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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첫사랑의 추억 (계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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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의 추억 (계 2:1~7)


언젠가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4.5톤 화물트럭 운전기사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남편이 10년 전에 신장병에 걸려 하루 4번 투석을 합니다. 밤낮으로 운전해야 살 수 있는 형편이라 아내도 운전을 배웠습니다. 부부가 교대로 운전하면서 서울과 부산을 쉴 새 없이 오갑니다. 트럭 안에서 투석을 하고, 잠도 자고, 식사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버는 쥐꼬리만한 수입으로 생활을 꾸려가고 자식을 키웁니다. 얼마나 고달프겠습니까? 그래도 부부는 서로 위해 주며 열심히 살아갑니다.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운전석 뒤편에 전기장판 깔고 새우잠을 자지만, 함께 어려움을 이기며 즐겁게 살아갑니다. 취재하던 기자에게 남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라도 함께 할 수 있으니 행복하죠. 어때요? 꼭 신혼 단칸방 같죠?” 

여러분,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부부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사랑이구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무리 고대광실에 살아도, 아무리 억만금이 있고 온몸을 보석으로 치장해도, 사랑이 없다면 진정한 행복은 없을 겁니다. 그러나 어떤 형편에서든지 사랑할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성도,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를 흔히 부부로 비유합니다. 부부 관계에서 사랑이 핵심인 것처럼,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에서도 사랑이 핵심입니다. 아무리 세련된 예배를 드려도, 아무리 유창한 기도를 드려도, 아무리 큰 봉사를 해도 사랑이 빠지면 모두가 헛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전13장에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고전13:2~3 “ ...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I am nothing) ...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I gain nothing)”

한 마디로,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게 헛되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이 그런 사실을 확인해 줍니다. 요한계시록(Revelation)은 사도 요한이 쓴 책입니다. 그는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다 로마 황제(도미티아누스)에게 붙잡혀 기름 가마에 던져집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살아났고, 기겁을 한 황제가 밧모 섬으로 귀양 보냅니다. 그 외딴 섬에서 기도하다 계시 받아 기록한 책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그 중에 2장~3장을 보면 그 당시(주후 1세기말) 소아시아(지금의 터키)에 있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일곱 교회는 당시에 존재하던 교회들입니다. 동시에 성경에 기록되어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들을 잘 살펴보면 오늘 이 시대의 교회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의 신앙 상태를 진단해 볼 수 있습니다. 각 교회에 주신 말씀을 보면 칭찬도 있고 책망도 있는데, 그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과연 우리 성도들에게, 교회들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계신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오늘 본문은 첫 번째 교회인 에베소교회에 주신 말씀입니다. 이 시간 이 말씀을 상고하면서 우리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새롭게 되는 귀한 기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1] 에베소교회 : 첫사랑을 잃어버린 교회

여기 보면 주님께서 칭찬의 말씀과 책망의 말씀을 같이 주십니다. 먼저 1절 보면, 말씀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지 소개되어 있습니다. 1절.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여기서 ‘사자’(使者)는 교회 지도자를 가리킵니다.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 곧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일곱 금촛대는 일곱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권능의 오른 손으로 사자들을 붙들고 교회들을 보살피고 통치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리켜 ‘교회의 주인’이라 부르는 겁니다. 

2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주신 칭찬과 책망의 말씀이 있습니다. 먼저 칭찬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2절과 6절을 보면, 이단을 퇴치하고 진리를 수호한 데 대한 칭찬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이단이 많았습니다.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과 니골라 당이라는 이단들이 있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이를 단호히 배격하고 복음진리를 수호했습니다. 

또 한 가지는 3절에 기록된 대로 시련을 극복한 데 대한 칭찬입니다. 에베소는 당시 소아시아의 중심이 되는 항구 도시로 상공업이 발달되고 향락과 우상 숭배가 성하던 곳입니다. 아데미神(=제우스神의 딸로 풍요와 섹스의 여신)의 신전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죄악과 향락의 풍조가 가득한 도시에서 신앙 생활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래도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모든 고난과 유혹을 다 이겨냈습니다. 칭찬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책망의 말씀도 있습니다. 첫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겁니다. 4절 말씀 보시죠.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your first love)을 버렸느니라” 이단과 싸워 진리를 수호하고 고난을 참아낸 것은 가상하지만, 정작 처음 믿을 때의 그 순수하고 뜨거운 사랑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아주 치명적인 것입니다. 신앙은 머리로만 아는 생경한 지식이 아닙니다. 신앙은 말씀의 지식도 중요하지만, 그것으로 가슴이 뜨거워지고, 그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예배, 봉사, 전도 등 모든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교회는 겉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모든 게 착착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점점 그들의 가슴은 싸늘해지고 빈껍데기 같은 형식적인 신앙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면, 신앙의 매너리즘(mannerism)에 빠졌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부부가 같이 살면서 겉으로 보면 아무 문제가 없이 잘 돌아갑니다. 남편은 꼬박 꼬박 생활비를 벌어옵니다. 아내는 아이들도 챙기고, 집안 살림도 잘해 줍니다. 그런데 서로 간에 대화도 없고 애정도 없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겉으로 보면 엄연한 부부지만, 실질적으론 남남과 같습니다. 에베소교회의 신앙 상태가 이랬다는 겁니다.


