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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질 수 있는 용기 (창 13:1~9) - 아브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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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수 있는 용기 (창 13:1~9) 


스승이 제자들에게 도를 설법하다 재채기를 하였습니다. 설법을 듣고 있던 제자들은 스승께 “오래 사십시오.” 라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옛날 인도 사람들이 하던 관습으로 가까이 있는 어른이 재채기를 할 때 그렇게 인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스승은 그렇게 인사하는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자네들은 내가 재채기를 했을 때 그렇게 인사하면 그 인사 때문에 내가 오래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에 스승은 “그렇다면 앞으로 자네들은 나에게 그런 인사를 하지 말게.” 라고 말했습니다. 이때부터 수행제자들은 스승에 대해서 또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재채기를 할 때 그런 인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신도들이 반대를 하고 일어났습니다. 신도들은 수행제자들이 재채기를 하면 늘 “오래 사십시오.” 라고 인사하였고, 그 인사에 수행제자들도 “오래 사십시오.” 라고 인사했습니다. 그런데 신도들은 인사를 했는데 수행제자들은 그런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또 스승이 재채기를 해도 제자들이 그런 인사를 하지 않자, 신도들은 그것은 예가 아니라고 항의했습니다. 스승은 그 항의를 듣고 가만히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자들에게 자기가 이전에 내렸던 그 지시를 번복했습니다. “앞으로 자네들은 다른 사람이 재채기를 하면 ‘오래 사십시오’ 라고 인사를 해도 좋네.” 

참 쉽지 않는 일입니다. 스승은 다른 사람이 재채기를 할 때 그런 인사를 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고 부질없는 일인 줄 뻔히 알았습니다. 그러나 많은 신도들이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길 원하기 때문에 자기 자존심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내린 지시를 번복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번복할 때에도 그 스승은 여전히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고 그것 때문에 오래 살고 건강한 것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 알면서도 그렇게 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사람이 바로 어른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필요한 사람들이 바로 이런 어른입니다. 나라에도 이런 어른이 필요하고 사회에도 이런 어른이 필요하며 점점 위기가 높아지는 가정들에게 필요한 분들이 바로 이런 어른입니다. 남편이 이런 어른 노릇을 하든지 아내가 그런 노릇을 하든지 안 되면 자식이라도 이런 어른 노릇을 해줄 때 그 가정은 평안할 수 있고 참으로 아름다운 가정이 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은 아주 오랫동안 함께 살았습니다. 바벨론에서 출발할 때부터 북쪽의 하란이라는 곳에 올라갈 때까지 같이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이자 롯의 할아버지가 거기서 돌아가셨으므로 거기서부터 다시 가나안으로 이주를 하였는데 그렇게 먼 길을 같이 갔고 가나안에서도 같이 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두 집안의 재산이 늘어났습니다. 그들의 재산이란 가축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집안 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가축들을 제대로 먹일 풀이 없었기 때문에 목동들이 자주 다투게 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사람들은 항상 팔이 안쪽으로 굽게 되어 있으므로 내종이 이야기하면 남의 종 이야기는 듣지 아니하고 그렇다고 이야기하게 됩니다. 

