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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손 (막 1:4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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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손 (막 1:40~42)


세계 2차 대전 때 프랑스의 한 마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작지만 아름답게 건축된 교회당의 안뜰에 손을 앞으로 뻗은 예수님의 아름다운 대리석 조각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적의 폭격으로 조각상의 사지가 절단되고 말았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적들이 철수하자 시민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예수님의 성성의 잔해들을 찾아 재건시키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유명화가의 작품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삶의 일부였고, 그들은 그것을 유명한 작품과 같이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깨어진 조각들을 모아 다시 조립을 했습니다. 몸의 흉터조차도 그들의 눈엔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는, 그 조각상의 손을 찾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성도가 말하기를“상처가 있는 손은 괜찮지만 손 없는 그리스도는 결코 있을 수 없어. 우리는 새 조각품을 만들어야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견해가 설득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글을 놋쇠에 새겨 부치기로 했습니다.“나는 손이 없지만 여러분들이 나의 손이 되어주오.”

어느 분은 손을 가리켜“인체의 마술사”또는“역사의 주름 잡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착한 일도 손이 하고, 못된 짓도 손이 합니다. 자랑스러운 일도 손이 하고, 부끄러운 일도 손이 합니다. 인류의 시조인 아담과하와는 그 손으로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를 따먹고 원죄를 후손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손은 아담과 하와로부터 내려오는 원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처럼 손으로 행하는 결과에 따라 삶의 질과 무게가 결정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고, 예수님의 능력을 통해 우리의 소원을 성취하는 것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 땅에 작은 예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 자신을 가리켜 요한복음 9:5에 말씀하시기를“내가 세상에...빛이로라.”하셨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5:14에는“너희는 세상의 빛이라.”하셨습니다. 달과 별은 스스로 발산하는 빛은 없지만 태양의 빛을 받아 어두운 밤을 밝히듯, 그리스도를 섬기는 성도의 삶이 이와 같은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손은 어떠한 손인가에 대해 생각하므로 우리들이 행해야할 삶의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우리들이 본 받아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손은 어떠한 손일까요?


一. 예수 그리스도의 손은 긍휼을 베푸시는 손입니다. 

본문인 마가복음 1:40~42에“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질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곧 문둥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고 했습니다. 

문둥병자를 만지는 것은 위생상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당시의 율법이 금하는 범법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위생상의 문제나 율법의 문제보다 민망히 여기는 마음이 우선이셨습니다.“민망히 여김”이란“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손은 불쌍히 여기는 사랑의 손이었습니다. 문둥병자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은 그의 병을 깨끗하게 고쳐주셨습니다. 이 문둥병자만 아니라 예수님은 언제나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으로 긍휼을 베푸시는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3세기경 로마에 발렌타인이라는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전도서 9:20말씀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무릇 내 손이 일을 당 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게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이 발렌타인 수도사는 자기 손으로 할 수 있는 좋은 일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병든 자, 외로운 자, 고통 속에 있는 자를 찾아내어 그들에게 사랑과 위로의 말과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을 곁들여 펀지를 썼습니다. 이미 3세기에 문서선교를 시작한 사람입니다. 이 수도사가 순교한 날 을“발렌타인 데이”로 지켜 사랑을 전하는 관습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 나 오늘날처럼 이성간의 사랑을 전하는 그러한 것이 발렌타인의 마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소외된 자, 외로운 자, 불쌍한 자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우리 모두도 예수님의 손처럼 어려운 이웃에게 긍휼을 베푸는 손이 되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2:13말씀에“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7에도“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미국 콜로라도 스프링스에 본부를 두고 있는 국제 어린이 구호 단체인“Compassion International”이 있습니다. 이 단체는 우리나라와는 참 친숙한 단체로서 한국 전쟁 때 전쟁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시작되었던 단체입니다. 컴패션은 1993년 한국에서 철수하기까지 수많은 한국의 어려운 아이들을 도왔고, 지금도 전 세계 23개국의 수십만의 어린이들을 돕는 단체입니다. 미국 포브스에 의해 가장 투명한 경영을 하고 있는 단체로도 유명하고, 그냥 돈만 보내서 하는 사역이 아니라 현지 교회와 연결하여 효과적으로 전인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선교 모텔을 제시해 주는 단체이기도 합니다. 

어렵고 가난한 나라였던 한국이 2003년에는 수혜국에서 파트너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 선교단체는 미국 시카고에서 사역하던 에버렛 스완슨 목사는 한국전쟁 중인 1952년 미군들을 위한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방한했습니다. 종로 부근의 어느 숙소에서 어느 겨울날 아침 유리창 너머로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마침 쓰레기 트럭이 지나가면서 쓰레기를 담는데 청소부들이 던져 넣는 쓰레기 가운데 어린아이의 손을 보고서 뛰어 나갔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지만 방금 던진 쓰레기 가운데 어린아이의 손을 보았다고 손짓 발짓하며 말을 전하는데 말이 통하지 않아 직접 아이의 시신을 찾기 위해 쓰레기 위에 올라간 순간 스완슨 목사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트럭 안을 자세히 보니 거기에 가득 실린 것은 쓰레기가 아니라 지난밤 거리에서 얼어 죽은 전쟁고아들의 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상태로 아무 말도 못하고 서있었고, 마음속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이제 너는 어떻게 살 것이냐?”

그가 미국으로 돌아와 시작한 것이“컴패션(긍훌)”사역이었습니다. 그를 통해 수십만의 전쟁고아들이 살게 되었고, 삶을 열어가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1993년 철수하였지만 그들의 사역은 전 세계를 향해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잠언 19:17에는“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긍휼을 베푸는 아름다운 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二. 예수 그리스도의 손은 허물을 덮어주는 손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 앞에 당시 종교지도자들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한 여인을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한복음 8:3~5)라고 했습니다. 이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은 대답하시기를“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한복음 8:7) 하셨습니다. 

