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전도]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막 6:1~6)

  • 잡초 잡초
  • 506
  • 0

첨부 1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막 6:1~6)

      
우리가 전도를 하려고 하다보면 이런 불평을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믿고 안 믿고는 내 자유가 아니냐? 왜 믿음을 나에게 강요하느냐? 또 내가 안 믿고 싶어서 안 믿는 게 아니고 믿어지지 않기 때문에 안 믿는데 왜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느냐?’ 이런 말을 들으면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그렇지요. 안 믿어지기 때문에 믿지 않는데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안 믿어지는 사람을 억지로 믿게 한다면 그것은 양심을 속이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의 믿음 없음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셨다고 오늘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6절 말씀에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도다’ 이상히 여기셨다는 말은 부정적인 뜻입니다. 기뻐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먼저 여기서 주목할 것은 믿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고 믿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사람의 선택이 포함돼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믿을 수 있는데 믿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학생들 중에는 공부를 못하기 때문에 못하는 학생이 있고 공부를 안하기 때문에 못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못하기 때문에 못하는 것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건 타고난 것이기 때문에. 그러나 머리는 좋은데 안 하는 학생들, 그 학생들은 책임을 추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을 수 있는 기회가 없기 때문에 못 믿는 것, 그건 별개의 문제이지만 믿을 수 있는데 믿지 않는 것, 여기에는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도덕적인 실패에 대해서는 심판을 보류하셨습니다. 죄의 문제 때문에 사람을 나무라신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죄인을 구하러 오셨기 때문에. 할렐루야! 

예수님은 죄인을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에 사방에 죄인들이 있는 것을 아셨지만 적어도 그들의 죄 때문에 그들을 나무라신 적은 없습니다.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믿음 없는 것을 보셨을 때는 가차 없이 나무라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의심하느냐 어찌하여 아직 믿음이 없느냐 의심하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에도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믿음이 없는 것을 예수님은 아주 못마땅해 하시고 그것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죄가 크더라도 용서받을 수 있지만 믿음이 없는 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지옥에 가는 것은 죄가 커서라 아니라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주 중요한 원리입니다. 죄 때문에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 없기 때문에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얼마든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죄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것은 하나님도 대책이 없습니다. ‘믿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요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으리라’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믿음은 노아의 방주와 같다고 생각됩니다. 방주에 들어가면 홍수로부터 건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방주에 들어가지 않으면 죽습니다. 방주에 들어가는 사람이 의인이냐 죄인이냐를 말하지 않습니다. 방주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이 이와 같습니다. 죄인이냐, 의인이냐, 어차피 다 죄인인데 이제 와서 의와 죄를 비교하는 것은 도토리 키 재기입니다. 그러므로 방주에 들어가는 것, 그게 바로 믿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함이라’ 할렐루야! 

다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을만한 기회를 주십니다. 그래서 노아의 홍수가 경고한 날부터 백년 이후에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경고하시고 백년을 기다리셨습니다. 그 백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방주를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방주를 준비하면 죽지 않고 삽니다. 