양쪽의 이야기를 다 들으면 좋겠지만 인생이란 그렇게 잘 되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들 사이에 금이 가게 생긴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많은 세월을 함께 했습니까? 기쁨과 슬픔, 행불행을 함께 했고 서러움과 즐거움과 모든 것을 함께 한 삼촌과 조카의 아름다운 관계였지만 그 목동들로 말미암아, 목초지로 말미암아 그 관계가 깨어질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여러분도 경험해보셔서 아시겠지만 사랑을 만드는 것, 좋은 우애를 갖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아름다운 정이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가끔 남자들은 아내가 죽으면 화장실 뒤에서 빙그레 웃는다고 이야기하지만 지금까지 수십 년 맞추어도 그렇게 맞추기 힘든데 새로운 사람을 만나 다시 그렇게 맞추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좋은 정이란 만들기 정말로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좋은 관계를 깨뜨린다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런데 아름다운 관계, 우애, 우정, 좋은 정이라는 것이 말 한마디로 깨어집니다. 그렇게 절친하던 친구사이가 완전히 무너지고 갑자기 원수가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것은 우리들에게 현실적인 문제이고 실전의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회사에서 근로자와 사용자간의 문제, 정치하는 사람들 간에 안타까운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본문에서는 이런 위기에 다다르자 삼촌이 나서서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말자(8절) 라고 원론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원론만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실존의 문제까지 이야기했습니다. 누구든지 원론의 문제는 알고 있지만 실존의 문제로 뛰어들지 못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것을 뛰어넘어 우리는 한 믿음의 가족들이 아닌가 다투지 말자고 이야기하면서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9절) 라고 말했습니다. 좋은 것은 조카에게 주고 남은 것을 자기가 하겠다고 하니 얼마나 위대합니까? 

목축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생명만큼 귀한 것이 목초지입니다. 목초지가 없으면 재산이 다 날아가므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인데 아브라함은 이 목초지를 조카에게 양보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망할 각오, 죽을 각오를 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어른들만 계신다면 나라는 문제가 없습니다. 어느 가정도 문제가 없습니다. 이 정도만 하면 어떤 문제가 있어도 절대로 무너지지 않습니다. 나라도 마찬가지로 이런 어른 몇 분만 계시면 끄떡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일을 통해서 힘을 기울여서 알아야할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아브라함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망할 각오, 죽을 각오를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는가 이고, 두 번째는 그렇게 해서 정말로 망했는가 입니다. 죽을 각오로 내가 죽겠다고 하고, 망할 각오로 내가 망하겠다고 했을 때 과연 우리 하나님은 그 사람을 그렇게 죽도록, 망하도록 그냥 내버려 둘 것인가? 두 가지를 함께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은 어떻게 그런 용기를 가지게 되었는가를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바른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 바른가 라는 것인데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과 바른 것을 착각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바른 것이라고 생각하면 문제가 생겨납니다. 아브라함은 먼저 하나님 마음을 알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일에 있어서 무엇을 원하는 것일까를 생각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평화를 원하시고, 화목을 원하고 사랑을 원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양보하라는 하나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바른 것이고 옳은 것이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나의 이익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조카를 먼저 생각하고 조카에게 양보하고 이웃을 생각하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택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아브라함은 알았습니다. 얼른 보면 잘 모르겠지만 길게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안목을 가지게 되면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부디 여러분들이 이런 어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걱정이 없습니다. 이 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 땅에 예수 믿는 사람들만 그렇게 되어도 이 땅은 걱정이 없습니다. 이 나라는 걱정이 없습니다. 나에게 어떤 손해가 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바른 것이라는 것을 아브라함은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양보할 수 있었습니다. 위대한 신앙인들이 정말로 잘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늘 한결같이 위대한 신앙인들은 이렇게 했습니다. 

다윗은 자기를 그렇게 쫓아다니던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인간인지라 찌르고 싶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몇 년 동안 쫓겨 다니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고, 죽을 뻔 한 기회가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이제 찌르기만 하면 곧 끝날 수 있을 것 같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억울한 소리를 더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당신의 종이므로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하나님께서 다 조치하시기 때문에 자기가 나설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마음도 많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이 바른 것임을 알고 그쪽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얼마나 높여주셨습니까? 

또 다시 한 번 더 그런 기회가 있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음보다 더 많은 갈등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에 또 다시 생각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바라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에 따를 것인가를 생각하였고,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래서 창과 칼을 던졌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다윗을 얼마나 좋아하십니까? 

