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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각하며 사는 사람 (고후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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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며 사는 사람 (고후 10:5)


‘사람이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물음은 사람이 삶을 살아가는데 절실히 생각하는 삶에 대한 일컬음이요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인간됨의 근본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인간존재의 이유를 알게 한다. 그 앎은 곧 삶의 의미로 이어진다. 그 앎은 살아가는 생각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무엇 때문에 인생을 살아가는 것일까? 하는 이유를 칸트가 이 질문을 던졌고 소크라테스가 이 질문을 말한다. 

칸트는 인간을 이성으로 사는 존재로 긍정하고 그의 도덕철학은 인간존엄성을 강조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의 문제를 제시 하였고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당시 고대 그리스에 주요한 학문의 경향이나 사람들이 향유한 문화가 감각적 경험과 유용성을 중시하여 사람들이 주로 자신들의 경험만이 진리인 것처럼 알고 있었다. 

여기에 소크라테스는 사람이 살아가는 삶에 있어 가장 행복하며 사람다운 삶은 세속적인 성공이 아니라 참다운 진리를 생각하고 행하는 것이 지고의 선으로 알고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하였다. 그의 이 말은 스스로의 무지를 자각하여 진정한 생각을 위한 진리의 말임을 아는 것이다. 즉 사람은 자신의 눈앞에 이익에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생각하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함인 것이다. 아마 누구나 자신의 일생에 한번쯤은 진지한 마음으로 자기 인생에 대하여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 왔음을 알게 한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것을 잊은 채 현재의 삶에만 보고 허덕이며 살고 있다. 그러기에 ‘사람은 생각하며 살아가야 한 다’. 사람들은 생각하기 전에 먼저 느끼고 감각한다. 

이러한 것을 파스칼은 사람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다. 그런데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생각하는 갈대가 아니라 생각을 아니하는 갈대가 아닌가? 하는 우려의 마음을 가진다. 지식은 많아도 지혜는 적다. 공연히 바쁘기만 하고 조용한 자기 시간을 갖지 못한다. 어지러운 경험의 혼돈은 있어도 정연(整然)한 생활의 양식은 부족하다. 이러한 진지한 문제들을 알지 못하고 나름대로의 자기 삶에 방향도 생각도 없이 마냥 살고 있지 않나하는 마음 지워 버릴 수가 없다. 살아 있음을 존중한 슈바이처는 일찍이 이러한 병리현상을 진단하기를 ‘현대인은 무(無)사상이다. 

현대인은 자기의 사상을 갖지 않는다. 진리에 대한 감각도 잃어버리고 진리를 추구하는 말도 상실하고 그저 무사상인 채 취생몽사(醉生夢死)하여 여러 가지 의견 또는 논리를 이리저리 부동(浮動)하고 있다’고 한 말은 우리의 삶의 모습을 잘 나타내는 말이라 생각한다. 사람이 생각이 없으면 마음도 없다. 생각이 없으면 존재도 없다. 한 예를 들어 들판에 핀 한 떨기 들국화와 하나의 돌멩이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사람은 자기의 필요에 따라 그것을 본다. 들판에 핀 들국화와 돌멩이는 사람이 그것을 생각하든 그렇지 않든 존재하는 객관적인 한 실재임은 확실하다. 꽃을 사랑하고 그 꽃을 통해 기쁨을 느끼는 사람에게는 들국화가 중요하게 생각되며 새나 토끼를 잡아서 먹고 사는 사람에게는 들에 놓인 돌멩이가 중요하고 값이 있는 것이 된다. 

이렇게 인간은 생활을 위해 물질을 이용하면서 그 물질이 그 자체로서 무가치한 것이 아님을 안다. 인간에게서 생각을 제거하면 일체의 현실이 사라진다는 주장은 객관적 세계를 무시하고 인간만을 중심으로 보는 주관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여기서 인식해야 한다. 사람이 주관론에 사로잡히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되어버림도 아는 것이다. 생각해 본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태양, 지구, 강과 산, 동물과 식물 등의 자연과 가정, 직장, 국가, 민족 등의 사회는 바로 우리의 생각 밖에 독립하여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로 물질을 이루고 있고 그 물질은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근원임도 알아야 한다. 

