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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고후 12: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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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고후 12:7~10)

                                                                                          
인류는 각종 한계를 뛰어넘어 강해지려고 무한도전해오고 있습니다. 먼저는 수명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애써왔습니다. 71년도 한국인 평균 수명이 불과 59세였대요. 지금은 의학이 발달하고 식품 영양이 참 좋아졌습니다. 세계보건기구가 2007년에 발표한 2005년도 통계에 의하면 여자는 82세 남자는 75세래요. 여자가 일곱 살 더 삽니다. 참고하세요. 아무튼 한국인 평균 수명은 78.5세입니다. 약 30년 만에 무려 20세 정도를 더 살게 된 겁니다. 올해는 2005년에서 3년이 지났으니 2살 더 늘어나서 평균수명은 한 80세쯤 될 겁니다. 요즘 환갑잔치하는 분 별로 보지 못하셨지요? 이제는 칠순 잔치 아니면 팔순 잔치 하고 있습니다. 

교통과 통신 장비를 개발하여 소통에 요구되는 시간을 단축시켜왔습니다. 옛날에는 그리 멀지 않은 지역과도 며칠 씩 걸려 소식을 주고받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지구 반대편 사람하고도 얼굴 보며 대화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편리한 세상입니까?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의 한계도 뛰어넘어왔습니다. 바다를 메워 땅을 넓혀왔습니다. 한두 평이 아닙니다. 아예 지도가 바뀝니다. 광활한 매립지에 농사도 짓고요, 집도 호텔도 짓고 합니다. 인터넷 사이버 공간까지 새롭게 만들어 내었습니다. 우주공간까지 진출해보려고 지금도 노력중입니다. 진보를 위한 인류의 무한도전은 끝이 없고, 언제나 위대한 것으로 예찬되어 왔습니다. 

무한도전을 통해 개인적으로 강해진 인생성공담들도 책으로 쏟아져 나옵니다. 이런 책들은 절망 가운데 있는 분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곤 합니다. 내용은 서로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발견됩니다. 항상 밝고 좋은 것 생각하고, 늘 긍정적으로 말 하며, 적극적으로 도전하면 마침내 한계를 극복해내고 반드시 성공한다는 확신으로 차 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는 소위 ‘적극적인 사고방식’에 기초해 있습니다. 

이 ‘적극적 사고방식’은 우리 신앙생활에도 들어와 있습니다. ‘믿음’이란 단어와 상당한 친화력을 보입니다. 즉 우리가 적극적으로 믿음을 고백하면 만사가 형통하게 되며, 우리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을 때, 한계를 뛰어넘어 우리가 소원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 때 자주 사용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시 81:10,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좋으신 하나님은 야구투수처럼 축복의 공을 계속 던지시는 분으로 여깁니다. 따라서 야구포수가 공받기 위해 장갑 쫙 벌리는 것처럼 믿음의 입 크게 벌릴 때 그 축복의 공 모두 받아가질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적극적으로 믿음의 입 벌리지 못하면 하나님의 복 받아내지 못한다고 가르칩니다. 믿음의 입을 넓게 여는 데 도움이 되는지는 몰라도 때로는 발음도 세게 합니다. “주여, 믿-쓉니다.” “주여, 어서 어서 복을 주-쒸옵소서!” 

또한 막 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도 자주 사용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능력 믿기만 하면 불가능한 일 없다는 희망 갖도록 인용되곤 합니다. 우리가 열심히만 믿으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모든 일이 술술 풀린다고 가르칩니다. 저도 이런 제목으로 기도하고 설교하면 신이 납니다. 분명히 성도님들께서 큰 소리로 아멘 아멘 하실 거니까요. 

그런데 여러분, 죄송합니다. 오늘은 좀 다른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이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틀렸다고 비판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믿음으로 죽을병도 고침 받고, 믿음으로 망한 사업에서 재기하는 경우도 분명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적극적인 사고방식’은 부분적으로만 옳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확신을 갖고 적극적으로 행동해도 결코 넘지 못하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완전한 진리라고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미국유학을 마친 2001년 여름, 저는 싱가포르한인교회로부터 선교 분야에서 협력해달라는 동역 제의를 받았습니다. 현지에 도착하니, 안타까운 사역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간암말기 판정을 받은 40대 초반의 한인 성도님을 돌보아야 했습니다. 

