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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역을 변화시키는 중보기도 (느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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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을 변화시키는 중보기도 (느1:1-11)       


새벽기도회 시간에 창세기 말씀을 나누고 있는데 창44장에 이런 내용의 말씀이 나옵니다. 
가나안 땅의 기근으로 인해 요셉의 형제들은 애굽으로 곡식을 구하러 왔습니다. 
애굽의 총리인 요셉은 형제들의 우애를 시험해보고자 했습니다. 
물론 형제들은 애굽의 총리가 자기들의 동생인줄 모르지요. 
말째인 베냐민의 곡식 자루에다가 자신의 소유인 은잔을 몰래 넣어 베냐민을 도적으로 몰았습니다. 
요셉은 베냐민을 종으로 삼겠다고 붙잡았습니다. 

그때 유다가 나섰습니다. 

창 44:33절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베냐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 보내소서.” 

말째 베냐민을 대신하여 종으로 애굽에 남겠으니까 베냐민을 형제들과 함께 고국에 보내달라는 유다의 진정어린 청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유다의 결심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그 당시 종이 된다는 것은 몇 년 종살이 하다가 끝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평생 가족을 떠나, 고향을 떠나, 이국땅에서 이름 없이 종살이 하다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사역할 때 대사관의 요청으로 ‘자가지그’ 형무소에 갇혀 있는 한국인 죄수 한 사람을 돌본 적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마약 밀거래를 하다가 붙잡혀 이국땅에서 종신형을 살고 있었습니다. 
성경책도 넣어주고, 감기약도 사다주고....... 
그런데 이 사람이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가족을 떠나, 이국땅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절망감이 살아갈 의욕조차 완전히 꺾을 정도로 그를 짓눌렀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베냐민 대신 내가 종살이 하겠다’는 유다의 발언은 보통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만큼 유다는 책임적인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책임적인 사람을 귀히 여기시고, 중요하게 쓰시고, 축복하십니다.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지 않는 사람, 핑계대지 않는 사람, 책임감 때문에 기쁘게 손해 볼 줄 아는 사람을 하나님이 눈여겨보십니다. 

민2:3절에 보면, 광야 생활 40년 동안 이스라엘이 성막을 중심으로 진을 형성할 때 선봉의 자리에 섰던 지파가 유다지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다 지파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다윗 왕가가 나왔습니다. 
어찌 이런 축복을 저절로 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1. 느헤미야가 들은 고국 소식 

오늘 본문에 보면, 책임감이 강한 지도자 한 사람이 나옵니다. 
느헤미야입니다. 
느헤미야는 유대인이었지만 페르시아의 고위 관료가 된 몇 안 되는 사람들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아닥사스다 왕의 술 맡은 관원장으로서(주방장 정도가 아니라 장관 정도의 지위임) 수산궁에 머물며 편안히 살았습니다. 
좋은 음식을 먹고, 화려한 옷을 입고, 남부럽지 않게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친구 하나니로부터 고국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3절 “저희가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하는지라.” 
한마디로 백성들은 환난을 당하고, 성은 훼파되고, 성문은 불탔다는 소식입니다. 

이런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면 두 가지 반응이 가능하겠지요? 

① “나와 무슨 상관이야?” 할 수도 있겠지요? 
② 또 자기 문제인양 뛰어들어 어떻게 해서든 해결해보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근래 한국사회는 무슨 일이든지 극단적으로 처방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경향은 우리사회가 생성하는 언어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크든 작든 일만 벌어지면 ‘out!'하라는 것입니다. 
“처음서부터 끝까지 네 책임이니 당장 나가라.”는 것입니다. 
이런 풍토는 건강한 사회를 위하여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인사관리원칙 중의 하나는, 사람을 바꿀 때는 새 사람이 옛사람보다 두 배 이상 잘 하리라는 확신이 없으면 바꾸지 말라는 원칙이 있습니다. 
바꾸어서 잘 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괜히 시간만 허비할 수도 있습니다. 


2. 이런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느헤미야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4절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이것을 느헤미야의 중보기도 사역이라고 합니다. 

느헤미야가 기도하면서 고백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1) “.........하늘의 하나님 앞에.........”(5절) 

‘하늘의 하나님’이란 표현이 5절에도 나옵니다. 
‘하늘의 하나님’이란 표현은 공간을 뛰어넘는 초공간적인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그 당시의 신들은 지역신이었습니다. 
페르시아 신은 페르시아만 다스렸습니다. 
바벨론 신은 바벨론만 다스렸습니다. 
블레셋신은 블레셋만 다스렸습니다. 
그들의 능력은, 그들의 지역에 넘어가지 못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지역신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하나님’이란 시공을 초월하십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이런 분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2) “........언약을 지키시며.........”(5절)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 언약을 다음과 같이 기억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만일 내게로 돌아와서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찌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컨대 기억하옵소서."