[2] 에베소교회에 주신 말씀 : 권면, 경고, 약속 

주님은 이와 같은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안타까운 심정으로 계속 말씀하십니다. 

① 권면 : 추억, 회개

5절을 보시죠.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 ” 여기 보면 두 가지를 권면합니다. 먼저 생각하라(Remember)고 말씀합니다. 추억(追憶)하라는 겁니다. 어디서 떨어졌는지 ... 본래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는데, 언제부터 무엇 때문에 냉랭해졌는지 잘 생각해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첫사랑을 추억해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회개하라(Remember)고 권면합니다. 회개(悔改)는 방향전환 즉 유턴(U-Turn)입니다. 이제 돌이켜 잃어버린 첫사랑을 회복하라는 겁니다.

② 경고 : 촛대 제거

권면의 말씀을 주신 주님은 이어서 엄히 경고합니다. 5절(하). “ ...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만일 첫사랑을 회복하고 바른 신앙을 갖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겠다는 겁니다. 촛대는 교회를 말하죠. 결국 교회를 없애버리고 말겠다는 겁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모릅니다. 

실제로 그 후 에베소교회는 어떻게 됩니까? 한 때 교회가 부흥하고 성도들이 많은 축복을 받았지만, 끝내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지금 터키 에베소에 가 보면 어떻습니까? 고대 유적지를 보면 정말 놀라울 정도로 번영했던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터가 폐허가 된 채 덩그러니 남아 있습니다. 이제 터키는 기독교회가 발붙이기 어려운, 전 세계에서 가장 복음을 전하기 어려운 모슬렘 국가가 되어버렸습니다. 

촛대를 옮기는 일은 역사 속에서 비일비재했습니다. 북한의 경우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리던 평양! 지금은 교회가 다 사라지고, 선전용으로 세워진 교회가 두 개 있을 뿐입니다. 지하에서 신앙의 자유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북한의 성도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유럽의 교회가 그런 위기 가운데 처해 있습니다. 과거 유럽은 기독교가 융성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웅장한 교회당이 관광지로 전락해 있습니다. 어떤 곳은 술집으로 팔려 조롱을 당하고 있습니다. 양적으로 질적으로 점점 쇠락하고 있습니다. 반면 모슬렘이 갈수록 유럽을 뒤덮고 있습니다. 얼마 후면 유럽의 몇몇 나라는 모슬렘 나라가 될 것이라는 슬픈 전망조차 들립니다. 

프랑스의 어느 도시에서는 지자체에서 모스크 건축은 허가해 주면서 교회당 건축은 인가해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영국의 북부 아일랜드 어느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십자가 목걸이 착용하고 등교하지 말라고 금지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모슬렘의 스카프나 시크 교도의 팔찌 등은 허용한다고 합니다. 

지금은 유럽이 신앙이 좋던 조상들의 은덕으로 잘 살고 있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렇게 강성하던 로마 제국이 멸망한 역사를 생각하면 무섭죠. 여러분,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한국교회가 짧은 기간에 크게 부흥했지만, 근자에 들어 신앙이 형식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예전 같지 않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많습니다. 회개하고 첫사랑을 회복해야 할 때입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촛대가 옮겨질 수도 있습니다. 

③ 약속 : 영생의 축복

주님은 회개를 촉구하시지만, 어디까지나 사랑으로 하신 말씀이기에 이제 호소하는 심정으로 축복의 약속을 주십니다. 제발 회개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축복하시겠다는 겁니다.

7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낙원은 천국을 가리킵니다. 천국의 생명나무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영생의 축복을 누린다는 겁니다. 이것은 현재적, 미래적 의미를 모두 담고 있습니다. 즉 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영생의 기쁨을 누리고, 장차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을 향한 첫사랑을 회복하고 간직하면 모든 게 다 해결됩니다. 어떤 환경 조건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또 그러다 보면 하나님이 형통의 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생이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데 동분서주하고, 주님을 멀리 하고 세상과 짝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돌이켜 회개해야 됩니다. 그게 살 길입니다. 혹시 우리에게 꼬인 일이 있습니까? 주님을 향한 첫사랑을 회복하십시오. 그러면 모든 게 풀릴 수 있습니다.

