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좋은 나무, 아름다운 열매 (마 7:15~20)

  • 잡초 잡초
  • 573
  • 0

첨부 1


좋은 나무, 아름다운 열매 (마 7:15~20)


현대의학에서는 사람이 앓고 있는 병이 약3만 가지 이상이 된다고 봅니다. 그 중에 원인을 알 수 있는 병은 고작 5천 가지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속수무책입니다. 대부분의 원인을 모르니 처방도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더욱 큰 고민은 원인을 안다고 해도 효과적인 처방을 할 수 없는 것이 부지기수입니다. 차라리 눈에 보이는 외상(外傷)은 그 정도가 심하더라도 정확한 치료법이 있기에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보이지 않는 내면의 병이 문제입니다. 딱히 의학적으로 판명 할 수는 없지만 정신적으로 고통이 있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 때문입니다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원인이 보다 깊은 곳에 있고 보다 근본적이고 본래적인 것에 있다고 보는데 결국은 한마디로 영적인 문제입니다. 사람은 그 생각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고민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참으로 생각이 많은 동물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얼마나 생각하며 사는 지 아십니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은 한 5만 가지 생각은 한다고 그랬습니다. 왜 우리가 생각이 많은 것을 보고"오만가지 생각 다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여간 생각이 여간 복잡하지 않은 것이 인간입니다. 고로 같은 사람이지만 무엇을 주로 생각하고 사느냐는 것이 다른 사람을 만듭니다. 

그래서 인간을 그 생각에 따라 다섯 가지의 질(質)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악질적(bad quality)인 인간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이지만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나쁜 질의 사람입니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고 하는 말처럼 사람의 얼굴을 하고서 짐승의 행동을 하는 사람이요, 파렴치한 철면피요, 냉혈한이며, 비정과 무법과 탐욕의 노예가 된 사람입니다. 주로 이런 사람이 살인하고 강도짓하고 유괴범이 되고 방화범이 되는 범죄적인 성향의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저질적(low quality)인 인간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처럼 실제로 질이 낮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속이고 배신하고 음흉한 모략을 즐기고 양심이 혼미하여 한 마디로 수준이하의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질이 낮은 사람의 특징은 교만하고, 독선적이고, 불성실하며 무책임, 무감동의 인간형입니다. 

셋째는 범질 적(common quality)인 인간이 있습니다. 이 말은 보통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위대하지도 않지만 비범하지도 않습니다. 지식수준도, 교양도, 인격과 행동이 일상 보통사람의 경지에 이른 사람입니다. 자기의 설 자리를 알고, 분수를 지키고, 무엇을 해야 하고 안 해야 할지를 분명히 구별할 줄 아는 건실한 상식인 입니다. 온전한 사람이라면 최소한 이 정도는 되어야하는 계층이 범질 적인간입니다. 

넷째는 양질 적(good quality)인간입니다. 문자 그대로 질이 좋은 존재의 인간입니다. 인품이 선량하고, 신용도가 높으며, 책임감이 강하고, 약한 자를 도울 줄 알고, 사회적인 봉사 정신이 강하며 적극적인 자세로 공동체와 이웃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공헌을 하는 사람입니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선량한 사람이요, 안심하고 모든 일을 맡길 수 있는 양심적인 사람이요, 자기만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남을 배려하고 생각할 줄 아는 훌륭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높은 인격 수준을 가졌기 때문에 남에게 존경을 받기도합니다. 사회의 모범적인 표상이 될 만한 인물입니다. 양질 인이 많을수록 사회는 밝고 평화롭고 번영합니다. 사람이 이 정도는 되어야 하겠다는 표준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는 특질 적(super quality)인간이 있습니다. 인간 중에서 가장 탁월한 존재의 인간입니다. 이 특질적인 인간은 하나님의 놀라운 특혜를 입은 생명이며, 신앙 안에서만 가능한 가장 높은 차원의 그런 인간의 모습입니다. 영적인 차원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고 나아가야할 삶의 목표이기도합니다. 오늘 우리들은 특질적인 인간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치를 높은 곳에 두고 고민하고 생각해야합니다. 비인간적인 악질이나 저질적인 데 생각이 머물러서는 안 되고 가치 있는 것에 고민하고 행동하는 결단이 있어야합니다. 생각이 건강해야 합니다. 그래야 행동도 건전합니다. 나아가서 영적인 가치도 높아지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사람이란 처음이 좋아야하고 과정도 좋아야합니다. 그러면 결과는 반드시 좋습니다. 

