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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방과 자랑 (약 4: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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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방(誹謗)과 자랑 (약  4:11~17)


우리는 "자식 자랑은 반 푼수고 마누라 자랑은 온 푼수다."라는 말을 흔히 듣습니다.
이 말은 옛날 사람들과 비교할 때 사고방식이 많이 바뀐 현대사회에 와서는 완전히 공감되지 못할 여지도 있을지 모릅니다.
  
요즘처럼 자녀교육 바로 시키기가 쉽지 않은 시대에 자기 자식을 사람답게 잘 키웠으면 참으로 자랑할 만한 일이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중하면서 산다면 남들 앞에서도 자기 배우자에 대하여 험담하는 것보다야 칭찬하는 것이 백번 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왜 자식 자랑은 그래도 '반 푼수'까지는 되는데 아내를 자랑하면 '온 푼수'가 되는지 그 이유를 저로서는 도저히 알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자랑을 두고 반 푼수니 온 푼수니 하고 '덜된 사람' 취급하는 것은, 그런 자랑이 어떤 긍지나 존중심에서 나온 경우가 아니라 어떤 자격지심에서 비롯되는 경우일 것입니다.
  
즉 자신의 못난 것을 감추어 보려고 하는 얄팍한 심리의 소산으로 자식과 아내를 자랑할 때입니다.
"우리 아들이 이번에 전교 몇 등 했다."라고 자랑할 때에 그 이면에는 '내가 학벌 없다고 당신이 날 깔볼지 모르지만 내가 이런 자식을 두었으니까 나도 원래는 똑똑한 사람이다.'라는 인상을 주고자 하는 의도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내 아내가 얼마나 미인인데."라든지 "우리 남편은 돈도 잘 벌어오지만 집에 와서도 얼마나 잘해 준다구요."라고 자랑할 때에도 역시 '그런 아내, 그런 남편 가진 내가 너보다는 낫지.'라는 의미가 그 복선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자식 자랑이나 아내 자랑을 반 푼수니 온 푼수니 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런 자랑들을 하는 본인이 이처럼 진짜 '못난 인생'인 까닭에 나오게 된 말인지도 모릅니다.

자식이나 아내 자랑이 이 세상 사회에서 자신을 못난이로 만드는 말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정말 못난이로 만드는 말은 어떤 것들이 있겠습니까?
  
이 시간 우리는 본문의 교훈을 통하여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정말 덜된 인생이 되지 않기 위해서 절대로 피해야 할 두 가지의 말이 무엇인지를 함께 깨닫고자 합니다.


  1. 타인에 대하여 하는 말 중에서 꼭 피해야 할 것은 '비방'입니다. 

본문 11절과 12절에 "11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12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비방하다'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를 직역할 때, '거슬러 말하다 (speak against)'라는 말로서 남에게 해를 끼치는 모든 종류의 언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거스려 비방할 때(민 21:5), 남을 모함하여 말할 때(벧전 2:12), 혹은 남을 은근히 죽이려는 악의가 가득한 말(시 101:5) 등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비방하는 말은 피차에, 특히 "형제들" 간에는, 즉 교회 안에서는 결코 나타나서는 아니 되는 것이라고 야고보는 초대교회 교인들에게 엄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비방하는 말을 해서는 아니 되는 이유를 이어지는 말씀에 두 가지로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그 첫째 이유는, 남을 비방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자가 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같은 교회 안의 교우를 비방하는 것이 왜 '율법을 비방하는 일'이 되는 것이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몇 가지 답이 있는데, 어떤 학자는 형제 비방은 율법의 최고 명령인 이웃 사랑을 거슬리는 것이기 때문에 곧 율법을 비방하는 행위라고 해석합니다.
  