최근 어느 가정을 심방하다 이런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 집사님이 어려서 수련회에 참석했다 큰 은혜를 체험했답니다.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심한 말더듬이 있었는데,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기도를 들으시겠지 하는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거짓말처럼 깨끗이 고쳐졌습니다. 본인도 주변 사람들도 깜짝 놀랐습니다. 그 후 타지에 가서 공부하고 사회생활하면서 교회는 계속 출석했지만 신앙의 열정이 점점 식어졌습니다. 그러다 40세가 넘어 실직의 시련을 당했습니다. 자신을 돌아보면서 모든 것 내려놓고 기도했습니다. 아무 것도 구하지 않고 그저 이렇게 기도했답니다. “주님! 신앙생활만 잘 하게 해 주세요!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첫사랑을 회복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러자 고난 중에도 마음에 기쁨이 솟아났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다시 취직하기가 어려웠지만 평소 선망하던 회사에서 연락이 온 겁니다. 아는 사람도 없고 이력서는 낸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래서 너무 감사해서 열심히 일한다고 간증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문제는 오직 하나입니다.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주님을 향한 첫사랑을 회복하고 그 추억을 늘 마음 속에 간직하고 살면 거칠 게 없습니다. 항상 기뻐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3] 항상 간직할 첫사랑의 추억 : 순수한 열정 

그러면 어떻게 첫사랑을 회복하고 늘 간직할 수 있겠습니까? 

① 구원의 감격 회복 :

첫사랑은 무엇보다 주님을 처음 만난 감격입니다. 그 감격이 상실되면 영혼도 죽습니다. 삶도 일그러집니다. 여러분, 다윗의 경우를 보십시오. 그가 목동 시절, 그리고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얼마나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했습니까? 그런데 왕이 되고 부요해졌을 때 오히려 큰 실수를 하지 않았습니까? 사무엘하 11장에서 보는 대로, 부하들은 전쟁터에서 피 흘리고 있는데 자기는 왕궁에서 낮잠이나 자다가 남의 아내를 범하고, 그것도 부족해서 죄를 은폐하고자 그 남편을 살해하고 ... 다행히 다윗이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회개합니다. 그가 눈물로 참회하면서 쓴 시가 시편 51편입니다. 거기 보면 다윗이 뭐라고 간구합니까? 시51:11~12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성령 충만과 구원의 감격을 회복시켜 달라는 기도입니다.

다윗이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구원의 감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시련 속에서도 구원자 되신 주님을 의지하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안일한 가운데 타락하고 범죄한 것은 구원의 감격을 상실하고 세상의 향락에 젖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입니까? 죄로 영 죽을 인생, 지옥 갈 인생, 세상의 풍파 가운데 망할 수밖에 없었던 인생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사랑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난 번 중국 스촨성에서 대지진이 났을 때 많은 일화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한 가지입니다. 구조대가 건물 잔해를 파헤치는데 한 여인이 무릎 꿇고 고개 숙인 채 죽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품 안에 갓난아기가 새근새근 자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옆에 핸드폰이 떨어져 있었는데 이런 문자가 찍혀 있었다고 합니다. “아가야! 네가 만일 살아난다면 이 엄마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잊지 말렴 ... ” 인간의 사랑 중에 모성애가 가장 위대한 것임을 증거하는 좋은 예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랑은 그 어떤 모성애보다 더 크고 귀한 것입니다. 그 사랑을 한 순간도 잊지 않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② 헌신의 열정 회복 :

우리가 주님을 만나 구원의 감격을 갖게 되면 자연히 따라오는 게 주님을 위한 헌신의 열정입니다. 이제는 주님 뜻대로 살겠습니다, 주님만 위해 살겠습니다, 주님 위해 죽겠습니다, ...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가면서 어느덧 헌신의 열정이 식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수제자였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그것도 세번씩 예수님이 보는 데서 말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를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저주하면서 예수님을 배반하는 베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주님의 시선은 정녕 사랑이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어떻게 합니까? 눅22:61~62 “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회개하고 돌이킨 것입니다. 이래서 베드로가 다신 산 겁니다. 

