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이사야 같은 신자 (사 6:1~8)

  • 잡초 잡초
  • 311
  • 0

첨부 1


이사야 같은 신자 (사 6:1~8)


이사야는 크게 두 가지 사역을 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설교사역이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일들을 기록한 집필사역이었습니다. 그의 설교사역은 풍성했습니다. 그에게 가장 영향을 받은 사람은 유대의 13대 왕 히스기야였습니다. 그의 설교는 왕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왕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운 탁월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가 기록한 이사야서는 메시야에 대한 가장 많은 예언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메시야의 이름과 동정년 탄생 그리고 수난까지 마치 현장을 보며 예언하듯이 선명하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약 60년간 변함없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사용되었습니다. 그의 사역 기간 동안 나타난 가장 대표적인 기적은 히스기야 왕의 생명을 15년 연장시킨 일과 해 그림자가 10도나 뒤로 물러난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이사야의 위대한 사역에 대해서 더 다룰 수 있지만 이정도로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초점을 잃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서 중요하게 다루려고 하는 것은 그가 성직자였느냐 평신도였느냐가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의 손에 잡혀서 하나님을 위하여 장기간 위대하게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성공은 돈벌이에 있지 않습니다. 명예나 권력에 있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은 우리를 편리하게 해주고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인정받게 해주기는 하지만 영원한 세계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런 것을 소유했지만 하나님께 사용된 것이 아니라면 오히려 더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손에 잡혀서 살았는가, 하나님이 인정하는 인생을 살았는가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나 부르심을 받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이 내용을 통해서 신앙인 이사야의 모습을 보고 우리의 신앙생활을 점검해봐야 할 것입니다. 

1. 이사야는 문제가 있을 때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1절).

문제가 있을 때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 있고, 문제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쳐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사야는 문제를 만나니 하나님 앞으로 들어갔던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가 만난 문제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인 문제입니다. 그의 관심은 자신에 대한 관심보다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더 컸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하던 해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였습니다. 웃시야 왕의 죽음은 국가적인 위기였습니다. 웃시야 왕은 유다의 10대 왕입니다. 52년 동안 유다를 다스렸습니다. 웃시야는 경건한 사람으로 하나님을 섬겼으며 하나님의 축복으로 국방과 경제를 튼튼하게 했으며 그 당시 일어나고 있는 신흥제국들의 압력 앞에서도 국가를 지켰던 왕입니다.

이사야는 성전으로 들어가서 기도했습니다. 그는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풀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사야는 문제를 푸는 열쇠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른 곳에서 해답을 찾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문제를 만났을 때 이사야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찾는 것은 굉장히 싫어하십니다. 사31:1에서 이사야는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도움을 구하러 애굽에 내려가는 것은 세상적인 도움과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말과 병거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이사야 시대에 웃시야 왕이 죽었던 때처럼 어려운 때인 것 같습니다. 먼저 영적인 어려움이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약 120년의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마이너스 성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장로 대통령이 되었지만 여러 가지 실수로 인하여 기독교가 엄청난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MBC, SBS 방송국에서는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프로그램을 공공연하게 몇 주 동안 방송했고 또 한국교회 상위 0.01%에 해당되는 교회와 목회자들의 잘못을 마치 모든 한국교회 전체의 모습인 것처럼 방송하므로 기독교를 음해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경제적으로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기름 값 상승과 원자재 값 상승으로 한국경제가 휘청거리고 있으며 서민경제는 바닥을 치고 있습니다. 7%성장을 장담했던 이명박 정부도 성장보다는 안정을 강조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주식시장도 외국인들의 손에 놀아나고 있습니다. 외국인들의 매도와 매수에 따라서 주식시장이 춤을 추고 있습니다. 그들은 더 나은 수입이 보장된 나라가 있다면 철새처럼 옮겨가게 될 것이 뻔합니다. 우리나라는 통일문제와 외교문제에 있어서도 어려움을 격고 있습니다. 금강산 피격사건과 일본의 독도영유권 문제가 단적인 예가 되겠습니다. 우리의 우방이라고 믿었던 미국도 경제논리로 일본의 손을 들어줄 것이 뻔합니다. 