우리나라 속담 가운데"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결과가 좋게 나타날 것은 처음부터 그 기미가 엿보인다."는 뜻으로 보통 사람의 성장과정을 통하여 나타나는 모습과 그 결과를 말할 때 자주 쓰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성장의 시작이 잘못 되어서 올바르지 못할 때 이 말에 반하여 하는 속된 말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싹수가 노랗다."는 말입니다. 이미 싹이 말라 비틀어져서 잘 자라기도 틀렸고 좋은 열매를 기대하기란 더욱이 어려운 나무처럼 그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보람이란 없다는 체념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이렇게 된다면 이건 불행입니다. 기대할만한 열매가 없다는 것은 비참한 일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주님께서 하시고자하는 말씀이 바로 우리가 좋은 나무가 되어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좋은 나무에 아름다운 열매>는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이자 간단한 이치입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고, 많이 심으면 많이 거두고, 적게 심으면 적게 거둔다는 것은 원리입니다. 그러나 이 간단한 이치를 거스르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운 것입니다.<불한당(不汗黨)>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문자 그대로 땀을 흘리지 않는 무리들입니다. 나는 수고하지 않고 남이 땀 흘린 것을 빼앗아 쓰겠다는 도적 심보요, 강도와 같은 사람을 불한당이라고 합니다. 사람이란 진실을 심고 그 열매를 기다려야 옳은 것이지 거짓을 심고 옳은 열매를 얻겠다는 것은 강도요, 도적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잘 생각해보면 열매 맺는 참 원리를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무작정 좋은 열매를 맺고자 하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있습니다.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나무는 가시나무인데 열매는 포도를 따겠다니 말이 됩니까? 나무는 엉겅퀴 나무인데 열매는 무화과를 따겠다는 이 심보는 무엇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열매부터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나무를 먼저 말씀하십니다. <열매>가 그 사람의≪행위≫라면 <나무>는 그 사람의 됨됨이, 즉 ≪인격과 성품과 기질≫을 말합니다. 깊이 생각해 볼 교훈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행동부터 바꾸려고 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속사람이 변하면 행동은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의<행동>을 고치라고 말씀하시기 이전에<사람>이 먼저 바뀌라는 예수님의 교훈을 얻게 됩니다. <인격>이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속사람은 여전하면서 행동만 바꾼다고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건 가식입니다. 절대로 오래가지 못합니다. <탐스러운 포도열매>를 그럴싸하게 내보이면서 <가시나무 됨>을 숨기려 하지 말고 열매 이전에 나를 <포도나무>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화려하고 예쁜 무화과>를 보이면서 <엉겅퀴>인 자신의 모습을 감추려들지 말고 근본적으로 나 자신을 <무화과나무>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이 못된 짓을 하는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하시면서 이 거짓말쟁이들을 만나는 것조차 엄격히 삼가라 하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중요한 것은 보이는 열매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나무됨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세상에서는 보이지 않는 중심이 변하는 것보다는 보이는 겉모습이 바뀌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고 인정받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더 알아주고 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빠지지 말아야 할 유혹입니다. 소위 화려한 열매만을 세상은 즐겨 따먹습니다. 그러나 학교 교육으로도, 또 다른 어떤 고등 교육으로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의 <인간성>입니다. 사람의<됨됨이>는 어떤 환경으로도, 조건으로도 바꾸어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내 지식, 내 의지, 내 성품, 내 고집으로부터도 열매는 맺힙니다. 

그러나 맺힌 그 열매가 과연 무엇입니까? 다시 한 번 생각을 가다듬읍시다. 이것으로는 안 됩니다.
자, 그런데 나무 이전에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좋은 씨앗>이 뿌려져야 그로부터 <좋은 나무>가 있고, 좋은 나무가 되고야 <좋은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또 교훈이 있습니다. 심는 것은 선택이요, 자유입니다. 그러나 추수하는 것은 심판이요, 보상입니다. 사람이란 꼭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불가피하게 악을 심었으나 웬만하면 악을 거두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지만 꼭 거두고 맙니다. 이것은 <심판>입니다. 

반면에 좋은 씨앗을 뿌려놓고 나는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언젠가는 반드시 좋은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이것은 <은혜>입니다. 문제는 내가 악한 열매를 심었기 때문에 악한 것을 거두는 것이고 선한 열매를 심었기 때문에 아름다운 열매를 거두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무 이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우연은 없습니다. 환경이나 분위기를 탓할 것도 없습니다. 환경과 조건은 때로 빠르게 하고, 느리게 하며 많게 하기도하고 적게 하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씨를 바꾸거나 나무를 바꿀 수는 없는 것입니다. 햇빛이 콩 나무를 팥 나무로 바꾸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바람이 가시나무를 포도나무로 바꾸어 놓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환경과 조건이라는 것은 이런 것일 뿐입니다. 중요한 건 내가 좋은 씨앗이 되고 좋은 나무가 되는 것이지 그 외에는 탓할 것이 못 됩니다. 

나아가서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봅니다. 과일나무는 심어만 놓는다고 해서 좋은 열매를 맺히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열매를 수확하기 위해서는 이른 봄부터 가지치기를 해야 하고 거름을 주어 가꾸어야합니다. 나무의 모양을 만들고 열매가 충실히 맺힐 수 있게 곁가지는 모두 잘라야합니다. 비록 제대로 심겨진 나무와 같다고 할지라도 자라면서 필요 없는 곁가지는 잘라내듯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불필요한 가지들은 가지치기를 해야 합니다. 농업에서는 이것을 <적과(摘果)>라고 합니다. <열매솎기>라는 뜻입니다. 적당히 열매를 솎아내지 않으면 열매의 크기도 작을뿐더러 많은 열매들의 무게 때문에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가지치기>와<열매솎기>는 아름다운 열매를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일들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필요 없는 곁가지들은 어떤 것인지를, 신앙생활의 아름다운 모양을 해치는 삐져나온 가지는 없는지를... 좋은 열매를 위해서는 좋지 않은 열매를 과감하게 솎아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좋은 나무가 되지는 못하고 아름다운 열매만을 구하고 속은 텅 비어 있으면서 겉으로는 너무 많은 것을 나타내 보이려고 한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우리는 간혹 수많은 곁가지와 작고 부실한 열매들을 신앙의 결실이요, 혜택이라고 착각할 때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먼저 좋은 씨앗과 좋은 나무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고야 아름다운 열매가 있을 것입니다. 포도나무에서 포도를 얻고, 무화과나무에서 무화과를 얻는 이 진리를 따라 <좋은 나무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신앙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