그 후 십자가에 달렸던 주님은 부활하셨고, 갈릴리 바닷가에 나타나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때 그가 뭐라고 고백합니까? 요21:15~18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때 베드로는 다시 헌신의 열정을 회복합니다. 그리고 나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마지막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합니다. 그가 이렇게 헌신할 수 있었던 에너지는 바로 주님을 향한 첫사랑이었습니다. 

③ 예배의 감격 회복 : 

첫사랑이 마음 속에 살아 있는 사람은 날마다 예배의 감격을 맛봅니다. 우리는 천국 가는 그날까지 언제 어디서나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 말씀과 기도, 찬송으로 주님을 만나고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개인적이든 공적으로든 예배의 현장마다 주님을 만나는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가 날마다 기뻐할 수 있었던 비결, 그가 장렬히 순교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예배의 감격을 통해 첫사랑의 추억을 간직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그가 빌립보 감옥에 애매하게 투옥됐을 때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매를 맞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한밤중에 일어나 예배합니다. 행16: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다른 죄수들이 들을 정도의 큰 소리로 찬송하며 기도하는 그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니다. 찬송합니다. 감옥이 예배의 현장이 된 겁니다. 그럴 때 감옥 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죄수들이 탈옥한 줄 알고 자살하려던 간수장을 살리고, 더 나아가 그의 가족에게 세례를 베푸는 기적의 역사가 벌어집니다. 마음속에 첫사랑이 살아 있어 예배의 감격이 있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놀라운 역사입니다. 

지난 주간 여러분이 기도해 주셔서 인도네시아 단기선교를 잘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가는 데마다 설교하고 강의하는 빡빡한 스케줄이라 사역만 하다 오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오히려 많이 배우고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잘 아시는 대로 인도네시아는 회교 국가입니다. 2억 명이 넘는 무슬림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기독교회도 나름대로 부흥하고 있고, 2천만 명의 성도들이 있습니다. 물론 개중에는 명목상의 교인들도 있지만, 이번에 방문한 교회들은 모두 부흥하는 교회들이었습니다. 그 중의 한 교회에서는 집회를 했는데, 설교를 하면서 오히려 나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들의 기도하는 모습, 찬양하는 모습이 너무 순수하고 열정적인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마치 한국교회의 70년대, 80년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 우리가 어느덧 이런 모습을 잃어버리고 있구나 ... ” 생각하며 마음이 아팠습니다. 정말 그랬잖아요. 우리가 주님을 처음 만났을 때 구원의 감격에 눈물을 흘리고, 밤새 기도하고 찬송하고, 고난 받고 핍박을 당해도 기뻐하고, ...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축복받고 풍요로워졌는데, 오히려 영적으로 나태해지고 감격을 잃어버리고 ... 이게 우리의 모습이라면 분명 회개하고 첫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번 일정 중에는 무슬림 개종자 세례식에 참여한 일이 있었습니다. 선교사님이 직접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없으니까 제자들을 키워서 그들로 하여금 회교 지역으로 깊숙이 들어가 복음을 전하게 해서 한 명 두 명 얻은 영혼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은밀한 장소에 모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신앙 때문에 회교 동네에서 쫓겨난 분들도 있었습니다. 100km 떨어진 곳에서 온 분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이름과 얼굴을 공개할 수 없지만, 26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죠. 회교도 한 영혼이 예수 믿고 세례 받는 것은 우리 가운데 10명, 100명이 세례 받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세례 받기 전에 어떻게 주님을 만났는지 간증하는 것을 들으면서, 그들이 고난과 핍박 중에도 기뻐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힘이 바로 그들 마음속에 불타는 첫사랑 때문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이런 첫사랑이 생생하게 간직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아련한 기억으로 점점 잊혀져가고 있습니까? 어느 쪽이든 바로 그것이 우리의 신앙 상태입니다. 주님이 우리 신앙을 평가하시는 척도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 자신의 첫사랑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강원도 해변에서 처음 구원의 주님을 만났을 때 너무 감격스러워 모래사장에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손가락으로 써내려갔던 그 추억, 처음 성령의 은사를 받고 밤새 기도하며 기뻐했던 그 추억, 핍박 가운데 눈물로 감사하며 주님 위해 살겠다고 다짐했던 그 추억 ... 이런 추억들이 언젠가부터 내 마음속에서 흐려지고 있다는 생각에 회개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첫사랑의 추억이 있습니까? 그 추억을 날마다 마음 속에 되새기며 순수한 열정으로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은 주님 한 분으로 만족하고 주님 한 분 위해 살아가는 복된 삶이 될 줄로 믿습니다. 아무쪼록 주님을 향한 첫사랑의 추억으로 늘 기뻐하며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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