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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드온③ : 보리떡 영웅 (삿 7: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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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드온③ : 보리떡 영웅 (삿 7:1~14)


I. 두려워 떠는 자는 가라

사사 기드온을 통해서 은혜를 나누는 세 번째 시간입니다. 

1. 첫 번째 시간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는 말씀을 상고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장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가장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그를 부르며 위로하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포도주 틀 속에 숨어 밀 타작을 하고 있는 기드온을 찌질이라고 부르지 아니하시고 "큰 용사"라고 부르신 것은 하나님께서 바로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큰 역사를 이루시겠다는 약속이었지요. 하나님께서 네 힘으로 네가 가라. 그랬을 때에 내 힘이 어디 있습니까? 출애굽 가운데 함께 하셨다고 한다면 오늘은 왜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묻는 기드온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리리 이것이 너의 힘이 아니겠느냐. 내가 너와 함께 하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겠느냐. 내가 나와 함께 하는 것 이것 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2. 두 번째 시간 "표징을 보여주소서"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기드온은 자신을 찾아오신 분이 하나님 되시고 정말 전쟁을 승리하게 하실 것인지 표징을 보여달라고 요청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두 가지 표징에 응답하십니다. 

첫째 기드온이 제물을 준비하여 왔을 때에 그 제물을 바위 위에 쏟으라 말씀하시고 지팡이를 내미니 지팡이에서 불이 나온 것이 아니라 바위에서 불이 나와 그 모든 제물을 불살라 연기로 하나님께서 받으셨습니다. 아니 바위에서 불이 나온다면 지팡이는 왜 필요했던 것일까요? 부싯돌 역할을 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지팡이는 기드온이고 반석되신 하나님께서 불을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너는 지팡이 역할만 하라는 것입니다. 순종하여 내밀기만 하고 가기만 하면 불은 하나님이 내실 것이라는 약속이었지요. 

둘째 표징은 양털 시험이었습니다.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는 시험 또 양털에만 이슬이 안 내리는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온 땅에 모든 은총을 다 거두어 들이면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이슬, 하나님의 은총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시고 또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에 이슬을 내리면서도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에게는 이슬, 하나님의 은총을 거두어 가실 수 있는 분임을 기드온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 시간에는 세 번째 시간 보리떡 영웅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 7장의 문이 열려지면 이스라엘과 미디안의 한판 큰 전쟁을 준비하는 장면이 열려집니다. 이 전쟁의 참전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각 지파에서 몰려든 군사는 3만 2천명 정도, 8장 10절에 미디안 연합군의 숫자는 13만 5천명이 모여 있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이스라엘은 한 명의 군사라도 더 모아야 할 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4대 1로 싸우고도 적은 1만 5천명이 남습니다. 만약 이때 이스라엘 군대의 탁월한 병기가 있던지 유리한 고지라도 점령하고 있었다면 아마 해볼 만한 전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디안 진영에서 울려오는 요란한 낙타 발 발굽소리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낙타새끼 한 마리가 없었습니다. 턱없이 부족한 군대 숫자, 적은 기마대 낙타부대의 완전무장, 아군은 변변한 무기 하나가 없는 오합지졸이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진을 친 곳이 「하롯샘 곁」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요. 
하롯이란 떨린다. 두려워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단히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요. 이스라엘 군대는 이번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번 전쟁에서 대부분의 군사들이 전사할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두려워 떨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두려움이란 장소, 떨림이란 장소에 모여 있는 국민들, 얼마나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미디안 사람들은 얘들 데리고 싸우는 전쟁이라고 생각했던지 별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습니다. 급조된 이스라엘 군대는 겁에 질려 있는 장면을 우리에게 그림처럼 묘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상황을 어떻게 판단하고 있습니까?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다" 아니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모인 이스라엘 백성이 자살 특공대로 모인게 아닌데 말이예요. 

4대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 숫자가 너무 많다는 이 말씀의 의미를 하나님은 곧이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2절 하반절입니다. "숫자가 엇비슷하고 무기가 서로 대등해서 이겼다면 이스라엘이 스스로 자랑하기를 자기들이 용맹스러워 적을 무찔렀다고 말하지 않겠느냐. 착각하지 않겠느냐." 그 얘기이지요. 이스라엘은 지팡이 노릇만 하면 되는 겁니다. 불은 바위되신 반석되신 하나님이 친히 내리실 것입니다. 

