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십니까 (합 1:12~17, 벧후 3:9)

  • 잡초 잡초
  • 567
  • 0

첨부 1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십니까 (합 1:12~17, 벧후 3:9)


1605년의 시대 풍자 소설인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는 거짓의 기사가 돈키호테에게 이렇게 거짓말을 합니다. “네 진짜 모습을 보아라. 네가 고매한 기사가 아니라 인간의 멍청한 허수아비임을 알아라”. 세상에서 거짓의 기사는 거짓말을 합니다. 거짓의 기사가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신의 거짓을 감추기 위해서입니다. 거짓의 기사는 진실한 자에게 오히려 거짓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거짓 기사의 특성이며 습관입니다.
  
거짓의 역사는 창세기의 역사입니다. 에덴의 평화가 파괴된 것은 거짓말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동산 중앙의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뱀이 와서 하와를 꼬여 먹으라고 합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죽으리라고 했지만 뱀은 죽지 않으리라고 합니다. 뱀이 거짓말로 사람을 유혹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는다고 했지만 뱀은 죽지 않는다고 합니다. 뱀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거짓된 자의 특징입니다.
  
요한일서 1:10에는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라고 합니다. 요한일서 5:10에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라고 합니다. 거짓된 자들은 지금도 우리 하나님, 예수님, 성경, 교회 그리고 성도를 거짓이라고 적반하장으로 말합니다.
  
지금도 거짓은 마귀의 전유물입니다. 마귀는 절대로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선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말할 수 없습니다. 진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을 항상 속일 수는 없다”. 그런데 마귀는 모든 사람을 항상 속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마귀는 항상 열심히 속이지만 끝내 이기지 못하고 진실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토마스 제퍼슨은 “정직은 지혜의 책 제1장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혀의 거짓말은 결국 마음의 거짓말로 발전하게 되고 언젠가는 좋은 성품까지 타락시켜 버리는 거라네”. 거짓은 남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속이는 일이고 남을 파멸에 몰아넣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파멸에 몰아넣는 것입니다.
  
번연의 ‘천로역정’에는 인간의 죄 짐을 두려움, 거짓말, 수다, 위선, 허영 등으로 묘사합니다. 거짓말 하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죄는 인간을 거짓말하게 만듭니다. 거짓말을 한마디 하면 지탄을 받고, 거짓말을 한 권하면 작가가 되고, 거짓말을 한 페이지 하면 당선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거짓말은 죄 지은 사람들의 일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존 프란트는 우리는 하루에 40번 거짓말 한다고 하였습니다. 마귀의 밥이 된 사람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합니다. 예레미야 9:8에는 “그들의 혀는 죽이는 화살이라 거짓을 말하며 입으로는 그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마음으로는 해를 꾸미는도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은 거짓이 가득 찬 세상입니다. 거짓말하는 자를 하나님은 방관하고 계십니다. 왜 방관하십니까? 언제까지 방관하십니까?

첫째, 하나님은 일시적으로 방관하시며 잠잠하십니다.

