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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는 그렇게 살지마라 (사 53:11~12, 빌 2:6~8, 마 20: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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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그렇게 살지마라 (사 53:11~12, 빌 2:6~8, 마 20:20~28)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 고난주간 연극제에서 이런 시나리오를 읽은 적이 있었다. 많은 군중들이 모여 있고, 그 가운데 시커먼 관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 관은 가룟유다의 관이었다. 군중들은 가룟유다가 과연 어떤 사람이었던가가 궁금했다. 그래서 그 관을 열어보라고 재촉한다. 그래서 한 사람이 그 관의 뚜껑을 열어보더니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도망을 친다. 그 다음 사람이 이상해서 관을 들여다보더니 무릎을 꿇고 울면서 가슴을 친다. 여러 사람들이 그 관을 들여다보는데 모두가 “아니야, 이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야!”하면서 그 관 곁을 떠나갔다. 나중에 그 관을 공개하는 데, 거기에는 길쭉한 유리거울이 들어 있었다. 

이 연극의 의미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죄인들을 용서하고 사랑하신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셨던 한 제자가 배신을 하여 결국에는 모진 고문과 참혹한 멸시와 조롱 속에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게 하였는데 그 제자가 가룟유다였고, 그 후대에서 지금까지도 천벌받을 인간으로 조명되어지는 그 제자가 오늘날에는 바로 “나”자신이 아닌가 라는 자성을 하면서, 내게 못을 박는 사람들까지라도 포용하고 섬기라는 그러한 뜻으로 생각하고 그 점을 가슴 깊이 받아들이고 되새기면서 어느 자리에서든 군림하는 자기 아니라 섬기는 자로 살아가라는 각오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가룟 유다만 배신자라고 환멸을 느끼고 있는 듯한데 사실 배신의 모양은 성경 속에서도 여러 가지로 표현되어지고 있다. 결국 변함없이 섬겨야 할 대상에 대해 섬김이 없는 모습들은 모두가 배신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시내산 아래에서 보여줬던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 그랬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외쳤던 군중들이 그러했고, 예수님이 게세마네 동산에서 대제사장의 사병들에게 끌려가실 때 막지 못했던 무리들이 그랬고, 가야바의 뜰에서 겉옷을 벗어 던지고 도망쳤던 청년이 그러했으며, 닭 울기 전에 세 번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가 그러했다. 

안디옥에서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다가 예루살렘교회 장로들이 들어설 때, 도망쳤던 그 베드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들의 모든 삶이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 그때를 돌아보면 너무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이었던 행위들이 주님의 참된 가르치심과 다른 배신의 흔적들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대통령까지도 국민을 섬기겠다고 했는데, 과연 섬김의 길, 섬김의 삶은 어떤 삶일까요? 

오늘 본문말씀 마태복음 20:20 이하의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간곡하게 가르침을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연후에 20절 말씀을 보니 살로메가 자신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 엎드려 절하며 노골적으로 인사 청탁을 하는데서 비롯되었다. 21절 말씀대로 예수께서 무엇을 원하느냐 말씀하시자, “나의 두 아들 중에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그렇게 요청했다. 22절에서 예수께서는 “너희의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되물어보셨다.

나의 마시려는 잔, 이 잔 포테리오는 예수께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것을 은유로 나타내신 것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세베대의 아들들은 아마도 예수님의 잔을 마신 것이 자신들의 순결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쉽게 “할 수 있나이다.” 라고 성급하게 대답했다. 야고보와 요한은 이 비유를 예수님께 들었을 때 어쩌면 영광에 앞서서 제한된 고난이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니면 그들과 살로메까지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얼마나 고민되고 고통스러우시면 땀방울이 핏방울 되시기까지 할 수만 있거든 세 번이나 멀리하고 싶었던 그 끔찍스러운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의 잔을 착각해서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여 로마제국을 뒤엎고 권좌에 오르게 될 때 단순히 고대 제왕들의 관습에 따라서 좌우편을 하사받고 함께 앉아서 마실 축배로 착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본문 마태복음 20:20 앞에 17-19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옮기시면서 세 번째로 당신의 고난을 예고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고지가 끝나자마자 이와는 달리 상반되게 세상에서의 권력과 지위를 구하는 두 제자들의 막무가내식의 요청은 매우 충격적이고 밉살스럽게 보이기도 하였다. 아마 대학생들 같은 표현으로는 짜증나, 그렇게 했을 것 같다.

