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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합 2: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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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합 2:4~20)


  우리나라말에 '믿는 구석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낭패스러운 일을 당해도 자기 뒤에 무언가 든든하고도 믿음직한 것이 있을 때에 쓰는 표현입니다.
  하지만 왜 그것을 하필이면 '믿는 구석'이라고 하게 되었는지는 좀 의아스럽습니다.
  '구석'이라는 말에는 뭔가 숨기는 듯한, 뭔가 깨끗하지 못한 것이 포함되어 있는 듯한 뉘앙스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믿는 구석'이라고 할 때에는 본인에게는 든든한 배경이 되는 것임에 틀림없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밝히기에는 무엇인가가 좀 켕킨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는 것 같고, 어쩌면 우리나라 사회에서 어떤 믿을만한 배경이 되는 것이란 대체로 다 그처럼 떳떳하게 내세울 수는 없는 '빽'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쓰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그런 '은근히 믿는 구석'이 아니라 '당당히 믿는 배경'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살고 있던 시대의 유다는 그 주변상황만을 보자면 모든 것이 최악이었습니다.
  국력은 오래 전부터 쇠퇴일로였고 민생고는 이미 한계에 도달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으로는 부패한 공무원들이 착취에 여념이 없었고 밖으로는 그 당시 근동사회에서 공포의 대명사였던 '갈대아인' 즉 바벨론 사람들의 위협이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임박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누가 보아도 도무지 어떤 마음의 여유나 삶의 희망을 찾으려 해야 찾을 수 없어 보이던 그런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하박국 선지자는 본문 4절에서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너무나도 놀라운 소망을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본문 20절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는데 곧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 잠잠할지어다"라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었습니다.
  비록 아무리 세상이 어지럽고 인생이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성전에 임재하셔서 당신의 백성을 다스리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결코 망하거나 죽을 리가 없다는 것이 바로 하박국 선지자 자신의 고백이며 또한 유다를 향한 격려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도 우리 신앙생활의 모선(母船)에 해당되는 교회를 통하여 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든든한 보호와 인도를 당당하게 믿고 살아가는 성도는 과연 세상의 어떤 위험들을 넉넉히 이기고 살아남을 수가 있겠습니까?

  1. 교회 중심으로 하나님 신앙을 지키는 성도는 '전쟁의 공포'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본문 5절로 8절에 "5그는 술을 즐기며 궤휼하며 교만하여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그 욕심을 음부처럼 넓히며 또 그는 사망 같아서 족한 줄을 모르고 자기에게로 만국을 모으며 만민을 모으나니 6그 무리가 다 속담으로 그를 평론하며 조롱하는 시로 그를 풍자하지 않겠느냐 곧 이르기를 화 있을진저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는 자여 언제까지 이르겠느냐 볼모잡은 것으로 무겁게 짐진 자여 7너를 물 자들이 홀연히 일어나지 않겠느냐 너를 괴롭게 할 자들이 깨지 않겠느냐 네가 그들에게 노략을 당하지 않겠느냐 8네가 여러 나라를 노략하였으므로 그 모든 민족의 남은 자가 너를 노략하리니 이는 네가 사람의 피를 흘렸음이요 또 땅에, 성읍에, 그 안의 모든 거민에게 강포를 행하였음이니라 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그"라고 언급되면서 또한 "화 있을진저"라는 저주의 대상이 되고 있는 자는 구체적으로 바벨론 사람을 가리킨 것이었습니다.
  당시 막강한 군사력으로써 "자기에게로 만국을 모으며 만민을 모으고" 있던 바벨론인들은 그 "궤휼"과 "교만"과 "욕심"이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박국 선지자는 그처럼 하늘을 찌를 듯이 기세등등한 바벨론도 결국 하나님의 다가오는 심판의 제1차 저주의 대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무리의 속담'과 '조롱하는 풍자'의 표현을 빌어서 다섯 번 반복되는 "화 있을진저"라는 말로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바벨론이 받은 첫 번째 저주는 그들의 침략성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소유 아닌 것을 모으며" "볼모를 잡으며" "여러 나라를 노략하는" 행위를 아주 상습적으로 행하던 민족이었습니다.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결코 악한 행위가 아니라 자기들의 무력에 따른 당연한 권리처럼 여겨졌으며 '침략'이란 결코 수치스러운 단어가 아니라 온 국민의 좌우명이나 같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바벨론을 "물 자들"을 일으키셔서 오히려 그들이 "노략"당할 날이 오게 하고야 마실 것이라고 저주하셨습니다.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마 26:52)는 주님의 말씀 그대로, 바벨론뿐 아니라 침략주의로 세워졌던 나라들이 다 결국에 가서는 철저히 망하고 말았던 것은 우리가 세계사에서 여실히 볼 수 있는 사실인 것입니다.

