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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의 투자 (눅 1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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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투자 (눅 15:11~24)


아들은 자유를 얻기 위해 아버지에게 재산을 요구했습니다. 

정신의학자 에릭 린트맨 박사는 수많은 사람을 관찰해본 결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위기게 봉착하면 한 85%가 되면 나쁜 습관을 고치고 소원했던 부부관계가 회복되며 미지근해진 믿음이 더 뜨거워질 뿐만 아니라 시관과 물질을 절약하는 전기가 마련된다고 보고합니다. 

미국에 NASA 본부에서 우주선을 발사하고 난 후에 우주인들이 계속해서 좁은 공간에서 장기간 동안 있다보면 작은 일로 신경을 쓰며 서로 싸운다고 합니다. 그 때 NASA 본부에서 일부러 우주선의 일부를 고장 내서 궤도를 이탈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안에 있던 우주인들이 정신을 다하여 다시 마음을 하나로 뭉쳐서 다시 궤도에 들곤 한다고 말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람이 당하는 고난도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 가운데서 중단한 일부분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는 빗나간 자식을 위하여 엄청난 투자를 하고 계시는 아버지의 사랑과 지혜가 가장 잘 나타난 아름다운 비유입니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자신의 분깃을 요구했습니다.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누가복음 15:12) 

아버지는 자식에게 자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신명기 21장 17절에 보니까 유산의 분배는 장자에게는 2/3를 주고, 차자에게는 1/3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유산을 분배하는 시기는 아버지가 운명하기 바로 직전에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은 아버지가 건강하게 살아계시는데 자신의 분깃을 요구했습니다. 이 아들이 아버지에게 미리 유산을 요구한 이유는 아버지로부터 독립해서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아버지로부터의 독립과 자유로운 삶에 대한 생각과 행동이 바로 근본적인 죄입니다. 우리는 탕자의 비유를 읽을 때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의 가서 허랑방탕하며 재산을 낭비해버리고 쾌락에 빠진 것만 죄라고 보기 쉬운데 그것은 부차적인 죄입니다. 이 아들의 근본적인 죄는 아버지로부터 독립해서 살려고 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살아보려고 했습니다. 

원죄란 하나님께로부터 독립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원죄란 내 인생의 주인이 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나뭇가지가 잘려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나뭇가지가 원 둥치로부터 자유하고 독립하는 순간부터 모든 자원은 공급이 중단이 되고 죽음이 찾아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하나님을 항해서 등을 돌리는 순간부터 마귀의 노예, 죄의 노예, 사망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자유는 노력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선물입니다. 

희랍신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배들이 해협을 통과하여 해협중간쯤 가면 물속에서 요정들의 노래 소리가 들린다고 합니다. 그 요정노래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생겨서 도저히 참지 못합니다. 그 해협을 통과하는 배의 모든 사람들은 물로 뛰어들어서 빈 배만 떠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선장이 반드시 그 해협을 통과는 해야 하는데 죽지 않고 통과하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를 생각해냈습니다. 모든 선원들에게 철을 녹여서 귀를 막게 했습니다. 요정소리를 듣지 못하게 만들고 자기 귀만 막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선원들에게 해협을 다 통과할 때까지 제일 가운데 있는 기둥에 자신을 꽁꽁 묶어 놓고 어떤 손짓발짓해도 풀어주지를 말라고 출항명령을 내렸습니다. 모든 선언들은 귀를 막았고 안막은 사람은 선장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해협의 중간에 가니까 요정의 노래 소리가 들리고 선장이 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 때문에 견디지 못했습니다. 선장은 발버둥치며 자신을 빨리 풀어 달라고 소리쳤지만 선원들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무사히 이 배는 해협을 통과했고 단 한 사람도 죽지 안했다는 신화가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이 선장이 가운데에 있는 기둥에 자신을 꽁꽁 매 두었기 살 수 있었습니다. 선장이 기둥에 매인 것과 같이 우리는 십자가에 완전히 매일 때 사망의 죄와 이 세상으로부터 자유 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역설적입니다. 철저하게 십자가에 매일 때 참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2) 

이 말씀은 완전히 진리에 매일 때 모든 자유를 누릴 것을 약속합니다. 우리는 참회에 매일 때 거짓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은혜에 매일 때 육체의 욕심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생명에 매일 때 사망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자유는 노력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선물을 받은 사람은 자유한 사람입니다. 자유가 있는 사람은 감사한 사람입니다. 감사가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둘째 아들은 한계 속에서 새롭게 깨달을 기회를 얻었습니다.