지금은 구국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나라는 구국기도의 용사들의 기도에 응답으로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고, 그 이후 역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믿는 자들의 구국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역사로 이 나라가 이만큼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구국기도로 나라를 구한 실례로 6.25 전쟁 때 있었던 국가적인 기도를 들 수 있습니다.  북괴군은 남한 전역을 거의 점령하고 낙동강 전선 최후 방어선이 위기에 있을 때 고 이승만 대통령은 모든 목사님들을 부산 도지사관으로 불러 기도의 부탁을 했습니다. “우리 한국은 지금 풍전등화의 운명에 있습니다. 지금은 장마철로 비가 올 때입니다. 비가 오지 않아야 우리 비행기가 떠서 낙동강 유역의 적의 진지를 폭격할 수가 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적군이 낙동강을 건너게 될 것입니다. 이 지경에서 우리가 의지할 곳은 하나님밖에 없으니 목사님들은 하나님께 기도 드려 주십시요” 그때 모든 목사님들이 부산중앙교회에 모여 일주일 동안 금식철야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그 결과 장마철임에도 불구하고 맑은 날씨가 20여 일 동안 계속되어 B29폭격기가 매일 낙동강가의 적의 진지들을 융단 폭격하였습니다. 적들은 풍비박산, 완전 무력하게 되고 유엔군은 반격을 감행하고 인천상률작전을 전개하여 적들을 다 몰아내고 우리나라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기도는 개인을 살리고 가정을 살립니다. 기도는 사업을 일으키고 교회를 부흥케 할 것입니다. 우리의 구국기도는 대한민국을 하나님이 지키시는 가장 안전한 나라로 만들 것입니다. 


2.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1-4절).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기도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이신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이지 알게 되면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 위에 뛰어나시고 모든 이름 위에 탁월하신 분입니다. 모든 존재를 창조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모든 존재의 이름을 주신이가 하나님이십니다. 하늘위에 있는 자들이나 땅위에 있는 자들 심지어 땅 아래 있는 자들까지도 그분의 이름 앞에 무릎을 끓어야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은 천사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천사들도 하나님 앞에서는 빛을 잃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여섯 날개를 가진 스랍천사들은 그 분 앞에서 얼굴을 가립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교회의 기도를 들으시고 천사를 보내셨는데 천사가 감옥에 나타나자 빛이 환히 비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영광스러운 존재인 천사들이 하는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화답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찬송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얼마나 높은 사람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다른 높은 사람과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아주 높은 사람이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그 사람이 상석에 앉았습니다. 잠시 후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자 상석에 앉아 있던 사람이 일어나고 금방 들어온 사람이 상석에 앉았다면 먼저 들어온 높은 사람보다 금방 들어온 사람이 더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천사보다 뛰어나신 분입니다. 아니 비교도 안 되는 분입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그 위대하신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 하는 그 장소에 하나님이 임재 하셨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이 자리에도 주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는 이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1장과 2장에 보면 일곱 금촛대와 일곱 금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주님이 나옵니다. 거기서 일곱 금촛대는 주님의 교회입니다. 교회는 주님이 거니시는 장소입니다. 