  제1차 및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이제 전 세계 각국이 그래도 헌법상으로는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고 선언할 정도의 명색은 갖추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남의 것을 빼앗음으로써 자기를 채우려고 하는 침략 근성은 특히 국가 간의 이해관계에 있어서는 결코 사라질 수가 없는 것이며, 이 세상은 주님 재림하시기 전까지는 곳곳에서 전쟁의 소리가 결코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믿는 성도만이 그런 '바벨론의 공포'로부터 진정 자유할 수 있습니다.
  역사가 계속 되는 동안에 이 세상에서는 "땅"과 "성읍"과 "거민"에게 "강포를 행하며" "사람의 피를 흘리는" 전쟁이 그칠 새가 없겠지만, 그런 교만한 침략자들을 끝내 심판하시는 절대주권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써 세상이 주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참된 평안을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교회 중심으로 하나님 신앙을 지키는 성도는 '이기주의적 욕심'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9절부터 11절에 기록하기를 "9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데 깃들이려 하며 자기 집을 위하여 불의의 이를 취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0네가 여러 민족을 멸한 것이 네 집에 욕을 부르며 너로 네 영혼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벨론 제국이 자국의 안위를 지키려고 국가의 기반을 공고히 하려 했던 것과 또한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민족과 나라들로부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의한 이득을 취했던 사실을 두고 하는 저주입니다.
  실제로 바벨론 제국의 수도 바벨론성은 그 화려함이 극에 달하는 것이었고 또한 외부 공격으로 함락시키기에 거의 불가능하게 보일 정도로 잘 방어된 것이기도 했습니다.

  바벨론은 끝없는 침략전의 결과로 엄청난 재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좋은 것들을 그렇게도 많이 얻게 되었으니 어디 그것을 잃어버릴 생각이 꿈에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얻은 것 잘 지키기 위해서 그 어떤 "재앙"으로부터도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강력한 성을 "높은 데"에 쌓았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에 일단 젖어들게 되니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또 더 많은 돈들이 계속 필요했을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그 "자기 집을 위하여" 자기네가 점령한 나라들로부터 세금과 공물을 짜내면서 "불의의 이"를 계속 취했던 것입니다. 