이 전쟁이 갖는 의미 성격을 분명히 하고 넘어가자는 것입니다. 
이 전쟁은 우선 하나님의 전쟁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싸우실 것이라는 것이지요. 이 전쟁은 이스라엘이 우상을 처단하는 자기 회개의 싸움이면 이스라엘의 전쟁으로서는 족하다는 것입니다. 이 가나안 땅의 주인이 하나님 되심을 온 우주의 주인이 하나님 되심을 보여주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스라엘은 섯부른 숫자로 하나님의 싸움을 가로막지 말라고 하나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우리는 숫자 싸움을 하려고 합니다. 무기 싸움, 전략 싸움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신앙 싸움이다. 너의 싸움은 거룩의 싸움이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고 믿고 깨끗이 받아들이고 따르느냐. 하는 순종 싸움이다.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다고 말씀하실 때에 기드온은 아마 자기 귀를 의심했을 것입니다.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적다는 말씀을 하나님이 역설적으로 말씀하신 것인지 아니면 너를 쫓는 적의 숫자가 너무 많다는 말씀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인지 아마 헷갈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곧바로 감군 명령을 바로 내리십니다. 

3절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을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만 명이었더라" 조기 제대. 명예 제대 시킨 사람이 ⅔가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신명기 20장의 규정된 이스라엘 군 징집 원칙이 나옵니다. 

1. 전투개시 전에 제사장이 먼저 군사들을 상대로 이 전쟁이 여호와의 전쟁임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아라. 용기를 가지라고 격려를 합니다. 

2. 그러고 나면 군 지휘관이 모집된 군사 가운데 몇 사람을 돌려보냅니다. 
① 새 집을 짓고 낙성식을 하지 못한 자 
② 포도원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어보지 못한 자 
③ 약혼하고 결혼식을 앞두고 있는 자 
④ 네 번째가 바로 마음이 약해서 두려워 떠는 자를 귀가조치시키도록 율법이 규정하고 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두려워 떠는 자는 가라」라고 외쳤지만 내심 모든 군사들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우리는 한 사람도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겠습니다." 용맹을 보여 주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만 이천명 ⅔가 넘는 사람이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4대 1의 싸움은 13대 1로 악화되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군인을 돌려보내는 과정 속에서 우리의 눈을 주목시키는 한 단어가 3절에 나옵니다.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을 떠나 돌아가라"고 얘기했습니다. 여기 "길르앗 산을 떠나" 이 말은 길르앗 산을 넘어서 혹은 길르앗 산을 버리고 이런 뜻입니다. 아! 지금 이스라엘이 주둔하고 있는 하롯샘이 길르앗 산에 위치하고 있었구나 라고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그 얘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주둔하고 있는 하롯샘은 요단강을 중심으로 요단 서편에 위치하고 있고 길르앗은 요단 동편 저 본부 바로 앞에 우뚝 솟아 있는 산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소리일까요? 여기 길르앗 산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고지를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끝까지 언제나 사수해야 될 요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길르앗 산을 떠나"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존재 자체가 이 땅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포기하고 떠나가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이스라엘 백성이 되기를 포기하고 떠나가라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이스라엘이 앞으로 가나안 땅에 살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중차대한 싸움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전쟁의 성격 중요성을 모르고 두려워 떠는 자들은 깨끗이 포기하고 떠나가라. 이런 얘기이지요. 이 싸움은 누구 하나 돌아가거나 포기해도 좋은 싸움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사활이 걸린 전쟁이었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 유명한 삼일 전쟁 얘기를 아시지요. 
300만 이스라엘이 1억 아랍과 전쟁이 벌어졌을 때에 미국 대학교 기숙사 마다 이스라엘 학생들과 아랍 학생들이 하루 아침에 다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학생들은 전쟁에 참여하러 가기 위하여 본국으로 다 돌아갔고 아랍 젊은이들은 징집 명령이 내려질까 봐서 기숙사에서 깨끗이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뻔하지 않습니까? 3일만에 300만 이스라엘이 아랍 1억을 이겼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 한국교회 성도들의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교회 위기가 여기에 있습니다. 숫자가 모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빌딩이 모자라는 것도 아닙니다. 대형교회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전쟁의 의미를 모르고 모여든 이스라엘의 2만 2천, 피흘리기를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군사 2만 2천, 애국심 없는 저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했던 이스라엘의 2만 2천, 이것이 오늘 나의 모습이고 이것이 우리교회 한국교회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이런 오합지졸을 데리고 어떻게 이 험한 세상에 영적인 전쟁을 치룰 수 있겠느냐 오늘 사사기 저자는 우리에게 도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사기 저자는 오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각 자에게 묻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대는 아는가? 
영적인 전쟁 악과 사탄과의 전쟁을 왜 해야 하는지 전쟁의 능력을 그들은 아는가?
몸 바쳐 헌신하고 의로운 군대가 되기를 주저하고 있는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들은 알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는가? 

