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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벽에 승리 (시 57: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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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승리 (시 57:6~11)
  

정말로 가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젯밤 한 시 즈음에 잠을 자려고 하는데 빗방울 소리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진짜로 내일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 기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알람시계를 맞추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무래도 불안했어요. 두 시간 후에 일어날 자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다시 일어나서 책을 보면서 두 시간을 채운 뒤 새벽 3시에 준비를 하고 20분에 집에서 나왔습니다. 혼자서 무서웠지만 만원을 손에 쥐고 택시를 탔습니다.

‘아저씨, 강남역이요.’

택시를 타보니 기본요금이 1,920원으로 시작을 하더라고요. ‘잉!, 어쩔 수 없지. 하나님 5,000원만 넘지 않게 해주세요.’ 그런데 요금이 200원씩 쑥쑥 올라가더라고요. 아직 한강도 안 건넜는데, 6천원, 7천원이 훌쩍 넘어갔어요. 제발 10,000원만 넘어가질 않기를 바랐습니다. 드디어 성수대교를 건너서 신사역 즈음 왔는데 요금은 벌써 9,600원이 되었지 뭡니까? 눈물이 나올 것 같았어요.어떡하지?

‘아저씨 저 만원 밖에 없어요. 그냥 여기서 내려주세요.’

교회로 진짜 걸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택시 기사 아저씨가 괜찮다고 아직 멀었는데 어떻게 여기서 세워주느냐며 강남역까지 데려다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휴, 감사합니다.’

그렇게 아저씨의 도움으로 강남역에 무사히 도착을 했습니다. 앞자리에 앉고 싶은 마음에 3시 50분 즈음에 본당에 들어갔는데 그 시간 이미 본당 1층은 꽉 차 있더라고요. 간신히 1층 한 구석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아,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하나님, 어찌하여 저는 이렇게 힘이 들게 오게 하셨나요? 하나님이 저를 진짜로 사랑하셔서 힘들어 하는 저에게 은혜를 부어 주시려고 주님의 임재를 느끼게 해주시려고 모자란 택시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여기까지 태워주셨군요.

정말로 황홀한 새벽기도였습니다.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상의 글은 서울 사랑의 교회의 이민영성도가 40일 특새 동안에 받은 은혜의 수기입니다.

이 글을 읽다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달려가려고 노력하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신앙의 고백’
‘새벽을 사랑하는 자에게만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의 황홀한 사랑의 고백’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내 일생의 삶 속에서 새벽예배에 참석하려는 한 가지의 마음 때문에 새벽에 일어나지 못할 것에 대한 염려로 인해 밤을 새우며 새벽을 기다려 본 경험이 있습니까?

제가 가끔 우리나라의 청년 사역의 주자로 소개하는 서울 삼일교회의 전병욱목사를 많은 분들이 익히 아실 것입니다.

전병욱 목사가 여러 책을 썼는데 그의 활동의 가장 전성기는 아마도 그가 낙타무릎이라는 책을 썼던 1996년 이후 1999년 새벽 무릎이라는 책을 쓸 때까지가 가장 열정적으로 사역을 할 때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평가합니다.

바로 이 시기가 청년 사역의 물꼬가 터졌던 때로 기억을 하고 저 역시 파주에서 청년 사역에 심혈을 기울였던 때가 바로 이 때였습니다.
목사가 부러워하는 대상의 목사가 있다는 것은 그리 나쁜 일 아니라고 봅니다.

목회 성공이라는 것 때문에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가지에 미쳐서 사역을 하는 목사를 볼 때 부러운 것이 사실인데 1999년에 출간된 새벽무릎이라는 책의 에필로그에 기록한 그의 글을 읽으면서 정말로 부러워했던 적이 있습니다.