  자신을 든든히 지키기 위해 그토록 애를 썼던 바벨론이지만 그것이 결코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바벨론이 발전한 만큼 바벨론의 이기주의로 인하여 멸망당했던 "여러 민족"의 원한 역시 사무쳐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인고 하니, 노예들을 동원해서 쌓은 바벨론의 성의 "담"과 바벨론인을 위해 세워진 주택들의 "들보"가 이를 갈고 있을 정도였던 것입니다.
  바벨론의 이기주의는 결국 "네 집에 욕을 부르며 너로 네 영혼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것" 즉 화를 스스로 자초한 행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모르는 사람들의 삶이란 지금도 이와 꼭 같지 않습니까?
  그들은 자기가 벌어놓은 것을 집에, 저금통장에, 혹은 주식에 투자하고 자기 딴에는 '재앙을 피할 수 있는 높은 데' 즉 아무도 손댈 수 없는 안전한 인생을 성취했다고 교만해 합니다.
  하여튼 '자기 집을 위하여' 쌓아 둘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어떤 불의한 수단도 가리지 않고 '이를 취하는' 즉 날마다 돈 벌기에만 혈안이 되어 사는 것이며, 불신자치고 이런 이기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직 우리 기독신자들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라는 경고를 늘 가슴에 새기고서 '자기 영혼에게 죄를 범하는' 어리석은 욕심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이기적인 물욕은 '음녀 바벨론'이 건네는 대표적인 유혹의 잔이며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찌르는 죄악임을 한시도 잊지 않고서, 오직 하나님만을 섬김으로써 물질을 축복의 통로로 체험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3. 교회 중심으로 하나님 신앙을 지키는 성도는 '인간사회의 문명 발전'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12절 이하 14절의 말씀에 "12피로 읍을 건설하며 불의로 성을 건축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3민족들이 불 탈 것으로 수고하는 것과 열국이 헛된 일로 곤비하게 되는 것이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말미암음이 아니냐 14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읍"과 "성"이란 말은 '도시'와 '마을'을 뜻합니다.
  이것들은 인간 사회가 형성되고 그 문명이 발달하면서 조성되기 시작한 것들입니다.
  사실 그런 사회와 문명이 발달하는 것 자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땅을 정복하라'고 하신 본연의 특권에 따른 당연한 과정이었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것들을 "피로" 건설하며 "불의로" 건축했다는 데에 있습니다.
  바벨론 역시 그네들의 문명을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은 결핍된 상태에서 오직 그들의 악한 행위만을 기반으로 건설해 나갔습니다.
  이는 마치 경건한 셋의 자손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동안, 가인은 '여호와 앞을 떠나' 놋 땅에 거하며 거기서 성을 쌓고 그 자손들이 불신문명을 발전시켜 나갔던 사실과 상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가인의 자손과 바벨론의 후예된 많은 "민족"과 "열국"들은 제 나름대로는 꽤나 화려한 인류문명을 끊임없이 발전시켜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모든 것들은 장차 하나님의 심판 앞에 "불탈 것"을 가지고 헛되이 "수고"하며 "곤비해" 하는 것일 뿐입니다.
  인류의 문명은 사람이 스스로 보기에는 자신의 최고 지혜와 능력으로 만들어낸 훌륭한 작품 같지만 하나님의 심판날에는 초개처럼 불에 타 없어질 것들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모르는 불신 사회는 자기네들이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문명이 마치 인간의 위대성을 영원히 증거할 불멸의 '바벨탑'이 될 것처럼 오늘도 교만해 합니다.
  그리고 그런 문명의 힘이 결국 사람을 영원히 행복하게 해 줄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대기 오염, 해수면 상승, 원유 고갈, 식량 부족, 신종 바이러스 등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결국 인간 스스로가 그런 것들을 해결해 낼 길을 찾아내고 이 지구 전체를 유토피아의 성읍으로 건축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만심에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고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성도들은 이 지구와 우주의 존속 자체가 오로지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말미암았음'을 늘 기억합니다.
  인간의 문명이 이 세상을 살려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사신 하나님의 주권을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크게 그리고 높게 인정하는 신앙만이 이 멸망해 가는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해 주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더욱 확신함으로써, 실로 이 지구와 인류를 계속 존속하게 만들어 주는,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존재가 되시기 바랍니다. 

  4. 교회 중심으로 하나님 신앙을 지키는 성도는 '육체의 향락'으로 인생을 망치지 않습니다. 

  15절부터 17절까지에 기록하기를 "15이웃에게 술을 마시우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로 취케 하고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16네게 영광이 아니요 수치가 가득한즉 너도 마시고 너의 할례 아니한 것을 드러내라 여호와의 오른손의 잔이 네게로 돌아올 것이라 더러운 욕이 네 영광을 가리우리라 17대저 네가 레바논에 강포를 행한 것과 짐승을 두렵게 하여 잔해한 것 곧 사람의 피를 흘리며 땅과 성읍과 그 모든 거민에게 강포를 행한 것이 네게로 돌아오리라"고 했습니다. 