13절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를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하나님은 악과 패역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방관하시며 잠잠하고 계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모르셔서 방관하시고 잠잠하십니까? 아시면서도 일시적으로 방관하시고 눈을 감아주시고 아무 말도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전지, 전능, 전재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방관하시고 잠잠하실 수 있습니다. 인간은 전지, 전능, 전재하지 못하기 때문에 잠잠하지 못합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격이 승화된 사람은 못 본 척하고, 잠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격이 덜 된 사람은 못 참습니다. 한마디 해야 하고 무엇을 들었다 하면 금방 뛰어가서 입방아를 찧습니다. “할 말은 아니지만” 하면서 말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할 말이 아닌 것은 하지 말아야지 “할 말은 아니지만”이라고 한 말은 거의 모두 감정이 섞인 말입니다. 그래서 그 말이 문제를 일으킵니다. 본 것이나 들은 것을 못 참고 얘기해야 하고, 입이 근진근질해서 못 견디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른들은 젊은이들의 삶을 때로는 못 본 척해야 합니다. 젊은 부부들의 삶이 마음에 차지 않더라도 부모가 간섭하면 오히려 안 좋은 것들이 더 많아집니다. 그냥 눈감아 주는 것이 좋은 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시고 갈릴리 바다에 나가셨습니다. 갑자기 바람이 불고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작은 배 안에서 주무시고 계십니다. 제자들은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않으십니까?”하고 소리치며 예수님을 깨웁니다. 고통의 극한까지 주님은 방관하고 잠잠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절대 제자들이 죽게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망하게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국내외가 혼란합니다. 우리 주변의 과제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바람이 불고 풍랑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수 많은 것들이 얼마나 거짓으로 가르치고, 호도하고, 사회를 혼란하게 하고 있습니까? 공영방송이 거짓을 방송하여 물의를 일으킵니다. 이것은 사회에 대한, 국민에 대한 죄악입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을 그릇되게 가르쳐 학생들이 분개하여 촛불을 들게 만듭니다. 최근에는 광우병 괴담, 믿기지 않는 금강산 관광객 피살, 독도괴담, 촛불시위 여대생 사망 괴담까지 나와 여름을 서늘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거짓들이 난무하고, 사회가 혼란에 빠지고, 국기가 위협을 받고 있는데 왜 하나님은 거짓을 방관하십니까? 왜 악을 보고도 잠잠하십니까?
  
하나님의 침묵이 때로는 답답하고, 억울하고, 걱정이 될 때도 있습니다. 엔도 슈샤쿠의 ‘침묵’이란 소설은 일본에 포르투갈의 천주교 선교사인 신부 로드리고가 박해를 이기지 못하여 배교하는 내용입니다. 배교자 로드리고 신부는 절규하듯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주여, 당신이 침묵하고 계시는 것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함께 괴로워하고 있었는데...”라고 대답하십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방관하시는 듯이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말씀 하셔야 하는데 잠잠하십니다. 하나님이 나서셔야 하는데 침묵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것이 아닙니다.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방관하시고 잠잠하시는 그 자체가 일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중국말에 ‘자우’(慈雨)라는 말이 있습니다. 때맞춰 내리는 비를 의미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자비로운 비입니다. 하나님은 때맞춰 주시려고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내리시는 은혜를 공급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른 비와 늦은 비로 내리십니다. 하나님은 그 좋은 비를 의인에게만 내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만 내리시지 않습니다.
  
알렉산더의 일화에 유명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알렉산더가 유대의 어느 마을을 침공하였습니다. 동네에 들어갔을 때 마침 동네 랍비가 재판을 하고 있었는데 이상한 재판이었습니다. 밭을 매매하였는데 매매 후에 땅 속에서 보물 상자가 발견된 것입니다. 그런데 밭을 판 사람도 산 사람도 서로 이 보물 상자를 가질 수 없다고 합니다. 판 사람은 이미 밭을 팔았으니 밭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판 것이나 다름없으니 내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산 사람은 밭을 산 것이지 보물 상자를 산 것이 아니니 가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난감한 랍비는 한참동안 생각하더니 두 사람에게 묻습니다. “당신에게 아들이 있습니까?” “예”, “당신에게 딸이 있습니까?” “예”, “그러면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딸을 결혼시키세요. 그리고 그 보물 상자를 결혼한 그 가정에 주세요.” 대왕은 랍비에게 어리석은 재판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랍비는 “대왕께서는 어떻게 재판하시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대왕은 “나는 둘 다 죽이고 보물을 내가 갖겠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랍비는 “당신의 나라에도 해가 뜹니까?”하고 대왕에게 물었습니다. “물론이지 해가 뜨고말고.”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런데 대왕의 나라에도 소나 양이 있습니까?” “물론 있지.” 이 때 랍비는 “이제 알았습니다. 대왕의 나라에 해가 뜨는 것은 소나 양을 위해서입니다.” 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45에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악인이 불의한 일을 저질러도 해를 비추십니다. 길이 참으시고 용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방관이나 잠잠하심은 인간 편의 느낌입니다. 인간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방관, 잠잠함도 하나님의 부지런히 일하심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해야 합니다.


