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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는 죄를 다스릴 찌니라 (창 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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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죄를 다스릴 찌니라 (창 4:1~12)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 찌니라” (창세기4:7)
                  
이 세상의 모든 사건은 죄의 사건입니다. 죄가 만들어 놓은 삶의 형태들이 우리 인간들을 주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죄의 역사가 인간 삶의 내용에 얼룩져 있습니다. 더구나 사람들은 이 죄의 역사를 즐기고 탐닉하고 있다는데 심각한 위기가 있습니다. T.V 뉴스를 보아도 죄가 만들어 놓은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가 다반사이고, 드라마를 보아도 죄가 만든 불륜이나 갈등의 주제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이러한 것들을 감상하며 즐기고 있습니다. 

인류의 처음인간 아담과 하와에게서 가인과 아벨이라는 아들들이 태어났습니다. 형 가인은 농사짓는 사람이 되었고 동생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인류의 처음 가정에 살인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형 가인이 들에서 동생 아벨을 쳐 살해한 것입니다. 이것은 죄가 만들어낸 역사입니다. 죄의 능력이 인간을 살해하는 불행한 결과를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가인에게 경고하셨었습니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어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7절) 새 번역 성서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네가 올바르지 못한 일을 하였으니,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죄가 원하는 대로 따라갔습니다. 죄를 다스리지 못하여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죄가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원하는 대로 우리를 지배하고자 하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를 다스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죄를 다스리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마음을 돌이키라는 것

가인과 아벨은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은 기뻐 받으셨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유는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7절)는 말씀에서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물을 받으실 수 없는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가인의 제물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만한 것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인이 드린 제물이 하나님께 선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과는 거리가 먼 제물이었던 것입니다.
  
가인은 이러한 결과에 실망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찾아 돌이켜 하나님께 합당한 모습으로 회복시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분한 마음을 가졌고 하나님께 인정받는 동생을 향해 미워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멀어져 가는 마음으로 일관했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과 멀어졌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마음은 어두움이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죄의 역사가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급기야 죄가 원하는 대로 지배되어 동생을 살해하는 악을 행하고 말았습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죄는 하나님의 의도에서 벗어나는 것과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바로 죄의 역사입니다. 인간의 고통과 괴로움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데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이 말씀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사람들에게 하나님께로 가까이 오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로 나아올 수 없는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속죄하심으로 하나님과 하나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아가는 우리는 결코 하나님과 멀어지는 삶을 살아서는 아니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삶은 어두움의 삶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롬13:12)고 했습니다. 그리고 빛을 따라 행하라고 했습니다. (엡5:11)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삶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 고 했고,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5:19)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죽은 자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삶은 어두움의 삶이 아니고 빛의 삶입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니고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사는 삶입니다. 죽은 자의 삶이 아니고 생명의 삶입니다. 세상과 하나 된 삶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된 삶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구원받아 하나님과 하나 된 우리는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죄를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마음에서 벗어나십시오. 

  
불평, 분노, 시기와 변명의 모습을 벗어나라는 것

가인은 하나님 앞에서 선을 이루지 못한 자신의 모습에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불평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멀어져 갔습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동생의 제물은 받으시고 자신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심에 대해 안색이 변할 정도로 분노했습니다. 심각한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떳떳이 고개를 들지 못하는 죄책감의 감정은 가인의 바른 의지를 무너뜨렸습니다. 불평과 분노와 죄책감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동생 아벨에 대한 시기와 미움의 감정을 일으켰습니다. 미움은 가인으로 하여금 동생 아벨을 살인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동생을 살해한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는 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라고 하면서, 책임을 회피하는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가 원하는 불평과 시기, 살인을 만들어 내는 분노와 뉘우치지 못하는 책임회피의 변명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불평과 분노와 시기와 변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현실을 불평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왜, 분노하며 살아야 합니까? 왜, 시기하며 질투해야 합니까? 왜 모든 잘못에 대하여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습니까? 이러한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데서 나타나는 감정들입니다.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것에서 벗어나라는 말씀입니다.  
  
어느 날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베를린 교외의 한적한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이든 노인과 스쳐 지나게 되었습니다. 대왕은 그 노인에게 물었습니다. ‘노인은 뉘신지요?’ 그러자 노인은 대답하기를 ‘나는 왕입니다’ 노인의 대답에 깜짝 놀란 프리드리히 왕은 ‘왕이라고요? 그럼 어느 나라를 다스리고 계시오?’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몸의 나라입니다. 나 자신을 다스리니까 이것이 곧 통치하는 것과 같지요. 그리고 또한 내 마음이 명령한 대로 움직이니까 나는 신하가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불평과 분노, 시기와 변명을 다스리는 통치자입니까? 아니면 이러한 것들에 지배되는 신하입니까 ?
  
