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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께로부터 (롬 11:25~32) - 하나님의 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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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로부터 (롬 11:25~32)
  

어느 목사님의 설교에서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머릿속에 있어서 소개하며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어느 교회에 장로님이 있었습니다.
그 장로님이 교회에서 장로로 피택되어 장립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님은 운이 좋게 장로로 장립은 했지만 한 가지 고민이 있었습니다.
무엇인가하면 담배를 못 끊은 것이었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담배를 계속 피우며 장로 일을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고민 끝에 섬기는 교회의 담임목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담배를 도저히 못 끊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러자 그 담임목사님의 답변이 걸작입니다.
‘장로님, 피우시는 것은 괜찮은데 들키지 마십시오.’

아주 가벼운 농담으로 들으실 것 같은 노파심이 있어 그 목사님의 진정성이 무엇인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지금 이야기 한 에피소드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담배를 못 끊는 것 때문에 장로를 그만 두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장로가 담배를 피우는 것이 정상적인 일이냐고 반문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담배라는 것과 맞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본질이지만 담배는 지엽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담배 에피소드를 말한 목사님의 말은 지엽적인 것 때문에 본질을 희석시키는 일은 옳은 일이 아니라는 말이 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제가 설교의 서두에 이 말을 왜 드리며 설교를 시작하는 것일까요?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것은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본질은 마마도 구원에 대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오늘은 그 중요한 본질 중에 구원의 주권에 대하여 집중해 보려고 합니다.
구원에 대한 주권을 말입니다.

오늘 본문 로마서 11:29-36절에서 바울은 구원에 대한 주권이 누구에게 있느냐에 초점을 두고 말하는 것과도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기에 저 역시 그리스도인의 구원에 대한 주권의 가치를 오늘 설교를 통하여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본론)

오늘 본문으로 우리 교우들을 초청합니다.
우리는 지난 강해를 통해서 이런 은혜를 도출해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을 당신의 선민으로 택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을 제사장의 나라로 택하셔서 하나님의 구원의 시발점으로 삼으셨습니다.

출 19:5-6절은 시내산에 도착한 이스라엘 신악공동체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언약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분명히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당신의 소유로, 거룩한 제사장의 나라로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부하였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보내셔서 다윗의 계보를 통하여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선민으로서의 구원을 저버린 유대인들을 시기 나게 하기 위하여 이제는 이방인들에게로 구원의 손길을 뻗치셨습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은 돌 감람나무였지만 참 감람나무인 유대인들이 받아야 하는 구원의 뿌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분명히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구원을 보고 돌아오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 중에 지유의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분명히 구원을 받을 구원의 대상이 있음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증거로 남은 자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유대인들이 반드시 존재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유대인들은 예정론자들이 말하는 온 유대인 전체가 될 지 아니면 자유의지론자들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유의지로 받아들인 유대적 남은 자가 될지는 훗날 분명해 질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판단은 훗날 주님이 하실 것으로 믿고 이만큼 하여 덮으십니다.
그런데 오늘 주목하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주권입니다.

오늘 본문 29절-32절을 봅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무슨 말입니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① 하나님은 행하시는 일에 후회하심이 없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② 전에 이방인들이 순종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긍휼이 여겨 순종하는 자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③ 이제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처럼 순종하지 않아 버림을 받은 것처럼 보이지만 유대인들로 하나님의 긍휼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세 가지의 내용의 공통점이 보입니다.
무엇입니까?
모든 일의 사역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구원의 은혜는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 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왈가왈부하는 것은 배은망덕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구원론을 다루고 있는 1-8장까지의 구원론과 이방인의 구원론을 다루고 9-11장까지의 내용을 지금까지 강해하면서 제가 갖고 있는 신학적인 기초를 토대로 여러 번 언급한 내용이 있습니다.

“구원을 계획하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전적인 주권은 주님께 있다. 그러나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여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사람에게 달려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이 성서적입니다.
제가 예정론을 반대하고 있기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오해입니다.
단언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의 계획의 절대적인 주권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저는 예정론자들보다 더 강력하게 호소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혹시 이것을 반대하는 자들과의 논쟁이 있다면 저는 언제든지 순교적인 각오로 싸울 준비까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계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기를 기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허락하셔서 저와 여러분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이 이 로마서를 쓰고 있는 시기에 구원의 은혜의 줄기에서 빗나가 있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통로인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이스라엘을 안타까웠지만 하나님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는 방법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까?
이 문제에 대한 질문의 답을 본문을 통해서 추적해 보십시다.
25-26절의 본문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이스라엘의 구원의 계획을 이렇게 천명하셨습니다.

①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함으로 그들을 시기 나게 함으로 이방인들을 구원시킬 것인데 이방인들이 구원의 충만한 수가 찰 때까지 행할 것이다.
② 이방인의 구원 받은 백성이 충만하게 임하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의 파노라마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다시 지난주에 이어 주목해야 하는 구절이 26절 전반절의 ‘온 이스라엘’(pa" !Israhl) 입니다. 
하나님은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온 이스라엘의 정의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온 이스라엘’에 대한 신학적인 논쟁은 대체적으로 약 세 가지 정도입니다.