오늘 우리가 교회를 바라볼 때에 허약해진 오합지졸 군대라 한다면 어찌 이 전쟁을 할 수 있겠습니까? 교인의 숫자는 늘어나는데 책임을 나누어지는 교인은 줄어들고 있다면 이 험한 마지막 때를 이 교회가 한국교회가 역사를 책임지고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거룩한 부담을 지고 사는 영광을 모른 채 부담을 피하여 이곳 저곳 떠도는 철새교인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면 어찌 한국교회를 하나님의 영광스런 교회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위해 몸 바쳐 사는 영광을 모르고 살아간다고 한다면 어찌 하나님 나라의 면류관을 우리가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향해서 피 흘리기를 두려워하는 자들은 떠나라. 영적인 전쟁이 두려운 자들, 헌신과 희생이 아깝고 두려워 떠는 자들은 가라 라고 한다면 얼마쯤이나 한국교회에서 떠나갈까요? 약 ⅔쯤 떠나갈까요? 우리 교회를 향하여 하나님 나라에 헌신이 두려워 떠는 자들은 떠나 가라 라고 한다면 2/30쯤 떠나갈까요? 여러분들은 2만 2천에 속해 있습니까? 아니면 1만의 군사에 속해 있습니까? 


II. 숫자로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다

2만 2천명 비겁자들이 떠나고 1만명이 남아서 13대 1로 전세가 악화되어갈 때에 사령관 기드온은 자신이 아마 미쳐버리는 것만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너무 많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두 죽음으로 몰아가려는 것은 아닐까?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1만명을 마침 목도 마르고 하니 물가로 내려가서 물을 마시게 하라는 것입니다. 왜요? 물을 마시는 것을 보고 내가 또 감축 대상을 말해 주겠다는 것이지요. 

9천 7백명은 냇가에 도착하자마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쳐박고 시원하게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있었습니다. 3백명은 손바닥에 물을 받아서 개처럼 혓바닥으로 낼름낼름 핥아서 물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손바닥으로 물을 받아서 먹는 3백명을 남기고 무릎을 꿇고 물을 벌컥 거리고 마시는 9천 7백명을 처소로 돌려보내라는 것입니다. 

"자기 처소로 돌아가라" 이 말을 보니까 "길르앗 산을 떠나 가라"는 말이 없습니다. 여기 처소는 자기 진영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전쟁에 참전하진 않았지만 후방에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영광스런 승리를 함께 보고 함께 누리도록 배려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왜 3백명을 선택하셨나? 하는 것이지요. 

9천 7백명을 처소로 보낸 이유? 

1. 많은 성서 주경가들이 전쟁터에 나온 군사들이 적이 언제 밀려올지 모르는데 무릎을 꿇고 머리를 쳐 박고 물을 마시는 것은 경계심이 없는 그런 태도였기에 군인정신이 모자랐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손바닥으로 물을 받아서 개처럼 핥아 먹는 사람은 물 한 모금을 마시면서도 언제나 경계심을 가지고 적을 관찰하면서 물을 마셔야 된다 그래서 9천 7백명을 돌려보내고 3백명을 남겼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설명이 억지스럽습니다. 

2. 유대 랍비들은 그렇게 해석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무릎을 꿇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하나님께만 무릎을 꿇었다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그들은 절대로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목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무릎을 꿇어야 한다면 풍요와 쾌락과 성공을 위해서 바알에게 이미 무릎을 꿇은 것이 습관화되어져 있는 놈들이라는 것이지요. 또 쉽게 언제든지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자들 무릎 꿇는 것을 아무렇게나 생각하는 신앙적인 절개가 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돌려보냈다. 그렇게 유대 랍비들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3. 그러나 이 얘기는 그렇게 복잡한 얘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냥 많은 쪽을 가라는 것입니다. 아마 바뀌었다면 또 바뀌게 설명했을 거예요. 특별한 이유가 없습니다. 9천 7백명이 탈락했다면 몽땅 탈락한 것입니다. 기드온은 뚜껑이 열리고 혈압이 올라 쓰러질뻔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어떡 하라구요? 

하나님은 숫자 영웅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4대 1의 상황은 13대 1의 상황을 뛰어 넘어서 450대 1의 상황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고백이 이 전쟁에서는 꼭 필요했던 것이지요. 