아버지는 둘째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면 먼 나라에 가서 탕진해 버릴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어떤 놈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무엇 때문에 그 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었을까요? 찰스 스윈돌 이란 사람은 이 물음에 대해서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아버지가 이 예상하지 못했거나 거절할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이 아들의 되어질 행보를 미리 다 아시고 처참한 실패와 배신과 배고픔과 서러움을 통해서 올바른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 피땀 흘려서 모은 재산을 아낌없이  둘째 아들에게 주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는 투자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나누어 주시는 재산을 다 받아서 도망을 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먼 나라에 가서 재미있게 허랑 방탕하면서 자유인이 된 것같이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갑자기 안 좋은 일이 생겼습니다.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서 궁핍한지라” (누가복음 15:14)

  그는 너무 배가 고파서 쥐엄 열매로 주린 배를 채우고자 했습니다. 쥐엄 열매는 사람이 먹는 음식이 아니라 짐승을 먹이는 사료입니다. 그는 자유하기 위해서 집을 떠났으나 빈곤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존귀하게 되기 위해서 아버지를 등졌으나 동물의 차원으로 전략해버렸습니다. 아들은 모든 것을  상실했습니다. 아버지를 잃음으로 아들의 위치와 부귀와 건강과 소망과 돈과 친구를 다 잃어버리고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끝은 아닙니다. 

  인간의 한계는 곧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주안에서의 모든 불행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동기가 됩니다. 고난을 통해서 범죄 한 자가 회개하게 되고, 멀리 떠난 자가 돌아오게 됩니다. 잠자는 자를 깨우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축복은 고난의 보자기에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내게 온다는 말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 안에서의 고난은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기회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징계가 없는 자식은 사생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회개의 기회를 붙잡아야 합니다. 

  성경에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충분히 살리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지혜는 늘 자신의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왔다가 빨리 지나가는 것입니다. 기회가 나를 향해서 등을 돌리기 전에 그 길을 붙잡는 사람이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회개의 기회를 붙잡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우편과 좌편에 두 사람이 같이 죽었습니다. 그날 십자가에 집행되는 사람은 세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있는 강도 두 명이 다 예수님을 욕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운명하기 전에 일곱 마디를 하나님께 들었습니다. 그 말씀을 가만히 듣다 보니까 우편에 있던 강도는 소문에 듣던 대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강도는 고개를 돌려서 주님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누가복음 23:42) 

  그때 그 말을 들은 순간 주님은 강도를 바라보며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누가복음 23:43) 

  우편에 있던 강도는 마지막 순간에 기회를 붙잡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좌편에 있던 강도에게도 똑같은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사람의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기회를 붙드는 사람과 기회를 놓치는 사람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는 기도해야할 기회가 매일매일 주어집니다. 나와 가정을 위해서, 국가와 민족과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빠서 기도를 못한다고 말합니다. 바빠서 기도 못한다는 말은 수없이 들었지만, 바빠서 밥도 못 먹는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할 것을 다 하면서 바빠서 기도를 못한다고, 바빠서 성경을 못 본다고 핑계를 댑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바빠서 기도 못 하고, 바빠서 성경 못 본다는 말은 하지 말아야합니다. 

