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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이지 않는 것에 시선을 고정하라! (고후 4: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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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것에 시선을 고정하라! (고후 4:16~18)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유별나게 비판을 받는 이유는 꼭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유별난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우리가 좋은 일을 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우리가 보다 구별된 아름다운 삶을 살아주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믿는 우리가 믿지 않는 저들보다는 뭔가 다르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좋은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믿지 않는 저들과 다른 것이 무엇인지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교회와 성도들을 비판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믿음 생활을 잘 해야 됩니다.  바른 믿음 생활이란 성령 안에서, 성령에 의해서,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 속에 감화와 감동을 주셔서 아름다운 변화의 역사를 일으키게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이러한 성령의 역사 속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교육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먼저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 안에 일어난 내적 변화를 삶에서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잘 믿어야 합니다.  제대로 믿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판과 조롱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손가락질을 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의 내용을 보여 주십시오.  당신이 예수를 믿어서 구체적으로 무엇이 변했는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십시오.  당신이 예수를 믿어서 가치관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여주십시오.  저들에게 우리가 믿는 그 믿음의 증거들을 당신이 살아가는 그 삶에서 보여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예로부터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가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지성인이 인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적 사회에서 점점 기대되는 것은 실천력입니다.  삶의 구체적인 내용과 실천이 없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서는 어떤 기대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이 땅의 교회는 구체적으로 변화된 삶의 내용을 보여주지 못하는 종교인들만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에 미쳐야 할 거룩한 영적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종교인이 되지 말고, 영적인 사람이 되십시오.  종교인은 자신을 명상만 하게 만들지만 영적인 사람은 실천하게 만듭니다.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 그리고 유대인들은 생각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실천했습니다.  결국 제자들이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실천력이 기적을 낳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사상가나 이론가가 성공한 예는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그 사상을 행동으로 옮긴 사람들만이 성공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실천력이 사람의 차이를 만듭니다.  실천했느냐, 실천하지 않았느냐에 따라 차이가 나게 됩니다.  박차고 일어나는 용기, 이것이 실천력의 근원입니다.  일어나 구체적인 삶의 내용을 보여주는 헌신, 이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아십니까?  믿는 사람에게 제일 무서운 죄는 그대로 있어 보자는 것입니다.  남들은 다 변화하고 있는데 혼자 가만히 있는 것은 퇴보입니다.  이와 같은 삶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러므로 박차고 일어나십시오.  결코 방관자가 되지 마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먼저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결단 없는 실천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릇 마음을 바꾸면 세상이 간단하게 바뀝니다.  마음은 입에서 나오는 말을 먹고 삽니다.  입과 마음은 절대 분리되지 않습니다.  '일어난다! 일어난다!' 하면 일어서게 됩니다.  죽고 사는 권세가 마음에서 나옵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 인간의 운명을 변화시키는 것은 물질이나 환경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행동의 기틀입니다.  마음은 언어의 원천입니다.  마음을 따라 말이 나옵니다.  좋은 마음에서 좋은 말이 나오고, 밝은 마음에서 밝은 말이 나옵니다.  마음이 변하면 말이 변합니다.  말이 변하면 행동이 변합니다.  행동이 변하면 운명이 변합니다.  결국 신앙이란 마음을 바꾸어 먹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는 견해를 바꾸면 세상이 갑자기 다르게 보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언제나 긍정적이고 밝은 면으로 세상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앞에는 밝은 미래가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시간마다 때마다 자기 선언을 하십시오.  말이 씨가 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입으로 선포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돕고 계신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잘 될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믿음으로 선포하고 마음을 바꾸면 결국 세상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을 추구하느냐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삶이 어떤 성품과 자질을 지닐 것인지를 결정합니다.  그것은 그 삶의 모든 영역을 채색합니다.  우리가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면 우리의 삶도 가치 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비범한 것을 추구하면 우리 삶도 비범한 삶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추구하는 것만큼의 삶을 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봉독한 본문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본문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나눕니다.  어떤 사람은 보이는 것, 다시 말하면 육신적이고 지상적인 것을 그들의 삶에서 추구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 즉 영적이고 하늘의 것을 그들의 삶에서 추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더 많은 돈과 더 높은 자리와 더 강한 권력과 더 안락한 삶의 방식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경건과 믿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합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삶을 추구해야 할까요?  마땅히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영원한 하늘의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보이는 것을 좇아 삽니다.  심지어는 보이는 것을 더 많이 얻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좇아 산다고 하는 우리도 때로 보이는 것의 위력에 휘둘리고 그 유혹을 거부하는데 실패합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의 가치는 가장 좋게 말한다고 해도 제한적이고 한시적입니다.  아침의 안개와 같습니다.  들에 핀 꽃과 같습니다.  보이는 것의 가치는 한 마디로 말해서 잠시 잠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당장에는 쓸모 없게 보일는지 몰라도 그것은 우리 인생에 참된 의미와 영감을 공급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삶의 유익을 보다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요즘 세상을 가리켜서 '이미지에 이끌린 사회' 라고 합니다.  실체보다는 외적인 형상에 지배를 받는 세상이라는 의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그것에 따라 이익과 불이익을 주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자기의 외모에 신경을 쓰고, 그것을 가꾸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 세상이다 보니 외모의 손상이나 퇴화는 그 무엇보다 우리를 낙심하게 하고 근심하게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그것이 어디 우리들 시대만의 문제이겠습니까?  정도의 차이는 분명히 있겠지만 겉 사람의 낡아짐은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좌절과 실망을 가져다주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시대에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6절에서 '겉 사람의 낡아짐'에 대해 언급하면서 자신은 '낙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많은 다른 사람들이 이로 인해서 낙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겉 사람은 낡아집니다.  바울은 현재형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이것이 지속적이고 역전될 수 없는 과정임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우리 인간의 겉모습은 계속적으로 낡아집니다.  아무리 가꾼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몸은 속절없이 낡아져갑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외적으로 우리는 점점 시들어갑니다.

