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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슴앓이 (롬 11: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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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앓이 (롬 11:13~27)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를 찬양 드리고 말씀을 나눕니다.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 나의 모든 것
주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 수 없네 주 나의 모든 것
십자가 죄 사하셨네 주님의 이름 찬양해 주 나의 모든 것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나의 빈 잔을 채우네 주 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양 존귀한 이름   

지난 주 성결신문을 보니까 눈에 아주 익숙한 교회 이름이 광고란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광고의 제목은 이러했습니다.

“인천 ㅇㅇ교회 담임목사 청빙”

그 동안 제 출신교회에서 약 20 여 년 동안 귀한 사역을 감당하신 목사님이 이제 은퇴를 하게 되어 새로운 담임목사를 청빙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신문기사를 보는 순간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출신교회의 추억들이 떠올랐습니다.

주일학교 시절 철없이 그냥 주는 것이 많은 교회가 좋아 그렇게 교회를 다녔던 제 출신교회에서의 추억들이 아련히 떠올랐습니다.

1981년 이전까지 습관적이고 명목적인 종교생활에 빠져 있던 저에게 주님이 인격적으로 오셔서 저를 만나 주셨고 그 이후에 신학을 하고 목사까지 되어 지금 중앙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81년 여름 주님을 만나고 82년에 신학대학교로 편입을 하기까지 출신교회에서 행했던 사역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이전의 저처럼 명목적인 종교생활을 하는 같은 교회의 친구들, 선배, 후배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던 사역이었습니다.
무슨 종교적인 행위를 통하여서가 아니라 제가 받은 말씀을 통한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기도했고 그 결과 많은 청년들이 회복되는 은혜를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당시에 말씀을 함께 나누며 1:1로 복음을 제시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얻었던 후배들 중에는 지금 주의 종으로, 목회자 부인으로 주의 일들을 감당하는 동역자들이 참으로 많이 있어 자부심을 느낍니다.

저는 당시의 신학적인 기초가 전혀 없는 일반 평신도였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심정이 구원의 확신이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청년들을 보면서 안타까움 때문에 가슴을 태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의 심정을 표현하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안타까움에 미칠 것 같았다.”

이 표현이 정말로 정확한 표현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구원을 받는데 그것을 모르고 죽어가는 교회 안의 청년들을 보면서 정말로 미칠 것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미칠 것 같은 가슴의 아픔을 우리나라 말로 무엇이라고 표현합니까?
‘가슴앓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오늘 상황과 시대와 형편은 다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하기 위하여 정말로 심한 가슴앓이를 하고 있는 한 주인공의 기사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본문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것처럼 유대인이었습니다.
그것도 그냥 유대인이 아니라 엘리트 계층의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하여 파문이 일고 있는 예수주의자들의 행태에 대하여 분노하였고 열정을 갖고 그들을 축출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는 어간에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되었는데 바로 이방의 사도로 부름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명을 부여 받고 최선의 사역을 감당하면서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 수많은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로마서는 AD 56년이라는 비교적 정확한 집필 연대를 알 수 있는 서신입니다.
바울이 이방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시작한 제 1차 전도여행의 시기가 AD 46-48년입니다.

제 2차 전도여행은 49년 그리고 3차 전도여행은 50-51년 정도로 산정하는 것을 보면 적어도 로마서는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고 있는 로마교회를 향하여 편지를 전하고 있는 이 시기는 이방인들의 구원의 은혜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시기였고 그 역사는 참으로 엄청났던 시기였음을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바울 스스로만이 느끼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은 자신의 사명인 이방 사역은 승리를 하고 있는 반면에 바울의 동족인 유대인들의 구원의 사역은 비참했던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미 살펴 본 롬 10:21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의 심정을 대언하였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임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교만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지 않고 거부했습니다.

도리어 그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손을 벌려 돌아올 것을 종용하였지만 이스라엘을 거부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시기 나게 하는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방인들을 구원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지난주에 보았던 11:11절에 이 내용은 분명하게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 나게 함이니라”

바울은 이러한 심정을 오늘 본문에서 또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본문 14절입니다.
“이는 혹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하게 하여 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본문 14절에 기록된 ‘시기하게 하다’라는 헬라어‘parazhlow’는 원뜻이 ‘질투하는 마음이 넘쳐나는 것’을 말합니다.