제가 읽고 부러워했던 부분을 소개합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곳은 경남 통영이다. 지금 400명의 선교대원들이 통영과 거제 지역의 70개 교회에 파송되어 복음을 증거 하고 있다. 1주일의 사역을 통해서 5000명의 결신자를 얻는 꿈을 가지고 뛰고 있다. 사람들을 붙들고 땀을 흘려가며 복음을 전하는 형제의 모습이 보인다. 남루한 아저씨를 붙들고 30분이 넘게 눈물을 흘리며 복음을 증거 하는 자매가 보인다. 시장의 한 복판에서는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 가득하리라’ 라고 찬양하는 찬양 소리가 들려온다. 주신 축복을 사명으로 여기고 뱃놀이 하는 교회가 아니라 사람을 낚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지금도 땀을 흘리며 복음을 증거 하고 있는 삼일의 젊은이들이 그리고 이와 똑같은 정신으로 사마리아와 땅 끝을 누비는 새벽이슬 같은 젊은이들이 나는 자랑스럽다.”  

저는 이 글을 설교의 원고에 삽입하는 지금 이 순간에 온 몸에 성령의 충만의 임재를 경험하는 소름이 온 몸에 돋았습니다. 그리고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원고를 쓰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새벽을 깨웠던 젊은이들이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사역하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내가 예수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교회 안에서의 무엇이 되었느냐가 아니라 받은바 은혜 때문에 바깥문에서 그 은혜를 전하며 예수의 심장으로 사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느꼈기 때문입니다.

안정적인 조직교회에서 목회를 하며 자칫 잘못하면 나 역시 기득권의 편리함에 빠져 안일하게 나태하고, 움직이지 않고, 매너리즘에 빠져 세월아, 내월아 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목사이지만 아직도 부족한 종의 심령에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은혜가 이렇게 현장에서의 승리를 볼 때마다 가슴이 뛰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은혜에 눈물겨워하는 영적인 목마름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이러한 뜨거운 하나님의 은혜를 목도하며 그 은혜에 들어가는 첫 번째의 관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새벽예배에 관한 제목 설교를 준비하여 우리 교우들 앞에 섰습니다.

앞서 언급한 삼일교회는 새벽에 3시부터 택시들이 몰려드는 교회입니다.

지금도 대한민국의 50,000교회 중에 새벽예배에 목숨을 걸고 있는 교회가 바로 장년 중심의 교회가 아닌 청년 대학생들 중심의 교회인 삼일교회입니다.

이런 새벽예배의 승리는 곧바로 우리들의 생활전반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승리로 연결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오늘 저는 우리 교우들과 ‘새벽승리’ 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은 시편의 구조 중에 탄원시와 찬양시가 함께 들어 있는 대표적인 시 중에 하나입니다.

1-6절은 시인이 하나님께 자신의 고통을 탄원하는 구조의 내용이고, 오늘 본문 6-11절은 갑자기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의 구조로 바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57편의 부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믹담 시 인도자에 따라 알다스헷에 맞춘 노래. 다윗이 사울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믹담이라는 말은 아직도 무슨 뜻인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일정한 종류의 노래 방식이나 낭송 방식으로 추측합니다. 이렇게 어떤 종류인지는 모르지만 일정한 틀에 맞추어 노래하는 노래였는데 여기에서 ‘알다스헷’이라는 히브리어 ‘tjvT'Ala'’뜻은 ‘너는 멸망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은 사울에게 심한 핍박을 당할 때 스스로 시편 57편을 기록하면서 이렇게 노래를 했다는 말이 됩니다.

‘나는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외침을 하나님께 1-6절까지는 탄원을 하면서,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다시 하나님의 도우실 것을 확신하며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의 배경을 사무엘상 16장부터 31장까지의 역사적인 내용을 토대로 밝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울이 다윗을 핍박하게 된 동기는 권력을 빼앗길 것이라는 강박증이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골리앗과의 전투 이후에 사울에게서 다윗으로 심대하게 이반되는 국민들의 여론에 위기의식을 느낀 사울이 정적이었단 다윗을 죽여야만이 자신의 정권이 아들 요나단에게로 넘어갈 것임을 확신했던 사울이 다윗을 여러 차례 죽이려고 하는 기사가 사무엘하에 실려 있습니다.

그 중에 사울에게 핍박을 당하던 다윗이 정말로 고통을 당하는 일의 압권은 사무엘상 21장에 기록된 가드왕 아기스에게 도피한 사건입니다.

