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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피할 수 없는 하나님 (시 139:7~12) - 사랑,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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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수 없는 하나님 (시 139:7~12) 
  
      
옛날 사람들은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천둥이 치면 하나님이 노했다고 생각하고 또 가뭄이 들면 하나님이 벌을 주신다고 생각하고 사람이 병이 들면 하나님께 죄를 범했다, 이렇게 생각하고 또 바람이 불면 신의 바람이 분다,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옛날에 부르던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지극히 자연적인 현상에 대하여 인격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의 묘한 속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애가 생기면 하나님이 주셨다 또 애가 안 생기면 하나님이 안 주셨다, 이런 식으로 모든 일의 원인에는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하고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일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일에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현대 과학이 발달하고 인간의 의식이 발달하면서 과거 하나님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일에 대하여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 없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천둥이 치는 것은 구름과 땅 사이에 전기의 작용하는 것이다, 비가 안 오면 이것은 엘니뇨 때문이고 기상변화 때문이다, 이상기후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고, 사람이 병이 드는 것은 병균 때문에 그런 것이고 면역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다. 인간은 어디서 왔느냐? 인간은 원숭이가 진화해서 된 것이다, 이처럼 사람의 일, 세상의 일이 하나님이 없이도 알 수 있게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런 일을 설명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믿을 필요는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대인이 하나님을 믿지 않느냐? 그건 아닙니다. 여전히 믿습니다. 다만 소위 일반영역과 신앙의 영역이 분리되게 된 것뿐입니다. 마치 칸막이를 친 것처럼 평소에 세상 살 때는 세상의 논리를 좇아서 삽니다. 직장, 학교, 학술, 사회생활, 과학, 사업, 이런 것을 할 때는 거기의 원칙을 적용하지만 종교의 영역으로 넘어와서 교회를 간다든가 신앙생활을 할 때는 거기에 맞는 원칙을 적용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에 칸막이가 쳐져있습니다. 이것이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이런 칸막이가 존재하는 사실조차도 모를 때가 많습니다마는 여러분의 삶을 잘 살펴보면 그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사실 저도 그러니까, 그게 오히려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게 없다면 신앙을 갖는 것 자체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런 칸막이가 있기 때문에 사람은 지성인이면서도 신앙을 가질 수가 있고 현대인이면서도 신앙인이 될 수가 있고 또 과학을 믿으면서도 동시에 성경을 진실이라고 믿고 또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으면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두 칸이 묘하게 섞입니다. 

병이 들면 병원에 가서 최고의 의료도움을 구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심방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고쳐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는 모순을 느끼지 않습니다. 또 어떤 일이 생기면 그 일의 원인과 결과를 냉철하게 분석하지만 그럼에도 거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지 않을까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 있지 않을까를 생각합니다. 여행을 갈 때 평안하게 잘 다녀오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다만 옛날 사람들은 돛단배를 타고 갔고 요즘 사람들은 제트비행기를 타고 가는 것이 다른 것뿐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옛날 사람들보다 생각이 더 복잡합니다. 이 시대에 믿음을 갖는 것이 더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우리처럼 많은 것을 생각하지 않아도 됐습니다. 그들의 삶과 생각은 단순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에 현대인이면서 합리적이면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지성인이면서 동시에 신앙을 갖고 또 그 신앙이 우리의 삶에 의미가 있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더 생각이 깊어야 되고 더 폭이 넓어져야 되고 더 하나님의 신비와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입니다. 

다만 어느 쪽에 비율을 더 많이 두느냐는 사람에 따라서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좀 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면에 비중을 둡니다. 이런 사람들은 좀 냉정하고 정확합니다. 예수님을 믿더라도, 또 어떤 사람은 영적인 면에 더 비중을 둡니다. 이런 사람은 더 직관적이고 우뇌적이고 그리고 미신적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요. 

그런데 아예 신앙적인 일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최근 인터넷 신문을 보니까 타임지가 뽑은 세계 10대 조작 사건 - 사람들이 이건 조작이라고 생각하는 세계 10대 사건을 뽑았습니다. 

