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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고 (시 13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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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고 (시 137:1~9)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B.C. 586-538년) 말기에 조국 예루살렘에 대한 애국적 향수에 눈물짓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원수에 대한 저주를 감추지 아니했습니다. 
저들은 제국의 감시를 잠시 벗어나 한적한 강변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생각하며 기도와 찬양을 하려고 모였습니다. 
본문은 민족주의적 애국시가 아닙니다. 저들은 단순히 나온바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기 위하여 모인 것이 아닙니다. 저들은 바벨론 강변에 버드나무가 줄지어 있는 곳에 모여 앉아 시온을 그리워하며 울부짖고 있었습니다. 저들의 슬픔은 단순히 망향의 그리움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파괴당하고 도성이 황폐된데 대한 아픔이 저들을 울게 했습니다. 지난 날 하나님을 찬양할 때 쓰였던 수금은 그 소리를 내지 못하고 버드나무 가지에 걸어 놓았습니다. 

Ⅰ. 시온을 그리워하며 울었습니다. 

본문 137편 1-2절에 『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라고 했습니다. 

1) 양극화의 과거를 생각하며 울었습니다.
저들은 찬란한 신정국가라는 무대에서 살아왔습니다. 저들은 왕조시대의 영화 속에서 아쉬울 것이 없었던 과거를 생각하며 저들이 누렸던 하나님의 축복 때문에 울었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저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받던 때를 생각하며 흘리는 참회의 눈물이었습니다. 여호야긴 왕 제 4년에 바벨론 느부갓네살에게 포로가 된 이래로 여호야긴과 시드기야에 이르기까지 환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저들은 계속된 망국의 쓰라린 한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진노 때문에 울어야만 했습니다. 

2) 거부할 수 없는 비참한 현실 때문에 울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가 된 저들은 이제 자유하는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바벨론의 압제 아래 식민통치가 자행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선민으로서의 민족적인 수치는 말할 것도 없고 바벨론으로부터 인권이 유린당하고 재물이 송두리째 수탈당했습니다. 

3) 언젠가는 돌아가야 될 시온에 대한 동경 때문에 울었습니다. 
저들은 조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어진 변함없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습니다. 인간과의 약속은 변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약속한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언약의 주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과 인간과의 약속에는 분쟁과 파기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로를 믿어달라고 장담하는 문서와 날인들이 난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지지 아니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에는 그러한 복잡한 절차가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 자신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Ⅱ. 신앙절개를 지키기 위한 충절을 노래했습니다. 

본문 137편 3-4절에 『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라고 했습니다. 
여기 노래는 노래의 말들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말은 바벨론 사람들은 단순히 유대인들의 음악을 듣기 원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할 때 익숙하게 사용하는 노래가사를 듣기 원했던 것입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조국을 잃어버린 히브리 청년들의 비통함은 아랑곳없이 그들이 부르는 노래를 요구해 왔습니다. 히브리 청년들이 부르는 노래의 주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를 기쁘시게 하는 노래입니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 이들에게 이러한 요구를 하는 것은 유대인들을 조롱하기 위함입니다. 바벨론 사람들은 불멸의 예루살렘 성과 너희들이 믿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노래해 보라고 조롱했습니다. 마치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조롱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27장 42-43절에 『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찌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찌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을 향해 우리를 황폐케 한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불결한 이방의 낯선 땅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차마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방의 땅은 불결한 땅입니다. 
아모스 7장 17절에 『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는 성읍 중에서 창기가 될 것이요 네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며 네 땅은 줄 띄워 나누일 것이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그 본토에서 떠나리라 하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저들은 이방의 음식까지도 불결하게 생각했습니다. 호세아 9장 3절에 『 저희가 여호와의 땅에 거하지 못하며 에브라임이 애굽으로 다시 가고 앗수르에서 더러운 것을 먹을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이러한 이방 땅에서 폐허가 된 조국을 생각하며 바벨론 사람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자체가 저들의 신앙양심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이들의 간악함을 알고 노래 부르기를 중단했습니다(시 137:4). 왜냐하면 불결한 민족 앞에서, 불결한 땅에서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나라는 빼앗겼지만 히브리 청년들은 그들의 신앙만은 빼앗기지 아니했습니다. 

히브리 청년들의 찬송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의의도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벨론 사람들에게 저들의 노래를 제공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들의 찬송과 감사는 바벨론 사람들과는 무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원수 앞에서 노래하는 것은 자기 조국 예루살렘을 포기하는 행위와 같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본문에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찐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찌로다."라고 했습니다. 
저들은 포로민의 한을 씹으면서 바벨론 사람 앞에 수금을 연주하고 노래하는 것은 이적행위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른손으로 악기를 다룰지라도 그 악기는 제 소리를 낼 수 없다는 말입니다.
본문 6절에 『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찐대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원문에 따라 직역하면 "만일 내가 나의 기쁨의 머리에 예루살렘을 놓지 않는다면"이 됩니다. 

