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종교인 서기관과 신앙인 과부 (눅 20:41~ 21:4)

  • 잡초 잡초
  • 379
  • 0

첨부 1


종교인 서기관과 신앙인 과부 (눅 20:41~ 21:4)


  흔히 기독교를 종교의 하나로 구분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수용될 수 있는 말이지만, 좀 더 깊게 따져 들어갈 때에는 틀린 말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엄격한 의미에서 '종교의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참된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옹졸한 독선주의자라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니라, 이 세상의 수많은 종교들 중에 오직 기독교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서로 인정해 주면서 소위 종교들 사이의 이해와 화합을 도모하는 것이 마치 참된 종교인의 너그러운 자세인양 자랑들 하고 있는 이 시대에, 오직 기독교, 특히 개혁주의 기독교만이 성경과 예수님 자신의 선포를 따라 '구원의 길은 단 한 길,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라는 사실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기독교는 정말 참된 종교인 까닭에 유일한 구원의 길을 자신 있게 선포할 수 있는 것이며, 여타 종교들은 자기네의 구원 개념부터가 확실치 않은 까닭에 다른 종교를 통한 구원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쓰는 '종교인'이란 말과 우리 기독교인을 지칭하는 '신자' 혹은 '신앙인'이라는 말도 얼핏 비슷한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엄청난 차이가 있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는 그야말로 대표적으로 '종교적인 사회'였습니다.
  그 나라에 살던 모든 유대인은 어쨌든 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율법을 읽고 성전에서 제사드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겉으로는 꼭 같아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 '외식적인 종교인'과 '진실한 신앙인'이 엄연히 구별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셨고,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서기관들과 한 과부를 대조시키시면서 우리에게 보여 주고 계시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일견 서로 비슷해 보이는 '종교인'과 '신앙인'이 실제로는 얼마나 뚜렷한 차이가 있는 것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종교인은 '자기 쪽에서 바라는 신'을 찾지만, 신앙인은 '영원자존하시는 절대주권자'를 믿습니다. 

  본문 20장 41절부터 44절까지에 기록하기를 "41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42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43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44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뇨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의 또 다른 이름들 중에 하나인 "다윗의 자손"이란 명칭의 사용에 대하여 유대의 종교 지도자 서기관들에게 한 가지 반론을 제기하셨습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명칭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메시아는 분명 혈통적으로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도록 구약에서부터 예언되어 있었으며 예수님께서 실제로 그렇게 탄생하셨을 뿐 아니라, 또 다른 사건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런 메시아의 호칭으로 부를 때 예수님께서도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셨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예수님께서 제기하시는 문제는 "너희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할 때 과연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냐?"라는 질문인 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오실 메시아를 '정치적인 군주'로만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옛날 다윗 왕 통치 하에서 강성하고 번영했었던 이스라엘을 사모하면서, 오실 메시아가 바로 그 다윗 같은 통치 능력을 발휘하여 이스라엘에 또다시 정치적 및 경제적 전성기를 가져다주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메시아란 순전히 자기네들이 스스로 '만들어 낸 상(像)'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네들이 그저 믿어야 할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메시아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메시아란 당연히 이래야 할 것이다.'라고 제멋대로 그려놓고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적하시는 바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다윗 왕부터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감히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라고, 즉 성경에 기록된 다윗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을 직접 인용하시면서 밝혀 주셨습니다.

