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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으로 하나님께 가치있는 자가 되라! (히 11:3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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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하나님께 가치있는 자가 되라! (히 11:32~38)


오늘 본문 38절은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느니라”고 말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들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믿음으로 사는 자들은 나라들을 이기기도 했습니다. 의를 행하기도 했습니다. 약속을 받기도 했고,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했습니다.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했고, 칼날을 피하기도 했습니다. 연약한 가운데 강하기도 했습니다. 이방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그들은 동물의 가죽을 입고 유리방황하기도 했고, 집도, 친구도, 힘도, 권력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세상이 그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F. F Bruce는 “그들은 문명사회에 적합하지 않은 자들로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오히려 문명사회는 그들에게 적합하지 못했으며, 그들의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감당하므로 하나님께 적합했다.”(사도행전주석)고 말했습니다. 지혜서(The Word of Wisdom)에도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셔서 그들이 하나님에게 가치 있고, 적합하다는 것을 발견하셨다.”고 했습니다. 


1.  다니엘과 세 친구의 가치 있는 믿음 !

33, 34절에 보면 사자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는 바로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과 그 세 친구가 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은 나의 심판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 왕족으로서, BC 605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간 청년 중의 하나입니다(단1:1, 렘 25:1). 이스라엘 자손 중 왕족과 귀족으로서 흠이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며, 지식이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서 일할 만한 소년 몇 사람을 뽑으라는 왕명에 따라 환관장 아스부나스에 의해 다니엘과 그의 친구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와 더불어 뽑혔습니다(단1:1-7). 

환관 장은 다니엘을 “벨드사살”(그의 생명을 보호하라), 하나냐(여호와는 자비하심)를 “사드락(당신의 명령)”, 미사엘(누가 하나님이 될 수 있으리오)을 “메삭(여지신의 이름)”, 아사랴(여호와가 도와주심)를 “아벳느고(느고의 종, 종의 종)”라 이름하였습니다. 환관장이 그들에게 이런 이름을 붙여 준 것은 바벨론과 바벨론 왕과 바벨론의 신에게 충성을 바치라는 의미에서 였습니다. 

다니엘과 이들 친구가 어떠한 신앙을 가지고 그 이방 민족 사이에서 살았는지는 구약 다니엘서에 잘 나타납니다. 이들은 비록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이 이방 나라요 우상 숭배의 나라이며, 그들의 여호와와 관계가 있는 본 이름을 빼앗기고, 우상과 관계가 있는 이름으로 개명까지 받았지만 그들의 유대적 신앙을 끝까지 고수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신앙을 고수하기 위해 굶주린 사자굴과 뜨거운 용광로 속에 떨어지는 끔찍한 사건들을 당했습니다. 즉 사자의 밥이 되거나 불속에 타죽는 일이 있어도 신앙은 바꿀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비추어 보면 우리의 모습은 부끄러운 것뿐입니다. 교회생활을 하면서도 아나니아와 삽비라같이 하나님을 속이고, 가룟 유다와 같이 사람 앞에 가면을 쓰고 생활할 때가 많지 않습니까? 세대가 그렇고, 교회와 교인들이 그렇다고 치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진행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분만 아니라 교회에 오면 교인처럼, 직장에 가면 불신자처럼 행동하여 도대체 신자와 불신자를 구분하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진정한 성도라면, 믿음의 사람이라면, 교회 안이든 밖이든 간에 어디서나 믿는 자로서 일관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믿음의 사람이란 칭호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 가치를 인정받게 됩니다. 


2.  엘리야와 엘리사의 가치 있는 믿음 !

34절에 “칼날을 피하기도”했다는 것은 구약의 선지자 엘리야와 엘리사가 아합과 여호람의 암살 위험을 피하여 도망하던 사건을 염두에 두고 한 표현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궁정에는 많은 예언자들이 직업적으로 일했습니다. 그들은 공무원으로서 대우를 받으며 왕의 고문으로 활동했던 것입니다. 

만일 엘리야나 엘리사도 이러한 것을 원했다면 더욱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호화롭게 지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리어 왕의 잘못을 꾸짖고 회개를 명함으로써 늘 그들의 암살 위험 속에서 피 해 다녀야만 했습니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피해 다니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 주저앉아서 차라리 죽여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기도 했습니다(왕상19:4). 그들은 끝까지 자기들의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 같으면 하나님의 축복이며 인도라는 이름 아래 궁전의 생활을 기꺼이 택했을지도 모를 일을 그들은 거절한 것입니다. 이들의 이러한 모습을 통해 우리는 악과 선에 대한 분별 의식이 사라져버리고 안락하고 편안한 것만을 축복이라고 갈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비신앙적인 자세임을 배워야 합니다. 

때로 우리에게 큰 손해와 고통이 있다 해도 하나님이 원치 않는 것은 거절하는 믿음이야말로 진정한 신앙이 될 것입니다.


3.  엘르아살과 일곱 형제들의 가치 있는 믿음 !

37절을 보면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런 끔찍한 시련과 고통을 말할 때는 마카비 시대의 유대 제사장 엘르아살과 일곱 형제의 신앙적 순교를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안티오커스가 유대를 점령하고 성전 안에서 유대인들로 하여금 헬라의 신들에게 제사했던 돼지고기를 먹게 했을 때 노제사장 엘르아살은 이를 거부함으로써 온갖 고문 끝에 불에 타죽었으며,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일곱 형제들도 차례차례 온갖  고통을 당하면서 죽어갔습니다. 

사실 바로 목전에서 자기 형제들이 처참하게 죽는 것을 보고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단지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신뢰와 장래의 삶에 대한 믿음으감당했습니다. 

아무리 이 세상에서 고통과 고난이 온다 해도, 어려움이 있다 해도 하나님께 대한 일편단심이 순교를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믿음을 통해서 어떤 유익을 얻겠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 유익이 사라질 때 우리의 신앙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순수하게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그의 말씀에 대한 신뢰에서 신앙을 시작할 때 우리의 신앙은 이 세상의 어떠한 위협과 박해에도 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들 다니엘과 그 세 친구, 엘리야와 엘리사, 엘르아살과 일곱 형제들의 신앙을 생각해 보면서 과연 현재의 우리 신앙은 어떤지 재고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너무 주변 상황에 물들지는 않았는지, 너무 편한 것만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다른 불순한 의도가 있지는 않은지 깊이 반성하고 이런 선조들의 신앙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끝맺는 말

다니엘과 그의 친구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는 바벨론 제국과 그들의 우상에 적합하게 사는 것 보다는 사자굴과 풀무 불을 택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보물 같은 가치를 인정받아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당시 포악한 왕들과 비뚤어진 우상종교에 적합한 생활을 거부하여 칼날의 위협을 당했습니다. 하나님께 적합한 믿음을 가짐으로 하나님이 엘리야를 산채로 승천시키셨고, 엘리사의 무덤에까지 능력이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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