획한 어떠한 일도 가능한 사람이 되고 반대로 성령님이 떠나시면 어떤 일을 하려해도 아무 일도 못하는 무기력자가 된다고 성경에 나타나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예언자들의 활동을 자세하게 기록을 했는데 분량 면에서 대단히 많은 분량을 차지합니다. 이 예언자들의 예언 활동을 언제 할 수 있었는가? 여호와의 신이 강림할 때만 그들이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사야 42장 1절에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그러더니 그가 하나님의 예언 활동을 그렇게 열심히 했고 이사야 61장 1절에 보면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므로 이 모든 것은 성령의 역사를 말하는 것으로서 구약 가운데 처음부터 끝까지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신약시대 성령님의 사역은 어떻게 나타나 있는가? 구약 시대와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때부터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음을 성경이 조명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으니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가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처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부터 성령 사역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성령이 이때 누구에게 임한 것인가? 마리아에게 나타났습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내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나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 능력도 없는 자연인 시골 처녀에게 성령이 임하니까 예수의 어머니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두려움과 공포감에 질려서 밖을 나가지 못할 만큼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그들이 힘차게 예루살렘 거리로 뛰쳐나갔는가? 성령 체험한 다음입니다. 그리고 나서 걸어 잠갔던 문을 자기 손으로 열어 제치고 예루살렘 거리로 나갔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그 사회에서 굉장한 불이익과 어려움을 당하게 되어있는데도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메시야였다.” 그렇게 예수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빌립 집사가 길을 갑니다. 그때 에티오피아 간다게 여왕의 국고를 맡은 큰 권세 있는 내시가 예루살렘까지 왔다가 마차를 타고 그냥 자기 나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 나타난 것을 보면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그래서 나아가서 성령이 시키신 일을 하니까 그 사람을 통해서 에티오피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첫 번째로 전달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성령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하나님의 인간 구원 사역에 필요한 때에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의사대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으면 그 사람은 성령님의 일꾼이 되어 성령님의 지시를 따르고 자신도 생각할 수 없었던 놀라운 하나님의 초능력의 역사를 진행하게 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강림은 구약시대나 신약시대에 지금도 변함없이 역사한다는 것을 우리가 성경말씀 그대로 믿고,  또 한 가지 지식은 성령의 역사는 인간과 끊임없이 교류한다고 하는 확실한 사실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성령의 칭호를 보면 여러 가지가 나옵니다. 아버지의 영, 진리의 영, 보혜사, 예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생명의 영, 아들의 영, 은혜의 영, 지혜의 영… 이런 많은 이름으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실 때 제자들은 겁이 났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실 때에도 우리가 그렇게 어려운 일을 많이 당했는데 왜 우리만 내버려 두고 이제 하늘로 가신다는 것입니까?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그랬을 때 예수님의 답변이 뭡니까?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큰 권능을 받을 것이며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이렇게 약속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마지막 제자들에게 남기신 말씀이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면 예수님이 함께 계시려면 가시지 말고 우리와 함께 지금 계셔야지 가시면서 어떻게 함께 계실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된 겁니까? 바로 나는 가지만 나의 영은 그대로 성령의 사역으로 너희와 함께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니까 절대로 내 이 몸이 너희 곁을 떠난다고 해서 떠나는 것이 아닌 것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는 지금도 우리와 함께 있음을 우리가 신앙고백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부와 성자, 성령이 하나가 되는 것을 성경에서 우리가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성령은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어떠한 깊음도 성령이 다 통달한 상태다.” 성령이 곧 하나님의 영임을 증거하여 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시편 139편에 성령의 편재성이 나타나는데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성령님의 편재성, 어디나 계신 성령님의 역사, 곧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 되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성령의 역사가 우리의 영혼을 거듭나게 하시는 힘이 있음을 예수께서 지금 니고데모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이나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말이나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같은 문맥의 신앙상 용어가 되는 것입니다. 다만, 이 문화화된 언어들을 우리가 편리하게 사용하는 것뿐입니다. 

오늘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성령의 세계를 설명하시는데 니고데모가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연과학적 질서를 답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거듭나려면 늙었는데 우리가 어머니 모태로부터 출생했습니다. 거듭나기 위해서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는 것을 말하니까 예수님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 자연 과학적 지식에 머물러 있는 니고데모를 영 위에 세계로 인도하는 자세한 설교를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늘 니고데모에게 설명하신 성령의 역사를 보면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바람 부는 것과 같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서 시작했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성령의 역사는 이렇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이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는 일이다.” 이렇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성령을 받고 싶어서 끌어들이는 사람이 있습니까? 성령이 자기 뜻대로 불어서 나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의 편에서 하신 일을 보면 성령 하시는 일이 동일하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하나님! 우리 민족을 선택해 주십시오.” 언제 기도했습니까? 그런 적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언제 하나님 앞에 “하나님, 나를 믿음의 조상으로 삼아주십시오.”라고 했습니까? 