그분은 다소 늦게 결혼해서인지 아무 것도 잘 모르는 어린 두 딸을 두고 있었습니다. 얼굴색은 참 까맣게 변해있었고, 배는 복수로 가득 찼습니다. 옛날 사진을 보니 몸이 너무나 수척해져 있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숨 쉬는 것도 힘들어했고, 거동도 무척 불편해했습니다. 저를 만나자마자 그 성도님은 앞으로는 열심히 하나님을 믿겠고, 다 나으면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성도님은 한 재벌기업의 해외영업 사원 출신이었습니다. 술자리, 회식자리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고, 그 기업 회장님으로부터도 신임 받을 정도였습니다. 몇 년 전부터는 개인 사업을 시작하여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합니다. 은행 이자로도 충분히 먹고 살 정도라니 성공한 사업가이지요. 그런데 이게 웬 말입니까? 간암말기입니다. 

그동안 어떤 사역자는 그 성도님께서 금식하면서 서원기도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고쳐주실 것이라고 조언해주었다고 합니다. 적극적인 사고방식에 기초한 적극적인 믿음과 적극적인 기도라고나 할까요? 현대 의학도 이미 손을 뗀 상태인지라 제가 그 분을 만날 때 어떤 말씀을 전해야할까? 마음을 정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생명의 주님께서 얼마든지 고쳐주십니다. 죽은 사람마저 살려내신 하나님께 믿음을 보이십시오. 금식도 하시면서 고쳐주실 것 의심하지 않고 믿으시면 분명히 고쳐주십니다라고 말씀 전하며 치유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옳은 것일까? 그러다가 낫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대비할 수 있는 시기도 놓치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살고 싶어 하는 이 초 신자에게 ‘성도님은 이제 죽습니다. 죽음 맞이할 준비를 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도록 회개할 것이 있으면 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아내와 자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하십시오. 재산 관련 모든 서류들도 정리하십시오.’라고 말씀 전해야 옳은 것인가? 이것은 너무 가혹한 것 아닌가? 더 나아가 혹시 고쳐주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것은 아니겠는가?” 

저는 주님께 매달려야 했습니다. 두려워하고 있는  한 어린 양을 어떻게 돌봐야 할지 가르쳐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해주셨습니다. “육신이 살고 죽는 문제가 나를 향한 믿음과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그러면서 빌립보서 1장 20절과 21절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저는 그 성도님에게 솔직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성도님, 성도님께서 고침 받으실지 돌아가시게 될지 알아맞히는 능력은 저에게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예외 없이 언젠가는 다 죽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처럼 살아도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를 위해 죽는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주님께서 성도님을 고쳐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할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살려두시면 지금 각오처럼 주님께 열심히 헌신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 찌라도 사도 바울처럼 주님과 함께 할 것을 생각하며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뒤에 남게 될 가족을 위해 준비할 것은 다 준비하셔야 합니다.” 

얼마 후 제가 전한 빌 1:20-21절 말씀이 진심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날 그분은 참 많이 우셨습니다. 어쩌면 육신으로는 영원히 헤어져야할 가족들을 생각하며 눈물 흘리시는 듯했습니다. 며칠에 걸쳐 여러 은행의 구좌 소유권을 하나씩 하나씩 아내에게 다 넘기셨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향한 그 분의 마지막 희생이요 헌신이었지요.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그분은 하나님 품에 편히 안기셨습니다. 부활을 분명히 믿으며 죽음의 한계를 기꺼이 수용했습니다. 저는 그분의 마지막 호흡을 병상에서 지켜보았습니다. 가족과 함께 임종예배를 시작으로 장례의 모든 절차를 밟았습니다. 그분과 동행했던 약 한달 간은 저에게 있어서 가장 숭고한 사역 중 하나로 기억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사고를 당해서이든, 질병을 앓아서이든, 늙어서이든 인간은 결국 다 죽습니다. 예수님께서 살려내셨던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도 다시 죽었습니다. 마리아의 오라버니 나사로도 분명히 다시 죽었습니다. 

바울은 죽음의 한계를 거부하지 않고 수용했습니다. 죽음을 피하려고 발버둥치지 않고 도리어 의연하게 순교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며 또 어떻게 죽는가가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죽어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는 더 유익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임하게 될 부활을 바울은 확실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 즉 육체의 장애를 제거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고쳐주실 것 분명히 믿으며 적극적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것도 세 차례나 기도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답변하셨습니다. “내 은혜는 너에게 이미 족하다. 네가 약할 때 내 능력은 온전하여진다.” 육체의 한계를 그냥 수용하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의 기도에 고쳐주지 않으시는 쪽으로 응답하신 겁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의 반응이 놀랍습니다.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약함과 한계를 도리어 기뻐하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1. 겸손하게 하신다.