  우리에게 효도할 기회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입니다. 죄송한 말이지만 저는 김희갑 씨의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노래가 나오면 웁니다. 부모님을 섬길 수 있는 기회는 다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 기회를 놓치고 난 후에 평생 동안 울 수밖에 없는 불효자가 되지 말고 기회를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화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그 기회가 지나고 난 다음에는 화해하기가 어려워집니다. 내가 먼저 남을 향해서 손을 내밀 수 있는 믿음의 승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탕자는 동물의 사료인 쥐엄 열매를 먹으면서 회개를 합니다.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누가복음 15:17)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누가복음 15:20)

회개는 뉘우치며 방향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뉘우치고 방향을 전환해야 합니다. 유다는 예수를 팔아먹고 난 다음에 뉘우쳤지만 방향을 전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를 안 한 것입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뉘우치며 방향을 전환했습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성경을 보면 스피커에서 쾅쾅 나는 것 같이 들리고 있습니다. “돌아서라! 빨리 돌아서라!”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짖는 절규 소리가 성경 속에서 들려옵니다. 
  회개의 궁극적 의미는 돌아가는 방향전환입니다. 방향 전환 없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믿을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나 예수님께서 첫 번 외친 말씀 뿐 아니라 성경 곳곳에서 회개에 대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마가복음 1: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이사야 1:15)
“여호와께서 말씀 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 (이사야 1:18) 

  이처럼 아들이 방향을 전환했습니다. 그 순간 집에서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한 걸음만 하나님께 다가가면 하나님은 백 걸음 달려오십니다. 아들이 아버지 보기 전에 아버지가 아들을 봤습니다. 아들은 천천히 걸어왔으나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서 부리나케 달려갔습니다. 아들이 잘못했다고 고백하기 전에 더러운 입에 대고 아버지는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부자관계에 의해서 얻어진 결과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를 투자하신 하나님께 충성하십시오.

  하나님 아버지 먼저 찾아오시는 사랑 때문에 우리는 죄와 저주와 절망과 사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 이유가 우리 마음속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형편과 처지를 초월하여 행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죽기까지 충성해야할 이유가 분명한 아버지의 종입니다. 
  에딘 버러의 나이 많은 목사님이 계십니다. 부인은 일찍 돌아가시고 자식들은 출가해서 애완용 개와 목사님이 살았습니다. 개는 목사님이 신방 갈 때마다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은 이 개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몇 달 후에 목사님이 개를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교인들이 개를 데려가려고 해도 좀처럼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개는 혼자 빈 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얼마 후 새로운 목사님이 오시니까 개는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그 이후 아무리 찾아도 개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집사님이 그 개를 봤는데 목사님 무덤가에 쭈그리고 앉아있었습니다. 그래서 집사님들이 개집을 들고 무덤가에 갔습니다. 그리고 교인 중에 빵 집하는 분이 빵하고 우유를 잘 주었었는데 꼭 아침과 저녁으로 그 집에 가서 얻어먹고는 얼른 목사님 묘 옆에 앉아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개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두 번 빵을 얻어먹었는데 주일날은 안 온다고 합니다. 개도 성수주일을 했던 모양입니다. 주일에 바빠서 교회에 못 오시는 분들은 알아서 생각하십시오. 그런데 그 개가 그렇게 3년을 살다가 얻어먹으러 안 오기에 찾아가보니까 죽어있었답니다. 우리는 개에게 배울 것이 참 많습니다. 

  이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제일 좋은 옷을 내다 입혔습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워 권리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발에 신을 신겨 주었습니다. 노예에게는 신발이 없는데 아들의 위치를 회복시켜 준 것입니다. 또한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어거스틴은 송아지를 예수님의 그림자라고 말씀합니다. 목수 예수가 일을 가다가 너무 피곤해서 기지기를 하고 있는데 석양이 비치는데 그것의 그림자가 십자가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은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19:10)

  우리는 모두 탕자 같은 사람인데 하나님을 찾아 왔기 때문에 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누가복음 15:24)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품속에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아버지는 돈을 투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독생자를 투자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투자 때문에 우리가 영생을 얻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실을 일평생 동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한 투자 때문에 자녀된 우리가 참 사람 되어 돌아온 사실을 기억합니다. 주님께서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 왔다는 말씀을 기억합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돈을 투자했지만 만군의 하나님은 예수를 투자함으로 우리가 자유인이 되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은혜와 사랑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께 죽기까지 충성할 이유와 감사해야할 이유, 헌신해야할 이유가 분명합니다. 우리에게 종이 된 은혜를 허락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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