우리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오셔서 마지막까지 고뇌한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만 고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계속해서 고뇌했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죽지 않으면 안 되는가? 내가 꼭 십자가에 죽어야 하는가?’ 인간 예수이기 때문에 그런 고뇌를 하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에 지금까지 했던 모든 고뇌를 모아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기 원합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다른 것을 선택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사람과 함께 살아가다보면 예의를 지키기 참으로 어렵습니다. 너무 친하다 보면 그만 예의를 벗어나게 되고, 너무 조심하다 보면 예의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것이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인생인지라 이기성이 많습니다. 나 중심적이고 내 이익을, 내 이해관계를 먼저 생각하는 경향이 모든 사람들에게 다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것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요? 자기 이익을 챙기고 이기적인 사람을 보면 얼마나 추합니까? 이것을 뛰어넘어가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인생 살다보면 아무리 온유한 사람도 화내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고함 한 번 지르고 큰소리치면서 마음대로 말하고 싶고 결과가 어떻게 되든 간에 뒤집어 버리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결과를 보면 참으로 추합니다. 의로운 분은 덜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성내는 것은 영 좋지 않습니다.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것,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그런데 이것을 실천하려고 하면 정말로 어렵습니다. 자꾸 악한 것이 생각나고 미움과 증오가 생겨나고 자꾸 오해하고 좋지 않은 쪽으로 생각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참는 것 또한 어렵습니다. 인내만 제대로 해도 정말로 성자 비슷한 지경까지 올라갈 수 있는데 참 어렵습니다. 견디는 것도 정말로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 인생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가능한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사랑이 있으면 가능합니다. 사랑이 있으면 양보할 수 있고, 참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 있을 때 바른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부탁하십시오. ‘하나님, 저에게 사랑을 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주십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마음대로 만들지 못합니다. 어느 누가 남편을, 아내를 사랑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선물을 덜 받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부탁해보십시오. 사랑이 있으면 얼마든지 참을 수 있고 화를 내지 않을 수 있고, 무례히 행치 아니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살 길을 떠나서 항로를 벗어난 인생들, 아무리 돌아오라고 불러도 돌아오지 아니하는 인간들을 보시고 너무 화가 나시지만 그 책임을 인간들에게 돌리지 않으시고 당신이 지기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선택하셨습니다. 당신이 대신 죽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예수가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대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모든 인류들을 다 없이 하고 새로운 존재를 만들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은 그가 찔림은 우리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 죄악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랑이 있으면 바른 것,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 지식이 아닙니다. 세상 판단이 아닙니다.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선택하면 그 뒤에는 반드시 책임을 지십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선택하겠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놀라십니다. 

위대한 양보는 사랑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내 옆의 사람을 사랑할 때, 하나님을 사랑할 때 내가 양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어른들이 되셔서 이 나라를 끌어가시고 이 사회를 끌어갔으면 좋겠습니다. 내 이익은 조금 뒤로 하고 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 불쌍한 사람을 챙기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좋아하시겠습니까? 사랑이 있으면 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바른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절대로 그냥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의 자식을 잘못되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십니다. 

아브라함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이집트에 갔을 때 큰 실수를 하였습니다. 아내에게 오빠라고 부르라고 말했으므로 바로가 정당하게 아내를 데리고 갔을 때, 누구에게 하소연하지도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나에게서 영원히 떠나가게 될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그 광경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아내를 빼앗긴 아브라함은 담벼락에서 쪼그리고 앉아 손가락만 빨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저녁때가 되어 군사들이 아브라함을 찾아왔습니다. 담벼락에 쪼그리고 앉아서 손가락을 빨고 있던 아브라함은 사지를 벌벌 떨면서 끌려갔습니다. 여전히 아내생각보다 자기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군사들에 이끌려 들어가니 바로가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너의 하나님이 나에게 나타나서 나를 죽이려고 하였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때까지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성경에 그가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나타나신 것이었습니다. 바로는 “네가 여동생이라고 해서 데리고 가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너 그 여자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면 너뿐 아니라 너의 집안까지도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빨리 데리고 가라” 라고 말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더 놀랐습니다. 