얼마 전에 제가 대학교 4학년 때 모교회에서 가르쳤던 제자로부터 거의 20년만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물론 이 아이는 초등학교 3학년과 4학년의 아이를 둔 대한민국의 아주머니요, 교회 목사님의 사모님이 되어 있었습니다.  20년 만에 처음으로 듣는 목소리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 아이 아닌 사모님이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옛날이나 지금이나 목소리가 똑 같아요.  하나도 안 늙으셨나봐요.  여전하세요."
제자 사모님의 이 말에 갑자기 기분이 우쭐해졌습니다.  제 나이가 20대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제 몸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스스로에게 확인 사살을 했습니다.
"너는 그래도 40대 중반이야."
제가 어디를 가면 제 모습 가운데 두 곳을 보면서 아주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머리 위를 보면 60대인데, 얼굴을 보면 30대로 보이십니다."
어느 장단에 맞추어야 할지 모르지만 사실 기분이 묘해집니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다시 한 번 제 몸매를 둘러보았습니다.  이마에 주름살도 하나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머리카락은 점점 더 빠져서 소갈머리가 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뱃살은 양심도 없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가끔 집사람은 남의 속마음도 모르고 저의 아랫배를 쳐다보면서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이 배 좀 집어넣으라고 지적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겉 사람은 낡아집니다.  아무리 주름살방지 크림을 발라보십시오.  아무리 좋은 것을 먹고 운동을 해보십시오.  아무리 청년 브랜드의 옷을 입고 젊은 사람 흉내를 내어보십시오.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외적으로 시들어갑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삶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며 산다면 우리의 속사람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새로워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16절 하반부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의 속 사람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말은 또한 연속적이고 멈추지 않는 과정입니다.  비록 주름살의 골이 더 깊어지더라도, 비록 뱃살이 늘어나더라도 우리의 내면 세계는 오히려 더 신선하며 더 아름답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걱정하고 신경을 써야 할 문제는 우리의 얼굴이나 몸의 노화가 아닙니다.  마음이 늙어가고 경직되거나 영혼이 추해지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아무리 육체적인 나이가 젊다고 해도 그 생각이 진부하며 편견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면, 어떠한 진취적인 기상이나 열정도 없다면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젊은 사람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날마다 경험함으로써 영혼의 신선함을 유지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거룩한 상상력과 예리한 통찰력으로 삶의 표피 아래로 내려가며 더 깊이 보고 더 많이 배우며 성장의 기쁨을 누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더 닮아감으로 더 성숙하고 균형 잡힌 인격을 소유합니다.  비판적이고 융통성 없고 쓴 뿌리로 가득 찬 고집불통의 기성세대가 아니라 삶의 지혜와 경험을 나누어주며 차세대들에게 영감을 주는 멋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특별히 우리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비싼 선물을 사주는 것에만 신경을 쓸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아이들에게 선물이 되어야 합니다.  점점 새로워지며 아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매력적인 부모, 매력적인 교사, 매력적인 선배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시인 류시화는 그러한 바람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비 그친 후 나는 당신 앞에 선 한 그루 나무이고 싶다.
내 전 생애를 푸르게 푸르게 흔들고 싶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가 그친 후의 한 그루 나무를 상상해보십시오.  그 맑고 짙은 푸르름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푸르름으로 살고 싶지 않으십니까?  내면이 신선한 사람이 정말 젊은 사람입니다.  내면이 아름다운 사람이 정말 멋있는 사람입니다.
 