가드가 어디입니까?
다윗이 불과 얼마 전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처단한 골리앗의 고향이 아닙니까?
다윗이 바로 골리앗의 고향인 바로 그 가드로 피신을 하게 됩니다.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땅에는 사울의 모든 정치적인 공권력이 장악을 하고 있었기에 피할만한 한 평의 땅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할 수 없이 가드 땅으로 피신한 다윗은 그곳에서 미친 시늉을 합니다.
왜냐하면 온전한 다윗이 가드로 들어왔다는 가드 왕이 그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은 것은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가드 땅으로 들어온 다윗을 가드 왕 아기스가 그를 경계하여 불렀습니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그 때 다윗이 어떻게 행동을 했는지는 삼상 21:13절이 보고합니다.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그는 살아남기 위하여 원수의 땅, 불과 얼마 전에 할례를 받지 못한 이방의 무지한 자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능멸한다고 단호하게 외쳤던 바로 그 이방의 땅에서 그리고 또 그 이방의 왕 앞에서 미친 척을 해야 하는 수모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장인이었던 사울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극적으로 가드 땅에서 미친 사람처럼 행세하여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윽고 사태가 조금 이스라엘에서 진정되는 기미가 보이자 다시 이스라엘의 아둘람 지역의 한 굴로 피신을 하여 그곳에서 은신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곳도 얼마 후 안전지대에서 벗어나게 되자 이번에는 이방 땅인 모압으로 건너갑니다.
그 때는 혼자의 몸이 아니라 늙으신 부모님들을 모시고 넘어갑니다.
넘어가서 이방의 왕에게 이번에는 늙으신 부모님들의 안전을 위해 무릎을 꿇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수모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부모님들을 위하여 다시 이방의 왕에게 수모를 당하여야 했습니다.
이 뿐입니까?

그는 당시의 자신의 권력에 대한 미약함으로 인해 아둘람 굴에서 짐승 같은 삶을 살아야 했고 죽음의 위기에서 수없이 고비를 넘겨야 했습니다.

이러한 고난을 겪었던 다윗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는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야!’

이렇게 외치면서 하나님께 탄원을 합니다.
은혜를 베푸시옵소서.(1절 전반절)
이 재앙들이 지나가게 하옵소서.(1절 후반절)
삼키려는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주옵소서.(3절)  

이렇게 간절함으로 탄원을 하는 시인은 본문 6절에서 이제는 갑자기 주님을 찬양하는 힘 있는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무엇이라고 찬양을 합니까?
나를 위하여 파놓은 웅덩이에 원수들이 빠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가장 힘찬 찬송의 대목에서 이렇게 고백되어 집니다.
시 57:7-8절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그리고 시인은 자신을 구원해 주실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는 고백을 오늘 본문 9-11절에서 고백을 하며 노래로 끝맺습니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무릇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이 찬양을 들으며 우리는 아주 단순하지만 정말로 큰 은혜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을 느낍니다.
죽음의 고난을 통과하고 있던 다윗이 그 고난을 이기는 방법으로 있는 처소에서 내가 동이 트기 전에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확정하였고 또 그렇게 실천함으로서 결국은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승리의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굴하지 않고 새벽을 깨워 주님께 간구하고, 주님을 찬양하는 것에서 승리의 비결이 있었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두 단어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확정’이라는 단어‘@WK’(쿤)입니다. 또 하나는‘새벽’이라는 단어 ‘rjv'’(샤하르)입니다. 

전자의 단어 ‘쿤’이라는 단어는 ‘막대기를 똑바로 세울 때 세운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내가 어떤 일을 하겠다고 뜻을 세우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새벽을 뜻하는 단어 ‘샤하르’는 여명을 뜻하는 동틀 녘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합쳐서 설명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내가 있는 그곳을 성전삼아 해가 뜨기 전 여명에 주님을 만나겠다는 의지적인 결단을 내렸다는 말입니다.

저는 다윗의 이 고백이 왜 이리도 눈물겨운지요?
왜요?
앞에서 전술했지만 다윗이 사울의 핍박을 당할 때에 거주하던 곳은 이방 땅 가드였습니다.
그곳에서는 미친 자의 행세를 해야 하는 신세였습니다.
침을 흘리며 미친 체를 해야 하는 정말로 기막힌 현실이었습니다.

