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처음 길로 행하면 (대하 17:3~6)

  • 잡초 잡초
  • 303
  • 0

첨부 1


처음 길로 행하면 (대하 17:3~6)


우리가 자동차를 운전할 때, 길이 참 중요합니다. 어느 길로 갈 것인가? 선택의 문제가 주어집니다. 요즘은, 네비게이션이라는 장비가 있어서, 거의 고민하지 않고, 그냥 시키는 대로 갑니다. 제 경험으로도, 네비게이터가 안내하는 대로 가기만 해도, 길 찾아가는 데 큰 문제가 된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참 편리합니다.

그러나 내 人生의 자동차를 운전한다고 할 때, 내가 가야할 길을 바르게 선택하는 문제는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더 어려운 것은, 인생이라는 것은 나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족의 문제이고, 직장의 문제이고, 교회의 문제이고, 사회적인 문제이고, 나아가 국가적인 문제가 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지만, 예수 믿는 방식이 각각 다 다릅니다. 자기 나름대로 信仰의 方式이 있고 길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그것은, 내가 걸어가고 있는 신앙의 길의 기준을 어디에 두었느냐에서 그 差異가 결정됩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걸어갔던 그들 나름대로의 신앙의 길이 다 있습니다. 물론, 궁극적인 신앙의 길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다(I am the way), 眞理다(the truth), 生命이다(and the life)”하시지 않으셨습니까?(요 14, 6)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을 보면, 그들이 걸어갔던 신앙의 길이, 나름대로 모두 특징들이 있습니다. 동일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지혜를 길러낼 수가 있습니다.

族長 아브라함이 걸어갔던 길이 있습니다. 이삭의 길이 있습니다. 야곱의 길이 있습니다. 요셉의 길도 있습니다. 출 이집트의 지도자 모세의 길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나안 땅을 얻어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에게 각각 땅을 기업으로 나누어준 여호수아의 길도 있습니다. 

본문 3절을 보면, “여호사밧 王이, 그의 조상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여”, ‘다윗의 처음 길’이 소개 되고 있습니다. 

‘다윗의 길’은,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많이 들어서 익숙한 길입니다. ‘다윗의 길’이란, 구약성경에서 열왕들의 삶과 정책(신앙과 통치)의 표준을 말할 때, 등장하는 기준잣대입니다. 통일왕국시대 제2대 왕이었던 「다윗」이 수많은 이스라엘의 열왕들을 평가하는 기준잣대 역할을 했다는 말이지요(길고 짧은 지). 

그러면 ‘다윗의 길’은 무엇을 뜻합니까? 다윗 왕 시절에 닦아 놓았던 경부고속도로와 같은 길을 말하는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 앞에서, 다윗이 왕으로서 품었던 ‘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의 마음이 여호와 앞에서 온전하였다, 여호와 앞에서 정직하였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다윗은 자기 所見이나 세상의 상식이나 時流를 따라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표준으로 삼아서, 하나님 앞에서 행하며, 산 그의 삶과 信仰을 말합니다. 

그런데, 역대기 저자는 그저 ‘다윗의 길’이라 두리 뭉실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길 중에서도 ‘다윗의 처음 길’이라는 제한적인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역대기 17, 3에서만 나오는 독특한 표현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주인공 여호사밧은, 분열왕국 시대 남쪽 유다의 제4대 왕입니다. 사울(1代), 다윗(2代), 솔로몬(3代, 통일왕국시대) 그 후, 남쪽 유다 왕국/ 북쪽 이스라엘 왕국으로 나뉘어졌습니다. 분열 왕국 시대 남쪽 유다는, 르호보암(1代), 아비야(2代), 아사(3代), 여호사밧(4代)으로 이어지지요. 

분열왕국이 된 후, 북 이스라엘은 말할 것도 없고, 남쪽 유다 왕국도 혼돈의 연속이었습니다. 남북분단 속에서, 북 이스라엘과 종족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1代 왕 르호보암과 2代 왕 아비야는, 하나님 보시기에 모든 죄를 행하고 그 마음이 그 조상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여호사밧의 아버지 제3대 왕 ‘아사’도 41년간 유다를 통치했는데, 비교적 훌륭한 왕이었는데, 그는 처음과 끝지 다른 왕이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여, 모든 우상을 제거하고, 신앙부흥운동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아사’ 왕은 末年에 북 이스라엘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 수리아 왕 벤하닷과 동맹을 맺으면서, 성전과 국가의 보물창고를 다 열어 보여주고 맙니다(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였다는 말이지요). 그 일로 先見者 ‘하나니’의 책망을 받자, 그를 獄에 가두어버리고 교만하게 행합니다. 결국, 중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는데, 그 때도 하나님을 찾지 않고, 의사들만 의지하다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맙니다. 