1위가 무엇이냐면 미국이 사람을 달에 보냈다는 것입니다. 조작됐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고 
2위는 외계인이 피라미드를 지었다는 설입니다. 여러분도 어렸을 때 다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사 밑에다 누가 댓글을 올렸어요. ‘가장 큰 조작극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설이다.’ 

제가 그런 걸 보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요. 그래서 또 제가 댓글을 ‘오히려 더 큰 조작은 인간이 원숭이에서 진화했다는 설이다.’ 이런 식으로 올렸는데 아마 그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기 때문에 인간이 어디서 왔느냐, 인간이 어떤 존재냐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의 삶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을 배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과연 가능할까? 인간이 하나님을 철저하게 배제할 수 있느냐?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겉으로 말하는 것과 속으로 생각하는 것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겉으로 하는 말만으로는 그 사람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건 모르는 것입니다. 

페라리라는 스포츠카를 만든 엔죠 페라리에 대한 그의 일대기를 담은 영화를 봤더니 페라리의 아들이 중한 병에 걸려서 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아버지가 염려하고 두려워하고 의사에게 경과를 물었더니 의사가 뭐라고 대답하느냐면 ‘소망을 가지시오.’ 이렇게 말합니다. 그때 엔죠 페라리가 화를 내면서 ‘당신이 의사이지 신부냐. 왜 나에게 소망을 가지라고 말하느냐?’ 이렇게 고함을 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마는 아무리 의사라도 소망을 가지라는 말 이외에는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불확실하고 사람이 보장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이것은 더 이상 과학이든 능력이든 의술이든 돈이든 어떤 것으로도 사람이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종교적인 차원으로 넘어가서야 뭔가 의미 있고 도움이 되는 말을 해줄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가 최근에 크레믈린에 대한 다큐를 보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과거 스탈린의 경호원이었던 사람의 증언에 바탕을 둔 내용입니다. 

이차대전이 한창일 때 스탈린이 크레믈린 안에 있는 예배당에 자신의 경호원만을 대동하고 몰래 가서 기도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스탈린이 겉으로는 무신론과 공산주의를 표방하였지만 전쟁이 힘들어질 때 몰래 크레믈린 안의 예배당에 가서 기도를 하고 회개를 하는데 먼저는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고 러시아가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경호원의 증언에 바탕을 둔 내용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러나 Why not?  스탈린은 공산주의에 심취하기 전에 신학생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아무리 하나님을 배제하려고 하고 나라의 국가 정책이 하나님을 배제할 수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마음에서 하나님을 배제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는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많습니다. 옛 말에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한 것처럼 모든 사람들의 생각과 추구하는 것과 소원하는 것과 인간의 모든 생각은 결국은 하나님에게 통하게 돼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주제를 말하든 어떤 것을 추구하든 결국은 그것이 하나님에게로 이어지게 돼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에게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지하게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과학을 말하든 문학을 말하든 음악, 미술, 행복, 쾌락, 성, 가정, 사랑 등, 어떤 주제든 우리에게 중요한 어떤 것을 추구하고 생각하더라도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주제로 이어집니다. 결국은 신앙적인 데에서 결론을 얻게 됩니다. 

행복이라는 주제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행복은 신앙적인 주제는 아니에요. 모든 사람은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젊은 사람, 나이 든 사람, 믿는 사람, 안 믿는 사람, 다 행복을 원합니다. 그리고 행복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건이 있지요. 건강, 사랑, 물질, 평강 등, 이런 기본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반드시 교회를 다녀야만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불행이라는 현실을 접하게 되면 사람은 좀 더 깊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는 이제까지 행복하게 사는 것만을 추구했지만 왜 사느냐, 사람은 무엇을 위해서 사느냐, 왜 죽지 않고 살아야 되느냐? 이것은 돈으로도 해답을 얻을 수 없고 철학으로도 해답을 얻을 수 없고 결국은 종교적인 질문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종교에 대해서 생각하려고 한 게 아니에요. 사람이 그저 행복하기를 원하고 또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고 그러나 그것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다 보면 결국은 하나님에 대한 주제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또 사랑이라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인간이 제일 목말라 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모든 사람은 사랑을 원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제일 괴로워하고 상처를 입는 것은 사랑의 부족입니다. 인간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것은 사랑이고 가장 불행하게 하는 것은 사랑의 결핍이에요. 양식의 결핍이 아니라 사랑의 결핍이 더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여기에 모순이 있습니다. 인간이 제일 원하는 것은 사랑이지만 제일 힘든 것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것이 모순 아닙니까. 우리가 제일 힘들어하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해 보셨습니까? 아주 힘듭니다. 사랑하기에 인간은 너무 못됐습니다. 못된 인간들 많습니다. 자식에서부터 시작해서 같이 사는 배우자로부터 해서 ‘이웃을 사랑하라’ 예수님이 그 말씀만 안하셨다면 예수님을 믿기가 쉬울 텐데. ‘네 원수를 사랑하라’ 도대체 예수님은 그걸 우리가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시고 말씀하셨을까. 사랑이라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여기에 모순이 있습니다. 