기쁨의 머리는 기쁨 중에 기쁨입니다. 즉 예루살렘 시온을 통하여 얻는 기쁨을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겠다는 말씀입니다. 
만약 신앙절개를 저버리고 바벨론 사람 앞에서 그들의 요구에 따라 노래할 때 하나님이 모욕을 당하신다는 것이 저들의 신앙철학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만약 신앙절개를 지키지 못한다면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찌로다."라고 했습니다. 
에스겔 3장 26절에 『 내가 네 혀로 네 입천장에 붙게 하여 너로 벙어리 되어 그들의 책망자가 되지 못하게 하리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 』고 했습니다.
만약 바벨론 사람 앞에서 노래하게 된다면 혀의 기능이 자동적으로 마비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Ⅲ. 최후 승리를 대망하면서 원수를 저주하는 노래를 했습니다.

본문 137편 7-9절에 『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해 받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저희 말이 훼파하라 훼파하라 그 기초까지 훼파하라 하였나이다 여자 같은 멸망할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유복하리로다 네 어린것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자는 유복하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직역하면 "네가 우리에게 복수한 그대로 복수하는 자에게 복이 있을찌어다."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복수의 주체를 궁극적으로 하나님으로 보았습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바벨론에게 복수하시고 자신들을 본국으로 귀향케 하실 것을 대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노래는 원수 바벨론이 망한다는 확신의 노래입니다. 이와 병행해서 자신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영원히 살겠다는 의지를 천명하는 노래입니다. 
신앙은 낙심치 아니합니다. 기독신자들에게 절망은 소망을 기원하는 출발입니다.
여기 해 받던 날은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입니다. 과거 한 형제의 후손이었던 에돔과 이스라엘은 긴 세월동안 반목질시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창세기 25장 25절에 『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갖옷 같아서 이름을 에서라하였고 』라고 했습니다.

말라기 1장 2-4절에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찌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경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영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라고 했습니다.
에돔 족속이 결정적인 틈을 타서 예루살렘을 노략했습니다.

이사야 63장 1-4절에 『 에돔에서 오며 홍의를 입고 보스라에서 오는 자가 누구뇨 그 화려한 의복 큰 능력으로 걷는 자가 누구뇨 그는 내니 의를 말하는 자요 구원하기에 능한 자니라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 틀을 밟는 자같으뇨 만민 중에 나와 함께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을 인하여 무리를 밟았고 분함을 인하여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뛰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 구속할 해가 왔으나 』라고 했습니다. 

에스겔 25장 12절에 『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돔이 유다 족속을 쳐서 원수를 갚았고 원수를 갚음으로 심히 범죄하였도다 』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애가 4장 21절에 『 우스 땅에 거하는 처녀 에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려무나 잔이 네게도 이를찌니 네가 취하여 벌거벗으리라 』고 했습니다. 

이같이 불행했던 날을 기억하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복수해달라는 애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어떤 경우에든지 예루살렘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버리지 아니했습니다. 

여기 8절에 여자는 바벨론을 비유합니다. 바벨론 국가는 어머니에 비유하고 바벨론 국민은 딸에 비유했습니다.
누구든지 우리를 위해 복수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까지 했습니다. 복수의 칼을 갈면서 살기등등한 모습을 연상케 하고 있습니다. 
그 복수의 주체가 그 누구도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복수해 달라고 하는 애원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본국 고토로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본문 9절에서 네 어린 것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자는 유복하다고 했으니 실로 끔찍한 복수를 연상케 합니다.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그 원수들을 철저히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원수가 바벨론에서 바벨론과 에돔으로 변했습니다. 에돔 족속은 에서의 후손이고 이스라엘은 야곱의 후손들입니다. 
에돔은 언제나 이스라엘을 향해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침공을 받던 날 기뻐하면서 그들을 조롱했습니다. 

오바댜 1장 10-16절에 『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을 인하여 수욕을 입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늑탈하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었느니라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의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라 내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성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고난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재물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며 사거리에 서서 그 도망하는 자를 막지 않을 것이며 고난의 날에 그 남은 자를 대적에게 붙이지 않을 것이니라 여호와의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왔나니 너의 행한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너의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너희가 내 성산에서 마신 것 같이 만국인이 항상 마시리니 곧 마시고 삼켜서 본래 없던 것 같이 되리라 』고 했습니다.

