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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겸비한 신앙인(1) :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럽게 (눅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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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비한 신앙인(1) :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럽게 (눅 2:52) 
 

겸비(兼備)한 신앙인

제가 처음 운전을 배울 때 일입니다. 운전이 미숙하다보니 오직 앞만 보고 운전했습니다. 운전면허를 따고 한동안 옆도 못 보고 뒤를 보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오직 앞으로만 가는 운전을 한 것입니다. 차를 앞으로 모는 것만도 힘들고 아슬아슬한데 어떻게 그 와중에 백미러로 옆도 보고 뒤도 보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갔습니다. 지금은 운전한지 20년이 되어 가니 운전하면서 여유 있게 옆도 보고 뒤도 보고 하지요. 하지만 하루아침에 이렇게 능숙해 진 것은 아닙니다. 그만큼 세월도 흐르고 운전도 오래 하고, 때로는 크고 작은 사고도 겪으면서 그렇게 노련해지고 능숙해 진 것입니다.

그런데 운전할 때 가만히 보니 제 초보운전 때 모습 그대로 운전하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초보운전 중에 어떤 분들은 차 뒤에 병아리를 그려 놓고 “왕초보입니다. 귀엽게 봐주세요.”하고 써 붙인 분도 있고, “왕초보, 어제 면허 땄음. 알아서 피할 것”이라고 쓴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인상적인 팻말은 이것이었습니다. “왕초보, 백미러 안 보고 운전합니다. 절대 옆에 오지 마세요.” 또 있습니다. “왕초보, 옆 뒤 절대 안 봄.” 또 있습니다. “왕초보, 세 시간째 오직 직진 중.” 난 옆도 안 보고 뒤도 안 보니 당신이 알아서 조심하라는 협박입니다. 누구나 처음엔 다 이런 식으로 운전을 시작하지요. 하긴 우리 교회 차량부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리 교회에도 오직 앞으로만 갈 줄 알지 차를 뒤로 빼 줄 모르는 분도 있다고 하네요. 이것이 바로 미숙함입니다. 비록 운전면허는 따서 운전할 자격은 얻었지만 아직 미숙해서 오직 앞만 보고, 한 방향만 보고 달리는 분들입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숙한 운전자처럼 미성숙한 신앙인은 오직 한 방향만 봅니다. 그래서 극단적인 신앙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이냐 세상이냐 식으로 양자택일 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아니, 목사님 무슨 소립니까? 성경에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말씀이 얼마나 많이 나오고 하나님이냐 우상이냐, 하나님과 세상 중에 한 가지만 택하라는 말씀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데요. 목사님이 성경도 안 읽으시나?” 하고 말씀할 분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본문은 대개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성도들이 세상을 더 사랑하고 우상을 숭배할 때 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양다리 걸치지 말고 하나님을 택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성경은 일반적인 신앙생활에 있어 결코 한 가지만 택하고 한쪽만 맹목적으로 따르는 신앙이 위험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믿는다며 결코 세상을 등한시 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성숙한 신앙인들은 ‘조화로운’ 신앙을 가진 분들입니다. 제가 성경을 나름대로 살펴보면서 성경 곳곳에 성숙한 신앙인은 두 가지를 다 잘 해야 한다는 말씀이 나온 것을 발견했습니다. 과연 어떤 것일까요? 성숙한 신앙인이 함께 갖춰야할 것들은 무엇일까요? 그래서 저는 ‘겸비한 신앙인’이라는 주제로 몇 주간 이런 본문들을 골라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겸비’ 한자로 겸할 겸(兼), 갖출 비(備) 자를 써서 두 가지를 겸하여 갖춘 신앙인이 필요하다는 뜻이지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럽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전혀 안 나오지만 누가복음에만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 후에 예수님이 성전에서 정결예식을 드릴 때 시므온과 안나에게 축복 받은 이야기, 그리고 예수님이 열두 살 때 부모님과 함께 성전에 갔던 이야기가 2장까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2장의 맨 마지막 절인 52절이 이런 말씀으로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그동안 우리는 기껏해야 이 본문을 돌 예배나 백일예배 같을 때 아이들이 지혜와 키가 잘 자라라고 하는 설교를 할 때만 사용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에는 그 정도가 아니라 더 크고 중요한 뜻이 들어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자라면서 지혜와 키가 함께 자란 것처럼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러운 분으로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 예수님처럼 어느 한 쪽만 사랑하고 어느 한쪽에만 치우친 사람들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되 주변 사람들에게도 아름다운 영향력을 끼친 사람들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상 2장 2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어디서 많이 보던 말씀 같지 않습니까? 바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다는 말씀과 너무도 똑같습니다. 이렇게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사람에게 함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다시 본문으로 가서 말씀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먼저 본문은 예수님이 지혜와 키가 자라갔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아이의 성장은 지혜와 키, 이 두 가지가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두 가지가 함께 자라야 정상적이고 건강한 성장이 됩니다. 지혜, 즉 지적능력은 커 가는데 키가 안자라면 어떻게 됩니까? 바로 ‘저성장증’이라고 부르는 장애입니다. 반대로 키는 커 가는데 지적 능력은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발달장애’라고 부르는 장애가 됩니다.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한쪽이라도 안 커주면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스럽게

