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그러므로 찬양해야 합니다 (롬 11:33~36)

  • 잡초 잡초
  • 1010
  • 0

첨부 1


그러므로 찬양해야 합니다 (롬 11:33~36)
  

찬송가 304장의 3절을 함께 부르겠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워낙 많이 애창하는 찬송이기에 불러도, 불러도 은혜가 됩니다.
오늘 설교를 시작하면서 3절을 주목한 이유가 있습니다.
가사 때문입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 기록할 수 없다는 고백이 감동이 됩니다.

이 찬송의 작곡, 작사가인 Lehman 목사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어찌 다 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어찌 다 쌓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레만 목사의 이 고백은 정말로 정답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를 측량할 수 없습니다.
오늘 그 고백을 바울이 하고 있습니다.

33절의 본문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오늘 우리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생각하며 은혜를 공유하고자 합니다.
    

바울은 9-11장까지의 내용에서 분위기가 나름대로 우울했습니다.
이유는 주지했던 것처럼 자신의 동족이었던 이스라엘이 복음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침통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침통했던 바울이 로마서의 첫 번째 파트를 마감하는 11장의 본문에서 갑자기 반전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노래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노래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바울이 찬양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1. 해석되지 않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본문으로만 이해하면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 본문의 의미는 로마서 전체를 놓고 해석을 하든지 아니면 그것이 조금 부담스러우면 9-11장을 배경으로 해석을 해야 참된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다시 33절을 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 자신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해석되지 않음에 감탄하며 그 분의 존귀하심과 풍성하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것임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길은 우리들의 판단으로 찾지 못할 것임을 친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런 뚱딴지같은 궤변이 어디에 있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사실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9:1-3에서 자기 동족이 예수를 거부한 것에 대한 비통함을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이러한 간절함으로 그렇게 동족을 사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거부한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고통에 직면해 있던 바울은 고독하고 유대인들이 선민인데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흔쾌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갈등의 삶을 살던 어간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예수를 거부하게 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섭리였습니까?
이방인들을 먼저 구원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섭리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면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는 방법이 뒤로 밀릴 수 있다는 것을 주님이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예수를 거부하게 하심으로 이방인들을 구원시키는 방법을 택하셨고 바로 그것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시기 나게 하심으로 유대인들도 이방인의 구원의 수가 다 차면 구원을 시킬 것임을 바울이 깨달았습니다.

이렇게 철저한 구원의 계획을 갖고 계심을 바울은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한계는 여기까지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하시는 방법에 대하여 그림자는 그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어떤 그림으로 그려질지에 대하여서는 함구하고 있습니다.

2주 전에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께서 구원할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누구일까?
‘온 이스라엘’(pa" !Israhl) 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이방인들의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수가 충족하면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한다고 했는데 도대체 그 수는 얼마인가?

여러분의 담임목사가 제기한 것인데 구원의 흐름이 예정론자들의 주장이 맞는가? 아니면 자유의지론자들의 주장이 맞는가? 등등은 바울도 역시 침묵합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더 이상이 해석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침묵은 패배가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바울의 침묵은 감사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롬 11:33절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어떻게 바울이 이렇게 노래하며 찬양을 드릴 수 있었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의 이성을 해석될 수 없는 놀라운 자존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말장난이 아니라 이 말은 이런 의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찬양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로마서 42번째를 강해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40번째 강해를 통해서 ‘가슴앓이’ 라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 날 설교를 통해서 선포한 내용의 줄거리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이 예수를 거절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방법을 택하셨는데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을 시기 나게 하는 방법을 택했는데 그것이 이방인들을 구원해서 이스라엘이 시기하게 함으로 그들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와 예수를 영접하게 하는 방법을 택하셨다.”

그런데 이 설교를 들은 아들이 집에서 아내에게 이렇게 설교 평을 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설교 총평 : 기분 나쁨”

이유는 이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들러리인가? 우리들은 유대인들에 비해 항상 왜 서자취급을 당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초점은 왜 항상 유대인들인가?”