인간이 제일 원하는 것이 사랑이지만 제일 힘든 것이 사랑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죄의 증거를 보게 됩니다. 죄라는 것을 다른데서 찾을 필요 없어요. 바로 여기에 죄의 증거가 있는 것입니다. 부인할 수 없는 죄의 증거입니다. 사랑을 원하지만 사랑의 결핍, 사랑의 불실천, 여기에 부인할 수 없는 죄의 증거가 있는 것이고 그리고 이 갭을 메워주기 위해 하나님이 사랑을 실천하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할렐루야! 인간이 가장 처절하게 실패하는 면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도움을 베풀어 주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소위 불경건한 것, 또 육신적인 것, 비종교적인 것, 이런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멀고 그런 일에는 하나님이 없다 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육신적이고 비경건한 그런 것에는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제일 먼 동네다, 이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손오공이 한참 구름을 타고 날아갔는데도 여전히 부처님의 손바닥 안에 있었던 것처럼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멀리, 멀리 갔다고 생각해도 거기에도 하나님이 계십니다. 아주 놀라운 사실입니다. 

흑인영가 중에 ‘He's Got the Whole World in His Hand’라는 곡이 있습니다. 얼마나 손오공적인 표현인지 몰라요. ‘He's Got the Whole World - 그분은 모든 세상을 당신이 손 안에 갖고 계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자기 스스로는 여기는 하나님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더라도 이미 하나님이 와 계세요. 

마치 무엇과 같으냐면 사람이 물을 멀리할수록 목이 마르는 것과 같은 원리에요. 물을 멀리할수록 물이 생각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물이 생각납니다. 목마릅니다. 하나님을 멀리할수록 하나님이 더 그리워집니다. 다만 본인은 그것이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건지 모르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불편하고 고독하고 평강이 없고 흡족하지 않고 또 불안하고 그건 인간이 하나님을 목말라한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을 목말라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엉뚱한 데에서 만족을 얻으려고 합니다. 

저는 신학교 다닐 때 어느 교수님의 강의를 잊을 수가 없는데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윤락가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실제로는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이다.’ 

충격적인 얘기지만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친밀함과 또 쾌락과 사랑을 추구할 때 결국은 그것이 하나님을 통해서만이 만족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추구하는 이런 모든 것, 쾌락,평강,사랑, 친밀함 등, 이런 것은 결국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가기 전까지는 아무리 이런 것을 추구해도 늘 목이 마릅니다. 

예수님 말씀에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셨어요. 탕자가 아버지 집을 떠나니까 아버지가 그리워지고 아버지 집이 생각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 집을 떠나면 아버지를 마음속에서 배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버지 집을 떠나니 거기서 더 생각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이 바로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려가 자리를 펼칠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음부는 하나님이 없는 곳 같은데 음부에 내려가 자리를 펴도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다, 하나님을 피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음부에 가자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건 멀리, 멀리 괴로운 길을 돌아서 궁극적인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쉽고 빠른 길을 가는 사람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할렐루야! ‘멀리 멀리 갔더니 괴롭고도 고달파’ 이러지 말고 ‘주님이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 주 예수 앞에 나갑시다’ 이것이 지혜로운 인생인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도 어차피 하나님께 돌아오게 돼 있는데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라면 쉬운 길로 오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지옥과 천국의 차이점은 지옥은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곳이고 천국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 곳입니다. 지옥은 하나님이 그리운 곳이고 천국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곳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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