똑같은 원리가 우리 신앙의 성장에도 적용됩니다. 예수님도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어떻게 되셨습니까?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더”고 합니다. 즉 아이가 자라면서 지혜와 키가 함께 자라야만 건강하고 균형 잡힌 성장이 되듯 신앙적으로도 성숙하고 건강하게 자라려면 두 가지 사랑을 동시에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하나님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동시에 사람에게도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예수님이 자라가면서 얼마나 균형 잡힌 분으로 성장했는지, 그래서 장차 인류 구원의 놀라운 사명을 감당할 분으로 잘 준비되어 갔는지를 설명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혜가 자랐다는 말은 지적으로, 심리적으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잘 성장해갔다는 뜻이요, 키가 자랐다는 말은 육체적으로도 잘 성장해 갔다는 뜻이며, 마지막으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모두 사랑받는 분이 되었다는 말은 신앙적으로, 영적으로 건강하고 균형 잡힌 분으로 성장해 갔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갔다는 이 말씀은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의 신앙이 자라는 것이 이와 똑같은 원리입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 믿기 전 우리는 오직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사람 되려고 애씁니다. 어려서는 부모님이나 선생님, 어른들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 받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예의 바른 아이 되려고 합니다. 조금 커서 이번에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공부 잘 해서, 예쁘게 보여서, 성공하고 출세해서 어떻게든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부러움 사고, 어깨에 힘 좀 주고 으스대며 살고픈 욕구가 우리를 지배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만 바라보고 사람만 의식하며 살던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되면 이제 모든 관심이 하나님께로 바뀌게 되지요. 전에는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했던 것을 이제는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 하게 되고, 사람들에게 인정과 칭찬 받으려고 했던 것이 이제는 하나님께 인정과 칭찬 받는 것으로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참 귀한 일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이 부분에서 우리가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까지로 끝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사랑 받고, 하나님께 인정과 칭찬 받는 것으로만 끝나서는 우리 신앙이 결코 건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다시 사람에게도 인정받고 칭찬 받고 사랑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옛날 예수 믿기 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 다른가 하면 전에는 나라는 사람이 잘 보이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지만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내가 영광 받는 것이었지만 이제 하나님 믿은 후에는 하나님을 믿은 내가 사람들에게 칭찬 받고 인정받아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목적이 다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하나님만 의식하며 하나님께만 사랑 받고 사람에게는 사랑과 인정을 못 받으면 어떻게 될까요? 반쪽짜리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흔히 교회는 잘 다니고 신앙생활은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인간관계를 잘 못 풀어가고 세상에서 적응 못하고 세상과 떨어져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남들에게 잘하는데 정작 집에서 가족에게는 잘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대형교회 목사님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청년부가 수천 명이 모이는데 그 가운데 ‘거룩한 백수’가 제법 많습니다.” 여기서 ‘거룩한 백수’란 젊은 사람 중에서 직장 생활 적응 못하고 맨날 교회만 와서 사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교회에서 모든 집회와 행사 다 참석하고 밥도 먹고 오직 교회에서만 사는 청년들입니다. 서울의 큰 교회 청년부에는 이런 청년들이 너무 많다고 합니다. 

하지만 과연 하나님이 이런 분들을 이런 젊은이들을 기뻐하실까요? 오히려 세상으로 나가서 열심히 직장생활 하면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 인정도 받고 칭찬도 받으면서 그 분야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젊은이를 더 기뻐하지 않으실까요? 심지어 성도들 중에는 직장이고 가정이고 다 안중에 없고 매일 집회다 부흥회다 쫒아 다니기만 하고 아예 모든 사회생활을 팽개치고 기도원으로 올라가 사는 분도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만 생각하고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하면, 그래서 신앙생활은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만) 올바른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하면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결과적으로 우리가 사랑하고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하나님이 나를 통해 영광 받지 못하시고 도리어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결과가 오게 됩니다. 내 주변 사람들이, 특히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 “저 사람 왜 저래? 예수 믿는다며?” 하는 순간 이미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랑받는 만큼 크리스천으로서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과 칭찬을 받고 사랑을 받을 때 그들은 “저 사람 참 괜찮아, 믿을만해. 그런데 저 사람 예수 믿는다며? 교회 다닌다며?” 하게 되고 그 순간 진짜 영광은 우리 하나님이 받게 되신다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사실입니다.

