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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대상, 사랑의 대상 (창 29: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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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대상, 사랑의 대상 (창 29:16~35)
  

여러분은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 앞에서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가시겠습니까? 소중한 사람이 되어 살아가시겠습니까? 행복한 사람이 되어 살아가면서 소중한 사람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 될 것입니다. 또한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행복한 사람이 되어주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소중한 사람이 되어주기를 원하십니까?  

또 다른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여러분은 사랑할 만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신뢰할만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사랑할만한 사람이 되면서 신뢰할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입니다만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믿음의 대상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어느 시골에 믿음 좋은 자매가 살고 있었는데 가정도 어려워 매우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자매는 "주여 너무 힘이 듭니다! 주여 너무 힘이 듭니다!" 라고 늘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자기가 예수님이 지고 골고다를 올라가셨던 커다란 십자가를 지고 천국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꿈속에서도 그 자매는 주님이 바로 나의 죄를 대신하셔서 이와 같은 십자가를 지셨구나 생각하면서 땀을 흘리며 열심히 가고 있었습니다. 

얼마를 가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 자매는 힘이 붙여 "주님 너무 힘이 듭니다. 주님은 목수이셨으니까 이 십자가를 조금만 잘라주세요." 주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그러라고 하고는 십자가를 잘라주었더니 이제 한결 가벼워 졌습니다. 그러나 또 얼마를 가다보니까 또 십자가가 무거워져서 도저히 갈 수가 없어서 이 자매는 또 예수님께 십자가를 조금만 잘라달라고 했더니 예수님은 또 아무 말 없이 십자가를 잘라주었습니다. 이렇게 세 번이나 십자가를 자르고 잘랐습니다. 이제 천국이 눈앞에 보이는데 깊은 계곡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큰 십자가를 질질 끌고 오더니 계곡에 턱 걸쳐놓으니까 자동적으로 다리가 되어서 그 협곡을 건너는데 이 자매의 십자가는 세 번씩이나 잘라내고 보니까 너무 짧아서 소용이 없었습니다. 천국은 보이는데 건널 수가 없어 이 자매는 요단강 가에서 목 놓아 울고 우는데 그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쫓아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지니라" 그 자매는 잠을 깬 그 후로는 “주님 어렵습니다. 힘이 듭니다. 제 십자가를 가볍게 해 주세요” 라고 했던 삶이 이제는 변하여 항상 주안에서 기쁨의 삶을 살고 있다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두 여인 레아와 라헬 자매가 등장하는데 그들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한 남편을 섬기면서 같은 시대를 살아온 여인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두 여인을 생각할 때 언니 레아는 인물도 부족하고, 게다가 시력도 좋지 못한, 그래서 시집도 못 갈 여인인데 그의 아버지 라반이 꾀를 부려서 억지로 시집을 보내 천덕꾸러기로 일생을 살아온 여인, 눈물과 한숨과 근심 걱정으로 일생을 보낸 여인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반면 라헬은 인물도 예쁘고, 무엇하나 흠잡을 데 없는 여인으로 행복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선입관이 있습니다. 하지만 라헬은 남편의 사랑을 받고 좋은 조건을 가졌지만 그녀는 남을 사랑하는 마음, 남을 위해 헌신하는 마음, 남을 이해하는 내면의 아름다움을 갖추지는 못한 여성이었음을 창세기 30장을 계속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은 두 여인의 남편이 된 야곱도 라헬만 사랑했기 때문에 어느 면으로 보나 언니 레아는 모든 것에 불리하고 도저히 삶의 낙이 없는 여인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 가지 불리한 조건에 있는 레아에게 더 큰 축복을 주셨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사람은 어느 누구나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받을 때 기쁨을 느낄 수 있고, 사는 맛이 납니다.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은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사랑받고자 하는 형태가 약간 다를 뿐입니다. 남자는 그 능력을 인정받고 싶어 하며, 여자는 그 감정을 용납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사랑받아야 할 자신이 사랑받고 있지 못하다고 느껴질 때 분노하게 되고 상심하게 됩니다. 부부 사이에 마찬가지입니다. 아내는 자기의 감정을 그대로 이해받고 싶어 하고 남편은 아내를 위한 그의 헌신을 그대로 용납 받고 싶어 합니다. 