교회의 숫자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 숫자는 천국 생명책에 기록된 구원의 숫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겨서 여러분의 이름 하나 하나가 날마다 바라보여지고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날마다 우리 이름을 부르고 숫자 하나 하나를 세면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 하기 때문에 교회의 숫자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숫자만 채우는 것이 교회의 목표는 아니지요. 

언젠가부터 한국교회가 1천만 성도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1천만 성도! 그것은 일종의 역사 앞에 이 사회에 대한 책임을 지는 두려운 언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하나님은 많은 숫자로 반드시 큰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드온의 싸움은 바로 이 싸움이었습니다. 숫자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랑이 아닙니다. 책임의식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일뿐입니다. 다윗이 인구조사를 하다가 숫자 자랑을 하다가 망해 가는 꼴이 한국교회의 꼴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가 무엇인가 정체의식을 붙들고 씨름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우리는 왜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는가? 신앙의 본질을 가슴에 부둥켜안고 씨름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합지졸 1천만 아무리 모여도 아무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의 걸림돌이 될 뿐이고 조롱거리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붙들린 3백명 용사를 이 시대는 그리워하고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III. 보리떡

기드온이 메뚜기떼 같은 13만 5천의 철기군인 모래알처럼 널려있는 낙타부대를 대적할 아군을 모으고 또 모아도 3만 2천 오합지졸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기드온의 심경이 이때 어떠했을까요? 참으로 참담했을 것 같아요. 더구나 하나님의 감축 명령에 따라 2만 2천명이 길르앗 산을 넘어서 돌아갔습니다. 1만의 가까운 병사가 후방 막사로 물러갔습니다. 고작 3백명이 남았는데 기드온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하나님의 계획을 알 길이 없었던 유약한 사령관 기드온은 아마 숨이 콱 막혀오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깨끗이 사표라도 던지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지금 우리를 자살 특공대로 모으신 것입니까? 항의라도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계획이라도 한번 들어보십시다. 대들고 싶었을 것입니다. 물을 마실 때 입을 물에 대고 벌컥 마시던지 손바닥에 받아서 먹든지 전쟁 하는데 그게 무슨 차이가 있다고 9천 7백명을 돌려보내는 것입니까?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한번 더 진정제 징표를 보여주십니다. 
기드온아 네가 정히 두려움을 이길 수 없다고 한다면 네 부관을 데리고 미디안 진영으로 숨어 들어가 보거라. 아, 하나님께서 번개라도 번쩍 내려서 미디안 진영을 박살내셨구나. 기대감을 가지고 미디안 진영으로 숨어 들어갑니다. 웬걸? 사태는 더 위압감을 주기에 넉넉했습니다. 미디안 군대, 아말렉 군인, 동방 군대가 거기다 낙타 부대, 메뚜기떼처럼, 모래알처럼, 천지를 뒤덮고 있었습니다. 

오금이 저려서 발이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사시나무 떨듯이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병사 둘이서 얘기를 주고받는 것이 귓전에 들려옵니다. "이봐, 내가 간밤에 꿈을 꾸었어. 그런데 저 이스라엘 진영에서 보리떡 하나가 둥글둥글둥글 굴러오더니 우리 막사로 들어오더니 온 막사를 다 쓰러뜨리고 자는 모든 병사를 죽이는 거야." 다른 병사가 그 꿈을 해석합니다. "그 보리떡은 다름 아닌 이스라엘의 사령관 기드온이래. 그 기드온의 칼이라더만. 그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한대. 신출귀몰한 사람이래. 그래서 그 기드온에 의해서 이번 미디안 연합군들이 완전히 패한다는 정보와 소문이 온 땅에 가득히 퍼졌어." 얼마나 힘이 되었던지요. 이 보리떡과 칼은 아무런 이미지 연결이 없는데 묘하게도 해몽하는 병사가 그렇게 해몽을 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어떤 표징, 어떤 말씀, 어떤 위로로 격려에도 힘을 얻지 못했던 기드온, 보리떡 사건으로 말미암아 사기 충천하여 두 주먹을 움켜쥐고 만면에 미소를 띄고 기드온은 진영으로 돌아옵니다. 

아니, 이 꿈속에 허리케인, 토네이도가 등장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지진 쓰나미가 나타나서 몽땅 그들을 쓰러버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산불 산사태가 나서 그들 막사를 뒤덮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전염병이나 하늘에서 용암이 쏟아졌다면 모르겠거니와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장막을 몽땅 부셔뜨렸다는데 이게 이해가 되십니까? 