혹은 비방하는 것을 금하는 율법이 있는데(레 19:16-18) 만약 누구든지 그것을 어기면 그 율법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 즉 그 율법을 비방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상의 두 가지 해석들은 율법을 전체로 보기보다는 그 중에 일부 혹은 대표적 계명만 두고 해석하는 것이므로 이 본문의 문맥을 두고 볼 때에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그보다는 칼빈이 해석하는 것처럼, 사람이 남을 비방할 때에는 정확한 율법의 규례를 바탕으로 판단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교만과 편견 따위가 판단의 기준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말로써 훼방하는 것이므로, 이것은 곧 자신의 판단을 하나님의 율법 위에 올려놓는 참람죄이며 곧 율법을 비방하는 것과 같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이 해석은 남을 비방하는 것은 곧 율법 전체를 비방하며 판단하는 것이라는 본문의 문맥에 훨씬 더 잘 들어맞게 됩니다.

뒤이어 나오는 "율법의 준행자"와 "율법의 재판자"라는 두 말의 대조가 그런 뜻을 더욱 명백히 해 줍니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스스로 준행'하도록 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지, 그것을 가지고 '남을 판단하고 재판'하라고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율법을 가지고 자신의 행위를 바로 잡는데 쓰지 않고 남을 판단하여 비방하는 도구로 오용한다면, 그것은 원래 율법이 가지고 발휘해야 할 권위를 사람이 침해하는 것이며 그런 까닭에 율법의 권위를 모독하는, 즉 '율법을 비방하는' 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남을 비방하는 것은 이처럼 율법, 즉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우리에게 선과 악을 구별하여 바로 살도록 가르쳐 주는 이 율법을 극도로 남용하고 무시하는 죄가 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둘째 이유는 더욱 심각한 것인데, 곧 다른 교인을 비방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놓는 신성모독죄에 해당된다는 사실입니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라고 선언하신 대로 각 사람을 율법에 따라 최종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 하나님은 율법을 입법하신 분이시니 당연히 재판하실 권리가 있으시며, 따라서 사면권과 형벌권 역시 독점하고 계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율법에 따라 유죄임에도 불구하고 용서하시고 구원을 베풀어 주기도 하시며,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직접 멸하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누구관대" 감히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려 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자신 역시 하나님 앞에서 재판받아야 할 처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을 판단하는 자격 있는 체하는 것은 월권 정도가 아니라 참람죄, 즉 신성모독의 죄에 해당되는 까닭에 우리는 결코 남을 비방치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은 목사가 죄를 책망하는 설교를 하고 교회가 교인의 공적 범죄에 대하여 권징 실시하는 것까지 금하는 것은 물론 결코 아닙니다.
이 비방은 아까 말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 땅의 교회에 주신 위계질서를 거슬러 말하는 것, 남을 시기하는 심정으로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리거나 악의로 가득 찬 독설로써 모함하는 것 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큰 교회이든지 작은 교회이든지 간에 이 지상교회 안에는 바로 이런 비방이 항상 시험거리를 일으키기 마련입니다.
작은 교회에서는 사람 수가 적으니까 그런 말들이 쉽게, 빨리 돌게 되고, 큰 교회에서는 비방의 말을 할 사람들도 많고 비방할 대상도 많으니까 역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유명한 영어 속담에 '펜은 칼보다 강하다.(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말로 번역할 때에 '문(文)은 무(武)보다 강하다.'라는 따위로 번역하기도 하는 말입니다.
칼로 사람 죽이는 것보다 글로 사람 죽이는 것이 더 무서운 것이라면, 말로 사람을 죽이는 것 역시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인터넷 세계는 그처럼 '말로 사람 죽이는 일'이 현실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그처럼 예쁘고 돈 잘 벌고 인기 있는 젊은 연예인들이 그런 '악플'에 시달리다 못해 자살까지 하는 것이겠습니까?
'익명'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서 아무에게나 악담과 욕설을 거침없이 퍼붓는 '네티즌 살인자'들이 그런 무서운 짓들을 태연히 저지르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악한 행위인지에 대해서는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 지금 정부와 여당에서 추진하고 있는 '인터넷 실명제 도입'을 개인적으로는 적극적으로 찬성합니다.
이것은 결코 '언론 자유를 침해하는' 제도가 아니라 '언론 자유를 남용하는 범죄를 막아야 할' 문제에 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말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 또한 교회 안에서도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교인들이 교회생활 중에 시험을 받게 되는 대부분의 경우가 바로 자기에 대한 험담이나 비방을 듣게 될 때가 아니겠습니까?
만약 스스로 그런 일을 직접 당해 본 적이 있다면, 우선 나 자신부터도 남에게 그렇게 행한 적이 없는지를 먼저 돌이켜 볼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말하는 사람은 무심코 내뱉는 것이지만 듣는 쪽에서는 문자 그대로 칼보다도 더 아프게 찔리게 되는 것이 곧 '비방'이기 때문입니다.