이 말은 "왜 이렇게 하지 못했느냐?"하고 추궁 받고 싶지 않다는 뜻입니다. 힘들어하는 대부분의 부부들을 보면 비슷한 하소연을 합니다. 자기는 남편이나 아내를 사랑하고 있는데 상대방이 자기의 그 사랑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그 사랑을 무가치하고 하잘 것 없는 것으로 여기는데 문제가 있지 않은가요? 한 쪽은 사랑하는데 한 쪽은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사람은 누구나 상대방이 자신에게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는 기대치가 있습니다. 상대방이 나의 그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 자신은 그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비단 부부 관계에서만의 문제가 아니고 친구관계, 거래관계, 상관이나 부하와의 관계, 함께 일하는 동역관계에서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기대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나의 기대치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해보지 못합니다. 어머니가 아들을 자신의 분신으로 애지중지 길렀는데, 그 아들이 결혼하고부터 어머니에게 소홀히 합니다. 어머니는 자기 아들이 결혼하고도 변함없이 어머니와 일체가 되어 모든 것을 어머니와 상의하고 어머니의 뜻대로 움직여 주기를 바랐을지 모릅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기대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어머니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어머니는 생각하기를 며느리가 아들의 마음을 빼앗아갔다고 여기며 마음이 상하게 되고 며느리를 미워합니다. 며느리가 어머니에게 아무리 정성을 들여 잘 하여도 어머니의 눈에는 간사하게만 보일 뿐입니다. 어머니의 빗나간 기대 때문에 어머니는 아들과 며느리로부터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고, 아들도 어머니가 변했다고 느낍니다. 더욱이 며느리는 시어머니가 자기를 미워한다고 느낍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나의 기대대로 상대방이 움직여지기를 바라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의존입니다. 미움은 사랑하는데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의존하는데서 생겨나고 분노는 사랑하는데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의존하는데서 생겨납니다. 

어떤 젊은 여자가 병원에 찾아와서 자기 뱃속에 있는 개구리를 꺼내 달라고 하니까 의사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여자의 설명인즉, 몇 달 전 산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너무 목이 말라 웅덩이에 고인 물을 손바닥으로 움켜서 먹었는데 일어서다보니 그 웅덩이에는 올챙이들이 헤엄을 치더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그 여인은 심각할 정도로 복통이 가끔 일어나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때 몸속으로 들어간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어 몸 안을 돌아다니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그 여인에게는 심각한 일이었습니다. 의사가 그 여인에게 아무리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설명한들 먹혀들어갈리 없습니다. 

그 여인에게는 엑스레이는 물론 어떤 의학적 검사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의사가 수술하는 척 하면서 미리 준비해둔 개구리를 한 마리 보여주자, 그 여인은 기뻐하면서 돌아갔습니다. 이것이 그 여인의 기대치였습니다. 그 잘못된 기대치를 버리지 않는 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집으로 돌아간 그 여인은 몇 달 후 다시 배가 아프다고 병원을 찾아와 또 개구리를 꺼내 달라고 호소하는 것이었습니다. 지난번 수술할 때 개구리는 꺼냈지만, 그 개구리가 낳은 알이 몸속에 남아 있어서 그 알이 부화하여 새끼 개구리가 되어 온 몸을 뛰어 돌아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개구리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아프게 하고 못살게 구는 의심과 원망과 미움입니다. 우리의 잘못된 기대 때문에 우리 안에는 의심과 원망과 미움이 계속해서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남들이 볼 때는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당사자에게는 이처럼 고통스러울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가 자기를 극진히 사랑해주지 않거나 인정해주지 않거나 관심을 갖지 않으면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많은 여인들이 남편이 자기를 사랑해 주지 않으면 자신은 살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의욕을 잃고 만사를 귀찮게 여기는 반면 많은 남자들이 자신의 능력을 알아주지 못하면 불안해하며 꿈을 잃고 안절부절 못합니다. 