아이들이 무슨 물건을 사달라고 했을 때 부모가 꼼짝 못하고 사줘야 할 때가 있습니다.
“아빠가 사준다고 약속했잖아요?” 라고 말할  때 입니다.

아버지가 한 약속을 기억하고, 그 약속을 걸고넘어지면 꼼짝 못하고 지갑을 열어야 합니다. 
그때 거절하면 아버지 되기를 포기해야 합니다. 
신뢰를 잃은 아버지가 어떻게 아버지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겠습니까? 


3)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5절) 

하나님은 죄인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잘못했어요.’ 라고 고백하면 하나님은 마치 바보처럼 잘 용서하십니다. 
이렇게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부자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이해관계와 부자관계를 비교해보면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① 이해관계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에게 돈을 빌렸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A와 B는 이해관계로 맺어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B는 약속된 날에 빌린 돈을 갚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A와 B의 관계는 끊어집니다. 
때로는 민사소송도 걸게 됩니다. 
만일 B가 A와의 관계를 회복하려면 빌린 돈을 갚는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B가 돈을 갚지 않고 관계를 회복하자고 말하면 아마 A는 “웃기는 소리하지 말고 이자라도 갚아!”라고 호통을 칠 것입니다. 
그들의 관계는 오로지 이해관계로 맺어졌기 때문입니다. 


② 부자관계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이해관계로 맺어진 사이가 아닙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돈을 빌려 사업을 하다가 망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빌린 돈을 갚을 길이 없습니다. 
아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아버지의 빚을 갚으리라 다짐하며 거리로 나섰습니다. 
그러나 돈이 그렇게 쉽게 벌리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아들은 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 빌린 돈을 다 날려버리고 말았어요. 용서해주세요.” 
그러면 아버지가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무슨 소리냐? 당장 나가 내 돈 가지고 와라.”라고 소리를 지르실까요? 

아니면 “아들아, 자식들하고 사느라고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돈은 무슨 돈? 부모자식 간에 돈 얘기하는 것 아니다. 돌아와 줘서 고맙다.”라고 말씀하실까요? 
아버지는 돈을 잃고도 아들에게 고맙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은 부자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용서 받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부자관계이기 때문입니다. 


4)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6절) 

하나님은 눈이 밝으시고, 귀가 밝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라는 복음성가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과거에는 성도들이 모이면 기도에 대한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금식 중이야.” 
“용문산 기도원에 기도하러 간다.” 
“산기도 하는데 짐승이 나타나서 무서워 눈도 못 뜨고 죽는 줄 알았다. 사탄이 그렇게 시험하드라고.” 

그러나 지금은 그런 얘기를 많이 듣지 못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그 힘든 시절에 어려운 상황을 이기고 살아온 것은 기도함으로 얻은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필립 얀시는 기도를 ‘하나님께 가는 가장 쉽고 가장 어려운 길’이라고 했습니다. 


나가는 말 

중보기도란 다른 사람의 문제를(민족과 인류의 문제) 자신의 문제로,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고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린 시절 저의 시골 교회를 섬겼던 전도사님은 ‘김유옥’이라는 분이셨습니다. 
이 분은 권사님으로서 정식으로 신학 교육을 받은 분이 아니셨습니다. 
강릉ㅇㅇ교회 권사님이셨는데 담임자가 없자 감리사님이 임시로 파송한 분이셨습니다. 

설교하는 것을 훈련 받은 분이 아니셨기에 노트에 적어서 그냥 읽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에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의 소원이 전도사님의 설교 노트를 한번 읽어보는 것이었습니다. 

어느날 수요예배를 드리던 밤에 전갈이 왔습니다. 
동네에 초등학교를 다니는 한 여자 아이가 죽어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교우들은 예배를 서둘러 마치고 그 집에 심방을 갔습니다.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찬송 부르고 기도하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때 전도사님이 이마가 펄펄 끓고, 의식을 잃어 가는 그 아이를 끌어안고 눈물과 땀이 뒤범벅이 되어 기도하시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동이 틀 무렵 열이 떨어지고, 아이의 의식이 회복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바로 ‘저것이 중보기도로구나.’를 알았습니다. 

중보기도란 다른 사람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고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럴 때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18:19절)” 는 주님의 약속이 이뤄진다고 믿습니다. 

그런 점에서 느헤미야는 참 중보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참으로 귀한 사람입니다. 

보통사람들은 남 타령합니다. 
보통사람들은 남을 원망하고, 남에게 불평합니다. 
보통사람은 남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민족의 불행을 자기의 문제로 싸안은 느헤미야는 분명히 포로후기 유대 역사에서 우뚝 솟은 거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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