Ⓐ 온 이스라엘은 모든 열방 중에서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는 모든 사람들의 통칭이라는 주장입니다. 이 말은 유대인과 이방인 양자를 다 포함하는 내용입니다.

Ⓑ 온 이스라엘은 문자 그대로 이스라엘 전 민족을 가리키는 말로 보는 견해입니다.

Ⓒ 유대인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돌아오는 영적인 이스라엘인의 통칭으로 보는 학설입니다.

교파마다, 신학적 특색에 따라 이 세 가지의 내용은 주장이 됩니다.

저는 지난주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로마서 강해를 주석한 케제만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제 3안에 손을 들어주는 입장입니다.
이 세 가지의 학설은 나름대로의 장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어떤 것이 맞는 학설인가는 후에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즈음이면 분명히 판가름이 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교우들과 주목하는 설교 포인트는 온 이스라엘 과연 어떤 존재들인가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 교우들과 함께 집중하려는 포인트는 Ⓐ든 Ⓑ이든 아니면 Ⓒ이든 중요한 것은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통합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인 영적인 이스라엘이든, 하나님의 특별하신 예정의 은혜로 온 이스라엘이 선민이기에 몽땅 구원을 하시든, 유대인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영적인 남은 자 이스라엘이든 그것은 다시 말하지만 그 때 가보아야 압니다.

그런데 한 가지는 그 때까지 가지 않아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본문에 기록된 ‘온 이스라엘’의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강력하게 천명하는 메시지의 핵심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주신 은사에 대하여 후회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부르신 부르심에 대하여 후회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절했지만 당신이 유대인을 부르신 것에 대하여 결코 후회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지금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주신 선민으로서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에 반응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회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후회하다’는 헬라어 ‘ametamelhto"’는 ‘취소하다’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의 계획을 취소하지 않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원의 주체자이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지금 흘러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후회하다’라는 단어가 나와서 좋은 예가 될 것 같아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 교우들이 잘 아시는 것처럼 제 아들이 고 3입니다.
시중에 이런 농이 표현됩니다.
‘인삼도 아니고 산삼도 아니고 해삼도 아니고 고삼이라’

이 말의 진의는 고등학교 3학년은 인삼보다 산삼보다 해삼보다 더 중요한 시기의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이야기이니까 생각은 다를 수 있습니다.
여하튼 분명한 것은 고등학교 3학년은 인생의 중요한 분수령의 시기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저도 처음으로 고 3 학부형을 해보는데 대학입시의 시간이 다가올수록 부모로서 긴장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긴장은 하지만 아빠가 고 3아들을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도 다만 저는 아빠이기도 하지만 목사이기에 한 가지는 잊지 않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에 두 가지를 기도합니다.

* 하나님, 우리 요한이가 고등학교 3학년을 뒤돌아볼 때 후회하지 않는 시간을 보냈다고 고백할 수 있도록 하옵소서.

* 하나님, 우리 요한이와 경쟁을 벌이고 있는 교회 내의 동기생들에게도 똑같은 은혜를 주옵소서.

요즈음에 우리 교회의 지체들 중에 우리 아들의 경쟁 대상자들인 성도님들에게 그래서 자신 있게 토로할 수 있는 것 중에 하나는 당신의 고 3자녀들을 위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동일하게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은 의아하지 않습니까?
사실, 제 아내도 아니 여기 있는 고3의 자녀들을 둔 부모님들이 요구하는 기도는 그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적어도 목사가 기도하는 내용은 이런 것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우리 아들, 딸들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게 하옵소서.”

이 기도가 조금은 더 현실적으로 바라는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그렇게 기도를 드린 적이 없습니다.
아니, 앞으로도 그렇게 기도를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를 여호수아의 말씀으로 답해 드리겠습니다.

여호수아의 영도 하에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는 요단을 기적적으로 건넜습니다.
그리고 길갈에서 할례 의식을 행한 뒤에 이제는 또 하나의 관문인 여리고성을 넘어야 하는 최대의 숙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여리고성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공동체에게는 무거운 짐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하는 산이었고 과제였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리고는 난공불락의 요새였기 때문입니다.

수 6:1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참으로 난감합니다.
그런데 그 난감함 속에 있던 여호수아가 신경이 예민한 상태로 여리고 성 가까이 이르렀습니다.
바로 그 때 여호수아가 눈을 들어 보니 한 사람이 칼을 빼고 손에 들고 마주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민감한 여호수아는 혹시 여리고성의 첨병이 아닌가 하여 민감하게 묻습니다.