바울은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갈4:7) 고 했습니다. 우리는 죄가 원하는 불평과 분노와 시기와 변명의 종에서 벗어나 감사와 평화와 겸손과 책임을 다하는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소유해야 합니다.  

  
불행한 결과를 만들지 말라는 것
  
죄가 원하는 대로 동생을 죽인 가인에게는 저주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땀을 흘려 밭을 갈아도 거두어들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수고의 보람과 가치를 잃어버렸습니다. 기쁨과 평안을 잃어버리고 유리하며 방황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가인은 선과 악의 갈등에서 죄가 원하는 대로  따라감으로 불행한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결과를 만들어가고 있느냐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혹시 불행한 결과를 만들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주의 인생을 살아서는 아니 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삶을 다스리며 극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너의 죄를 다스릴지니라.’는 말씀입니다.
  
다윗은 달밤에 목욕하고 있는 우리야의 아내를 보자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그 여인에게 음욕을 품고 그 여인을 범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야를 죽이고 그 여인을 자기의 아내로 차지했습니다. 아름다움에 매료되는 것이 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음욕의 자리이며 그 음욕을 채우도록 행동하게 하는 죄가 도사리고 있는 그곳까지 다가서는 것은 결코 아니 됩니다. 결국 다윗은 죄를 다스리지 못함으로 불행한 결과를 만들고 마는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어느 오후 두 아이가 바닷가 바위 위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노는 재미에 정신을 빼앗겨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느덧 조수가 밀려와 주위가 바닷물로 휩싸였습니다. 아이들은 오도 가도 못하고 바닷물에 잠길 위험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무서워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때마침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어부가 이 광경을 보고 배를 타고 재빨리 노를 저어 와서 바닷물에 쓸려가기 직전, 아이들을 구해낼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불행한 결과가 다가옴에도 정신을 잃고 바위 위에서 놀고 있는 어린아이들과 같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불행한 결과를 만들어 가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우리를 축복하시는 행복한 삶을 만드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레이몬드 릴리라는 난폭하고 악한 흑인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흑인 청년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이 불만스러웠고 주위의 모든 것들이 못마땅했습니다. 잘사는 사람들을 보면 증오감이 앞서고, 자기가 이렇게 된 것은 잘못된 사회와 다른 사람들의 책임이라며 원망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마을에서 거추장스럽고 꼴 보기 싫은 존재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 지역의 목사였습니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존경받는 그 목사를 볼 때 이유 없는 미움과 증오감이 앞섰습니다. 

결국 목사를 죽이겠다고 결심을 하고 붉은 벽돌 한 장을 싸들고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교회에 들어가 보니, 죽이려는 그 목사가 열심히 말씀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교회 뒤 좌석에 앉아 설교를 듣고 있는데, 그 시간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릴리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벽돌로 목사의 머리를 치겠다던 릴리는 자신의 마음을 내리치시는 주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불행한 결과를 만들려고 교회에 들어갔던 청년 릴리의 그 자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수년 후 세계 최고의 자선병원인 시카고의 쿡 카운티 병원에는 가난 속에서 질병에 시달리거나 죽어 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흑인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선한 사마리아의 흑인 릴리’ 라고 불렸는데 바로 그가 과거의 불량아 흑인청년 릴리였습니다.
  
후일 릴리 목사가 하늘나라에 간 장례식 예배당에는 손때가 묻은 붉은 벽돌 한 장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이 벽돌은 보는 사람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습니다. 그것은 목사를 죽이기 위해 들고 갔던 붉은 벽돌이었습니다. 불행한 결과를 만들려고 예배당에 들고 갔던 이 벽돌은, 릴리를 돌이켜 행복한 인생의 삶을 살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감사해, 밤마다 어루만지며 그 위에 눈물을 떨어뜨리며 기도하는 벽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릴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때마다 그 벽돌을 붙들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죄가 만들어내는, 분노의 감정이 지배할 때마다, 시기하는 마음에 사로잡힐 때마다, 불만스러운 감정에 지배당할 때마다, 비겁하게 책임을 회피하며 변명으로 일관하게 될 때마다 벽돌을 붙들고 눈물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죄가 문에 도사리고 앉아 기다리는 것을 느낄 때마다, 죄가 지배하려고 할 때마다, 멸망을 향해 가는 불행한 인생의 되지 않도록, 벽돌을 붙들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아름답고 가치 있고 귀중하며 유익한 삶을 만들어 가기를 원하십니다. 죄를 다스리며 살아가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히12:4) 사도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죄가 원하는 대로 지배당하고 끌려감으로 우리에게 결코 불행한 결과가 찾아오도록 해서는 아니 됩니다.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나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죄를 다스릴 지니라!’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바로 서야 합니다. 
  
죄를 대속해 주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성령의 붙드시는 능력으로 죄와 싸워 이기고 죄를 다스리는 승리자가 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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