또한 눈을 들어 우주를 보며 생각해 본다. 그 가운데 작은 점 하나가 인류가 사는 지구이며 사람은 바로 여기에서 태어난다. 이 한 생명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 그리고 거기에 관계되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선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들을 안기게 된다. 또한 인간생명은 무형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유형에서 비롯된 것인가? 하는 문제 전개는 서양철학에 있어 피타고라스라든지, 플라톤, 그리고 데카르트에 이르기 까지 현상과 본질이라는 차원에서 만유를 설명하려 했다. 즉 드러난 유형의 세계와 드러나지 않는 무형의 세계를 나누어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 이 둘은 양분되었다. 무형의 세계를 다룬 분야는 종교이었고 유형의 세계를 다룬 분야는 과학이었다. 그러나 지금 현대에 와서 종교는 과학에서 과학은 종교에서 서로 답을 구하고 있음을 안다. 이러한 이론은 ‘나’라고 하는 존재는 ‘남’이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은 우주가 있기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고 내가 있기에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는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그리하여 ‘신은 세계를 만들고 세계는 신을 만든 다’라는 말이 있다. 사물이 맨 처음에 어떻게 생겨났느냐를 물을 때 유형의 세계에만 치우친 생각으로 답을 찾으려 한다면 답을 찾을 수가 없다. 

즉 과학적인 생각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마음이 분명히 있지만 이것을 증명할 수가 없음을 아는 것이다. 우리가 상대의 마음을 알려고 할 때 그 사람이 하는 말과 행동을 본다. 즉 말과 행동이 곧 마음이기 때문이다. 한 생명의 태어남의 의미는 눈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과 생각을 같이 하여야 함을 알게 한다. 고로 인간의 삶의 목적은 우주의 목적과 같은 것이다. 인간의 삶의 목적은 인간의 생명을 같이하는 우주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생각하며 살아야 한 다’는 사실은 인간이 어떻게 존재 하는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 된다. 

인간의 존재이유를 묻는 것은 인간보다 뛰어나고 초월한 존재가 어떤 이유로 인간을 만들었고 우주를 만들었는가? 를 생각해 보는 신앙적인 믿음의 대답이 있어야 함을 알게 한다. 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살지 못 할까? 진정한 삶을 누리지 못 할까? 왜 살아가는데 많은 문제를 가져야만 하는가? 그것은 인생의 근본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인 것이다. 사람을 만드신 분은 부모가 아니다. 부모는 자녀를 설계하고 제작할 능력이 없다. 생각이 없는 자연이 고도의 지능을 가진 인간을 만들 수 없다. 사람은 우연하게 태어난 것이 아니다. 천지 만물을 만드신 창조자가 계획을 가지고 모태에서 부터 설계 제작한 것이다. 어린이가 부모를 떠나면 불안 하듯이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면 항상 불안하고 문제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것은 죄를 얻음이다. 죄를 얻은 인간은 불안, 초조, 그리고 절망이다. 그리하여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절망이라고 했고 절망은 곧 죄를 말하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근대 철학적 사고의 굳건한 기반을 세운 인물이다. 그는 의심하고 의심해 보아도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는 명제를 찾기 위해 눈앞에 보이는 자신의 육체도 그리고 신도 모든 것을 의심하고 부정해 보았다. 이를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懷疑)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는 이 과정을 거쳐 부정할 수도 의심할 수도 없는 명제를 발견한다. 

그의 결론은 자신의 의식에서 부터 주관적 관념론의 바탕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 한다’는 명제가 나온 것이다. 이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다른 것과의 차이를 생각하다보니 자신의 존재를 무엇보다 스스로 존재인식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존재란 자신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있다(존재)’는 그것 자체가 가치가 있음을 알게 되어 생각하게 되는 것이라 한다. 이 생각의 깨달음의 과정 속에서 새로운 가치발전을 찾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부정하여도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것은 곧 생각하는 내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음을 안다는 것이다. 

여기에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 한다’는 이 생각의 상태가 내가 있다는 뜻임을 아는 것이다. 사실 데카르트는 신실한 신앙인이었음을 알게 된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존재의 궁극적 관심으로 생각을 가진다. 그가 서거하기 2년 전 1963년 봄 산타바바라 켈리포니아대학교 켐퍼스에서 각각 전공이 다른 18명의 대학원 학생들과 의미 있는 세미나를 가졌다. 거기에 중심 화두는 ‘궁극적 관심’이었다. 종교는 궁극적인 관심이요 신앙이란 관심에 붙잡힌 상태라고 한다. 