예수님께서는 섬기며 죽는 것을 생각하시는데 제자들은 이와는 달리 섬김을 받으며 사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24절에 열 제자가 이 말을 듣고 두 형제들에 대해서 분히 여겼다는 말을 보면 열두 제자 모두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세상적인 생각에 빠져있던 것 같다. 야고보와 요한이 자신들만 높은 자리를 얻으려고 하는 것에 분노를 드러낸 열 제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열두 제자 모두 그들이 가진 가치관은 하나님 나라 가치관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이었음을 우리는 잘 알 수 있다.

25절 말씀에 예수께서는 이런 제자들을 불러 모아서 더 깊은 가르침을 주셨는데, 이방인들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대인들이 저희들에게 권세를 부린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이 세상에서 권력자들과 대인들이 권력을 추구하고 즐기며 권력을 임의로 부리고 살지마는 그렇게 계속 살기 위해서 권력을 탐하고 권좌에 앉기 위해서 죽도록 분토하지만,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모습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만 하신 것에 끝내지 않고 실제로 마가복음 15:25에 기록된 해골의 곳 골고다에 이르러서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로마 제국의 사형수들이 두려워하는 페니키아에서 유래되었다는 십자가 형틀에 못 박혀 죽으셨다.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셔서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고 이사야 53:11-12에 나타난바 많은 사람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며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에 하나로 죽기까지 고난의 종으로 오셔서 십자가 고난을 통해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던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 6시간 동안 매달려서 옆구리에 창을 박고 남은 핏방울 물 한 방울 다 쏟으시며 죽기까지 희생과 섬김과 사랑의 삶을 사셨다. 

우리 주님은 자신을 조롱하고 비웃는 자들을 품으셨다. 자신을 향하여 침 뱉고 저주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시고 자신을 심지어 대못으로 박는 자들까지라도 끝까지 참고 사랑으로 용서하셨다. 높은 권좌에 앉는 군림의 자리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홀로 섬김의 자리에 서 계셨다. 영광의 면류관 길이 아니라 고난과 희생의 십자가 길을 외롭게 걸어 나가셨다. 

다니엘서 7:14 말씀대로 사실상 섬김을 받으러 오셔야 할 인자께서 빌립보서 2:6-7 말씀대로 오히려 겸손하게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이여, 하나님께서 거꾸로 우리를 섬기로 오셨던 것이었다. 

몇 해 전에 한국교회 지도적인 위치에 있던 몇 분의 목사님들이 한국교회의 성장이 멈춤을 보면서 고백한 적이 있었다. 교회가 교회다워야 하는데, 너무 복음을 값싼 것으로 전해왔다는 것이었다. 그 뉘우침이 불과 얼마가지 못한 것을 우리는 이미 보고 있다. 마치 국민 앞에서 두 번씩이나 기자회견을 통한 사과를 했던 대통령이 오비이락이라 할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아는 바대로는 지난 주 초에 여의도 정책연구소에서 리서치 결과를 얻었는데 쇠고기 추가협상발표 후에 대통령의 지지율이 12%에서 31%로 오르고 있다는 것과 촛불문화제를 그만두어야 한다는데 찬성하는 율이 51%나 되었다는 것이었다. 

서울에서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는 내심 불안해졌다. 그런데 아니게 아니라 그 다음날 대통령은 과격 폭력시위하면서 엄단 조치를 취하겠다고 하였다. 검찰이나 경찰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앞 다투어 충성을 표시하였다. 초등학생과 81세의 노인 그리고 국회의원까지 연행하였다. 참회의 고백을 하셨던 그 목사님은 촛불문화제가 한참일 때,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이 문제는 전적으로 이전의 참여정부가 책임져야 할 것을 떠안은 것이라고 위로(?)의 말을 던졌다고 보도되었다. 이런 것이 과연 섬김을 가르치셨던 주님의 제자다운 모습일까? 아니 이것이 과연 예수 잘 믿고 복받는 길인가?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는 이 말씀을 정리하면서 주님께서 저한테 해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저 자신을 돌아보았다.