사랑받고 싶어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사랑받을 때 힘이 나고 자신이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인정과 사랑에 나의 존재와 삶의 가치를 둔다면 우리는 잘못된 기대, 빗나간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스코트 팩(정신과 의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받는 일이 당신의 목표라면 그것은 결코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확실하게 사랑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들의 인생의 주요목표가 수동적으로 사랑받는 것이면, 당신은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수동적으로 사랑받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수동적으로 사랑받으려는 사람은 상대방이 자기를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 끊임없이 불평합니다. 그리고 자기 이외 누군가 다른 사람을 중용하든지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표시하지 않는다고 분노합니다. 수동적으로 사랑받으려는 마음을 "의존"이라고 부르는데 의존은 사랑을 갈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안에 스스로 올챙이를 키우고 그것이 개구리가 되어 온 몸을 돌아다닌다고 믿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사랑하자"고 했지 "사랑을 받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받아야할 사람이 아니라, 이미 사랑을 받았고 지금도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무궁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렘31:3) 하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그 아들을 화목 죄로 보내셨을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요일 4:10)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 , 다른 사람에게서 그 사랑을 구하게 되며, 늘 불안해하며 다른 사람을 피곤케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의존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존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우리를 사랑해 달라고 요구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사랑의 감정이 있을 때 성공적인 삶을 누릴 수 있다   

사람들 중에는 이성간에만 연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연애하듯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일에 미쳐 일만을 사랑하며 일에 몰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먹는 것이나 굶는 것을 분간하지 못하고 일에만 몰두합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성공합니다. 공부하는 학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를 사랑하고 그것을 연애하듯이 즐깁니다. 이런 학생이 성공하고 자신이 하는 일을 성취합니다. 사실 모든 일에 이런 사랑의 감정이 있어야 즐겁고 황홀하며 매진할 수 있고 성공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핵심은 사랑  

신앙도 그렇습니다. 이런 사랑의 정신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데서 바른 신앙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도 가장 중요한 신앙의 핵심을 말씀하시면서 마태복음 22장 37절 이하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 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의 핵심은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신앙의 중심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정 사랑의 감격을 느낄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의 정신만이 참다운 신앙을 가지게 합니다. 하나님의 인간 사랑도 그렇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사 죽게 하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바로 이런 사랑의 정신에 입각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화목 제물로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정신은 먼저 둘 사이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를 부여합니다. 둘이 함께 할 수 있다면 어떤 고난이나 수고도, 또 어떤 명예나 부귀도 포기하고 바꿀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야곱은 7년을 라헬을 위하여 섬기겠다고 하였습니다. 7년이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젊디젊은 인생의 7년을 사랑하는 이를 위하여 종처럼 섬긴다는 것은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야곱은 사랑하는 라헬을 얻기 위하여서는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의 정신이요 사랑의 힘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의 정신이 신앙에도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다면 어떤 어려움도 기쁨으로 감당하겠다는 각오와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신앙은 바로 이런 사랑의 정신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핍박이 있다고 하여도 주님과 함께 있을 수 있고 마음껏 예배하며 신앙할 수 있다면 감수하겠다는 결의가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정신이 바로 신앙입니다. 
  

사랑의 정신은 시간을 계산하지 않는다   

사랑의 정신은 시간을 계산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가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함으로 7년을 수일같이 보냈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시간이 가는 것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함께 있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 스스로도 놀라게 됩니다. 서로 사랑하게 되면 시간의 흐름이 전혀 의식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진정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예배시간이 길지 않게 느끼고 성경 읽는 시간이 길지 않게 느끼고 기도하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과 함께 하는 모든 시간이 즐겁고 감격스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듯 주님을 좋아하면서 하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없으면 단 한 시간인 예배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길게 느껴지고 설교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잡념에 마음을 빼앗겨 예배를 예배답게 드리지 못하고 지루하고 답답하여 시계를 자주 들여다보게 됩니다. 신앙의 열정이 없어서입니다. 원하기는 여러분 모두가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던 열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사랑정신의 신앙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늘 예배가 감격이 있고 솟구치는 기쁨이 있는 은혜 충만한 예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7년을 수일처럼 보내듯 아무리 긴 예배나 말씀에서도 지루함보다는 은혜와 감격, 기쁨과 감사가 있는 아름다운 신앙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정신은 수고를 계산하지 않는다.   