뭐 이런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딱히 할 말이 없어서 궁색하게 말을 한 것 같은데 저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유인 즉은 아내 스스로도 이 점이 궁금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아마 말을 못해서 그렇지 거의 비슷한 생각을 갖고 계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날 그 질문을 받고 아내에게 말해 준 것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한 것은 그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제사장 나라로 삼으셔서 그들을 통해서 이방의 모든 나라를 구원하셨다. 그런데 그들에게 집중한 것은 하나님께서 구약을 통해서 쌍방 간에 맺은 언약 때문이다. 내가 나를 하나인 하나님으로 인정하면 나는 너희를 택한 백성을 인을 쳐서 너희를 구원할 것이라는 언약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행하신 언약을 철저하게 실천하신 분이었기에 이스라엘을 놓지 않으셨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유대인들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이방인들의 구원은 계획 속에 있었던 사실이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제가 아내에게 말해 준 것은 저의 신학적인 지식을 근거한 답변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만 우리 교우들에게 되묻겠습니다.
저의 답변이 완벽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한 자들입니다.
우리들이 이것을 고백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구원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이성적인 영역으로 하나님을 해석한다는 것은 이미 출발부터 불완전 한 일일 수 있습니다.
불완전한 일 일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이성으로 하나님은 해석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시무하던 교회의 불신 남편이 이렇게 저를 공격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라는 분이 물 위를 걸었다는 데 내가 그걸 믿으라는 겁니까?”

그 말을 듣고 제가 이렇게 답변 한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 물 위를 걸었다니까 믿죠? 물 위도 못 걷는 존재를 어떻게 믿습니까?”

우리들의 이성의 한계가 무엇입니까?
세상적인 이해의 측면에서 볼 때  물 위를 걸으려면 그 물 표면을 엄청나게 빠르게 지나가든지, 아니면 물의 표면적인 압력을 가하는 물체가 더 가볍든지 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 우리들의 이성입니다.

그래서 이 이성을 토대로 하여 이해가 되어야만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이성이 아닌 이성을 넘어서는 믿음입니다.

교우 여러분!
모세가 홍해를 갈랐을 때 그 홍해는 사람들이 충분히 건널 수 있었던 무릎까지 물이 차오르는 개울 정도의 수준이었기에 홍해를 갈랐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하는 인본주의자들의 말을 천만번 양보해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나는 무릎까지 차는 물을 가지고 뒤 쫒아 오던 애굽의 군사들을 수장시킨 하나님의 능력을 이성이 아닌 믿음으로 믿습니다.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 손이 마른 자를 보셨던 주님께서 네 손을 내밀라 하실 때 말라 있는 손은 도저히 움직일 수 있는 없는 손이기에 주님의 명령이 이루어질 수 없는 무모한 요구라는 이성의 판단을 과감히 포기하고 주님이 하라니까 하면 되지 않을까의 믿음으로 손을 내밀 때 손이 펴졌다는 마가복음 3장의 말씀을 100% 믿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위급의 상황에서 항아리 6개의 아귀까지 물을 채우라는 말씀과 이제는 떠서 갖다가 주라는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리신 예수님의 말씀을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말 한 것처럼 주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는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하면 물이 혹시 포도주가 되지 않겠는가의 믿음으로 믿음을 실천한 바로 그 하인들의 믿음이 H2O를 C2H₅OH로 바꾼 것임을 확실히 동의합니다. 

하나님은 이성으로 해석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믿음의 대상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의 이성으로 해석되지 않으시는 놀라우신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우리는 찬양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이런 이성주의자들을 향하여 무엇이라고 선언합니까?

본문 34절을 봅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이 바울의 외침은 이사야 43:13절의 예언자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사야는 일찍이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과연 태초로부터 나는 그이니 내 손에서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

이 말씀은 하이라이트는 ‘나는 그이니’입니다.
‘ aWh ynIa}’(anee hoo)라고 기록된 원어의 문자적인 의미는 ‘나는 그다.’입니다.
이 말은 나는 하나님이므로 그냥 하나님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그 누구에게도 조정될 수 없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이어지는 35절을 봅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 바울의 고백은 욥 41:11절에서 하나님께서 욥의 한계를 지적하셨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들이 드리는 그 어떤 것 때문이 움직이시는 우유부단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다 가지신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상에서 바울이 오늘 고백한 34-35절의 내용을 주석한 여러 책을 보았습니다.
그 중에 케제만 주석이 설득력이 있게 들렸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으로 왜곡될 수 없는 존재이다.”
현직 목회자의 강해 설교집도 여러 책을 보았습니다.
그 중에서는 하용조목사는 로마서 강해에서 두 가지로 정의했는데 공감했습니다.  

① 하나님을 가르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② 하나님은 거래의 대상이 되는 분이 아니다.  

동의하면서 제 해석을 하나 첨부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으로 인해 만들어지지 않는 분이시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앨버트 슈바이처는 이렇게 갈파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원 중에 점이다.”

공감합니다.
점이 어찌 원을 알 수 있습니까? 
시도 자체가 교만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을 자꾸만 내 마음에 맞게 재단하려고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을 자꾸만 나에게 편한 하나님으로 만들어가려고 합니다.
사도행전 10장은 유대적 그리스도인과 이방적 그리스도인이 만나 복음이 이방들에게로 전이되는 극적인 사건을 다룬 기사가 실려 있습니다.
욥바에 머물고 있었던 베드로가 지붕에서 기도를 하는데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환상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사도행전 10:10-13절입니다.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그러자 환상 중에서 이 음성을 들은 베드로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율법적인 사고관 때문에 거절을 합니다.