본문 27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으뜸’과 ‘종’은 둘로써 거의 정반대 개념의 말이다. 으뜸이 되고자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하고 종이 되고자 하는 자는 으뜸이 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역사의 종교이다. 살고자 하면 죽어야 하고 죽고자 하면 사는 것이 기독교이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이기도 하다. 높아지려고 하면 물처럼 머리를 낮은 곳에 두어야 한다. 낮아져야 한다. 성육신하신 주님처럼 낮아져야, 겸손히 낮아지고 섬기면 높아지게 되는 것이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말씀하셨던 그 주님. 제자들의 선생님께서 더러워진 그 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본을 보여주시며 사랑으로 내가 아닌 너를 위한, 남을 위한 헌신과 희생으로 섬김의 삶을 살아갈 것을 제자들에게 명하셨다. 그리고 주님께 성도로 제직으로 부름받은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께서는 그렇게 명하고 계신다. “너희도 내가 갈보리 산에서 죽기까지 본을 보인 것처럼 너희도 그렇게 살라.” 

그러나 마가복음 10:28 말씀처럼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라는 제자들의 고백같이 저들은 배와 그물과 부친까지도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지마는 죽는 데까지 따르겠다고 생명포기까지 선언하였지마는 결국은 자신이 살려고 주님을 포기했던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요한복음 21:3 말씀을 보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이것을 확신하지 못한 수제자 베드로가 하는 말이 뭡니까?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자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다고 따라 나섰다. 사람낚는 어부의 사명보다 과거로 돌아가 물고기 잡는 어부로, 세상의 아들로 주님의 영광보다는 자신의 안일과 영광을 추구하는 자로 다시 전락하였다.

이 시간 우리 자신을 말씀 앞에서 엄정히 돌이켜 보자.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은 제자들처럼 저와 우리 모두는 이 세상 것을 버리고 예수 믿고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지만 나 또한 지금까지 세상의 것들을 오히려 더 많이 움켜잡고 높은데 서기 위해서 은밀히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가? 

말씀 안에서 성령 안에서 목적이 이끄는 분명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오히려 구습의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같이 세태의 변화에 따라 세상에 오히려 깊이 묻혀 살아오지 않았는가?

우리는 지난 한 주간에도 얼마나 주님을 나 몰라라 하고, 내동댕이치며, 주님을 부인하고,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살았는지를 돌아보고 입으로 입술로 마음으로 행동으로 지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며 사죄의 은총을 누려야 할 것이다. 세상 것에 대한 욕심과 교만은 우리를 군림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고 벽을 쌓게 한다. 담을 높이 쌓게 하지마는 세상 것에 대한 포기와 겸손과 자기희생은 섬김의 자리로 우리를 인도해 주고 높이 쌓은 벽을 무너뜨리게 한다. 우리 주님은 그리스도의 일꾼 된 우리가 세상의 황금 의자와 황금 송아지 우상을 스스로 포기할 때까지, 겸손히 주님의 길을 걸어 나갈 때까지 진정한 능력과 평화를 내려주시지 않는다. 

 하지만 죽기 전까지 어떻게 세상에 대한 것들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놓을 수가 있겠는가? 못 놓는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2:20 표현을 빌리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만이 우리는 진정한 섬김의 자리에 나갈 수 있다. 변화된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고 내가 변화되어야 우리 공동체인 세상이 바꿔진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 성령세례 받은 제자들처럼 성령을 통한 자기 변화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을 섬김의 삶으로 살 수가 있다. 성령으로 내가 먼저 말씀 앞에, 십자가 앞에 반쯤 죽는 것이 아니라 덜 죽으면 이게 더 문제이다. 완전히 깨지고 부서지고 죽을 때에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나도 주님처럼 십자가에 죽으면서까지 사랑으로 품으셨던 그 주님처럼 섬김에 점을 찍을 수 있다.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꾸고 변화시키는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해 날마다 주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기도하고 말씀과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아 우리 삶의 양상은 다르지만 섬김의 삶의 열매를 맺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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