선민인 이스라엘은 구원의 지평에서 배제되고 도리어 같은 자리에서는 식사도 같이 하지 않으려고 했던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도록 하는 것을 보며 질투가 넘쳐나게 하여 이스라엘에게 예수님을 받아들이라고 독려하고픈 심정의 가슴앓이를 14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들의 구원론을 시작하는 9장에서 이렇게 충격의 고백을 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롬 9:1-3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

그런데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예수를 거부함으로 바울의 가슴앓이의 선한목적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완전히 포기하셨습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로마서 11장을 시작하는 1절에서 저는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셨음을 밝힌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고 단언하였습니다.
그 근거로 제시한 것이 2주 동안이나 살펴본 남은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이스라엘 중에서 남은 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바울은 남겨 두었습니다.

그러면서 또 다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의 비유를 들어 이스라엘의 구원의 메시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① 처음 익은 곡식가루의 비유입니다.  

16절을 주목합니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이 비유는 민 15:17-21의 거제(擧祭)의 규례에서 온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떡을 만들 때에 떡가루 중에서 처음 한 뭉치를 취하여 하나님께 거제로 드립니다.
그렇게 하면 남은 떡가루 전체가 거룩해진다는 것입니다.
대표성의 원리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첫 번째 드려진 거룩한 떡덩이라는 비유입니다.  

② 감람나무의 비유입니다.  

17절을 봅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 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 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무슨 말일까요?
우리가 너무나 익숙한 것처럼 참 감람나무는 이스라엘입니다.
반대로 돌 감람나무는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참 감람나무의 뿌리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진액을 부여 받은 나무는 아이러니하게도 참 감람나무가 아닌 돌 감람나무였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해석하겠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지역에 아주 잘 자라는 나무가 하나 있습니다.
올리브 나무(감람나무)입니다.
올리브 나무는 이스라엘의 지형에서 아주 알맞게 자라는 나무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 올리브 나무의 건강한 가지를 접붙여서 만들어 낸 또 하나의 나무가 있는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야생 올리브 나무(돌 감람나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나무는 당연히 원래의 올리브 나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하면 올리브 나무의 뿌리에서 나오는 진액을 가지들이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데모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가지들이 뿌리의 진액을 받아들이지 않자 말라서 죽어갑니다.
그러자 말라죽어가는 가지는 잘라서 버리고 그 자리에 야생 올리브 가지를 접붙였습니다.

그리고 야생 올리브 나무 가지가 이제는 원래의 올리브 나무에서 아주 잘 자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그래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비유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택하여 당신의 제사장 나라로 만드시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하여 구원을 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다른 방도를 찾아내셨는데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가지를 쳐서 버리고 이방인이라는 나라의 가지를 구원시킴으로 이스라엘을 깨우치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사도로 바울을 택하였고 이방인들 중에 구원을 받는 백성들을 불일 듯 일어나게 하신 것이라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자, 이제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도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입니까?
다시 강조하지만 이방인들을 먼저 구원시키심으로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싶으신 하나님의 계획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시기가 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려는 방법임을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이렇게 토로하고 있는 비유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속상하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도 받아들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 하나님의 선민들이 받아 들이지않느냐는 것입니다.
정말로 가슴이 아프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감격에 있는 이방인들을 볼 때 정말로 미칠 것 같은 가슴앓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주일 아침에 주시는 하나님의 바울을 통한 가슴앓이를 두 가지의 은혜로 깨달아야 합니다.

1.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된 이방인들은 자고하지 말라는 은혜입니다.