모압 땅에서는 부모님들을 위하여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의 왕에게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어야 하는 영적 자존감을 타의에 의해서 완전히 꺾어야 하는 신세였습니다.

아둘람 굴은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습기와 박쥐와 최고의 열악함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최악의 조건이 있는 그곳에서 다윗은 그런 모든 상황 속에서 자신의 심령으로 새벽을 깨우며 하나님을 바라보겠다고 결단하며 동이 트기 전에 주님에게 무릎을 꿇으며 나아가고 있음을 오늘 시를 통하여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다윗의 고백을 통하여 내일부터 시작되는 한 주간 동안의 특새에 대한 영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도전을 받고 사역에 동참해야 하는 점을 역설하고자 합니다.

무엇입니까?

* 새벽의 승리는 성도들의 모든 상황 속에서의 승리를 보장한다는 점입니다. 

다윗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악의 조건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에는 앞이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당대의 최고의 권력자 사울의 공권력은 말할 수 없이 강대했습니다.
아무런 물리적인 힘을 갖고 있지 못한 다윗은 그냥 수없이 닥쳐오는 죽음의 고비를 무방비로 넘겨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앞이 보이지를 않는 캄캄한 절벽과도 같은 삶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다윗의 자기의 하나님께서 이 사망의 위기에서 자신을 건져주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57편 2-3절에서 이렇게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그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셀라) 하나님이 그의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동시에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시 23:4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나의 소원을 이루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삼키려는 자의 손에서 구원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구원을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도움이 언제 오는가? 에 대하여 다윗은 아주 단호하게 그 때가 바로 새벽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시 143:8절에서 다윗은 이것을 알았기에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

여기에서 ‘아침’으로 번역된 ‘rqB’(보케르)가 바로 ‘새벽’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다윗은 말씀을 하시며 나를 하나님이 돕는 시간을 새벽이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저는 다윗의 이 고백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는 새벽입니다.

제가 흔히 쓰는 말이지만 새벽에는 하나님께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쏟아 부어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성령의 조명을 가장 많이 받는 시간이 바로 새벽입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건은 모두 다 영적인 시간인 카이로스에 이루어졌습니다.

출 14:24절입니다.
“새벽에 여호와께서 불과 구름 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애굽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출애굽을 하여 홍해를 갈라 애굽의 간섭에서 영원히 해방시킨 시간이 바로 새벽입니다.

수 6:15절입니다.
“일곱째 날 새벽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 성을 일곱 번 도니 그 성을 일곱 번 돌기는 그 날뿐이었더라”

난공불락의 요새인 여리고성이 무너진 7번째 날에 일곱 번 성을 돌 때의 시간이 새벽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새벽에 모든 중요한 일들을 결정할 때 기도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부활을 하셨을 때의 시간은 안식 후 첫날 새벽 미명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그 주님을 만난 시간은 새벽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디베랴 바닷가로 제자들을 찾아오신 시간은 새벽이었습니다.

요 21:4절입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사도행전적인 시대에도 주님의 활동 시간은 새벽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한국교회가 이제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새벽승리 때문이었습니다.

책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부흥사인 빌리 그래함의 어록입니다.

“내가 세계를 순회하면서 캐나다에 간 일이 있었다. 아침에 숲속의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잠을 깼다. 나는 캐나다가 자연의 아름다운 나라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일본에 갔다. 공장이 요란한 엔진소리와 출근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에 아침을 깨었다. 일본은 산업의 나라요 경제의 나라임을 알았다. 나는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에 갔다. 새벽기도회를 알리는 차임벨 소리에 잠을 깼다. 한국은 주님이 지키시는 나라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일본에 의해 여러 가지의 문화, 경제, 사상 등 많은 것을 약탈을 당했습니다. 
6,25 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인하여 전쟁의 폐허 속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 민족 중의 하나가 바로 한국이라는 연구 논문까지 발표되었던 적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아직은 부익부 빈익빈이 팽배해 있고 모두가 잘 사는 나라의 반열에 들어서려면 멀었지만 그러나 그 폐허더미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불과 선교 2세기 만에 선교를 당하는 나라가 아니라 선교를 하는 나라는 전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데 우리나라가 그렇게 보고되는 모델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아십니까?
한국교회의 새벽기도회 때문입니다.
지금은 5시에 모여서 기도회를 하지만 저의 출신교회는 당시에 새벽기도가 새벽 4시였습니다.