둘째, 악인은 일시적으로 풍부하고 풍성합니다.

16절에는 “그물에 제사하며 투망 앞에 분향하오니 이는 그것을 힘입어 소득이 풍부하고 먹을 것이 풍성하게 됨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악인은 일시적으로 풍부하고 풍성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잘 됩니다. 이것이 지상 세계의 이치입니다.
  
그물에 제사하며 투망 앞에 분향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어촌에 가보면 미신이 심합니다. 하나님 보다 귀신을 섬기고 미신을 의존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보다 일시적으로 잘 되고 풍부하고 풍성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미신을 믿는 사람들이 잘되고 풍성한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첨단 기술단지를 오픈하면서 먼저 돼지머리 놓고 고사 지내고 절을 하는 모습을 우리는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또 이런 사람들이 잘 되고 돈도 많이 벌고 건강한 것을 보면서 이해가 안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악인은 대체로 오래 삽니다. 말도 함부로 막 하고 남에게 예사로 상처를 줍니다. 그러면서 “나는 뒤는 없다”고 합니다. 남에게 상처를 다 주고 뒤가 없으면 뭐합니까? 악한 자들은 화풀이합니다. 속에 있는 것을 다 털어놓습니다. 자기는 정신 건강에 좋습니다. 그래서 더 건강하고 오래 삽니다.
  
악한 자들의 사는 모습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재물도 많고, 명예도 얻고, 지위도 높습니다. 세상에서 악한 자들이 의로운 자보다 많고, 높고, 빠릅니다. 그러나 이것만을 가지고 복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매를 맞지 않았다고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이 방관하시고, 잠잠하시기 때문에 살아남아 있는 것입니다.
  
오스 기니스의 ‘고통 앞에 서다’라는 책이 최근에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은 ‘악의 도전을 대면하다’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번역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들이 지구상에서 가장 잔혹한 만행을 저지르는 현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착한 사람들이 불행을 당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성경에서 하박국의 질문은 지금도 끝없이 계속됩니다. 죄인 된 인간의 사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위선자’(hypocrite)는 바리새인이라는 말의 어원을 가진 말입니다. 옛날 로마 극장의 배우들은 모두 남성이었습니다. 극중에서 여자 역이 필요하거나 어떤 특별한 역이 필요할 때는 남자 배우들이 마스크를 썼습니다. 이 말은 가면을 쓴다는 말이 유래되었습니다. ‘위선자’라는 말은 연극에서 어떤 역을 맡아 일시적으로 가면을 쓴 사람을 의미합니다. 위선자는 일시적으로 자신을 감추는 자입니다. 일시적으로 풍부하고 일시적으로 잘 되는 자를 의미합니다.
  
제가 아는 어느 집사님은 오래 전에 아주 높은 분의 비서였습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높은 분에게 주는 봉투가 많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봉투가 얼마나 많은지 중간에서 적당히 떼먹어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중간에 가로챈 돈을 모아 후에 대구에서 버스를 몇 대 사서 운수업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얼마나 사업이 잘 되었는지 이러다가 금방 재벌 되는 줄 알았답니다. 그런데 당시만 하더라도 보험이라는 게 없던 때라 차 한대가 인사사고를 내서 돈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는데 차례로 사고가 나서 돈이 줄줄 새어나갔습니다. 사업은 망하고 후에 예수를 믿고 다른 사업으로 재기하였습니다. 그 분의 말이 처음에는 바람 만난 배처럼 잘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끝내 부정한 돈은 다 새어나가게 마련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부정한 돈으로 하는 일도 일시적으로는 잘 됩니다. 하나님의 알지 못하는 사람의 일이 일시적으로는 잘 됩니다. 일시적 풍요는 세상이 주는 풍요입니다.
  