본문 18-22절은 이런 뜻입니다.
참 올리브 나무의 가지들이 나무의 진액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러자 졸지에 주인은 흉하게 가지가 죽어가는 꼴을 볼 수가 없어서 야생 올리브 나뭇가지를 원 나무에 접붙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생 올리브나무 가지는 아주 가치가 있는 가지로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복을 받은 야생올리브 가지는 그럼으로 더 열심히 뿌리의 진액을 받으려고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옛날의 습관을 버리지 않고 역시 교만하여 뿌리의 진액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원 올리브 가지를 쳐 버린 주인은 더 가차 없이 야생올리브 가지를 치게 될 것임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계속되는 비유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은혜로 구원을 받은 이방인들은 그 은혜를 지속하여 사모하고 공급받으라는 권면입니다.
은혜는 절대로 단절이 아니라 지속이며 연속임을 이방인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들에게 알려주는 교훈입니다.

신명기 31장을 우리는 새벽예배를 통해 묵상한 적이 있습니다.
모세가 우여곡절과 파란만장한 일들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지체들과 가나안이 바라보이는 느보산에 근처에 이르러 여호수아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죽음을 앞두고 모세의 뒤를 이을 여호수아에게 사역을 위탁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 31:3-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과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보다 먼저 건너가사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멸하시고 네가 그 땅을 차지하게 할 것이며 여호수아는 네 앞에서 건너갈지라 또한 여호와께서 이미 멸하신 아모리 왕 시혼과 옥과 및 그 땅에 행하신 것과 같이 그들에게도 행하실 것이라 또한 여호와께서 그들을 너희 앞에 넘기시리니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명령대로 그들에게 행할 것이라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

우리 교우들과 함께 새벽에 이 말씀을 묵상하기에 앞서 큐티를 통해 먼저 말씀을 받을 때의 감격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큐티를 하는데 갑자기 온 몸에 전율하는 소름이 쫙 끼쳤습니다.
거룩한 성령님의 임재를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승리는 이어지는 것이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모세와 함께 하시면서 모세보다 한 발 앞서 먼저 가셨던 주님의 은혜, 그래서 모세를 실패하지 않도록 돌보셨던 주님의 은혜를 아십니까?

모세가 느꼈을 감격이 눈에 선합니다.
그런데 더 큰 은혜는 이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모세와 함께 하셨던 놀라운 은혜는 이어지는 여호수아에게도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모세보다 앞서 가신 주님은 여호수아보다 앞서 가십니다.
모세를 떠나지 않으셨던 주님은 여호수아도 떠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모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은혜는 절대로 단절이 아니라 연속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팡세를 지은 파스칼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고백하다가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순간 울었습니다.”

모세골이라는 영성공동체에서 사역을 하는 임영수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일본의 목회자들과 우리나라의 목회자들과의 큰 차이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본의 목회자들은 20대가 30대를, 30대가 40대를, 40대가 50대의 목회자 실력을 따라갈 수 없는 반면에, 한국은 그 반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목회의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목회자들이 공부하는데 소홀히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훈련을 하는데 소홀히 하고 경험을 통하여 익숙해진 방법으로 목회를 하기 때문이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정말로 깊이 생각하게 하는 도전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를 명심하면 이 위기에서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은혜는 이어지는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일회적으로 내리는 것이 아니라 지속되는 것임을 안다면 우리는 결코 매너리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은혜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을 확신한다면 우리는 결코 자만해질 수 없습니다.
이방인들 중에 먼저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을 확신하는 백성들은 그 은혜의 지속성을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사는 백성입니다.
결코 유대인을 능멸하거나 업신여기는 자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유대인들을 시기 나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로 먼저 구원의 방주에 타게 된 행운아이심을 믿습니까?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고하지 않고 지속의 은혜를 사모하는 귀한 지체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은혜의 방법은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입니다.  

본문 23-24절의 내용은 눈물겹습니다.

“그들도 믿지 아니하는 데 머무르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받으리니 이는 그들을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네가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니 원 가지인 이 사람들이야 얼마나 더 자기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을 받으랴”

이 말을 풀어 해석하면 이런 뜻입니다.
이방인들도 야생 올리브 나뭇가지 같은 존재들인데 참 올리브 나무에 접붙임을 당해 참 가치 있는 올리브 나뭇가지가 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방인들도 구원의 은혜를 받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물며 유대인들은 어떻겠느냐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원뿌리의 진액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그들을 더 기쁜 마음으로 구원시키시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그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의 다분히 민족주의적인 사랑의 메시지를 로마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유대적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아직도 율법적인 부분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문을 열어놓았습니다.