원래 기록된 시편의 문맥에 따르면, 그 다윗이 했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라는 말에서 첫 번째 "주"는 '성부 하나님'이시며 두 번째 "내 주"는 바로 '오실 메시아'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뒤에 나오는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의 발등상으로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에서도 "내"는 첫 번째 주이시며 "네"라는 2인칭은 두 번째 주를 가리키는데, 이 말씀은 성부께서 성자 하나님을 최후 심판의 날이 올 때까지 당신의 하늘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도록 명하시는 말씀임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다윗 왕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자기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부흥시킬 군주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음이 명백해지지 않습니까?
비록 육신적으로는 자기 혈통을 타고 태어날 메시아이지만, 그 메시아는 다윗 왕 자신에게도 어디까지나 '주'가 되시며 더욱이 이스라엘의 왕좌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셔서 장차 최후의 심판을 주도하실 심판주이심을 확실히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다윗은 오실 메시아를 이렇게 성부 하나님과 동격의 심판주로 높이 받들고 있었고 성경은 바로 그런 메시아를 정확하게 예언해 주고 있는데, 어찌하여 너희들은 메사아를 그저 '다윗을 닮은 군주' 정도로만 너희들 마음대로 생각하고 있느냐?"라고 꼬집으셨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일반 종교인들과 기독 신앙인들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종교인들은 신이라는 존재를 '자기 생각'이나 '자기 필요'에 따라서 인식하고 찾으려 합니다.
그처럼 자기 마음에 맞는 신이라야 자기 종교의 신이 될 수 있으니, 다른 사람에게는 또 그 사람의 마음에 맞는 다른 신도 있는 것이 당연할 수밖에 없고 자연히 다른 종교도 서로 인정해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처럼 출발부터가 순전히 '인본주의적인 종교관'에서 비롯되고 있으니, 그 결과 그런 종교인들의 신이란 완전히 '사람의 마음에 좌우되는 상대적인 신'으로 격하되고 '사람의 판단에 의존하는 무력한 신'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참된 신앙인은 신을 그런 식으로 찾거나 만나지 않습니다.
무슨 '신인식(神認識)'에 대한 사람 쪽의 구도(求道)와 득도(得道)에 아무 상관없이, 아니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생기게 되기기도 전에, 먼저 절대주권자로서의 신께서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스스로 살아 계신다는 이 자체가 우리 기독신자에게는 '부동의 제1 명제'요 '유일의 대전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 - 오직 이것만이 우리 신앙의 시작이요 결론이며 우리 생활의 원인이요 결과가 될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에게 똑똑히 선포해 주고 있는 '스스로 계신 자' 곧 '여호와'가 바로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그저 '자기 쪽에서 바라는 신'들을 무수히 만들어 내는 '우상숭배자 종교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친히 일깨워 주신 대로 오직 성경이 밝히 증거해 주시는 '영원자존하시는 절대주권자'로서의 하나님만을 믿는 '진정한 신앙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종교인은 '사람 앞에서의 외식'에 신경을 쓰지만, 신앙인은 '신전인격자의 자세'만 지킵니다. 

45절 이하 47절까지의 말씀에 "45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46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47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종교인'들의 대표자 중에 하나이며 또한 많은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이끌고 있던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즉 아주 조심하라고 제자들에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당시에는 인쇄술이 없었으므로 구약 성경책을 일일이 필사(筆寫)해야만 했었는데 그것이 바로 서기관들의 주된 업무였습니다. 또한 그처럼 성경책을 가장 가까이 접할 수 있었던 까닭에 그들은 자연히 '율법학자', 즉 오늘날로 치자면 신학자에 해당되는 사람들이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 서기관들의 실상은 신앙인이 아니라 순전히 종교인에 불과했습니다.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은 바로 부유함의 상징이었는데, 매일 노동해야 먹을 수 있는 가난한 사람들은 일에 방해가 되는 '긴 옷'을 입을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서기관들은 이처럼 남들 앞에서 자신이 부자임을 나타내는 것을 "원하는" 자들, 즉 그것을 과시하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상석을 좋아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으로서, 스스로 유대 상류사회에 속한 귀족임을 뻐기는 것이 바로 서기관들의 생리였습니다.
"과부의 가산을 삼킨다"는 말은 그들이 율법을 가르쳐 준다는 구실로 가난한 자들을 착복했던 것을 가리키는데, 원래 서기관은 그 가르침에 대하여 개인적으로는 어떤 보수를 받을 수 없게 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서기관들은 이것을 오히려 기정관례처럼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자기네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당연히 존경받고 대접받아야 할 위치에 있다고 아예 자타가 공인하고 살았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행위까지도 오로지 사람에게 더 훌륭하게 보이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고서 '일부러 길게'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서기관들은 사람들로부터 높임 받는 것만 좋아했던 것이 아니라, 자기네의 경건생활까지도 그저 사람 앞에서 제 잘난 것을 보이고자 하는 그 목적 하나만을 위해서 행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장차 '당신의 원수를 그 발의 발등상으로 두실' 심판주로 오실 때에 그런 외식적인 종교인들이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고 추상같이 정죄하셨던 것입니다. 

