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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출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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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출 2:1~10)


선교사에게는 체류 문제가 늘 따라다닙니다. 혼자라면 수시로 선교지 드나들며 사역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족 딸리면 자녀교육 때문에라도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장기체류 비자 받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닙니다. 체류허가를 연장해갈 때도 마음 놓을 수 없습니다. 지난주 설교하신 김상환 선교사님 가정이 장기체류 비자를 받도록 기도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인도네시아 선교사 시절, 현지 정부가 체류비자를 더 이상 연장해줄 수 없다고 통보해왔습니다. 나가라는 말입니다. 초조해졌습니다. 온통 비자 생각으로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한번 만 더 연장되면 영주권 신청할 수 있는데... 그러면 쫓겨날 염려 없이 장기 계획 세울 수도 있는데... 가족같이 지내온 현지 동역자들과 정녕 헤어져야 한단 말인가? 무엇보다 젊음을 불태우며 세워왔던 선교사역이 기어코 무너져야 한단 말인가? 기도하며 물질을 보내주셨던 수많은 후원자들을 또 어떻게 볼 것인가? 하나님 일을 위해 열심히 달려왔는데, 이렇게 쫓겨나는 것인가? 

이러 저리 방법 알아보고 아무리 애써도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도 비자가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캄캄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응답해주시리라 분명히 믿었는데... 

결국 저희 가족은 1994년도에 인도네시아를 떠나야했습니다. 사랑하는 현지인들을 뒤로하고 서럽게 떠나면서 제 인생자체도 함께 무너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땐 하나님마저도 저희 가정을 사랑하시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떠나기 전, 참 희한한 일을 경험했습니다. 저의 집에는 발리 섬에서 얻어 온 개가 있었습니다. 진돗개 하고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황갈색의 짧은 털을 입고 있었고, 코 주변은 시꺼멓고 귀는 쫑긋했습니다. 삼각형처럼 생긴 눈매로 기품 있어 보였습니다. 개 이름은 끼끼였습니다. 외모와는 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지요? 아주 새끼였을 때, 끼끼거린다고 저희 집 아이들이 그렇게 지어버렸습니다. 

이 끼끼는 신기하게도 제 자동차 소리를 멀리서도 알아들었습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귀가할라치면, 집에서 50m 정도 떨어진 진입로까지 마중 나왔습니다. 차 앞에서 짖어대며 집까지 안내해주곤 했습니다. 

오후에 퇴근하자마자 샤워하고, 처마 밑 그늘의 장의자에 앉는 것이 열대나라 더위 식히는데 최고였습니다. 그러면 이 끼끼도 꼭 제 옆에 앉곤 했습니다. 그리고 은근 슬쩍 저한테 기댑니다. 제가 밀쳐내면 또 슬쩍 기대오곤 했습니다. 

해질 무렵 산들바람이 불어오면 하루 피로도 싹 가십니다. 이 끼끼도 얼굴을 들고 코를 킁킁거렸습니다. 산들바람을 함께 즐기는 듯했습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의자에 꼬리를 툭툭 쳐댑니다. 그렇게 정 들어버린 개였습니다. 

우리 가족은 이 끼끼와도 헤어져야 했습니다. 한국까지 데리고 올 생각은 할 수 없었습니다. 선교사가 비싼 경비 들여가며 애완동물을 데리고 귀국한다는 것은 덕을 세우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결국 제가 사역해온 신학교에 맡기기로 했습니다. 승합차에 실어서 끼끼를 떠나보낼 때, 우리 가족의 마음이 좋질 못했습니다. 참 아팠습니다. 

그런데 떠난 지 10분도 채 못 되어 끼끼를 실은 승합차가 되돌아 온 겁니다. 운전수는 혼비백산해 있었습니다. 끼끼가 차 안에다 심하게 배설했고, 계속해서 사납게 짖어대었다고 했습니다. 끼끼는 그동안 일편단심 충성해온 주인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라고 느꼈는지 모릅니다. 결코 싫어져서 버린 것 아닌데도 말입니다. 제 마음 잘 모르는 끼끼는 크게 충격 받았던 모양입니다.  

그 때부터 끼끼는 모든 음식을 거부했습니다. 좋아하던 과자를 주어도 먹질 않았습니다. 물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무리 “끼끼”하고 불러도, 시무룩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습니다. 평시에는 명랑하게 꼬리치며 저를 똑바로 응시하던 녀석이었는데 말입니다. 눈에서는 총기가 사라지고, 몸은 시름시름 말라갔습니다. 인도네시아를 떠나기 직전, 다른 선교사님 가정들과 1박 2일의 시간을 갖고 돌아와 보니 끼기는 그만 죽어 있었습니다. 저희 가족이 완전히 떠나간 것이라 생각하며 죽었나 싶었습니다. 