그러나 그 백년의 기간을 허송세월하면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면 이미 늦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인내와 하나님이 기다림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천년 전에 예수님이 ‘내가 곧 오리라 - I'll come soon’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천년이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왜 곧 오리라고 하셨는데 이렇게 오랜 세월을 지냈느냐. 이것은 하나님의 기다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될 때까지 기다리고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찰 때까지 기다리고 사람들이 회개할 때까지 기다리고 탕자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만이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 당신도 믿음으로 사십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라’ 아직 죄인이 회개하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고 아직 열방이 돌아오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이 회개할 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인내하시고 오래 참으십니다. 그것이 사랑의 속성이기 때문에. 할렐루야!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인간에 대하여 죄인에 대하여 오래 참으십니다마는 그렇다고 영원히 참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첫 번째 오셨을 때는 구원을 주러 오셨지만 두 번째 오실 때는 심판하러 오십니다. ‘저리로써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예수님이 처음에 오셨을 때는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재림하실 때는 심판하기 위하여 오십니다. 그 이전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해야 됩니다. 그때가 되면 너무 늦습니다. 신랑이 도착했을 때 그때 기름을 찾으려고 하면 너무 늦습니다. 그 이전에 기름을 예비해 두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믿을만한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들의 믿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기신 것입니다. 그들은 첫째로 예수님의 설교를 들을 기회가 있었고 또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볼 기회가 있었고 그들은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고향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어렸을 때부터 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했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들의 믿지 않는 것에 대하여 도덕적인 의미를 발견하고 못마땅하게 생각하시고 예수님이 마음이 언짢아 하셨던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살던 동네는 꽃피는 동산은 아니었지만 어린이들이 많고 또 위계질서가 잡혀있는 동네였습니다. 요즘은 길에 나가면 노는 아이들을 별로 볼 수가 없지요. 다 학원에 가니까. 그러나 옛날에는 아이들이 집밖에만 나오면 놀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골목에 나가서 놀던 추억이 많이 있는데 한번은 동네 형들이 이런 규칙을 정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잘 모르는 아이에게는 서로 존댓말을 하기로 한다. 만약에 이 규칙을 어기면 때려도 좋다.’ 그 후 얼마 안돼서 제가 어떤 아이들하고 노는데 한 아이가 반말을 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어! 너 규칙을 어겼어!’하고 때렸습니다. 그랬더니 제 옆에 있던 친구가 ‘얘는 우리 동네 애가 아니야. 그래서 그 규칙을 몰라. 왜 때려?’ 이러더라구요. 그때 제가 제 실수를 깨달았어요. 그리고 ‘아, 나에게 과잉 충성하는 속성이 있구나.’ 어린 제가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이러한 속성을 늘 경계하면서 삽니다. 

국가든 가정이든 자기가 속한 팀이든 여기에 대해서 과잉충성을 하게 되면 상처를 입는 사람들이 발생합니다. 우리는 나라를 사랑해야 되지만 그것이 배타적인 민족주의가 되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되지만 그것이 영적인 교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무엇에 대해서 과잉충성을 하다보면 상처 입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과잉충성을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래서 규칙을 들을 기회가 없는 사람에게 그것을 요구할 수 없는 것처럼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는 사람이었다면 하나님은 적어도 그 책임을 그 사람에게 묻지는 않을 것입니다.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을 하나님은 어떻게 심판하실까? 그 사람이 스스로 양심에 갖고 있는 기준대로 심판하십니다. 그 사람이 스스로 옳다고 생각했던 것을 기준으로 삼아서 그 기준대로 살았느냐를 보실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성경이 별로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추측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이 세상을 떠난 사람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그 사람이 알고 스스로 갖고 있는 잣대를 가지고 심판하실 것이라고 우리는 보는 것입니다. 

문제는 복음을 듣기도 하고 믿을 기회가 있었는데도 안 믿은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다’ 여기서 이상히 여기셨다 라는 말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놀랬다 라는 뜻도 되고 그것을 싫어하셨다, 상처를 입었다, 충격을 입었다, 이런 뜻이 됩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믿지 않았느냐? 그 이유는 예수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었습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 이 사람들의 얘기입니다

본문 3절을 보면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그러니까 예수님의 동생들이 많았다는 얘기입니다. 마리아가 이후에 낳은 자식들인지 아니면 요셉이 전에 결혼해서 낳은 자식인지 가톨릭에서는 후자를 주장합니다마는 아무튼 같은 집에 식솔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형제들의 이름만도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 유대인들은 전부다 이름이 비슷비슷합니다. 그리고 누이들, 누이들은 몇 명이었는지 그 이름은 말하지 않습니다마는 아마 숫자는 비슷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들이 그렇게 말하면서 ‘예수를 배척한지라’ 이게 웬일입니까. 예수님을 알면 믿어야지 알기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예수님을 정말 아는 것을 방해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를 살펴보면 첫째는 예수님을 인간적으로만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인간적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적으로만 봐서는 믿음에 도달할 수가 없습니다. 영적으로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성령이 도와주셔야 됩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했을 때 예수님의 대답이 ‘이것을 너에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깨닫게 하셔야 예수님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우리가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들이 예수님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충분히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제이 패커라는 사람이 쓴 ‘More than a Carpenter'라는 책이 있습니다. '목수 이상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목수이셨지만 목수 이상이었어요.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들이시지만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몰랐어요. 충분히 알지를 못했기 때문에 믿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문제에요. 