모세가 하나님을 향해서 “나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아주십시오.”라고 했습니까? 더군다나 마리아가 처녀인데 “내가 예수님을 잉태하게 해주십시오.” 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나님이 임의로 하신 일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어서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성령의 임함도 너에게 똑같다.” 예수님은 자신이 분명히 밝혔습니다. 

“내가 너희를 택한 것이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택자구원설입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예수님, 우리를 제자 삼아 주십시오.” 언제 그랬습니까?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바울이 언제 “내가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겠습니다.” 언제 그랬습니까? 오히려 그 반대 입장에 섰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역사는 그들을 사로잡아서 성령의 내재성이 그 속에서 이루어지게 함으로 말미암아 택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역사에 그렇게 쓰임을 받는 성령 충만자들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렇게 교회 오셨습니다. 여러분 영 가운데 보이지 않게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이 성령님의 임재가 내재성을 이루어서 “오늘은 어떠한 약속보다도 중요한 것이 하나님 앞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이렇게 교회 오셔서 성령님의 인도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님이 언제 내 영 가운데 오셨는지 우리의 사고로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 무슨 이유가 있었는지 분명하게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어쩌다가 특별 사건에 붙들린 사람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길바닥에서 거꾸러진다든가 방탕하게 살다가 어느 극적인 순간에 변화를 가져오는 그런 경우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모든 사람들은 내가 언제 거듭났는지, 날짜나 시간이 언제인지 기억할 수도 없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내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 되어있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충실한 청지기가 되어 있음을 우리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임의로 부는데 언제 왔는지도 모릅니다. 

가끔가다 여러분이 그런 사람 만날 때가 있을 겁니다. 무슨 이상한 교파에서 이상한 성경공부를 가르치는데 사람을 보자마자 당황스럽게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구원받았습니까?” “그럼요. 내가 교회 다닌지가 언제인데요?” “언제 구원받으셨습니까? 날짜를 기억하십니까?” 날짜를 모르잖아요? “그러면 당신 성령 못 받은 겁니다. 당신이 그런 교회를 다니니까 못 받은 겁니다. 우리에게 오십시오. 우리에게 오면 우리가 생일을 기억하는 것과 똑같이 내가 몇 월 며칠 몇 년도에 성령 받았는지 확실하게 알아야 성령 받은 것이지 생일은 기억하면서 영적으로 출생한 날을 기억 못하시다니요. 그러면 성령 안 받으신 겁니다.” 이렇게 이상한 성경공부를 가르치며 사람들을 현혹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교인들 가운데 그런 일이 많이 있으니까 그런 곳에 간 사람들은 가만있지 못하고 또 옵니다. 또 와서 나에게 “목사님, 나에게 이렇게 질문하는 바람에 당황했고 내가 정말 성령 못 받았나 근심이 되고 그래서 내가 갔다 왔는데요.” “그래서 지금 어떻게 되었단 말입니까?” “정말 성령 받은 사람은 성령 받은 날을 기억합니까?” “나도 모릅니다.” “생일은 다 기억하잖아요?” “생일 기억하는 사람 어디 있습니까? 자기 생일 기억하는 사람은 세상에 한 명도 없습니다. 집사님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신 날을 기억하신단 말입니까? 그 날이 네 생일이라고 말해주신 어머니의 말을 기억할 뿐이지 자기 생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머릿속에 어디 있단 말입니까? 

그런 쓸데없는 이상한 교파를 만나서….” 성령은 임의로 하나님의 마음대로 바람 부는 것과 같이 어느 틈에 내 영 가운데 내재성을 이루어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이 되도록 그렇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다만 지금 내 고백이 분명한가 아닌가, 내가 정말 예수를 믿고 있는가 아닌가 이것만 내 영혼을 진단하면 됩니다. 성령의 역사는 의식 이전의 역사로서 마치 느낌이 생각보다 앞서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사실 성령 받은 사람은 지금 제가 성령 사역에 대해서 설교를 하는 것을 듣고 아마 속으로 ‘아! 속 시원하다. 참 오늘 목사님 교리적인 설교를 아주 잘 해주신다.’ 하시면서 속으로 ‘아멘 아멘’ 하면서 받아들이실 겁니다. 그런데 성령 받지 못한 사람은 ‘목사님이 다른 때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하더니만 오늘은 졸린 이야기만 계속하고 있네.’ 이렇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성령의 역사를 가르칠 때 성령 받은 사람이 가는 길을 세단계로 가르칩니다. 