사랑의 정신은 수고를 계산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수고함을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위한 수고라면 찾아서라도 하려고 힘쓰며 그것이 아무리 고달프고 힘든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자체가 기쁨이요 감사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하지 못해서 안달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정신입니다. 이렇게 진정한 사랑은 모든 수고를 계산하지 않으며 그 자체가 기쁨이요 감사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랑정신으로 일도 하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할 때 진정한 성공과 충만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레아는 야곱의 아내가 되었으나, 야곱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레아가 야곱으로부터 사랑받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처절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레아는 야곱의 아들들을 낳음으로써 남편의 사랑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리하여 아들을 낳을 때 마다 "이제는 남편이 나를 사랑하겠지"하고 기대했습니다. 레아가 야곱의 사랑을 그토록 갈구했던 이유는, 그녀는 야곱을 사랑하여 야곱과 결혼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강권에 못 이겨 야곱과 결혼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랑은 도의적으로 명령하거나 호소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만일 우리가 레아와 같은 처지에 놓였다면, 어떻게 해야 옳을까요? 남편은 아리따운 라헬을 사랑하고 있으며 남편의 사랑을 얻기 위해 라헬과 경쟁한다는 것은 고통스런 싸움일 수밖에 없습니다. 레아는 자식 낳기로 라헬과 경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 믿는 여인이 되도록 힘써야 했을 것입니다. 레아가 행복하게 사는 길은, 야곱의 사랑을 받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확신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사는데 있습니다.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깊이 받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크게 받았습니다. 아리따운 용모는 없었지만 훌륭한 자녀들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훨씬 큰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레아의 아들들 중에 레위는 그의 후손들이 제사장 직분을 맡은 축복을 받았으며 넷째 아들 유다는 그의 후손 중에 다윗 왕이 출생을 하여 왕가로서 또 그의 혈통에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오늘 우리는 라헬과 레아를 보면서 무엇을 알게 됩니까? 누가 진정한 승자입니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준과 하나님의 뜻과의 차이가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환자가 고백 한 글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영적 은혜를 주시기 위해 육적 결핍을 주시고, 영원한 것을 주시기 위해 유한한 것을 빼앗아 가시며, 우리를 겸손케 하기 위해 더 큰 그릇 만들어 더 큰 복을 주시기 위해 부족하게 하시고 어려움을 주십니다” 참으로 깊이 있는 고백의 글입니다. 

남편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라헬과 하나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레아의 삶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이세상도 그때와 같이 인생의 눈에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좋은 것이요, 행복으로 착각하며 살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그 용모, 빈부, 귀천이 아니라 그 심령 속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과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쓰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의 계보를 놓치지 않고 이어갔던 야곱과 같은 계보를 이어간 여인은 아름다운 미모를 가져서 남편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라헬이 아니라 남편의 사랑으로부터 소외되어 살아왔지만 슬픔과 외로움, 역경 속에서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오직 믿음을 지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은 레아였습니다. 

여러분! 레아와 같이 모든 조건이 불리하다고, 내 나이가 많다고, 육신이 약하다고 세상에서 부요하지 못하다고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앙만 있으면 하나님의 크신 축복을 레아와 같이 충만하게 받을 줄로 믿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약한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고자 하십니다. 세상은 우리를 레아와 같이 부족한 모습으로 보지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들어 모든 원수를 부끄럽게 하시리라 믿습니다. 예수님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사랑을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으셨고 그들에게 의존하지 않으셨고 대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셨고, 죄인들과 아픈 자들과 당시 사회에서 지탄받는 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의존하지 않았고 그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을 전파했고, 이 때문에 핍박 받는 것을 기쁘게 여겼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 역시 세상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으며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었고, 이로 인해 여러 가지 시련을 받았으나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사람은 늘 연약하고 변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랑의 대상은 될 수 있지만 결코 믿음의 대상은 될 수 없으며 하나님만이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이요, 사람은 사랑의 대상입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감정까지 평안으로 지켜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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