  여기 15절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은 바벨론 사람들의 음란과 방탕입니다.
  앞서 5절에도 나왔던 것처럼 바벨론 사람들은 "술을 즐기는" 민족이었습니다.
  그 술 마시는 동기 중에 하나는 "자기 분노를 더하여" 즉 홧김에 자기도 마시고 남에게 권하여 먹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술 취한 상태에서 "그 하체를 드러내려 하는" 즉 남의 알몸을 훔쳐보려는 음탕한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바벨론인들은 그런 일을 "수치가 가득한" 행위인 줄로 전혀 자각하지 못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결국은 "여호와의 오른 손의 잔" 즉 '진노의 잔'을 받게 되는 그 날에 가서야 비로소 그들은 자기의 생활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이었던지 비로소 알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에는 그 바벨론인들이 자기 자신의 "할례 아니한 것을 드러내는" 즉 자신의 하체를 스스로 드러내는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바벨론인이 "레바논"이나 "짐승"이나 "땅과 성읍과 거민" 즉 자신이 아닌 다른 대상을 향하여 지은 모든 죄값도 다 "돌아오게" 될 것이었지만, 또한 자기 몸에 스스로 지은 그런 음란의 죄 역시 꼭 같은 날 그 벌을 피할 수 없게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바벨론 하면 그저 "영광"으로 가득 찬 대제국으로만 보였지만 그 개인의 사생활 속에서는 그처럼 음란과 방탕으로 점철된 "수치"만 가득한 곳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믿지 않고 살아가는 인생도 겉으로 보기에는 점잖아 보이지만 그 실상은 다들 술과 음행으로 인한 향락에 젖어 있기 마련입니다.
  그처럼 육체의 욕구와 쾌락만을 추구하기 위하여 그들이 허비하는 시간과 돈이 얼마나 많은지는 아마 우리들로서는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런 불신자들은 그런 삶을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할 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오히려 '내일 죽으리니 오늘 먹고 마시자.'는 것이 인생의 의의요 목적이요 보람인 것으로 알고 있으며, 그처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며 성공한 사람이라고 우러러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들은 그런 향락주의적인 삶이 결코 사람의 '영광'이 아니며 오히려 '수치'가 가득한 인생인 것과 그런 부도덕과 비윤리의 죄악 역시 결국 하나님 앞에서 정죄당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육신을 음주와 음행으로써 쾌락의 도구로 전락시키고 스스로 짐승보다 못한 저질적 존재로 타락시키는 '음녀 바벨론의 포도주 잔'에 빠지지 아니하고, 이미 하나님의 양자라 칭함을 받은 성도답게 더욱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며 그 하늘 아버지의 거룩하심을 닮아가는 성화의 신자들 되시기 바랍니다.

  5. 교회 중심으로 하나님 신앙을 지키는 성도는 '우상숭배의 죄악'으로써 자기 영혼을 죽이지 않습니다. 

  본문 18절로 19절에 "18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19나무더러 깨라 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더러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하박국 선지자가 책망하고 있는 대로 바벨론은 또한 우상의 나라였습니다.
  그것도 한 가지 우상이 아니라 온갖 사람의 욕구와 소원에 따라 온갖 종류의 우상들을 대량 생산하면서 섬기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하박국 선지자가 지적하고 있듯이 그런 우상숭배는 누가 보아도 너무나도 뻔한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우상을 섬기는 당사자가 바로 그 우상을 "새겨 만든" 장본인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것을 자기가 받들어 섬기면서 그것을 "의지"하며 그것을 통해 "교훈"을 들으려 하며 그것을 통해 "유익"을 얻으려 하는 것은 삼척동자가 보아도 명백한 바보짓에 불과했습니다.