종교인은 이처럼 종교생활 그 자체까지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사람들 앞에서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어떤 종교를 믿는 목적부터가 오직 사람이 자신의 선함과 자신의 고상함과 자신의 덕을 더욱 높이 쌓아가기 위함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고방식으로 종교생활이 시작되면 바로 그 목적이 성취되었을 때 나타날 결과도 자명합니다.
즉 그 종교생활을 통하여 그런 선함과 고상함과 덕 높음을 본인이 성취하게 된 것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게 되고 또한 다른 사람이 성취한 것에 대해서는 숭상하고 추앙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주교에서 무슨 '성인'이나 '성녀'니 하면서 받들어 모시는 것이 바로 그 대표적인 모습 아니겠습니까?
그런 종교인들의 종교생활이란 결국 '사람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좀 더 높이려는' '도토리 키 재기' 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참된 기독신자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자신이 오직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여기에만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관심과 정성을 기울이는 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연히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으로 드러나고 있는가 하는 사실을 늘 정확하고도 겸손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사람 앞에서 자신을 판단한다면 남보다 좀 더 잘난 것도 있고 제 자랑할 것도 좀 있겠지만, 위에 계신 하나님의 눈에 나라는 존재가 어떻게 보이고 있을까 라고만 생각해 보면 정말 자신은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로도 부족할 최악의 죄인임을 고백하는 것 외에 다른 아무 할 말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그처럼 부족하고 불충하며 죄 많고 악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의인이요 양자라고 불러 주시는 하나님의 이 놀랍고도 무한한 사랑과 은혜에 또한 진실로 감사 감격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신전(神前) 인격자'라는 멋진 표현이 바로 이런 신앙인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이 '사람 앞에서의 도덕군자'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인격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결코 착각하거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 앞에서 얼마나 선하게 보일지에만 관심을 두면서 사람의 눈만 의식하고 종교생활하는 '외식적인 종교인'이 아니라, 매사 매순간 오직 저 위에 계신 거룩하신 하늘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말과 행동이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서만 모든 생각과 노력을 다 기울이는 '경건한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종교인은 '자기 욕구 충족'을 위해 살지만, 신앙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바치려 합니다. 

21장 1절로 4절에 기록하기를 "1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2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 뜰에는 나팔 모양으로 생긴 열 세 개의 "연보궤" 즉 헌금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보고 계셨습니다.
"부자들"이 얼마나 헌금하고 있었는지 본문에 정확히 밝히고 있지 않지만 분명히 상당히 많은 액수를 바쳤던 것은 쉬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에 대조적으로 "어떤 가난한 과부"가 헌금을 했습니다.
당시는 '과부'라고만 해도 가난한 사람의 대명사나 다름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의 유대 사회에서는 과부가 스스로 돈을 벌 수 있는 길이란 거의 없었으며 대부분 남의 도움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고, 그래서 더욱이 '가난한 과부' 하면 그야말로 최악의 빈민 그 자체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어떤 과부가 와서 "두 렙돈"을 연보궤에 넣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셨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여러 나라의 화폐들이 통용되고 있었는데, 이 '렙돈'은 유대 화폐 중에서도 가장 작은 단위액수의 동전이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얼마나 되는지를 정확히 따지기는 어렵지만, 하여튼 당시 보통 사람에게는 연보할 가치조차 의심될 정도로 적은 것이었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부에게는 "생활비"가 될 만큼 큰 것이었음에는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과부의 헌금하는 것을 보시고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여기 "모든 사람보다"라는 말은 '그날 헌금했던 그 어떤 개인의 헌금 액수보다'라는 뜻이 아니라 '그날 헌금했던 모든 사람의 헌금 액수를 다 합친 것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헌금의 액수를 가지고 상대적으로 비교하신 것이 아니라 헌금하는 사람의 중심을 보시며 절대적으로 평가하셨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즉 '누가 누구보다 얼마나 더 많은 액수를 바쳤는가?'로 따지신 것이 아니라, '누가 누구보다 얼마나 더 많은 정성으로 바쳤는가?'를 가지고 판단하셨던 것이며, 바로 그런 면에서 그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최고의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부자들의 헌금은 비록 상대적인 액수는 많았지만 그것은 "그 풍족한 중에서" '자기가 쓰고 남는 것'으로 바친 것이었던 반면에, 그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바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가 바친 액수는 헌금 계수하는 자들이 오히려 귀찮아할만한 동전에 지나지 않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문자 그대로 '자기 가진 것의 최고와 전부'를 다 바친 헌금으로 받으셨던 것입니다.