과학자들이 과학을 충분히 알았다면 하나님을 인정할 것이지만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철학이든 인류학이든 생물학이든 천문학이든 다 마찬가지에요. 충분히 알면 오히려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데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부인하고 진짜 지혜를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이 성경을 충분히 알면 오히려 성경말씀을 믿을 텐데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을 마음대로 해석하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충분히 알아야 됩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다고 생각한 것이 오히려 예수님을 진짜로 아는 것을 가로막았어요. 

그리고 세 번째 이유는 예수님을 섣불리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방접종의 원리가 무엇입니까. 병균의 힘을 약하게 해서 몸에 주사를 하면 몸이 그 병균에 대해서 저항력을 키우기 때문에 진짜 병균이 들어오면 그것을 저항하게 됩니다. 면역력이 생깁니다. 이것이 예방접종의 원리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표면적으로만 알고 섣불리 알게 되면 오히려 예수님에 대해서 저항력이 생기기 때문에 진짜 복음을 들었을 때 저항하고 거부하고 진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그런 결과를 낳습니다. 소위 기독교 문명, 기독교 문화에서 산 사람들이 회심하지 못하고 믿음을 갖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자기가 섣불리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다보니까 진짜 복음을 들었을 때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덴마크 사람들에 대해 지적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덴마크 사람들은 자기들이 덴마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당연히 크리스찬이라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덴마크는 기독교 국가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독교 국가에서 태어나고 기독교 문화에서 살아도 거듭나지 않고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난 것 자체로 크리스찬이 되는 게 아니고 그 사람도 다 거듭나야 되고 회심해야 되고 주님을 자기의 구주로 영접해야 됩니다. 섣불리 아는 것이 오히려 진짜 신앙을 갖는데 걸림돌이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좀 충격적인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5절에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라는 표현입니다. 할 수 없었다 - could not 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전능하신 줄 알았는데 예수님도 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는 얘기냐, 그것이 초대교회의 논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똑같은 사건을 기록하면서 표현을 바꿨습니다. 

마태복음 13장 58절을 보면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did not 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could not- 할 수 없었다 가 아니고 하지 않았다 라고 썼습니다. 미묘한 차이입니다마는 아마도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이 마가복음 이후에 기록됐다고 보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마가의 표현이 옳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없으면 주님도 우리 삶에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주만물을 다스리는 데에는 우리의 믿음이 필요 없어요.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 역사하시는 부분에 있어서는 우리의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우리의 믿음이 필요하고 우리에게 복을 주기 위해서도 우리의 믿음이 필요하고 우리를 인도하기 위해서 우리의 순종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하실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많은 권능을 행하실 수 없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의 불신이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합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 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도둑질 하는 것이 죄이고 사람 죽이는 것이 죄이지, 믿지 않는 것이 어떻게 죄냐? 그러나 믿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믿지 않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다른 죄는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용서받지만 믿지 않는 것은 그건 대책이 없기 때문에 지옥 갑니다. 믿지 않는 것이 가장 심각한 죄입니다. 

21세기는 세계화시대이고 정보화시대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기독교를 모르는 사람이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이 없는 시대가 됐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를 안다고 기독교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해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믿어야 됩니다. 그 믿음이 주님으로 하여금 우리 삶 속에서 역사하실 수 있는 문을 여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 것이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주님의 구원이 우리의 삶에 임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천년 전이나 오늘이나 마찬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