정반대로 이런 분들도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인정 많이 받고 잘 나가는데, 또 직장이나 친구나 이웃들 사이에서는 인간관계도 참 잘 하는데 교회에서는 그렇지 못한 분들입니다. 교회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고 교회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합니다. 저 사람은 참 신앙생활 잘 할 것도 같은데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신앙이 잘 자라지 않습니다. 이런 분들은 왜 그럴까요? 그것은 사람에게는 사랑 받는데 하나님께 사랑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사랑받고 인정받는 것은 정말 중요하게 여기고 그렇게 되기 위해 애를 쓰는데 하나님께 사랑 받고 인정받는 것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앞서 소개한 사람들이나 이런 사람들이나 건강한 신앙인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사랑받기 원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사랑받지 못하는 성도나, 반대로 사람에게 사랑받기 원하지만 하나님께 사랑받지 못하는 성도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겸비(兼備)한 신앙이 아니기는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받는 법

이제 마지막으로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함께 사랑받는 법”이 무엇인지 살펴보기도 합시다. 먼저 첫 번째 답은 로마서 14장 18절에 나옵니다. 함께 찾아서 읽어볼까요?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이렇게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도 하고 사람에게도 칭찬 받는 사람이 될 수 있답니다. 그러면 ‘이렇게 그리스도를 섬긴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 앞에 나오는 본문을 보면 로마 교회 내에서 유대교의 특별한 절기를 지키려고 고기와 포도주를 안 먹는 사람과 아무 거리낌 없이 먹는 사람들 사이게 분쟁이 일어나서 서로 업신여기고 비난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런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분들은 기도를 해도 크게 방언으로 하는 것을 좋아하고 어떤 분들은 조용히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떤 쪽이 더 좋은 것입니까? 둘 다 좋은 것입니다. 어느 쪽이 더 좋은 것이 아닙니다. 다 좋고 다 필요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선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또 다른 분들은 해외까지 가서 선교하는 돈으로 차라리 교회 주변에 어려운 분을 돕는 구제가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어떤 쪽이 더 중요합니까? 다 중요합니다. 이런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

도 바울도 이런 말을 합니다. “고기를 먹느냐 안 먹느냐, 어떤 절기나 특별한 날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 안에서 서로 덕을 세우고 평강과 기쁨을 이루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18절에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란 이런 자세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에 연연하며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상처 주는 그런 미성숙한 자세가 아니라 교회의 덕과 화평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성숙한 신앙을 가지게 되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에게도 칭찬 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한 구절만 더 봅니다. 잠언 3장 3~4절입니다. 함께 찾아 읽읍시다.

인자와 진리가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인자’라고 번역된 낱말은 히브리말로 ‘헤세드’로서 ‘인자’라는 뜻뿐 아니라 ‘친절, 자비’라는 뜻도 있습니다. 또 ‘진리’라고 번역된 낱말은 ‘에메트’로 ‘신실, 성실’이라는 뜻도 됩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이렇게 번역하면 더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늘 남을 친절과 자비의 마음으로 대한다면, 또 언제나 성실한 자세로 살아간다면, 마치 그것을 목에 매듯 늘 삶의 자세로 삼고, 마음판에 새기고 살면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동시에 은총을 받고 귀중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굉장히 실제적인 교훈입니다. 

하나님 믿는 사람은 반드시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또 직장에서나 어디에서나, 사람들 속에서 이 자세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그들을 품고, 무슨 일을 하든지 ‘성실’하게 열심히 하고, 특히 인간관계를 성실히 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힘이 있고 잘 나가는 사람이든, 아무리 보잘것없고 약해 보이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늘 모든 사람을 성실하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크리스천이며, 이런 크리스천들이 다른 사람에게 귀중히 여김을 받고 좋은 평가를 받고 칭찬을 받을 때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두 주 전 말씀 나눈 대로 진짜 그리스도인, 진짜배기 예수쟁이가 바로 이런 사람 아니겠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많지만 진짜 예수쟁이가 드물다고 하는 이 시대에 우리 교회 성도 여러분이 하나님께도 사랑받고, 사람에게도 사랑받는 진짜 예수쟁이들이 되시길 진심으로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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