먼저 바울은 하나님 능력의 강물은 겸손한 마음의 골짜기에 담긴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7절 말씀을 보니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고질병을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고질병을 고쳐주지 않으시는 이유도 자만하지 않고 언제나 겸손하라시는 데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잘나봐야 얼마나 잘났겠으며, 가져봤댔자 얼마나 가졌겠으며, 높아봤댔자 얼마나 높겠습니까? 그런데도 자신이 대단한 것으로 착각하고 그 힘을 과시하고 기고만장한 사람이 있습니다. 일부 교회도 그러합니다. 사회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힘으로 위협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자신이 워낙 커보이니 자신이 워낙 강하다고 생각하니 어찌 하나님 능력을 필요로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아무 문제도 없이 언제나 승승장구할 때, 감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방심해서는 안될 순간입니다. 

그러나 각종 한계에 부딪혀 연약함을 절감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냥 알아버립니다. 하나님 은혜와 하나님 능력을 그냥 사모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찌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영적 능력을 베풀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2. 위로하고 치유하는 통로가 되게 하신다.

또한 바울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다른 지체의 아픔을 위로하시는 하나님 통로가 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고후 1:4을 통해 바울은 고백합니다.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헨리 나우웬의 남긴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상처 입은 사람만이 타인의 상처를 볼 수 있으며, 타인의 상처에 공감하고, 그리고 다가가서 치유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교회 주보에 중보기도 면이 있습니다. 한번 펴보시기 바랍니다. 평상시에는 그리 관심을 끌지도 못하는 지면일 겁니다. 하지만 자신이나 가족이 중병에 걸려 한번 고통당해 보십시오. 이 지면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습니다. 깊이 공감하며 위해서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는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표현을 수긍하게 됩니다. 

위로하고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각종 연약함을 먼저 경험한 사람들을 통해 온전하게 역사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숱한 한계와 좌절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그 한계와 좌절은 귀한 사역자로 준비시켜 가시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스스로 택한 약함으로 그리스도를 위한 도구가 되게 하신다 

끝으로 바울은 하나님 위해서 스스로 선택한 자신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10절,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사도 바울이 복음을 증거 하려고 하니까 핍박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당하는 삶을 선택하니 하나님의 능력이 경험된 것입니다. 

성자 하나님께서도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인간이 되기로 선택하셨습니다. 인간의 한계 속으로 들어오시면서 인간의 연약함을 다 체휼하셨습니다. 그리곤 힘없이 나약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돌아가셨습니다. 힘을 과시하려고 했다면 검과 몽치를 들고 잡으러 온 군병도 얼마든지 물리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러면 어찌 온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복음이 전파되기 위해서도 누군가 희생을 치러야 합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세상적으로 약해져야 합니다. 세상적으로 손해보아야 합니다. 자신을 위해서 쓰고 싶은 것 다 쓰고, 입고 싶은 것 다 입고,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하고 싶은 것 다하면서 복음 전파되기는 어렵습니다.  

동백지역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도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건물 기증자는 오랜 세월 눈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자신의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자신을 위한 물질을 포기함으로써 약해지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손해보신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 능력은 이런 분들을 통해 역사되는 것입니다.  

아 우리 교회도 우리 자신을 위해 예배당 지었다면 어디서 예배드려야 하는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는 보이지 않는 성전을 건축하고자 우리 자신을 위해서는 약해지는 쪽을 손해보는 쪽을 선택하였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를 통해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줄 믿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뛰어넘게 해주시면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리 아니 하실찌라도 우리의 연약함 자체가 하나님 능력의 통로가 된다는 사실도 기억하셔야 합니다. 겸손히 주님 능력 사모하게 되고 고통 받는 연약한 분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데 쓰임 받게 될 겁니다. 

더욱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물질과 시간 등을 희생하면서 스스로 약해지기로 결단할 때는 더욱 놀라운 하나님 능력이 역사됩니다. 연약함을 수용할 줄 아는 은혜가 우리 각자와 우리 교회에 더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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