오전 4시에 일어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교회마다, 토굴마다, 골방에서, 기도원에서, 그리고 뱀과 늑대들이 우굴 거리던 산에서 오로지 한 가지 이 민족의 승리를 위하여 구국의 기도 제단을 쌓았던 이 땅의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있었기에 한국교회가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인터넷을 통한 교계 포털 사이트에 문화방송에 기고하는 한 진보적인 목회자의 글이 실린 것을 보았습니다.
교회가 하는 말이 세 가지이다. 모여라, 집 짓자, 돈 내라. 
도올이 한 말을 인용하여 교회를 비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국교회가 이런 말을 들을 때 나름대로 반성하는 부분이 있어야 앞으로 미래가 있습니다.

무조건 이런 비판에 반대를 하면 한국교회의 앞날이 건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목사님의 의견에 일견 동의하는 부분이 있지만 그 목사님이 또한 잘못 본 부분이 있음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한국교회가 세 가지 말 밖에는 하지 않는다는 것은 틀렸습니다.
왜 인지 아십니까?
한국교회 중에 역사적인 의식이 없는 교회들은 그렇게 말했을는지 모르지만 대다수의 건강성을 유지하고 있는 교회들은 도리어 이런 말을 더 많이 했습니다.

정직하십시오.
사랑하십시오.
교회 밖에서 더 그리스도인의 빛을 발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대로 사십시오.
불의와 타협하지 마십시오.
공의와 정의가 하수처럼 강물처럼 흐르는 삶을 살도록 하는데 기여하십시오.

그런데 이런 말들과 삶의 태도들이 어디에서 결정되고 언급됩니까?
새벽기도회입니다.
새벽에 입을 열어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한국교회의 능력이 한국교회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여기까지 온 것이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돌보심 때문이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새벽예배의 능력이 나를, 우리를, 우리 민족을 여기까지 오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조금 살 만해졌습니다. 

우리가 시쳇말로 흔히 하는 말로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을 못하다는 말이 가슴에 있는데 한국교회의 성도들을 보며 그 속담이 생각이 납니다.
경남 진해에서 목회를 할 때 김해지역은 같은 지방이었습니다.
김해의 한 전통이 있는 조직교회가 시끄럽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후에 들은 이야기였는데 담임목사가 새로 부임을 했는데 새벽예배를 안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새벽에 성도들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새벽예배를 나오지 않자 목회자에게 항의를 했고 목회자의 답변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새벽예배는 율법이기에 21세기를 살고 있는 신약적인 의미에서 새벽예배는 현대적인 의미로 바꾸든지 아니면 폐지해야 한다는 지론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새벽예배가 율법이라는 이론이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지는 모르지만 백 번 천 번 양보해서 새벽예배가 율법이라고 칩시다.

그래서 새벽예배를 폐지해야 한다는 이론이라면 우리는 구약 전체를 폐지해야 합니다.
새벽에 우리가 깨어 기도하며 하루의 첫 시간을 가장 부담스러운 시간에 드리는 이유는 적어도 신앙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는 구별된 삶을 살겠다는 시간과 삶의 헌신의 표입니다.

우리는 적어도 사탄의 세력이 현저하게 공격을 하는 밤 문화를 척결하고 새로운 하나님의 문화인 새벽의 문화를 펼침으로 이 땅을 거룩한 하나님의 도시로 만들려고 하는 거보를 띠는 것이 바로 제 6차 특별 새벽기도회의 목적입니다.