가슴 아파하며 땅에 묻어줄 때, 끼끼 속에서 제 자신을 보는 듯했습니다.  비자 연장 받지 못하고 쫓겨나야 하는 저도 버림받은 느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떠나야하는 순간이 째깍째깍 다가오면서 현장 선교사로서 제 생명도 시름시름 꺼져가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완전히 외톨이 되고 혼자된 느낌! 적어도 그 때만큼은 하나님마저도 저를 버리신 것 같았습니다. 

인도네시아 선교는 제가 풀타임 사역자로 태어나자마자 가졌던 첫 경험이었습니다. 꿈과 열정을 갖고 선교지를 뛰어다녔습니다. 현지인들을 위해 뼈까지 묻으려고 갔던 첫 사랑이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 마음은 여전합니다. 그런데 쫓겨나야 했습니다. 하나님마저 침묵하셨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결코 받아들이기 어려운 캄캄한 충격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한 신생아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레위지파 가문에 사내아기가 태어납니다. 2절 보니 잘 생겼다고 합니다. 히브리어로 토브(tob)! 하나님께서 피조물과 사람을 창조한 다음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실 때 사용된 바로 그 단어입니다. 부족함 없이 준수한 모습입니다. 사실 자녀는 부모에게 다 그렇게 보입니다. 사랑하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1992년도에 첫 안식년 맞아 귀국했을 때, 제 어린 딸보고 이쁘게 생겼다고 말하는 성도님 하나 없대요. 다들 “아빠 닮았네. 아빠 닮았네!” 그렇게만 하시는 거예요. 참 섭섭하대요. "아니 말 귀 알아듣기 시작하는 아이에게 이쁘다고 한 마디 해주면 어디 덧나나?" 싶었습니다. 속도 상하대요.  

저는 속으로 외쳤습니다. “사람들이 내 딸을 이쁘다고 말해주지 않아도 괜찮다. 내 딸은 귀여운 거야!” 그리고 커가는 제 딸에게 가끔씩 말해주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너를 이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어. 사람 취향은 정말 다르거든. 그래도 확실한 것 하나 있어 넌 정말 귀여워!” 

여러분, 이 세상 부모에게 자녀는 다 보기에 좋습니다. tob예요. 다 잘 생기고 부족함 없이 준수합니다. 시어머니로부터 구박받는 며느리도 친정집 어머니께는 tob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모두도 하나님께는 다 tob합니다. 서로 한마디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tob하십니다.  

배가 불러오면서 부모는 어떤 아기가 태어날까 궁금해 하고, 가슴 설레며 출생을 고대합니다. 분만의 고통도 새 생명 탄생의 기쁨으로 다 사라집니다. 여느 때 아기의 탄생은 부모와 일가친척의 기쁨이고 온 동네 사람들로부터 축하받을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신생아 이야기는 좀 다릅니다. 무슨 사연인지 그 잘 생긴 사내아기를 숨겨야 했습니다.  

그 기구한 사연은 1장에 나타납니다. 사내아기는 고대근동의 최강국 이집트의 국민으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 이집트의 노예로 사는 히브리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것도 모든 사내아기 죽이라는 무서운 폭정이 자행될 때 태어났습니다. 사내아기의 출생은 도리어 불행이요 저주입니다. 3개월은 어째 어째 숨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숨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만일 들키면 아기는 물론 온 가족이 죽임 당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기를 버려야 하는 부모 심정은 오죽하겠습니까? 부모는 갈대로 상자를 만듭니다. 물이 새지 않도록 시커먼 역청과 나무진을 정성껏 바릅니다. 그리곤 아기를 넣어 나일 강 갈대 사이에 둡니다. 결국 죽을 가능성 많겠지만 그래도 눈앞에서 죽는 것 차마 보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또 혹시라도 살아나준다면 하는 실낱같은 희망도 함께 두었을 겁니다.   

태어난 지 겨우 3개월 된 아기는 모태 속에서 누렸던 평안함! 엄마 품 안에서 가졌던 평안함! 이 모든 것 갑자기 사라지고 캄캄하고 답답한 상자에 졸지에 갇힙니다. 이해할 수 없지만 불안한 두려움이 아기의 영혼을 덮었을 겁니다. 아기가 무얼 안다고요? 낙태수술하기 위해 기구를 모태에 집어넣으면 태아가 살려달라고 절규하듯 반대쪽으로 도망치는 초음파 영상 본 적 있습니다. 아기들은 머리로는 자세히 이해하지 못해도 온 몸으로는 주변 분위기를 감지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사용된 아주 독특한 단어를 주목하셔야 합니다. 나일 강에 띄어진 이 상자는 바로 저 옛날 홍수를 견뎌낸 노아의 방주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테에바(te-bah)! 그러니까 이 아기는 시커먼 갈대 상자에 버려지는 경험을 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구원의 방주처럼 보호받는 경험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실 노아의 방주도 역청이 발라졌습니다. 출입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나마 그 문 닫으니 방주 실내는 정말 캄캄합니다. 채광과 통풍 안 되는 역청발린 방주, 상상되십니까? 밖에서는 끊임없이 천둥 벼락과 함께 폭우가 쏟아집니다. 안에서는 수많은 짐승들이 캄캄하게 거의 1년을 같이 삽니다. 별 생각 다해봅니다. 노아 가족과 짐승들의 배설물은? 그 냄새는? 결코 쾌적한 경험 아닙니다. 하지만 오랜 기다림과 믿음으로 견뎌내니, 결국 맑은 하늘의 무지개 약속이 노아와 온 인류 앞에 펼쳐지질 않았습니까? 