첫째가 다시 태어남(born again), 거듭남, 중생, 재생 이런 말을 쓰는데 이 단계는 예수를 안 믿다가 예수를 믿게 된 단계입니다. 그래서 삶의 가치관이 변했습니다. ‘아!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물이구나.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은 바로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한 영적 사건이로구나.’ 그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의 진리가 내게 옵니다. 그래서 이 단계는 예수 믿고 영생을 얻게 된 이 기쁨을 누리는 다시 태어남(born again)에 단계입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신앙생활이 계속되면 성화의 단계로 발전됩니다. sanctification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자신의 삶을 거룩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동안 세상에서 나쁜 짓 하던 것을 다 잘라 버리고, 노름판에 다니던 것을 이제는 안가고, 전에는 망나니같이 살았는데 그것도 다 끊어버리고 그래서 경건과 거룩성의 삶을 살도록 노력하는 단계로 주일날에는 꼭 예배드리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하나님께 분명히 드리는 이런 약속도 내가 분명히 지킵니다. 그래서 이런 sanctification, 2단계의 성화의 단계로 사람이 발전합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에 영화의 단계로 glorification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내가 사는 이유가 뭡니까?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있다.” 이때가 되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이때가 되면 주님으로부터 받는데 대한 관심이 없어집니다. 무엇을 드릴 것인가? 마지막에 이 몸 하나를 요구하시는 순교의 현장에도 나가서 찬송을 부르면서 이 몸을 바칩니다. 그래서 완전히 그때가 되면 “나는 주님을 위해, 주님이 시키는 것을 땅 끝까지라도 무엇이든지 죽는 것도 괜찮습니다. 이때는 내가 이렇게 나서야 될 때가 되었습니다. 주님도 나를 위해 그렇게 사셨으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느 단계에 계십니까? 보세요. 밤중에 예수님을 찾았던 니고데모는 그날 밤 예수님에게 동문서답의 대화를 했습니다. “그러면 내가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오란 말씀입니까?”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그때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바람 부는 것과 같이 자기 속에 성령의 임재가 그날 저녁에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는 성화의 단계로 발전하고 마지막에는 영화의 단계, glorification의 단계에까지 올라가기 때문에 마지막 자기에게 성령 사역을 가르쳤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는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예수님의 12제자도 간 곳이 없어지고 피를 흘린 예수의 시신이 아주 흉하게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그 때에 이 사람이 나타나잖아요?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나타났습니다. 

왜 나타났습니까? 니고데모는 성경에 침향과 몰약이라는 값비싼 물품을 백 근이나 가져와서 예수님의 시신을 발라드리고 세마포로 곱게 싸서 장례를 했습니다. 니고데모가 그런 일을 함으로 그는 사회에서 엄청난 불이익을 당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유대인의 관원으로 정부를 향해 정 반대의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얼마나 큰 어려움을 당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왜 합니까? 바로 영화(glorification)의 단계에 갔기 때문입니다. 

다 망해도 괜찮고 죽어도 상관없고 ‘이제는 나는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으로 나의 인생이 마감이야! 괜찮아!’ 누구도 돌아보지 아니하는 흉하게 된 예수님의 시체를 내려서 침향과 몰약으로 다 닦고 “예수여! 나에게 성령의 역사를 가르쳐주신 예수여!”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마지막 작업을 해드리잖아요? 성령 체험이 없으신 분들은 오늘 예배 가운데 성령 체험하십시오. 또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도 모르게 성령이 임재하여 중생의 삶을 체험하시고 나아가서 성화의 단계로, glorification 영화의 단계로까지 올라가서 마지막에는 예수를 위해서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위해서 ‘이때는 내가 나서야 돼! 나는 이것을 위해서 주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이야!’ 이러한 성령의 임재가 모두에게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니고데모를 만나서 성령 사역에 대한 자세한 성경말씀을 들려주신 예수 그리스도여! 그는 주님을 위해서 마지막을 그렇게 장식했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우리 모두가 지금은 거듭남의 단계에 있지만 성화와 영화의 단계에까지 이르러서 마침내는 니고데모와 같이 주님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드리며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믿음의 결단을 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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