  아무리 "금과 은으로 입혀서" 그럴듯하게 보이게 해도 그 본질은 역시 "나무나 돌"에 불과한 것이니 그것이 사람에게 무슨 유익을 주기는커녕 스스로 "생기"조차 한 점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벨론 사람들은 그런 어리석은 짓을 가장 고귀한 행위인 양, 가장 중요한 일과인 양 온 백성이 날마다 반복했던 것이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이런 뻔한 바보짓을 하는 것이겠습니까?
  왜냐하면 사람의 영혼은 참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그런 뻔한 헛된 우상 앞에 영락없이 넘어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가 사람이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특별한 피조물'로 지음을 받은 유일한 영적 피조물인 까닭에 그 창조주와의 교통이 단절되면 자연히 본능적으로 다른 신을 추구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와 꼭 같은 어리석은 우상숭배에 빠져 있는 것이겠습니까?
  돌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들을 섬기는 자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지만, 그런 조각한 신상을 섬기지 않는다는 자들도 역시 내면적으로는 자기 나름대로의 우상숭배자입니다.
  자기 자신의 지식만을 최고로 여긴다든지 혹은 자신의 재물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사는 인생도 역시 우상숭배자입니다.
  왜냐하면 그 지식과 그 재물이란 것이 바로 하나님 대신에 자기가 의지하고 있는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는 안전보장이 된 사회와 국가를 의지하고 살든지 혹은 성경 말씀보다는 세상의 어떤 철학자나 과학자가 하는 말을 최고의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으면 이 또한 우상숭배자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조직이나 이론도 다 사람이 '스스로 부어 만들고 새겨 만든' 것, 즉 사람이 자기 머리로 만든 우상의 일종이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눈 크게 뜨고 똑똑히 보면 다 사람이 만든 것에 불과한데, 그 사람이 만든 것을 그처럼 믿고 의지한다는 것은 정말 우스꽝스럽고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사람의 심령에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바보짓은 오히려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똑바로 깨달아야만 합니다.
  자기의 손이나 머리로 만들어 낸 것을 스스로 의지하고, 아니 그것을 신처럼 높이 모시면서 그 앞에 절하는 이 '바벨론 종교'에 휩쓸려 들어가서 필연적으로 '화를 입는' 저주를 당하지 아니하도록, 오직 스스로 살아 계신 하나님, 유일한 참 신 되신 여호와만을 경외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유다는 쇠하여 가고만 있던 시기에 상대적으로 신흥 대제국 바벨론은 문자 그대로 만사형통한 듯이 보였습니다.
  그 바벨론의 거센 조류 앞에 유다는 그저 속수무책인 것만 같았으며 오직 그런 바벨론의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에 동조해야만 살 길이 있는 것처럼 여겨졌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바벨론을 향하여 선지자 하박국은 실로 놀라운 말씀을 선포합니다.
  바로 본문 20절의 말씀 "20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는 너무나도 당당한 호령입니다.
  그 천하무적처럼 승승장구하고 있던 바벨론을 향하여 '너는 좀 조용해라. 우리 여호와 하나님께서 성전에 좌정하고 계시다.'라고 오히려 대갈일성을 외쳤던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선지자의 눈에는, 아니 하나님의 눈에는 그 바벨론이란 오직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침략성, 자기 집만 높이 세우는 이기주의, 인본주의에 뿌리박은 불신 문명, 수치스러운 사생활, 그리고 어리석고도 교만한 우상숭배 등으로 똘똘 뭉친 저주의 대상일 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세상 앞에서는 화려하고 강력하게 보여도 하나님이 없는 바벨론은 실상 그저 저질스럽고 추악한 장망성 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 현대사회의 현실도 일견 우리에게 압도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것처럼, 아니 우리의 생사화복을 좌우할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중동전쟁과 그에 따른 유가폭등, 세계적인 경제위기설과 장기화된 국내 경기침체, 지구온난화로 인하여 이미 우리가 피부로 느끼게 된 이상기후, 여전히 입시지옥에 시달리며 성인음란문화에 노출되어 있는 자녀교육 문제, '하나님 절대주권 신앙'이라는 말이 기독교 안에서조차 조롱받게 되는 풍조 등 온갖 '바벨론적인 불안과 위협'이 매일 노도와 같이 덮쳐오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누가 이런 각박한, 아니 살벌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오직 '안전한 모선을 타고 든든한 선장을 모신' 사람만이 이런 '바벨론의 세파' 속에서도 생존할 수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 온 천하야, 이 하나님 앞에서 잠잠해라.'라고 당당히 선포할 수 있는 '하나님 절대주권 신앙'의 신자입니다.
  '그 우리 하나님께서는 바로 성전에 임재하고 계시며, 나는 바로 거기서 이 하나님을 항상 만나 뵈면서 사는 사람이다.'라고 체험적으로 증거할 수 있는 '교회중심 생활'의 신자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아무리 제 딴에는 똑똑하고 대단하고 강력해 보인다 할지라도 이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당당히 믿는 배경'으로 모시고 사는 신자 앞에서는 감히 '끽소리'조차 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인생이 힘들고 세상이 괴롭다 해도 그 때문에 교회중심의 신앙생활을 피곤하고 부담스럽다고 핑계해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더 더욱 예배생활에 충실하고 기도에 모이기를 힘쓰면서 살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교회만이 이 험한 '바벨론의 세파'를 이기고 헤쳐 나갈 수 있는 방주이며, 오직 교회만이 그런 든든한 모선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이 배의 선장, 이 교회의 머리 되신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찬송가에서도 '사납게 뛰노는 파도나 저 흉악한 마귀나 아무 것도 주 편안히 잠들어 누신 배 뒤엎어 놓을 능력이 없도다'(419장)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께서 임재하고 계시는 교회가 없는 세상을 가정해 본다면 남는 것은 무엇이 되겠습니까?
  온갖 전쟁과 죽음, 욕심의 싸움, 세속적 문화, 육체적 타락, 불신 우상종교 등 온통 '죄악만 관영한' 세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벌써 그 자체로 이미 지옥이나 다름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교회중심의 생활을 통하여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꽉 붙잡고 사는 성도는 설사 온 천하가 덤벼든다 할지라도 끄떡도 하지 않는 안전보장의 생을 영육 간에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매일 문밖을 나설 때마다 우리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거친 '바벨론의 세파'가 덮쳐올 때에도 '오직 성전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따르는 신앙으로써 '온 천하가 그 앞에서 잠잠해지는' 평안을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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