신자들은 주님의 영광을 알아야 하며 그 영광스러운 주님이 나와 함께 하므로 나 또한 영광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가 존귀한 이유는 위대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프랑스를 여행하던 한 미국 사람이, 파리 시내의 장신구점에서 한 중고품 호박 목걸이를 샀습니다. 미국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공항에서 이상하게 많은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상스럽게 생각한 그 사람은 목거리를 들고 보석상에 가서 감정을 부탁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보석상 주인은 그 목걸이를 선뜻 2만 5천불에 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더욱 권위 있는 감정사에게 가지고 갔습니다. 현미경으로 조사해 본 그 감정사는 “이 목걸이를 나에게 파신다면 3만5천불을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궁금증을 도저히 풀 수 없었던 목걸이의 주인은 도대체 그 목걸이가 왜 그렇게 값이 나가는 것이냐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감정사는 그를 현미경 앞으로 인도하고, “자 이것을 보세요” 라고 했습니다. 그가 현미경을 들여다보자 그 사람의 눈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프롬 나폴레온 보나파르트 투 조세핀” 그 뜻은 “조세핀에게, 나폴레온으로부터”입니다. 즉 나폴레옹 황제가 그 애인 조세핀에게 선물로 주었던 목걸이었습니다.  나폴레온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그 목걸이가 그토록 귀하고 값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믿는 우리와 우리가 섬기는 교회는 주님의 이름이 새겨진 정도가 아니라 주님이 함께 하시는 존재들입니다. 


3. 이사야는 자신에 대해서 절망했던 사람이었습니다(5절).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하나님의 빛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빛이 임하니 자기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을 때에는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이 분간이 안 됩니다. 그런데 빛 가운데 나오면 선명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로움과 도덕성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빛이 없어서 그렀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처음 만날 때 그에게 주님의 빛이 임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지적하지 않았고 주님께서도 자신의 죄를 지적하지 않았는데 주님 앞에 무릎 끓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참된 겸손은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빛 가운데서 자신을 볼 때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의 빛이 없으면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자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이 잘 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전에 먼저 자신의 죄를 보게 하시고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게 하십니다.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드릴 수 없습니다. 

1970년대의 한 인기가수가 대마초를 피우다가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3개월 동안 복역했는데 그곳에서 한 사형수에게 전도를 받았습니다. 이 사형수가 어찌나 진지하게 복음을 전하던지 그 태도에 감동을 받아 이 가수도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믿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그가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게 되자 사형수는 그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밖에 나가면 내가 세상에서 예수님을 위해 못한 몫까지 일해 주세요” 이 가수는 대마초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스스로 자기가 착하다고 생각하고 자기만큼 의로운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큰소리쳤습니다. 그러나 사형수를 만나 전도를 받고 복음을 들으면서 점차 자신이 추악한 죄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에 대해 절망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께 돌아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 후 그는 신학을 공부했고 미국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왜 사형수가 구원받기 쉬운지 압니까? 사형수는 자신에 대해 절망했기 때문에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절망하지 아니하면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의지하고 교만하고 자신만만해서 주님을 찾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절망한 사람이 비로소 자기를 도와주고 건져줄 자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왜 감옥에 들어가면 밖에 있을 때보다 예수 믿기가 쉬운지 아십니까? 감방에 갇혀 있다 보면 자신에 대해 절망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자신의 처지가 고달프고 비참해지면 자기를 도와줄 수 있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 가수도 한창 인기를 얻고 활동할 때는 스스로를 대단한 사람으로 여겼다가 감옥에 갇혀 절망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되자 깨어지고 항복해서 주님을 구주로 모시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깨어지고 항복해야 비로소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구원이 무엇입니까? 영혼의 구원입니까? 생활의 구원입니까? 질병으로부터의 구원입니까? 무엇이 되었든 자기의 능력에 대해서 절망하시고 스스로 무엇을 하려는 마음을 포기하십시오. 그래야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드리게 되고 구원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4. 이사야는 정결함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6-7절).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도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함에 이르는 것은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도 보면 이사야가 자신의 부정함을 발견하고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거룩해 지기 위하여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본문에 보면 천사가 화저로 단에서 핀 숯을 취하고 그것을 손에 가지고 이사야에게로 날아와서 입술에 대며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파출소나 학교에서 심부름을 하던 사람을 소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국가의 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대사라고 합니다. 비밀스런 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밀사라고 하고요. 특별한 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특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심부름꾼은 사람인 경우에는 사도라고 하고, 하나님의 심부름꾼 중 영적존재는 천사라고 한다. 이사야의 입술을 정결케 한 것은 하나님의 심부름꾼인 천사입니다. 천사가 하나님의 심부름꾼이기 때문에 선한 천사가 한 일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신자가 가장 열망해야 할 것 중에 하나가 거룩함입니다. 그릇 하나를 사용해도 깨끗해야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생을 살고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이 되려면 거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능력이 나타나려면 거룩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면 거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구가 되려면 거룩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기본적인 거룩은 소유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로 정결함을 받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을 성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가 있습니다. 이런 죄가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것을 가로막습니다. 렘5:25에 보면 “너희 죄가 너희에게 오는 좋은 것을 막았느니라”고 말합니다. 구원 받은 후에 범한 죄의 정결함도 역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배로 피로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주님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는 것입니다.