그는 우리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임을 몰랐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가라고 하셨을 때에도 그냥 그런 하나님인줄 알았습니다.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셨을 때에도 그냥 그런 하나님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그렇게 자기와 함께 하시고 자기를 챙기시고 자기의 위기를 당신의 위기로 생각하시고 바로를 혼줄 낸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믿기는 믿었지만 이런 하나님인줄 몰랐던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이 기회에 그런 하나님을 알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경제문제, 자식문제도 다 챙기시는 하나님인줄 몰랐습니다. 이렇게 이것까지 챙겨주시는 하나님인줄 몰랐습니다. 그제야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되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인데 어떻게 믿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나에게는 이 하나님만 있으면 아무것도 없어도 되니 땅도 가지고 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진정 하나님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하나님이 챙겨주십니다. 요즘 자녀교육이 많이 힘든데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내 아들 딸이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므로 챙겨 주십니다. 당당히 믿으십시오. 회사를 경영하심에 무엇을 그리 걱정하십니까? 힘을 쓰기는 하되 회사가 내 회사이기 전에 하나님의 회사라는 것을 생각하시고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십니다. 질환이 있습니까? 내 질환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질환입니다. 내 속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질환에도 주인이고 건강에도 주인입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 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인간인지라 가끔씩 흔들리기도 하고 ‘목사님이 직접 챙기지 않으시면 어떻게 합니까?’ 라고 걱정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데 여러 차례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내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이므로 너가 없어도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이 교회를 챙기십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어떻게 챙기셨습니까?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상가에서 시작하여 여기까지 오기까지 누가 했습니까? 하나님께 하셨습니다. 목사는 저 뒤에서 그저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면 됩니다. 

여러분, 아브라함이 죽을 작정, 망할 작정을 했을 때 정말로 망했습니까? 정반대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조그마한 집안 하나가 부족국가를 이룰 정도로 크게 번창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얻기 위해서는 버릴 줄 알아야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버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믿을 때 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을 때 양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하나님이고 저것도 하나님이고 다 하나님입니다.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주실 수 있는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누가 푸는가 입니다. 어른이 풉니다. 아이들은 문제를 만듭니다. 다른 사람이 어찌되든 간에 나의 이익이 되기만 하면, 나의 도움이 되기만 하면 문제를 만듭니다. 위기를 만듭니다. 나라가 어떻게 되든 간에, 사회가 기업이 어떻게 되든 간에, 다른 사람이 위기로 말미암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지언정 나의 이익이 되기만 하면 아이들은 웃고 즐깁니다. 아이들은 나의 이익을 위해서 문제를 부추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이들입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위기를, 문제를 풉니다. 나라에 위기가 있을 때 묵묵하게 기도하고, 사회가 가정이 위기가 있을 때 어떻게 하든 간에 풀려고 합니다. 내가 바보가 되고, 내가 못난 사람이 되고, 내가 정말로 모자라는 사람이 될지라도 어른들은 풀어갑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풀 때 그냥 풀리지 않습니다. 피를 흘려야 풀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피를 흘리지 않았습니까? 물질의 피를 흘려야지, 수고의 피를 흘려야지, 손해의 피를 흘려야지 가능합니다. 수치와 모욕의 피를 흘리고, 못난 사람이 되는 피를 흘릴 때 문제가 풀립니다. 그냥 어른 노릇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누가 이것을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믿는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물질의 피를 흘려도 못난 사람이 피를 흘려도 우리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흘릴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멋진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집트 들어갈 때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자기가 살려고 아내를 동생이라고 말하는 그의 모습은 얼마나 초라하고 비굴하고 치사했습니까? 그런데 조카를 대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얼마나 멋집니까? 어디서 이런 당당함이 나왔을까요? 하나님을 믿을 때 그렇게 됩니다. 

여러분, 이런 어른이 되십시오. 이 나라의 평화를 지켜나가고, 이 사회에, 여러분들이 경영하시는 기업에 그리고 가정에 하나님께서 평화를 지켜주시도록 여러분들이 어른이 되십시오. 그렇게 내가 피를 흘리고 내가 양보하고 희생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아브라함과 같이 위대한 사람으로 세워주실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 5장 6절은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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