종교인과 신앙인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서도 나타납니다.

종교인들은 신을 섬기는 목적 자체가 순전히 '자기 소원 성취'와 '자기 욕구 충족'에만 있습니다.
우리 원로목사님의 표현대로, '예수 믿는 것을 자기 인생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자들인 것입니다.

당연히 이런 종교인들에게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최우선이 되려야 될 수가 없습니다.
먼저 자기 가계부 정리할 것 다 정리하고 저금해 놓을 것 먼저 다 채워 놓은 후에 이제 좀 갖다 바쳐도 전혀 자기 생활에는 전혀 지장이 없을 만큼만 가져와서 헌금이라고 냅니다.
자기 급한 일 먼저 처리해 놓고 자기 놀 시간 쉴 시간 다 찾아먹고, 그래도 혹 여가 시간이 좀 남으면 주일예배에도 참석해 주고 봉사활동도 돕는다는 둥 생색은 다 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기독신자는 결코 그런 종교인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매사에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가 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앙인은 자신의 생명이란 바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주어진 수단이요 기회라는 사실을 정확히 깨닫습니다.
  
자신이 가진 물질, 시간, 아니 몸 그 자체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오직 하나님을 충성되이 섬기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오직 진짜 신앙인만이 도달할 수 있는 지극히 차원 높은 인생관인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인의 신앙생활은 모든 최우선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고 모든 동기와 발단이 오직 하나님께로부터만 비롯됩니다.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늘 '다고 다고'하는 '거머리형 종교인'에게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 목적, 내 삶 수단'을 실천할 줄 아는 진짜 기독신자의 신실한 봉사와 충성을 통해서만 구체적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필요를 따라 종교생활을 하려고 하고 자신의 욕구가 먼저 충족된 후에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하는 '하나님과 거래하는 종교인'이 아니라, 이미 받은 구원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오직 '생애 최고의 것과 전부의 것으로 섬기기를 기뻐하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유대 사회는 외면적으로는 한 종교 체계 밑에 있었습니다.
모두가 같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으며 한 종류의 경전을 가지고 있었고 한 성전을 중심으로 예배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판이하게 다른 두 종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서기관들처럼 일견 '완벽한 종교인'처럼 보이는 무리가 있었는가 하면, 한 가난한 과부처럼 사람 보기에는 아무 볼품도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만은 '신실한 신앙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 두 부류를 철저하게 구분하셨습니다.