영어 속담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아름다움은 그냥 피부 한 장의 두께이다."
외적인 아름다움이란 껍데기 한 장 벗기면 다 똑같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의 세계가 푸르고 맑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요즘 텔레비전에 보면 '산소 같은 여자'라는 광고가 나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산소 같은 여자가 되고 싶으십니까?  화장품 바른다고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속이 예뻐야 합니다.  안 그러면 화장품을 아무리 찍어 발라도 이산화탄소 같은 여자가 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할 때 우리는 내적 새로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또 다른 유익을 말해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육체의 노화와 함께 인간을 괴롭히고 절망시키는 것은 바로 여러 고난과 문제들입니다.  이 땅을 사는 그 어떤 사람도 고난에서 면제된 사람은 없습니다.  정도와 종류의 차이가 있지만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 어려움을 경험하며 삽니다.
 
척 스윈돌 목사님의 말처럼 "고난은 우주적인 언어입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해서 고난이나 문제에서 면제되지 않습니다.  예수를 잘 믿는 가정의 부엌에도 바퀴벌레가 번성할 수 있습니다.  냉장고에 성경구절 써 붙인다고, 가정예배 때 찬송 부른다고 벌레가 다 자빠지지 않습니다.  교회 가는 도중에 타이어가 펑크 나거나 차가 설 수 있습니다.  고난이 면제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믿음 때문에 비기독교인이 경험하지 않는 어려움까지 겪기도 합니다.

그러면 믿음의 유익은 없습니까?  물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이 땅의 고통스런 현실에만 고정시키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 멀리 더 높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동일한 사물이라도 다른 관점에서 보면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게 될 때 우리는 우리가 누릴 영원한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고통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본문 17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사도 바울은 지금의 일시적인 환난이 그저 귀찮고 고통스런 삶의 불청객이 아니라 자신의 영원한 영광을 이루는데 필요한 한 과정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환난은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는 도구로 여겨졌습니다.  사실 현재의 핍박과 고난의 무게는 우리의 영적 근육을 형성시켜주는 요인입니다.  마치 역도 선수들의 경우 역기의 무게가 그들의 근육을 만드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을 영적 근육을 만들어 경기에서 승리하게 하는 일종의 불가피한 훈련으로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기 위해 고난도 받아야 함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 관점의 변화로 인해 사도 바울은 그처럼 어렵던 환난을 "가볍고 일시적인 것"으로 여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자신이 받는 환난을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으로 표현했다고 해서 그것을 사소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정말 엄청난 고난을 받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절로부터 27절에서 그는 자신의 고난을 이렇게 열거합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가운데 이보다 더한 고난을 당한 자가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생각컨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도다."

사도 바울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장차 있게 될 영광의 빛 안에서 고난을 보기 때문에 지금의 고난을 능히 극복할 수 있게 됩니다.  국가대표 선수들은 훈련장인 태릉선수촌에 입소를 해서 새벽 6시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하루 종일 비지땀을 흘리며 훈련을 합니다.  감옥에 갇힌 것처럼 마음대로 그곳에서 나오지도 못합니다.  고생밖에 없지만 선수들은 제 발로 거기에 들어갑니다.  사실 못 들어가서 안달입니다.  그들이 왜 그런 고생을 사서 합니까?  뭐가 모자라서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고생이 영광을 이룰 줄 알기 때문입니다.
 