아버지 아사가 죽자, 그를 대신하여 왕 위에 오른 자가, 제4대 왕 ‘여호사밧’입니다. 여호사밧이 왕 위에 오르기 전까지는, 유다 왕국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우상도 겸하여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기도 했지만, 여상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게 행하면서, 하나님을 버리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분열 왕국 이후, 남쪽 유다 왕국은 제3대 ‘아사’왕 때까지 전쟁이 없었던 때가 없었습니다. 계속되는 남북 간의 전쟁에 나라의 안녕이 크게 흔들렸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도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그런 역사적인 위기의 때에, 여호사밧이 왕위에 즉위했습니다. 여호사밧이 왕 위에 오르자, 그는 先代 王 르호보암이나, 아비야나, 아버지 아사 왕과는 다른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가 새로 찾은 길은, 統一王國時代 제2대 왕이었던 ‘다윗 왕의 길’이었습니다. 다윗 왕의 길 중에서도, ‘다윗의 처음 길’을 찾아서,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였습니다. 

다윗 왕은, 비록 이스라엘의 열왕들 중에서, 다른 왕들을 평가하는 기준잣대가 되는 왕이긴 하지만, 다윗 王도 하나님 보실 때 부족함이 있기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사밧 왕이, 얼마나 세밀하게 역사를 공부하고 분석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다윗 왕도, 그의 왕위가 견고해지고 강성해지자 末年에, 잠시 교만하여 하나님께 犯罪하지 않았습니까?(삼하 11장과 대상 21장). 여호사밧은, 그 역사적인 고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면서, 다윗의 실수까지 배우지 않으려 했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그런 여호사밧 왕을 두고, 그가 왕 위에 오르자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사밧은, 역사를 꽤 깊이 공부한 사람입니다. 르호보암도 배우지 않았습니다. 아비야도 배우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아사 왕도 배우지 않았습니다. 부귀영화를 한 몸에 누렸던 통일왕국의 마지막 왕인, 솔로몬 왕도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가 집중한 사람은, 통일왕국의 제2대 왕 다윗 왕입니다. 다윗 왕을 배우되, 다윗의 처음 길에만 집중했습니다. 자기가 가야할 길을 세밀하게 찾아서, 그 길로 행하였던 것이지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한다는 말이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어렵게 찾은 여호사밧 왕이 선택한 길은, 대단히 지혜로운 길이지요. 그는, 자기가 걸어가야 할 길을 눈앞에 보이는 길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 길을 찾은 것입니다. 다윗의 길, 그것도 다윗의 처음 길, 누가 쉽게 찾아낼 수 있는 길입니까? 몇 대를 거슬러 올라가서 찾은 길입니까? 아사→아비야→르호보암→솔로몬→다윗입니다. 4代를 거슬러 올라가서 찾아낸 길입니다. 누가 관심이나 가지는 길이었겠습니까? 眞理의 길, 생명의 길은, 때로 歷史를 거슬러 올라가야만 찾을 수 있습니다.

코앞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법이지요. 우리 시대 사람들이 살아가는 보편적인 삶의 方式 속에서는 쉽게 찾아낼 수 없는 길입니다. 

오래 전에 읽은 책입니다. 카피라이터인 작가 이만재 선생님이 쓴, ????막 쪄낸 찐빵????이란 책입니다. 제목도 카피라이터답다 싶었습니다. 무슨 내용인가 하면, 그가 40대 후반 늦깎이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 믿기 시작한 날부터 100일 동안, 쓴 일기형식의 초보 그리스도인의 예수 믿는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내용을 보면 별것 없지요. 무슨 대단하고 심오한 신앙이 거기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아닙니다. 거기에는, 난생 처음 예수 만난 사람의 환희가 있고, 삶의 변화가 있고,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막 쪄낸 찐빵보다 더 맛있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가 예수 믿기 시작한 제1일/ 1990. 4. 29.(일) 일기가 이렇습니다. “07:00 기상, 술이 덜 깸. 성경책 챙김. 헌금봉투 챙김. 결혼식 축의금 때 말고는 봉투에 돈 넣어보기 처음이구랴 … 08:40 온누리교회 도착. 그래 오늘이 바로 그 첫날! 나 오늘 교회 갔었다—고 하니까, 우리 아이들 표정이 ‘천지개벽.’

제5일/ 1990. 5. 3.(목) 언제쯤 되어야 식탁에서 자동적으로 기도하게 되는 믿음이 내게 생길까? 

제6일/ 1990. 5. 4(금) 평상시처럼 6시에 퇴근을 할까 하다가 혼자서 조용히 성경 한두 줄 읽어 볼 요량으로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 병아리 신자가 되고부터 희한하게도 고질적인 불면증이 없어져 숙면을 취하기 시작함. 하나님, 당신의 영험한 이름은 ‘평안(平安)’입니까? 아무 때나 운전석에 앉기만 하면❬예수 사랑해요❭가 항상 흘러나오면서 즐거움이 가득 넘치는 내 이상한 자동차 [서울3구9548]은…“달리는 일인승교회(一人乘敎會)!”