본문 25-27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여기에서 아직도 신학적으로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것이 이것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라는 대목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온’이라는 단어 ‘ pa"’는 바울의 공동체에서 표현될 때 이스라엘 전체 공동체를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에른스트 케제만에 의하면 바울 공동체에서 사용되는 단어 ‘파스’는 ‘ 택함받은 자의 공동체’, 혹은 ‘구별함을 받은 지체’들을 말할 때 사용하는 형용사라는 것입니다.

케제만의 주석을 인용하여 대입하면 이렇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 중에 구원을 받는 자의 수가 충만해 질 때 유대인들 전체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를 믿는 구별된 공동체는 구원을 받는다고 해석해야 복음적입니다.
이것은 바로 여러분의 담임목사의 신학적인 기초를 둔 해석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선민으로 선택하셨기에 이스라엘 공동체를 모두 다 예수 믿게 하여 구원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을 자유의지로 받아들이는 유대인들을 구원시킨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이스라엘 공동체의 남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두 번째의 은혜를 사수해야 합니다.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만이 구원의 유일한 조건입니다.

요 14:6절을 선포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갈 2: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책에서 읽었습니다.
80세가 넘은 할아버지가 하루는 7세가 된 손자를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나이기 많아서 오래 살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 손자에게 이 세상에 남겨 주어야 하는 가장 귀중한 뜻을 가르쳐 주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그것이 무엇인데요?”
할아버지는 손자를 데리고 아들의 무덤으로 갔습니다.
다시 말하면 일찍 세상을 떠난 손자의 아버지에게 간 것입니다.
무덤에 한참을 서있던 할아버지가 손자의 손목을 잡은채로 이렇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손자야, 네 아버지는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었단다.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았지. 그런데 네 아버지는 한 가지 중요한 실수를 범했단다.”

손자가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그것이 무엇인데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다시 말했습니다.
“네 아버지는 예수가 예수라고만 믿었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지 못하고 떠난 것이란다. 너는 예수를 예수로만 믿지 말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야 한단다.”
이 이야기는 덴마크의 기독교적인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의 책에 나오는 말입니다.
  
교우 여러분!
선민인 유대인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이방인도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여야 구원을 얻습니다.
구원의 감격은 차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방법은 그래서 끝까지 예수님의 보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찬양을 눈물로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보혈을 지나 아버지 품으로 
보혈을 지나 하나님 품으로 한 걸음씩 나가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시네
존귀한 주 보혈이 내 영을 새롭게 하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교우 여러분!
설교의 마무리도 출신교회의 이야기를 하면서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고등부에 한 여학생이 나왔습니다.

백옥 같은 얼굴에 웃음을 띤 한 여학생이 눈에 띠었습니다.
1년 후배인 그 여학생은 정말로 천사 같았습니다.
학생회 예배실에서 그 후배가 피아노에 앉아서 ‘아드린너를 위한 발라드’를 반주했습니다.
저는 그 날부터 그녀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전형적인 짝사랑이었지만 그 사랑의 감정은 또 다른 감정으로 연결되었습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슴앓이였습니다.
괜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심장의 박동수가 빨라지고, 맥박도 빨리 뛰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얼굴도 붉어지고 그래서 날마다 가슴앓이를 앓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첫사랑을 해 보셨습니까?
첫사랑의 홍역이 무엇입니까?
가슴앓이입니다.
가슴앓이는 대전제로 사랑을 동반합니다.
사랑을 동반하는 가슴앓이는 아름답습니다.

우리 교우들은 태신자를 위한 가슴앓이가 있습니까?
우리 교우들을 바울처럼 골육, 친척, 민족을 사랑하는 가슴앓이가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이 지역의 죽어가는 영혼들을 품읍시다.
나에게 맡겨주신 태신자들을 위하여 가슴앓이를 하십시다.
십자가의 능력이 그들을 사로잡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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