행 10:14절입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 대”

주목해야 문구입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Not so, Lord)

성경에 기록된 사도행전 10장의 말씀을 의지해 보면 3번에 걸쳐서 이 명령이 행해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단호하게 거절을 하였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그러자 하늘에서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또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말씀에 주목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우리 교우들은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가 하나님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않았나이다 한 대”라는 말씀은 베드로의 생각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거절하려고 한 이유는 자신이 갖고 있었던 율법적인 사고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내 생각으로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교회에 좋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차를 타고 운전할 때 이렇게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사고 나지 않게 하시고 안전하게 하시옵소서.”

그런데 운전하고 가다가 졸음운전을 했습니다.
그리고 접촉사고가 났습니다.
그러면 모든 핏대를 다 하나님께 돌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럴 수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어떻게 사고가 나게 하셨습니까?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핏대를 올리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을 하셨답니다.
“이 놈아, 다음에 운전할 때는 나에게 기도하지 말고 커피 마시고 운전해라. 내가 네 졸음까지 책임질 정도로 한가한지 아냐?”

만들어 낸 이야기이지만 정말로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인간의 실수와 부주의까지 하나님의 탓을 돌리는 하나님을 제한해 버리는 잘못된 신앙을 지적하는 적절한 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금세기 최대의 기독교 변증학자라고 말하는 C.S Lewis는 그래서 일찍이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는 것은 내재적으로 가능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다는 말이지 내재적으로 불가능한 일도 하실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지만 말이 안 되는 일까지 행하시는 분이 아니다. 이것은 그 분의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자유의지를 줄 수 있는 분이기도 하지만 주지 않을 수도 있는 분이라는 말이다.”

통쾌한 해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이런 질문을 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전쟁에 왜 일어나고, 지진이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매몰 되어 죽고, 왜 세상이 이리 공평하지 못한가?”

다시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말 도 안 되는 것을 인정하여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가 아니십니다.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전쟁이 나고,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으로 인해 지구 온난화를 통한 각종 재해가 만연하고, 인간이 돌보아야 할 자연을 도리어 파괴함으로 인해 발생하는 수많은 재해를 통하여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하나님은 막는 비내재적인 능력을 행하시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들이 이 땅에 재해가 일어날 때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비겁한 행위입니다.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제한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고백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오로지 하나입니다.
로마서 전반부의 마지막 절에서 바울이 고백한 고백입니다.

롬 11:36절입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서론에서 말씀드린 레만 목사님이 지으신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 더 드리고 설교를 맺을까 합니다.

1974년 세계의 공원이라 일컫는 아름다운 나라, 스위스의 로잔에서 세계 순회 복음전도자 대회가 열렸습니다.
전 세계에서 4천 여 명의 전도자 대표들이 이 대회에 모였습니다. 
‘성경이 말씀하게 하자’라는 근본적인 복음사역자의 자세를 결의하고 다지는 귀한 모임이었습니다. 

회의 이틀 째 되는 저녁예배에 한 맹인 여가수가 특별찬송을 부르기 위해 안내자의 손에 이끌리어 강단 앞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조그마한 몸매의 동양계인 이 맹인 여가수는 낭랑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오 하나님 사랑 어찌 풍부하고 순전한지요. 진정 측량할 길 없고 굳세도다. 성도들과 천사들의 노래 영원히 받으시리로다. 대양을 잉크로 가득 채우고 하늘을 양피지로 만들었다 해도, 땅 위의 모든 나무줄기가 다 붓이라 해도, 모든 사람의 직업이 모두 서기관이라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대양이 마르고 양피지 두루마리를 하늘 끝까지 펼친다 해도 다 기록할 수 없겠네.”

찬송가 304장의 찬양이었습니다.
4천여 참석자들은 말할 수 없는 가슴 벅찬 감동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고백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지만 내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는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의 주인공은 6.25때 두 눈을 잃은 전쟁고아로서 미국에 입양되어 고생 끝에 음악수업을 마친 한국계 현역가수 킴.스윜 자매였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바울은 오늘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영어성경 로마서 11:36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RSV Rom 8:36절입니다.  
For from him and through him and to him are all things. To him be glory for ever. 

직역하면 이런 뜻입니다.
“그로부터, 그로 말미암아, 그에게 모든 것이 존재함으로 영광이 영원히 주님에게 있어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그러므로 해석되지 않는, 그리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으로 모든 주권을 갖고 계신 주님을 찬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