제35일/ 1990. 6. 2.(토) 자꾸만 까먹는 식기도(食祈禱) 연습(기도내용은 주기도문으로) 

제36일/ 1990. 6. 3.(일) 주일아침 1부 예배참석. 성가대 예쁘고, 뚱보 지휘자도 예쁘고, 맑은 미소의 하 목사님도 예쁘고, 온통 예쁜 사람들뿐인 온누리교회. 교회 사람들은 어쩜 저렇게 모두무도 하나같이 선량하고 경건하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그 착하고 어린 양 떼들 속에 흔연한 얼굴로 끼여 있는 나는 한 마리 늑대인가? … 문득 섬광 같은 절망! 

이렇게 시작된 이만재 선생님의 신앙생활도, 벌써 20년이 다 되어 갑니다. 지금 그 분이 어떻게 예수 믿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분도 처음 예수 믿으면서 펴내었던 100일 일기, ‘막 쪄낸 찐빵’을 더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막 쪄낸 찐빵’의 신앙은 어리지만, 아름답습니다. 그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너무 맑고, 어린아이 꾸밈이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 때문에, 고민하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합니다. ‘막 쪄낸 찐빵’이 맛있다고 하지만, 그 신앙 부족함 투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의 겸허함이 있습니다. 토기장이 하나님께서 빚으시는 대로 빚으시도록 내맡겨드리는 ‘내어드림’이 있습니다. 

겸허함, 내어드림, 바로 그것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탄력성이 좋은 새 가죽부대가 아니라, 탄력성이 부족한 낡은 가죽부대와 같지는 않은지요? 거친 돌이 많은 돌짝밭과 같지는 않은지요? 너무 세속화되어서, ‘하나님 말씀’이 자라날 기운조차 없는 가시떨기가 드리워진 밭과 같지는 않은지요?

처음 신앙의 ‘본’, ‘기준’을 나름대로 가지고 계신 분들은, 그 처음 것을 다시 한 번 찾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신앙에서 찾을 수가 있으십니까? 할아버지 신앙에서 찾으실 수가 있으십니까? 어머니와 할머니 신앙에서 찾아내실 수가 있겠습니까? 아니면, 누구에게서 그 처음 신앙의 ‘본’, ‘기준’을 찾아내실 수가 있겠습니까? 

혹 우리 중에, 처음 信仰의 ‘本’이 없으신 분들은, 하나님 말씀 속에서 스스로 그 처음 신앙의 본을 만들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처음 신앙의 개척자가 되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도 이만재 선생님처럼 막 쪄낸 찐빵의 信仰人이 되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다윗의 처음 길’은 분열 왕국의 제4대 왕 유다 왕 여호사밧과 그 나라를 축복하는 ‘本’이 되었습니다. 다윗의 처음 길이, 여호사밧과 유다 나라를 축복하는 길이 되었습니다. 다윗의 처음 길은, 그들이 찾은 축복의 통로였습니다. 그런 ‘本’이 있는 가정, ‘本’이 있는 교회, ‘본’이 있는 일터, 복입니다. 우리가 다 그 복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現代社會는 價値混沌의 時代입니다. 物質萬能主義 時代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따라서 사는 사람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시류를 좇아서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많지만, 좁은 문으로 협착한 길로 가는 사람은 적습니다. 자기 十字架를 지고 主님을 따라가는 사람 심히 적습니다. 

우리 子孫들이 어디에서 人生의 바른 길을 찾아낼 수가 있겠습니까? 여호사밧 같이 여간 지혜롭지 않고서야, 어찌 선대 왕들을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서 ‘다윗의 처음 길’까지 찾아가서 그 길로 행할 수가 있겠습니까? 현대사회는, 눈에 보이는 대로 ‘本’보고, 行하는 時代입니다. 우리가 ‘본’이 되지 못하면, 다음 세대들은 어두움의 시대를 살 확률이 매우 높은 시대입니다.

子女들을 물량주의적인 가치관으로 키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요즘 젊은 엄마들이, 수입유아용품에 열광합니다. 명품맘들이 모이는 정기모임도 있다고 합니다. 유모차는 아이들에게 자동차나 같은데, 벤츠, BMW같은 자동차에 해당되는 스토케(STTOKE)나 퀴니(Quinny) 같은 고가의 유모차가 많이 팔린다고 합니다(벤츠나 BMW). 그렇게 키우면 부요하게 자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꼭 자녀를 축복하는 길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여호와께서 제4대 왕 여호사밧과 함께 하셨으니, 이는 그가 그의 조상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여, 바알들(물질의 신, 풍요의 신)에게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아버지의 하나님께 구하며, 그의 誡命을 행하고, (하나님의 떠나 물질의 신, 풍요의 신 바알을 숭배하는) 북 이스라엘의 行爲를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라 하셨습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