국제대회에서 가장 메달을 잘 따는 양궁의 경우, 선수들은 번지점프를 하고 UDT라는 체조를 하며 빗속에서 활을 쏘기도 하고 지쳐 쓰러질 때까지 구보를 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결코 즐겁지도 않고, 재미있지도 않지만 그 후에 오는 영광이 그 모든 것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에 기꺼이 그 지옥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마도 번쩍이는 메달과 꽃다발, 숱한 사람들의 환호성과 사진 기자들의 플래쉬, 하늘 높이 나부끼는 국기와 울려 퍼지는 애국가, 그리고 가족들과 껴안고 흘릴 감격의 눈물 등을 머릿속에 그리며 그 훈련의 고난을 견뎌내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장차 우리에게 있게 될 영광을 상상해보십시오.  올림픽은 겨우 16일간의 영광이지만 우리는 영원한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사람들의 박수 대신 하나님과 천군 천사들의 박수를 받게 될 것입니다.  메달 대신 결코 잃어지지도 않으며 변하지도 않을 영원한 영광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보고 들은 어떤 것과도,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거침없는 상상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 영광을 누릴 것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 고정시킬 때 우리는 고난이 일시적인 것이며 장래의 영광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장차 있게 될 영광은 분명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상상함으로써 그 영광을 바라보는 훈련을 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현재의 어려움을 더 잘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할 때 우리는 현재의 고난을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전부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삶의 유익은 또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자원도 무한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의를 기울여 주어진 삶을 잘 활용해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는 쓸데없는 것에 삶의 자원과 에너지를 다 쓰고 정작 중요한 일에 그것들을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의 큰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또 다른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 18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번역이 좀 어렵습니다.  쉬운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들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에 시선을 고정합니다.  이는 보이는 것은 한 순간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보이는 것은 잠깐입니다.  한 순간에 불과합니다.  지상에서 우리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모든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돈도 명예도 인기도 권력도 쾌락도 육체도 다 지나갑니다.
 
왕년의 유명 코미디언 서영춘씨는 이런 말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인기는 물거품과 같은 것"  거품이 얼마나 빨리 사라지는지를 아십니까?  아주 순간적입니다.  눈 깜짝할 사이입니다.  야고보는 우리의 인생이 아침에 잠간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영원하지 못한 것들, 지나가고 말 것들을 추구하며 거기에 인생을 투자하면 우리의 삶은 지독한 낭비가 됩니다.
 
나이키 신발회사는 광고를 하면서 "인생은 짧으니 열심히 놀아라"고 부추깁니다.  그것은 잘못된 충고입니다.  열심히 놀면 신발만 빨리 닳습니다.  인생은 짧으니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라고 해야 옳습니다.  일시적인 것에 목을 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바울은 보이는 것은 한 순간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믿음, 성경말씀, 경건, 용서, 영혼, 마음, 하나님 나라, 교회, 이런 것들은 당장 만져지거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것들은 영원히 지속되는 참된 현실이며 실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것들을 추구하십시오.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 당신의 시선을 고정시키십시오.  보이지 않지만 이런 것들이 당신의 영혼을 풍성하게 만들 것입니다.  우리의 후배와 자녀들에게도 이런 가치들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마치 없는 것처럼 산다면 그것보다 더 바보 같은 삶은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그리고 투자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인생은 남는 장사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은 소중한 것입니다.  단 한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지나갑니다.  이처럼 소중한 인생을 낭비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연기파 배우 스티브 맥퀸과 더스틴 호프만이 주연한 '빠삐용'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아주 오래되긴 했지만 깊은 감동을 주는 명화입니다.  빠삐용은 죄가 없었지만 프랑스 검사들에게 몰려 살인죄의 누명을 쓰고 적도 부근 기아나의 지옥 같은 감옥에 갇힙니다.  너무도 억울했던 그는 꿈속에서 검은 옷을 입은 재판관들에게 자신의 무죄를 항변합니다.
그러자 그 재판관들이 그에게 유죄를 선고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을 죽이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너는 인생을 낭비했어"
빠삐용은 고개를 떨구고 나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유죄가 맞습니다! 유죄가 맞아요!"
 