갈대 상자가 구원의 방주나 다름없다는 것은 곧 이어 입증됩니다. 히브리인의 이 아기는 바로왕의 딸에게 발견됩니다.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손길이었습니다. 사내아이 죽이라고 명령한 바로 그 바로왕의 딸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젖 뗄 무렵에는 그러니까 2-3살 쯤 아예 그 아들로 입양됩니다. 버려진 아기는 그렇게 하여 이집트 국적을 소유하게 되고, 심지어 왕자 신분으로 보호받으며, 왕실 교육까지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공주는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줍니다. 실제 부모는 이름 지어줄 경황이 없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물에서 건져내었다 해서 모세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큰 섭리가 배어든 이름입니다. 홍수로부터 건짐 받은 노아처럼, 나일 강물에서 건짐 받은 이 모세! 언젠가 애급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건져내고 홍해로부터 이스라엘을 건져내는 지도자로 준비되는 하나님의 섭리가 시작된 것입니다.    

캄캄하고 답답한 그 갈대상자에 갇힌 모세의 경험, 사실 그것부터 이미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겁니다. 주변에 사랑하는 사람 아무도 없이 혼자된 모세! 그 모세를 하나님께선 결코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눈동자같이 지켜보셨습니다. 바로의 공주가 갈대 상자를 발견하게 하셨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모세에게 이끌리게 하셨습니다. 마침내 바로의 왕궁까지 모세를 들여보내셨습니다. 모세에게 새 인생이 시작되게 하셨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새 역사도 착착 준비해 가신 겁니다.     

제 일생을 뒤돌아보면, 체류비자가 연장되지 못한 것, 그것은 캄캄하고 답답한 갈대 상자에 갇힌 것이었습니다. 무너지고 버려진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짧게 끊어볼 때의 느낌입니다. 하나님의 긴 안목 속에서는 저는 결코 버림받은 것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저를 건져내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개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선 저를 선교지에서 건져내신 뒤 훈련 받을 수 있는 유학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지금은 선교 후진을 양성하는 교수되게 하시고 수많은 영혼을 건져내는 목회자 되게 하셨습니다. 선교지에서 쫓겨날 때 꼭 무너질 것만 같은 선교 사역의 집도 현지인 동역자를 통해 더 아름답게 리모델링 해주셨습니다. 저는 끼끼를 버린 것 아니었지만 지켜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선 저를 버리지도 않으셨을 뿐 아니라, 저 일생을 방주처럼 보호해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도 자기 백성을 찾아 이 땅에 오셨으나 환영받지 못하고 버림받으셨습니다. 마 8:20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 나는 새도 보금자리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결국 십자가에 달려 외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며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받으셨습니다. 우리 죄를 다 뒤집어쓰심으로서 우리 대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으신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려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 되게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2:10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그렇습니다.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된 예수님께서 도리어 온 인류 구원의 기초석이 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버림받음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경험하신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버림받은 것 같은 삶을 살아가는 분들을 넉넉히 건져내십니다. 
 
갈대상자에 갇혀 버려진 것 같은 경험을 하고 계십니까? 캄캄하고 답답하여 정말 혼자된 느낌이십니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결코 모르시는 바 아니며, 결코 버리신 것 아닙니다. 도리어 눈동자같이 지켜보고 계십니다. 믿음으로 견뎌 가시다 보면, 예상치도 못한 구원의 손길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내십니다. 마침내 건져내심 받을 뿐 아니라, 다른 영혼도 건져내시는 하나님의 도구까지 되십니다. 롬 8:28은 지금도 진리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기어코 선을 이루십니다.  

우리 교회도 예배처소 문제의 홍수를 만나 잠시 잠깐 캄캄한 것 같고 답답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하나님의 긴 섭리 속에서 믿음을 잃지 않고 항진해간다면, 우리 교회는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피난처 같은 구원의 방주가 될 뿐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는 한국 사회와 세계를 변화시키는데 쓰임 받는 구조선이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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