이때에 무리들의 반응에 대해 성경은 기록하기를“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요한복음 8:9)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볼 때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들춰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한 여인의 실수와 죄를 두고 험담하며 정죄하며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한복음 8:7) 는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살펴보니 돌을 던질 수가 없었습니다. 비로소 자기도 같은 죄인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살핀 후 나타난 현상이 무엇입니까?“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요한복음 8:9) 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여인에게 말씀하시기를“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요한복음 8:10) 라고 하셨고, 여인은 대답하기를“주여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한복음 8:11) 하시면서 이 여인의 허물과 실수를 덮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양손과 양발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무슨 까닭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의 멸망 받을 죄악을 덮어주시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손은 남의 허물과 죄악을 덮는 손 즉 용서의 손입니다. 남의 허물을 들춰내는 손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손이 아닙니다. 이러한 무리들을 향해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태복음 7:2~5)하셨습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9장에 노아라는 사람이 술에 취해 벌거벗고 잠을 자는 부끄러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실수를 가장 먼저 본 사람이 둘 째 아들 함이었습니다. 함은 밖으로 뛰어나와 형과 동생들에게 아버지의 흉을 보며 못 마땅히 여겼습니다. 그러자 형과 동생은 함을 책망하며 아버지의 겉옷을 가지고 뒷걸음쳐 다가가 아버지의 벗은 몸을 덮어드렸습니다. 술에서 깨어난 노아가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노아는 자신의 허물을 발설하며 흉을 본 둘째 아들 함을 저주한 사실을 창세기 9:25에 기록하기를“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저주입니까? 형제들의 종이 되어도 부끄러운 일인데 형제의 종의 종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 저주는 그대로 임하여 함은 흑인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지구촌 곳곳 에서 천대받고 살아가는 흑인들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요즘 인종차별이 없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반면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덮어준 셈과 야벳에 대하여 노아는 기뻐하며 축복하기를“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훤하노라.”(창세기 9:26~27)고 했습니다. 이들은 아버지가 축복한대로 동양인과 서양인의 조상이 되었으며, 지금까지 이 세계의 문명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남의 허물을 들춰내며 비방하는 사람은 저주하시고, 허물을 덮어주는 사람을 사랑하시 복 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김구 선생이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일본헌병이 한국 청년을 매수해서 김구 선생을 암살하도록 지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얼마 안 가서 붙잡혔고, 사람들은 청년을 처형하기 직전에 김구 선생에게 데리고 왔습니다.“선생님을 암살하려던 청년을 붙잡았습니다.”라고 하자, 김구 선생은 그 자리에서 이 청년을 용서해 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청년을 붙들고서“내가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한 한국 청년을 여기서 만나니 실로 감격스럽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암살하려고 권총을 들었던 그 청년을 부둥켜안고서 기뻐하자 이 청년은 김구 선생의 인품에 감동이 되어 독립군으로 끝까지 충성을 다하며 헌신했습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의 허물과 실수와 죄악만을 덮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양손과 양발에 못 박혀 피를 흘리시므로 우리들의 모든 죄악을 덮어주시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손이 되어 이웃의 허물과 실수와 약점을 덮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곳에 평화가 있고, 기쁨에 있고,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三. 예수 그리스도의 손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손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유명한 장면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사막지대이므로 사람들은 샌들을 신고 다닙니다. 조금만 걸어도 발은 온통 먼지투성이가 됩니다. 그래서 밖에 갔다 돌아오면 반드시 발을 씻고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나라의 풍습은 자기 발을 자기 자신이 씻지를 않았습니다. 종이 있으면 종이 주인의 발을 씻겨 주고, 종이 없으면 서로서로 씻겨주었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발을, 아내는 남편의 발을 씻겨 주었고, 친구끼리도 서로서로 씻겨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서로 서로 상대방의 발을 씻겨 주지만,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발을 먼저 씻겨 주었습니다. 이처럼 하인이 하는 일, 아래 사람이 하는 일을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친히 먼저 행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말씀하시기를“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요한복음 13:1~15)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겸손함과 이웃을 섬기는 봉사의 삶을 실천하신 귀한 교훈입니다. 겸손한 자세로 이웃을 섬기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인품입니다. 

한 신사가 말을 타고 가다가 병사들이 나무를 운반하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상사 한 사람이 구령을 붙으며 작업 지휘를 하고 있었지만 워낙 무거운 나무인지라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신사는 상사에게 물었습니다.“자네는 왜 같이 일을 하지 않는가?”“나는 졸병이 아니라 명령을 내리는 상관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신사는 말에서 내려 웃옷을 벗고 병사들 틈에 들어가 함께 일을 도왔습니다. 한참 후에 나무를 목적지까지 다 운반한 뒤 그 신사가 말에 올라타며 상사에게 말했습니다.“상사, 다음에 또 나무를 운반할 일이 있을 떼 총사령관을 부르게”상사와 병사들은 그때서야 신사가 그 유명한 조지 워싱턴 장군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섬김을 받기 전 먼저 섬기신 손이었습니다. 섬김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높아짐의 지혜이며, 높아짐의 비결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0:44에 말씀하시기를“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하셨습니다. 또 잠언 29:23 말씀에는“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롤 얻으리라.”하셨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수님의 손은 모두가 멀리하는 나환자를 만지시며 고치신 긍휼의 손입니다. 
예수님의 손은 간음한 여인의 허물을 덮어 주신 손입니다.
예수님의 손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겸손의 손, 섬기시는 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얻고, 예수님을 통해 축복 받아 누리는 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삶을 본받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어두워진 죄악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본분입니다. 
이러한 성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러한 성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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