그렇습니다.  삶을 낭비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그러므로 소중한 인생을 의미 있고 영원히 남을 것에 투자하십시오.  이 땅에서 지나가고 말 것을 위해 아귀다툼하며 그런 것들에 모든 자원을 다 쓴다면 이것만큼 무모하고 어리석은 낭비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언젠가 당신이 지금 소중히 여기며 집착하는 어떤 것이 너무도 무가치한 짐 덩어리에 불과했음을 알게 되기 전에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하나님 나라에서 귀한 것, 세상이 바뀌어도 영원히 남을 것에 투자하십시오.  그것이야말로 남는 삶입니다.  낭비하지 않는 삶입니다.  영원에 걸쳐 보상을 받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 시선을 고정시키기 위해서 간단히 몇 가지의 방안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먼저, 자신의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하십시오.
종이를 꺼내 당신의 사명을 글로 써 보십시오.  '나의 존재의 목적은 이런 것이다' 라고 쓰십시오.  사명 서술문이라고 일컬어지는 이 글의 작성을 위해 당신은 자신의 은사와 열정과 부르심을 고려해야 합니다.  이 사명 서술문에는 하나님에 대한 헌신과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 자기 세대에 대한 봉사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삶의 목적을 분명히 정리해두면 보이지 않는 것을 좇아가기가 보다 쉽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눈에 그렇게 보이지 않더라도, 세상이 그렇게 움직이지 않더라도, TV가 그렇게 가르치지 않더라도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면 그것이 맞는 것입니다.  사람의 삶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하면 그 말씀을 믿고 내 안에 있는 탐욕을 다스리십시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면 그 말씀을 믿고 주려고 하십시오.  물질만이 아니라 사랑과 격려를 나눠주십시오.  한 사람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면 그렇게 믿고 사람들을 귀하게 보며 대하십시오.  하나님이 가치 있다고 하는 것, 하나님이 영원하다고 하는 것 그것을 우직하게 믿고 그런 것에 투자해 보십시오.  그러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임재를 연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가까이 계십니다.  우리는 떨기나무를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거시는 그분을 보아야 합니다.  영성 작가 마이클 프로스트는 "고호의 작품 해바라기에서, 부서지는 파도 가운데서, 갓 태어난 아기의 해맑은 눈동자 속에서, 장미 한 송이 혹은 영화나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 아름다운 노래, 계절의 변화 가운데서" 하나님을 발견하라고 충고합니다.  자주 그분에 대해서 생각하십시오.  일상적인 사건과 자연 속에서 그분을 발견하십시오.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면 할수록 보이지 않는 것의 매력은 더 커지게 될 것입니다.

네 번째로, 성령의 충만을 받으십시오.
성령은 지혜의 영이십니다.  그분은 무엇이 소중하며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쳐주십니다.  말씀으로 마음을 채우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에 방해가 되는 죄는 회개하고 버리셔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성령의 세밀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것을 좇도록 친절히 이끌어주십니다.

다섯 번째로, 피차 격려하십시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줄 아는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것에 올인하는 삶은 쉽지 않습니다.  혼자서는 그 모든 유혹과 또래집단의 압박을 감당하기 불가능합니다.  서로를 붙들어주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 살도록 서로 중보하고 자극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자녀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하며 살도록 격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에게 삶으로 모범을 보이며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하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구약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롯의 이야기를 기억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이 많아져서 함께 있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각자 다른 땅을 선택하는데 롯은 눈에 보이는 것만 기준해서 소돔 성 가까이의 땅을 선택했습니다.  그 도성이 악하거나 자신의 영적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인가는 고려대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도성을 보았고 그 도성을 바라며 추구했습니다.  잘 알다시피 롯은 소돔이 망할 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은 받았지만 아내와 사위를 잃고 딸들과 동침해서 자식을 낳는 부끄러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그 삶이 세대와 지역을 초월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도 보이지 않는 것에 시선을 고정시켰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추구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에 당신의 시선을 고정시키십시오.  그럴 때에 당신은 무성한 가지가 담장을 너머 뻗어 나가듯이 당신은 이 땅에서 축복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거룩한 영향력을 끼치는 영적 거인의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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