칭찬의 말, 위로의 말은 남에게 많이 하면 할수록 좋은 말입니다.
너무 자주해서는 역효과가 나겠지만 꾸중하거나 책망하는 말도 경우에 따라서는 반드시 해야 할 말입니다.
농담이나 잡담은 해도 되고 안 해도 관계없는 말입니다.
하지만 남을 비방하는 말, 남을 거슬러 해롭게 하는 말은 무의식중에라도, 아니 좀 과장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죽어도 우리 입 밖에 내어서는 아니 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입에는 남을 비방할 권리란 애초에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율법과 그 율법의 입법, 재판, 선고자이신 하나님께만 속한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를 비방하는 것은 자신을 율법과 하나님 앞에서 반 푼수 정도가 아니라 무서운 신성모독의 범죄자로 만드는 일인 줄을 꼭 잊지 말고 그 어떤 경우에도 입 밖에 내지 않도록 극히 조심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자신에 대하여 하는 말 중에 꼭 금해야 할 것은 '자랑'입니다. 

13절로부터 17절에 기록하기를 "13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16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7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당시 1세기 무렵에 흔히 볼 수 있었던 상인들을 예를 들어서, 사람의 자랑 즉 교만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13절에 말하고 있는 대상은 그야말로 대표적인 비즈니스맨들입니다.
  
로마 최고 번영기가 시작될 무렵인 그 당시는 상업 활동, 특히 도시와 도시를 잇는 장거리 거래와 무역업이 번창 일로에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나타난 수완 있는 상인들이 자기네의 기업을 경영해가는 자세나 방침 같은 것은 기본적으로 오늘날 현대의 비즈니스맨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철두철미한 것들이었습니다.
우선 이들은 그들의 시간표를 철저하게 짰습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라고 한대로, 그들은 일일계획표, 금주의 일정, 출장시의 여정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간 계획을 완벽하고도 효과적으로 계획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그 세운 계획을 따라 자신의 모든 정력을 바쳐 아주 바쁘게 활동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가서... 거기서... 장사하여"라고 했습니다.
계획만 세워 놓고 출근하여 회사 사무실에서 낮잠만 자던지, 아무 홍보 활동이나 고객 유치를 위한 노력 없이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가게 문만 종일 멍하게 바라보고 있다가는 당장 망할 날만 남아 있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찾아다니면서 거래처 관계를 개선하고 고객을 확보하고 더 좋은 물건을 더 싼 값에 구입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말만 들리면 발 벗고라도 당장 달려가 보고 하면서 "장사"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장사'라는 영어 단어 자체가 '비즈니스(business)'라고 하듯이, 문자 그대로 '바쁘게' 하루 종일 쉴 틈 없이 움직이면서 일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분명한 목표도 세우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처럼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온 정력을 투자하여 장사한 것은 단 한 가지 목적 "이를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전의 모든 단계들은 바로 이 한 가지 확고부동한 목표를 어찌하든지 꼭 성취하기 위하여 있는 것일 따름이었습니다.
돈 벌지 못하는 장사란 당장 집어치우는 것이 백번 더 낫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였던 것입니다.