더불어 이 귀한 하나님의 시간에 우리들이 주님의 지상명령인 영혼 구원의 부담감을 갖고 그 영혼들을 기도하는 가운데 선정하는 사역을 행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새벽이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다시 새벽에 불이 붙어야 합니다.
말 그대로 현대사회에 있어서 새벽을 가장 일어나기가 어려운 시간입니다.

그래서 혹 어떤 목사님의 말대로 ‘새벽예배는 살아 있는 순교’라고 말한 정의가 맞는다고 저 역시 동의합니다.

새벽은 고된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에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시간에 주님이 임재하십니다.

서울의 어느 교회에서는 특새 기간 동안 3대가 함께 예배를 드리는 시간을 가졌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가정주부인 아내가 새벽 3시 30분에 휴대폰 알람이 시아버님 방에서, 아이들의 방에서, 남편의 휴대폰에서 동시에 울려 깨어나 세면을 하고 옷을 입는 장면을 보며 ‘내 지은 죄 다 지시고 못 박히셨으니 웬 일인가 웬 은혜가 그 사랑 크셔라’라는 찬송가 143장 2절의 가사를 부르면서 은혜의 한없는 울음으로 울었다는 간증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결론)  

저는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내일부터 특새가 일주일 동안 진행됩니다.
새벽승리가 일생의 우리들의 모든 상황 속에서의 삶의 승리를 보장한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새벽에 일어날 정도로 기도 제목이 많지 않으십니까?
기도를 쉬면 그날이 짧아질 수도 있습니다.
풍요롭고 행복할 때 새벽기도 은행에 저축 하십시오.

남편이 매번 태신자로 선정했는데 그 때뿐이었어요? 라고 자탄하는 분이 계십니까?
이번 새벽기도회에 남편이 나올 수 있도록 하겠다는 믿음의 용량을 넓히십시오.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이 지역이 음란합니다.
이 지역이 범죄가 만연합니다.
유흥가와 술집들이 난무합니다.
이번에 특새를 통하여 성령의 태풍이 그 모든 것들을 쓸어버리고 갈 수 있도록 기도의 힘을 합쳐보십시다.

일주일 동안 이렇게 살아보십시다.
저녁 9시 이후의 모든 일상을 한 주간만 내려놓고 일찍 잠자리에 드십시다.
교회의 사역도 이번 주에는 저녁 9시 이후에 있는 모든 사역을 중단할 것입니다.
텔레비전의 플러그를 이번 한 주간 아예 빼놓으십시다. 연속극 한 주 보지 않았다고 지구가 멸망하지 않습니다.
이번 주 한 주간 업무에 필요한 이외의 인터넷을 중지해보십시다.

여성 교우 여러분!
낮잠을 한 주간 절대로 자지 맙시다. 밤잠을 달게 자기위해서는 낮잠을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주무실 때 신발장에 있는 신발을 교회를 향하여 놓고 주무십시다.
주차장에 있는 카풀장의 차량은 반드시 후진 주차를 해 놓지 말고 교회를 향하여 주차해 놓으십시다.
그리고 절대로 8시에 이후에 어떤 음식도 먹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새벽에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잊지 말 것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새벽에 최상의 컨디션을 달라고 성령께 기도하고 주무십니다.

오늘 설교의 서두에 통영과 거제에서 복음의 씨를 뿌리며 여호와를 인정하는 물결이 온 땅에 가득하기를 찬양하며 선교사역을 감당하는 삼일교회의 청년 사역자들을 소개했습니다
참 부러웠습니다. 그들의 주님을 향한 열정이 부러웠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교회는 오전 3시 30분부터 불이 켜질 것입니다.
교회로 오십시오.
새벽에 교회로 몰려오십시오.

성도들의 아파트 불이 새벽에 켜지며 3대가 함께 몰려오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우들의 가정에서 새벽의 불들이 켜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새벽을 깨워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태신자를 위하여 가정을 위하여 기도하십시다.
이 땅이 거룩한 도시가 되도록 기도하십시다.
이 땅이 음란의 밤 문화가 사라지고 거룩한 하나님의 문화인 새벽 문화가 임하도록 기도하십시다.

오늘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시 57:7-8절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이제 우리 모두 다 ‘일어나 새벽을 깨우리라’의 찬양을 드리고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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