이 보리떡 사건이 왜 이렇게 기드온에게 용기가 되었을까요? 보리떡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기드온을 고무시켰을까요? 보리떡은 지금 이스라엘이 양식을 다 빼앗기고 겨우 곡식 껍질을 빻아서 먹던 이스라엘의 지금의 양식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꼴이 보리떡 꼴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평상시엔 짐승에게나 먹이고 극히 가난한 가정에서나 먹는 음식이었습니다. 

어릴때 보리 고개를 넘어가시면서 개떡이라는 것을 먹어보셨습니까? 그게 꼭 지금 이스라엘의 보리떡과 우리 어릴때 먹던 개떡은 정확하게 똑같은 떡이었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은 그래서 이스라엘을 개떡 같은 놈들이라고 보리떡 같은 놈들이라고 비아냥 했던 것이지요. 기드온은 바로 자기 자신을 보리떡 개떡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보리떡 개떡이 바로 이스라엘이고 기드온 자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리떡 개떡 같은 나를 통해서 이미 미디안을 부수고 계시고 계시는 구나. 저들을 부수는 데는 많은 군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보리떡 한 덩어리면 족하구나. 하는 것을 기드온이 깨닿게 되는 것이지요. 보리떡이 적을 죽이는 칼날이 될 줄이야. 보리떡 같은 내가 저 막사를 순식간에 부수는 칼날이 될 줄이야. 그는 용기 백배하여 진영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보리떡 같은 나를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건설되어집니다. 보리떡 같은 나를 통해 사탄의 진영이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보리떡 같은 나를 통해 천국의 승리를 이 땅에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 

얼마전 기드온이 바알을 부수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 불태워버린 이 사건이 결코 작은 사건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누가 감히 온 중동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바알과 아세라 상을 죽일 수 있었겠습니까? 바알과 아세라를 가까이만 하면 죽는 줄 알고 모든 백성들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이란 자가 나타나서 므낫세 지파를 다스리던 바알과 아세라를 부셨다는 소문이 온 땅에 가득해 지게 된 것이지요. 미디안 사람들에게 기드온은 신출귀몰한 초인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 기드온은 귀신잡는 사람이래. 보리떡이 칼날이 되어서 적을 무찌르는구나. 감격하고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기드온은 자신이야말로 먹다 버린 개떡 한 덩어리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개떡이 여호와의 칼이 될 줄이야. 그 개떡이 미디안을 부수는 폭탄이 될 줄이야. 저 개미떼, 모래알 같은 낙타들을 다 쓰러뜨리는 여호와의 칼날이 될 줄이야. 용기 백배하여 막사로 돌아왔습니다. 자기 자신을 개떡이라고 생각했던 기드온, 그런데 개떡 한 토막이면 미디안을 무찌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조금전 300명 용사를 보았더니 이것은 뭐야 자살특공대야 뭐야? 이런 생각을 하고 낙심했던 기드온 300명 군사를 보았을 때에 300개의 핵 폭탄을 본 것입니다. 성령이 저들과 함께 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저들과 함께 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저들과 함께 하면 저 보리떡 한 개면 미디안을 물리칠 수 있다. 할렐루야. 

여러분의 형편이 너무나도 곤고하여 어려워서 지금 여러분의 상황이 보리떡 같은 상황에 처해져 있습니까? 한국교회가 오늘 이 사회, 오늘은 이놈에게 짓밟히고 내일은 저놈에게 조롱당하는 보리떡 같은 존재로 전락되어졌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들 가운데 여러분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저것 자라서 사람 구실 할 수 있겠나. 우리 가문이 왜 이모양 이꼴이고 나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개떡같은 존재가 되었노. 절망하고 좌절하신 분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그들과 나와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보리떡 영웅으로 나를 써 주실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기드온의 모습은 오늘 이스라엘의 모습이요 이스라엘의 얼굴 속에서 내 얼굴을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가정 우리 교회 얼굴이 발견되어지기를 바랍니다. 한국교회가 발견되어지기를 원합니다. 한국교회 이대로 주저앉지 않습니다. 벌떡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 민족은 예수 안에서 위대한 민족으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저 북녘땅에 백성들을 가슴에 끌어안고 예루살렘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민족으로 하나님이 써 주실 줄로 믿습니다. 보리떡 한알이면 능히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천만 보리떡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계로 흩어질 세계로 굴러갈 그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땅에 주여 성령이여 임하시옵소서. 이 시대가 어려울수록 칠갑절의 영감을 부어주시고 갑절의 성령의 기름을 부어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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