이들은 B.C. 586년경에 남조 유다가 바벨론 느부갓네살의 침공을 받아 멸망당할 때 바벨론과 동맹을 맺고 유다를 공격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 시온은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온을 하나님의 도성(都城)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했습니다. 여기 시온을 기억한다는 말은 민족주의적 고토(古土)의 의미를 매우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저들이 저들의 수금을 버드나무에 걸어 두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시온을 노래하라는 원수들의 요청을 거부한 행위였습니다(2-4). 바벨론 사람들이 여호와를 위한 노래(시온의 노래)를 불러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때 저들은 그런 거룩한 노래를 이방인의 오락용(娛樂用)으로 사용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저들이 민족주의적인 차원에서 충절(忠節)을 지킨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신앙의 절개를 지킨 것입니다. 

저들은 이방에 있으면서도 자기의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예루살렘을 더욱 즐거워했습니다. 저들의 노래가 바벨론과 함께 에돔을 쳐서 원수를 갚아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일반적인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바벨론에 대한 심판을 선고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민족을 심판하실 때에 사람 보기에는 비참할 때가 없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이 어찌 저렇게 하실 수 있을까 하고 반문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배후의 원인이 되는 죄악이 하나님의 징계보다 더욱 비참했던 사실을 볼 줄 아는 영적 혜안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구약에 있어서, 어떤 민족의 죄악이 극도로 관영(貫盈)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벌하신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모압의 죄악이 관영(貫盈)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시켜서 그 나라를 멸망케 하셨습니다. 죄악을 징벌하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세움을 입은 바벨론에 대하여 예레미야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자기 칼을 금하여 피 흘리지 아니하는 자도 저주를 당할 것이로다" 라고 했습니다(렘 48:10).

실로 하나님의 심판은 잔인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관영(貫盈)한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公儀)를 정의롭게 집행한 것입니다. 
여러분! 국가적으로, 민족적으로 수난을 당할 때 우국단충(憂國丹忠)의 마음으로 지은 고귀한 시(詩)들이 우리 가운데 많이 있습니다.

① 심훈의 '그날이 오면' ② 윤동주의 '서시', '쉽게 쓰여진 시' ③ 김형준의 '울밑에 선 봉선화' ④ 서정주의 '자화상' ⑤ 김동환의 '국경의 밤' ⑥ 조지훈의 '봉황수' ⑦ 이용악의 '오랑케 꽃', '낡은 집' ⑧ 김동명의 '파초' ⑨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⑩ 김영랑의 '독을 차고' ⑪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⑫ 김소월의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면' ⑬ 한용운의 '당신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기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버드나무에 저들의 수금을 걸고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습니다. 저들의 그 한 맺힌 노래는 빼앗긴 이 땅에 조국을 생각하며 부르던 우국지사(憂國之士)들의 노래와는 다른 것입니다. 병자호란 때 조선의 부녀자들은 청나라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습니다. 저들은 볼모에서 풀려나온 봉림대군과 함께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고향에서는 이미 더럽혀진 여인들을 환영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습니다.
생각 끝에 인조대왕은 조선 8도에 흐르는 강물에 저들의 몸을 씻어 환향녀(還鄕女), 회향녀(回鄕女)라고 이름을 붙여 고향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들은 조선 땅에 흐르는 여러 강물에 원치 않게 더럽혀진 자신의 몸을 형식적으로나마 씻어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물은 조선 각 도에 흐르는 강물에 몸을 씻으면서 울부짖는 여인들의 통곡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들은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습니다. 얼핏 보면 자신의 포로 신세를 한탄하는 듯 합니다.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축복에 울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조국에 대한 사랑과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뜨거운 열정으로 성화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 무엇보다도 애통해야 할 일은 인간들이 과학문명의 만세 소리와 황금만능주의의 포호(咆虎) 앞에 돌아갈 우리의 영원한 조국(천국)을 잊어버리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십니다(히 11:6).

불완전한 이 땅에 우리들의 조국은 수단으로서의 조국입니다. 목적으로서의 조국은 더 나은 조국 곧 천국입니다. 이 땅의 교회운동은 곧 천국운동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우리 생활의 액세서리가 아닙니다. 우리 생활의 전부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운동은 우리 삶의 목적이자 우리의 존재의의입니다. 
시간적으로 하나님의 교회운동은 우리의 요람에서 무덤까지가 아니라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와 우리의 자손의 자손들이 거침없이 계속해야 될 거룩한 운동입니다. 
우리가 영생(목숨)을 얻으면 이 세상을 다 얻은 것입니다. 반대로 영생(목숨)을 얻지 못하면 이 세상을 다 가졌다고 해도 다 잃은 것입니다(마 16:26).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생각하며 의분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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