정말 철저한 '상인 정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록 거래처 간의 거리는 더 멀어지고 물량은 더 많아지고 서류는 더 복잡하게 되었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장사한다는 것은 철저하고도 완벽한 계획을 먼저 세우고, 세운 계획을 따라 전력을 투구하면서 땀 흘려 일하고, 그 결과로서 이윤획득과 재산축적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이 기본적 원리는 2천 년 전의 상인들이나 오늘날 21세기의 비즈니스맨들이나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는 왜 그처럼 '성실하고 부지런한 상인'들을 가리켜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는 자"라고 단정하며 그런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정죄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거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첫째는, 그들이 장사를 위한 시간 계획을 세울 때 '인생의 무상함'을 전혀 계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인생 계획을 세울 때 오늘, 금주, 금년 하면서 마치 그 계획표 안에 있는 시간들이 자기에게 틀림없이 찾아올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지만, 사실에 있어서 이것은 엄청난 착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14절에 말씀하는 대로 사람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며"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김없이 내게 찾아와 줄 것 같은 미래는, 사실은 병이나 사고나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하여 하루가 될지 혹 일분이 될지 전혀 알 수 없는 것이며, 그런 까닭에 각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아침에 잠시 동안은 그토록 짙게 깔려 있다가도 한 순간 사라지는 "안개"와도 같이 언제 사라질지 알 수 없는 무상한 시간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 16절로 21절에서 예수님께서 들려주신 비유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가 아니겠습니까?
한 부자가 그 밭을 통해 쌓을 곳 없는 큰 소출을 얻게 되었을 때 그는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에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르시기를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이라는 시간의 변화무상한 본질을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인간이 세우는 계획이란 이처럼 어리석고 '허탄한 자랑'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런 상인의 말에는 "주의 뜻" 곧 '하나님의 의지'가 상실되어 있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16절에서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이라고 한 것은 '너희가 당연히 이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뜻으로서, 그 당연히 했어야 할 말은 곧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는 말이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뜻이라면'이라는 말은 당시 이교 신자들도 소위 '신의 뜻이라면'(if God wills)하고 흔히 쓰던 표현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하나님(God)'이란 단어 대신에 일부러 "주(The Lord)"라고 분명히 밝혔던 것이었습니다.
즉 주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일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이 없으면 우리가 이것저것을 하고 이 도시 저 도시로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고 거래를 하고 어쩌고 하기는커녕 당장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주의 뜻, 하나님의 의지와 섭리를 꼭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것은 그저 입으로만 '주님 뜻이라면'하고 되뇌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 생애 구석구석까지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인도하시고 섭리하심을 믿고 의지하면서 나아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뜻에 의뢰하지 않고 자기 노력만으로 다 이룰 수 있는 듯이 덤비며 사는 것은, 자신에 넘치는 독립적인 생이 아니라 오직 교만일 뿐이며 그런 까닭에 '악한 자랑'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셋째로, 이 비즈니스맨들의 말에는 '선한 일을 위한 목적'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장사하는 사람이 "이를 보는 것" 즉 이윤을 그 목적으로 한다는 것은 사실 지극히 당연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그 얻은 재물을 무엇을 위해 쓸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바른 목적을 세울 줄 모를 때에는, 그 당연해 보이는 말도 하나님 앞에서는 "악한 자랑"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저질렀을 때에도 죄이지만, 해야 할 것을 하지 않았을 때에도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받은 달란트를 땅 속에 감추었던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책망 받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또한 누가복음 12장 47절에서도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라고 경고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는 어떤 일이 선한 것인지는 지극히 잘 알고 있습니다.