수 5:13절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무슨 말입니까?
현대적인 언어로 바꾸어 말하면 너는 우리 편이냐 아니면 적의 편이냐를 묻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왜 이런 질문을 했습니까?
민감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질문을 받은 상대편이 이렇게 잊지 못할 말을 던집니다.
수 5:14-15절입니다.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해석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군대장관을 보내셨습니다.
어찌 보면 카일과 델리취의 말대로 하나님 당신께서 여호수아에게 하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천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네 편도 아니고 적의 편도 아니다. 나는 나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온 하나님의 군대장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네 편도 아니고 적의 편도 아니기에 내가 너에게 명령하는데 너는 신발을 벗으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뜻에 순종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군대장관의 고백이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는 교훈의 메시지는 정말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의 뜻을 펼치시는 분이시지 하나님은 인간의 욕심에 의하여 좌지우지 되는 분이 아니라는 교훈입니다.

요한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였을 때 세부적으로 기도할 요량으로 이렇게 기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요한이가 한동대학교에 들어가게 해 주시든지, 아니면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에 들어가게 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아주 그럴듯한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를 묵상하면서 이렇게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을 막는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들 편이 되셔서 좋은 성적을 거두게 하셔서 남들이 보기에 그럴 듯한 대학에 들어가게 하옵소서.” 는 오히려 죄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들이 고 3이 된 이후에 한 번도 이런 기도를 드린 적이 없습니다.
도리어 하나님께 기도하는 제목이 이런 앞서 말씀을 드린 기도입니다.
“하나님, 아들이 후회하지 않는 고 3을 보내게 하옵소서.” 

주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한 가지 이야기를 더하려고 합니다.
이제 우리나라에 대통령이 보수적인 교단의 시무장로인 이명박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다시금 장로 대통령이 등장한 것에 대하여 고무되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목사가 정치적인 색채를 갖고 설교를 하거나 발언을 하는 것은 결코 성서적이지도 않고 바람직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저는 개인적으로 정치적인 복선을 깔고 설교를 하지 않으려고 의도적으로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하게 포장이 되어 교회가 정치적인 선전의 장이 되거나 성경에 부합되지 않는 정치적인 장으로 이용할 때는 분연히 그것에 대하여 할 말을 했습니다. 
또 앞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면 다시 또 그렇게 할 것입니다.

일전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이명박 대통령이 후보자 시절에 저는 한 번도 이명박 후보자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기도를 한 적도 없었고 또 바란 적도 없었습니다.

왜 그런 가하면 하나님은 이명박 후보자를 대통령을 만들어 달라고 기도한다고 해서 이명박 후보자를 대통령이 되도록 해 주신다고 믿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로마서 13:1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말씀을 믿으며 하나님께서 이명박 장로가 대통령으로 시대에 필요하면 당신의 주권으로 세우실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일부분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공공연하게 예배는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해야 하는 기본적인 것조차도 무시하고 한 개인을 대통령을 만들기 위해 분주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 공동체의 이름으로 그렇게 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기독교 연합회 주관으로 이명박 장로를 초청하는 집회도 개인적으로 반대를 했던 이유가 교회가 정치적인 면에서 휘둘림을 당하는 것이 분노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이야기이지만 우리 한국교회가 당시의 이명박 대통령을 위해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이명박장로님을 대통령으로 세워주십시오. 하나님, 크리스천이 대통령이 되게 하옵소서.’
그런데 저는 그제나 지금이나 그 때의 기도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 우리 한국교회에서 기도를 해야 하는 것은 이렇게 기도해야 했습니다.
‘하나님, 이명박 장로께서 하나님의 주권에 맞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그를 세워주시옵소서.’
전자는 하나님의 주권이 무시되는 기도이지만 후자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기도입니다.

이유야 어떻든 그가 대통령이 된 이후부터는 일전에 목양터의 이야기 마당에서 언급한 대로 저는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가 실패하지 않는 대통령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지금의 대통령의 생각은 같을 수 없습니다.
또 같아야지라고 말하는 것도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새벽에 이명박 대통령을 위해 지금은 기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명박 후보자가 대통령이 된 것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졌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 주권에 항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하심을 불순종해서는 안 됩니다.
 

결론)

이제는 저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로마서 41번째의 강해로 하나님의 구원의 주권에 집중하여 보았습니다.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문자적인 남은 자이든, 아니면 영적인 남은 자이든 상관이 없이 어떤 부류이든 상관이 없이 그들을 구원시키는 주권자는 하나님이심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주체이시라는 것을 믿으면 우리는 로마서 11:33절 이하의 고백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로마서 42번째의 강해에서 집중하여 살펴볼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11장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36절에서 바울은 구원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정의하면서 이렇게 진솔하게 고백하였습니다.

롬 11:36절입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가 전에 보던 성경에는 ‘주로 말미암아’라는 문구가 ‘주께로부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훨씬 더 메시지의 의미가 강하게 보여 오늘 설교의 제목을 ‘주께로부터’라고 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음악의 성자 Ludwig Van Beethoven 곡에서 편곡하여 만들어진 찬송가 634장의 찬양을 하나님께 드릴 때는 자리에서 일어나 드리는 것은 너무나 마땅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으니 이 예물을 주께 드리나이다.”아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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