'종교인'의 신앙이란 어디까지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 자기가 만들어낸 신을 찾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들의 경건생활이란 하나님이라는 성호를 오용해서 자기 자신을 사람 앞에 더욱 선하고 위대하게 드러내려는 가식일 뿐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봉사생활이란 먼저 자기의 필요와 욕구부터 다 채운 후에 남는 것으로 하나님 섬기는 체면치례만 있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참된 기독신자는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신앙인'은 내가 찾아서 발견하게 된 신이 아니라, 내가 있기 전부터 먼저 자존하고 계시는 절대주권자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는 사람입니다.
정말 경건한 신앙인은 사람 앞에서 점점 더 거룩해지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나 같은 죄인까지도 의인이라 칭해 주신 이 고마우신 하늘 아버지 앞에서 그분의 양자된 자다운 합당한 성화의 자세를 지키려고 늘 두려워할 줄 압니다.
그리고 진정 충성된 신앙인은 내 것을 먼저 채우고 남는 것을 신에게도 바치겠다는 뻔뻔스러운 행위를 결코 보일 수 없고, 그 대신에 나라는 존재에 속한 모든 것이 오직 '주께로부터 왔음'을 깨닫고 그런 까닭에 '모든 것이 주께로 돌아가야 함'을 마땅히 여기는 가운데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리면서 자신은 그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것을 오히려 기뻐할 줄 압니다. 
이처럼 우리는 '신앙을 수단으로 삼는 종교인'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신앙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신자'가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꽤 오래 전에 나왔던 것으로서 'Paper Mask'(종이 마스크)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었는데, 영국의 한 병원에서 잡역부로 일하던 주인공이 갑자기 죽게 된 한 의사의 신분을 도용하여 서류(paper)상으로는 완벽한 의사로 둔갑한 뒤에 온갖 해프닝을 벌이는 줄거리입니다.
  
그 '가짜 의사' 주인공은 'The Platters'라는 흑인혼성 보컬그룹이 부른 'Great Pretender'라는 제목의 노래를 자기 혼자 있을 때 기타를 치면서 즐겨 부르는데, "Oh-oh, yes I'm the great pretender (그래요, 나는 엄청난 '프리텐더'예요) / Pretending that I'm doing well (내 모든 것이 다 잘 되어 가는 척하고 있죠)"라는 가사의 노래입니다.
  
진짜 의사가 아니면서도 마치 의사인 척하면서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그 노래 가사와 딱 맞아 떨어졌던 것입니다. 거기에 나오는 'pretender'라는 영어 단어는 우리나라말로는 딱 한 단어로 옮기기가 어려운 것으로서 '(실제로는 자기가 아닌) 어떤 사람인 체 가장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종교인'이 바로 '신앙인이 아니면서 신앙인인 체하는 프리텐더'입니다.
그리고 그런 종교인들이야말로 우리 예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부류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예수님은 결코 어떤 'pretender'가 아니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인 체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짜 성자 하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인 체하는 교주'가 아니라 '진짜 죄인의 구세주'이셨습니다.
예수님부터가 무슨 '도통하고 거룩한 체하는 성인이나 종교인'이 아니라 '참된 신앙의 유일한 대상'이신 동시에 '신실한 신앙생활의 절대적 기준과 목적'이 되신 분이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은 사람 앞에서 '신앙인인 체하는 종교인'을 그토록 적나라하게 꿰뚫어 보셨으며 오직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신실한 신앙인'을 또한 정확하게 알아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와 꼭 마찬가지로 오늘날 역시 많은 '종교인'들은 있지만 참된 '신앙인'들은 여전히 소수입니다.
왜냐하면 이 신앙인의 길은 여전히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은 좁은 문'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어렵게 신앙인으로 살기 보다는 그저 적당히 '신앙인인 체하고 흉내만 내는 종교인'으로 사는 것이 훨씬 더 쉽고 편한 '넓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프리텐더 종교인'들이 가는 길은 결국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 될 뿐이며, 오직 신앙인의 길만이 '생명으로 인도하는' 참되고도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위치에 있습니까?
모든 것이 '자기 자신에서 출발하고 자기가 중심이고 자기만이 목적이 되는 종교인'입니까, 아니면 '자존하시는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 성경만 믿고 따르고자 하는 신앙인'입니까? 
'신자인 척하는 인본주의적 종교인'입니까, 아니면 '예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신전인격자적 신앙인'입니까?

오직 '하나님 중심의 신앙,'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경건,' '하나님 목적의 충성된 생활'을 통하여 진실하고도 신실한 기독인이 됨으로써, 그런 참된 신자들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신앙인으로 인정받고 천국으로 영접받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