설교가 스펄젼 목사님의 이야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이아가라폭포 위쪽 강에서 유람하던 배에 구멍이 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배에서 얼른 뛰어내려 강 옆에 심겨져 있는 작은 나무 가지를 잡았습니다. 그 때 강 위에 통나무 하나가 떠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가지보다 더 큰 통나무를 잡았습니다. 얼마 후에 이 사람은 나이아가라폭포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일시적 평안, 일시적 형통, 일시적 풍부를 추구하며 뿌리가 없는 것을 의지하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세상이 주는 일시적 풍요에 정신을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로 가이사에게 고소하여 로마로 갑니다. 바울의 호송을 책임지고 있던 백부장은 시돈에서 배를 타고 미항이란 곳을 거쳐 뵈닉스에서 겨울을 나기를 원했습니다.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 항해를 시작하자 바다가 그들의 항해를 도와주었습니다. 사도행전 27:13에는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유라굴로라는 태풍이 불어 사람들의 목숨만 겨우 부지하고 배와 화물은 모두 바다에 다 버리고 멜리데라는 작은 섬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일이 때로는 시작이 얼마나 미끄러지듯 순조로운지 모릅니다. 이것에 많은 사람들은 속습니다. 악한 자들의 하는 일은 이렇게 일시적인 형통과 풍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성경 잠언 24:19에는 “너는 행악자들로 말미암아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악인이 일시적으로 잘 되는 것은 부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일본과 한국은 멀리도 가까이도 못하는 나라입니다. 일본이 최근 다시 독도 문제로 우리의 비위를 건드리는 것을 봐도 실망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일본을 믿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외래종교가 들어가 성공한 적이 없는 나라입니다. 일본은 800만 신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반면에 우리나라는 외국에서 기독교가 들어와 가장 성공한 나라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슬람이 우리나라를 포교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한국을 통하여 세계 이슬람화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미국과 가장 가까워 미국을 이슬람화하는 공략의 중간 거점으로 가장 좋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요즘 이슬람이 엄청난 물량공세로 포교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미신이 성하고 귀신이 많은 일본이 왜 잘 살고 풍요합니까? 우리의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물에 제사하고 투망에 분향하는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잘 될 것이라고 이미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 없이 잘 사는 것보다 예수 믿고 못사는 것이 낫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예수 믿고 잘 사는 것이 제일입니다.

결론

진리라는 히브리말은 ‘아메트’ 입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 24자의 첫 자와 가운데 자와 마지막 자가 모여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진리는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이 같아야 합니다. 반면에 거짓이란 말은 ‘샤카르’ 인데 마지막 자들이 모여 만들어졌습니다. 언제나 진리는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거짓은 언제나 끝입니다. 일시적인 풍요나 일시적인 정직이 아니라 처음이나 중간이나 마지막이 동일한 풍요와 정직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진리에 사는 사람은 처음이나 중간이나 마지막이나 동일한 복을 받습니다.
  
요한삼서 3절에는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고 합니다. 부자가 되고, 건강하게 살고, 지위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사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이런 자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인간은 종교적 확신을 가지고 있을 때 가장 철저하고 신명나게 악을 저지른다”고 하였습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악을 자행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가장 악랄한 일을 행할 수 있습니다. 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교리의 이름으로 얼마든지 죽이고 파괴하고 미워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장 큰 적은 로마인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인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주의자입니다. 율법주의자입니다. 종교인이라고 하는 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서기관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가장 큰 적은 예수를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섣불리 아는 사람들입니다.
  
진리와 가장 가까운 것이 거짓 진리입니다. 거짓 진리가 참 진리인 기독교를 훼손하고 폄훼하고 비난합니다. 이런 세상에 거짓이 난무하지만 하나님은 방관하시고 잠잠하십니다. 그러나 결코 진리는 패하지 않습니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라는 찬송처럼 변치 않는 십자가의 진리로 이 시대를 승리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