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란 것도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곳에 산재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의 개인 이익만을 추구하기 위해 목표를 세우고 그 목적만 달성했다고 만족하고 산다면, 그는 비록 '저지른 죄'(sins of commission)는 없다할지 몰라도 '행치 않은 죄'(sins of omission)에 여지없이 걸리게 되는 것이며, 그런 사람은 아무리 무슨 사내대장부로서 남부끄럽지 않게 한 인생 잘 쌓았다고 말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오직 "허탄한 자랑"이요 더욱이 "악한 자랑"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 윤리학이나 인생 상담실에서는 자기를 대하여 자신을 가지라고 조언해 줍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인생을 성취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인생관이라고들 가르치고 또 배우고 있습니다.
계획 잘 세워서 시간을 효과적으로 쓰고, 주어진 기회에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일하고, 그리하여 원래 세워 놓았던 목적을 성취하는 것 - 누가 보아도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인생처럼 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은, 성령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선언하시기를 그것은 다 '허탄하고 악한 자랑'이라고 경책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런 말은 인생 시간에 대한 자신의 무능력함을 인정하고 있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에 전혀 의존하지 않으며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목표가 완전히 상실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가 결여된 말은 아무리 빈틈없어 보이는 계획이요 자신감 넘치는 인생관이라 해도, 곧 하나님 대신에 자기 자신을 우상으로 만드는 지극히 교만한 죄악이 될 따름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겸손하면서도 긍정적인 말은 하면 할수록 좋을 것입니다.
또한 어려운 것이기는 하지만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말이나 자책하는 말도 때로는 해야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남에게 자기의 체험담을 들려주거나 자기가 지은 시 한 수 들려주는 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그만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에나 그 어떤 자리에서도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말, 하나님 없어도 혼자 넉넉히 살 수 있다는 식의 말은 그 어떤 비슷한 소리라도 해서는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사람 앞에서 자기를 높이는 말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대신에 자기를 그 자리에 놓고 높이는, 실로 '악하고 교만한 자랑'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인생이라는 시간은 오직 생명의 주인 되신 하나님의 손에 잡혀 있으며 자기 인생의 계획은 스스로 세울지라도 그 걸음을 주장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며 자기 인생이 존재하게 된 목적 자체도 오직 하나님뿐이심을 늘 기억하면서, 그 어느 한 순간에라도 자기를 스스로 자랑하는 말을 결코 입 밖에 내지 않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차라리 가만히 있었더라면 중간은 될 것을..."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어디에선가 보니까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 아니라 꼴찌가 될 뿐이다. 그런 무사안일주의에 빠지지 말고 매사에 적극적, 진취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하면서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을 성토(?)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은 이 속담을 원래의 의미에서 벗어나도록 지나치게 확장해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즉 이 말은 '지나치게 적극적으로 행동하려 하지 말고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이다.'는 뜻에서 쓰는 것이 아니라, 무슨 잘 모르는 사실을 아는 척하고 괜히 말했다가 무안을 당하게 되었을 때 흔히 주고받는 말입니다.
  
그처럼 자기 무식을 드러내는 말이야 정말이지 애당초 입 밖에 내지 않고 가만히 있는 편이 백번 더 좋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무식'을 드러내는 말은 좀 창피당하면 그뿐이지만, '비방'과 '자랑'은 그 본인이 사람 앞에서도 그렇지만 더욱이 하나님 앞에서 아주 '덜된 사람' 진짜 '온 푼수'라는 사실을 스스로 드러내는 말이 됩니다. 
  
'비방'은 우리나라 속담에도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고 하듯이 그렇게 남을 비방하는 그 자신이야말로 훨씬 더 못난 인간임을 여실히 나타내는 말이나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또한 '자랑'은 사람 앞에서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 말이지만 그것을 입 밖에 내는 바로 그 순간 즉시 하나님 앞에서는 제일 밑바닥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적어도 이 두 가지 말만 우리가 절대로 하지 않으면 정말 '중간' 정도가 아니라 거의 '최상위권'에 드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습니까?
  
'남을 비방하는 말'과 '자기를 자랑하는 말,' 이 두 가지 말을 우리의 입이 아예 잊어먹게 될 정도로 스스로 조심하고 삼가함으로써, 한층 더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로 성화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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