하수구가 막혀서 고생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 저희는 몇 차례 고생을 했습니다. 작년에도 하수구가 막히니까 물이 내려가지 못해서 고생을 했는데 문집사님이 와서 하수구 뚫는 기계로 뻥 뚫어놓으니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아직 처리 되지 못한 죄 때문에 인생에 여러 가지 문제가 하수구가 막힌 것처럼 막혀있지는 않습니까? 주님 앞에 철저히 회개하시고 정결함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막힌 문제가 뻥 뚫리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5. 이사야는 사명을 발견하고 자원하는 사람이었습니다(8-13절).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일할 사람을 찾으십니다. 이사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 이사야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했습니다.

만약 이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했다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찾으셨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두 가지 이유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합니다. 첫째는 주님의 일보다 더 바쁜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일 보다 더 바쁜 일이 있는 사람은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그로 하여금 그의 길을 가게 하십니다.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능력을 주셔서 감당하게 하십니다. 모세나 예레미야를 보면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거절했으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놀라운 능력을 주시면서 그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사명자란 목회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일을 몇 받은 사람이 사명자입니다. 그런데 사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은 사명자입니다. 

사명의 길을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사야는 사명을 받았으나 그가 사명의 길을 가는 데는 어려움이 있을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의 눈이 어둡고 귀가 둔해서 이사야의 말을 듣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순종해야 하는 일입니다. 사명(使命)에서 ‘命’자는 ‘목숨 명’자입니다. 세상에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명입니다. 목숨은 사명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숨을 내놓는 어려움이 있어도 감당해야 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사명자는 작은 것에서도 소망을 보고 사역하는 것이다.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해도 그 그루터기를 보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명자는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에 치우치면 안 됩니다. 하기 싫어도 가기 싫어도 해야 하고 가야 하는 것이 사명자의 길입니다. 

삼상 6장에 보면 벧세메스로 가는 소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소는 사명을 위하여 헌신한 소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면서 법궤를 빼앗아갔습니다. 그런데 법궤를 탈취한 후부터 이상하게 재앙이 내리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 재앙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우연히 일어난 일인지를 시험하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젖 나는 소 두 마리의 송아지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법궤를 실은 수레를 끌고 벧세메스로 가게 합니다. 만약 소들이 새끼를 향해서 간다면 블레셋에 내린 재앙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고 소들이 벧세메스로 향해서 똑바로 간다면 블레셋에 내린 재앙이 하나님이 내린 재앙으로 여기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암소들은 울면서도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고 대로로 가며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벧세메스에 도착해서는 하나님 앞에 번제물로 드려집니다. 

성경은 이 두 마리의 암소를 통해서 사명의 길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사명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인정에 매여서는 안 됩니다. 좌우로 치우쳐서도 안 되고 바로 행해야 합니다. 사명자들은 사명을 완수한 후에 영광을 원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의 목숨까지도 내놓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주 흔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대부분 사명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찾아와도 흔들림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사명을 든든히 붙잡아서 그렇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중심으로 사느냐에 따라 4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익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편리를 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쾌락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넷째는 사명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사명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진정한 행복, 진정한 성공은 목숨을 걸어도 아깝지 않은 사명을 발견하고 하루를 살아도 사명대로 사는 인생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영적으로 단단해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비곗살 신자가 아니라 근육살 신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사야는 문제가 있을 때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 절망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 앞에서 정결함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명을 발견하고 자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