그리고 궁극적 관심은 히브리인들이 모세종교의 쉠마라고 말하고 예수가 모든 율법과 예언자 가르침의 총괄적 요체라고 말하는 것 곧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히브리적 경건과 영성의 핵심 요체에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라는 사랑하는 그 마음의 태도, 전인적 인간존재의 의지지향성과 진지하고 성실한 마음상태를 표현하는 말이 ‘궁극적’이라는 말이고 ‘관심’은 신앙대상에 대한 신뢰, 고백, 헌신, 경외 등 모두 ‘관심’의 형태라고 생각해 보게 한다. 

이 궁극적 관심은 나의 생명이 ‘존재이냐 비존재이냐’(to be or not to be)가 결정되는 중요한 일에 관여함을 말한다. 말하자면 살아있으나 실제로는 죽은 것과 다름없는 무의미한 존재 곧 의미상실의 삶이 되느냐 혹은 생물학적으로는 생존박탈 경우가 될 런지 모르지만 실존적으로는 참으로 사람답게 살고 영원히 사는 존재긍정, 존재실현, 존재향유의 삶이 되느냐 못되느냐의 문제인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 존재실현의 가능을 향유하기 위해 독일 출신 유대인 에리히 프롬은 그의 말년에 그가 저술한 “소유이냐, 존재이냐”에서 현대사회의 인간존재의 문제에 대한 그의 사상을 총 집결한 책에서 그는 인간의 생존 양식을 두 가지로 구별한다. 

‘소유양식’으로 재산, 지식, 사회적 지위, 권력 등의 소유에 전념하는 소유양식과 자기능력을 능동적으로 발휘하며 삶의 희열을 확신하는 ‘존재양식’인 것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는 주체와 객체가 물건으로 환원되는 죽은 관계인 소유양식이 존재양식을 압도해서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양식이 됨에 따라 현대문명이 좌절했다고 말함에 주의해 본다. 그의 이러한 사회비판은 가진 것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현대 사회를 지적한다. 

그리고 많이 가질수록 행복해 지려고함을 지적하면서 그는 소유하는 삶의 양식에서 벗어나는 몇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는 무한한 성장보다는 필요에 의한 선택적인 성장을 지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둘째로 물질적 이익보다는 정신적 만족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중시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내면적인 생각에 삶의 중심이 있다는 의미를 알게 한다. 셋째는 사람들은 기본적인 삶의 안정을 보장받아야 하며 주체적인 결단에 의한 삶을 살아가야 함을 말한다. 조직이나 제도에 휩싸이지 말고 각자의 주체적인 판단에 따라 생각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제반 이러한 많은 철학들의 논제를 생각해 보면서 ‘사람은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삶의 뜻은 폴 틸리히가 말 한대로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은 존재론적 가능성과 현실성은 인간 실존을 포함한 모든 존재자들이 ‘존재자체’인 자기존재의 이유와 근거인 원동력에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 속에 있음을 생각하게 하고 ‘무제약적 포괄자’가 능동적으로 인간에게 ‘초월경험’을 하도록 자기를 내어주며 존재에로 불러내는 인간의 동반적 유인자의 의도를 알게 함에 유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틸리히의 ‘궁극적 관심’에 인간이 사로잡힐 때 분열된 자아는 통전되고 상처 난 마음은 치유되는 경험을 하게 되며 그리고 소외되고 분열된 것을 재결합시키고 치유하는 존재의 능력은 ‘사랑’에 있음을 주목하는 것이다. 

신을 비상징적으로 말한다면 ‘존재자체’라고 말하지만 가장 의미 있는 상징적인 말은 ‘하나님은 사랑이다’는 말임을 간증하게 한다. 결국 인간이 ‘궁극적인 관심’에 붙잡히면 먹구름 사이로 맑고 청명한 하늘과 햇빛을 보듯이 인간의 모호성이 극복되는 ‘존재의 은총체험’, ‘새로운 존재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이 신앙은 구원체험, 은총의 현존체험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성서는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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