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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실상이 없는 정열 (히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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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이 없는 정열 (히 11:1~6)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근거 없는 루머로 피해를 본 사람이 소송을 걸어서 삼천만원의 피해보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자기가 겪은 피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자기는 근거 없는 루머 때문에 직장을 잃고 많은 아픔을 당해야했다고 합니다. 자기에 대해서 악플을 올린 어느 간호사에게 물어봤다고 합니다. 당신은 왜 그런 글을 올렸습니까? 했더니 그냥 내용만 읽어보고 울분과 정의감을 느껴서 그랬다고 대답하더라고 합니다. 울분과 정의감,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자기가 읽은 글의 진위에 대해서는 알아보지 않았습니다. 인터넷에 올라와 있으니까 당연히 사실이겠지, TV에 방송되니까 당연히 사실이겠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은 냄비근성이 있기 때문에 쉽게 흥분하고 금방 뜨거워지고 관광지에서 길을 막고 손가락질 하면서 싸우는 사람들을 보면 한국 사람들입니다. 식당에서 큰 소리로 불평하는 사람들을 보면 한국 사람입니다. 한국 사람은 울분과 정의감을 쉽게 느낍니다. 쉽게 길바닥에 쏟아져 나오고 쉽게 흥분하고 쉽게 화를 내고 쉽게 판단합니다. 군중심리에 쉽게 요동합니다. 누구를 이지매하는 것을 잘합니다.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기분에 좌우됩니다. 

어느 의사 선생님이 이런 탄식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환자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면 그건 당연한 것이고 조금이라도 소홀하게 대하면 금방 얼굴빛이 바뀌면서 대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애초부터 친절하게 대하지 말아라. 고마워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니까 그렇게 되는 것이다.’고 했는데 이런 것이 얼마나 개인과 국가에 손해가 되는 것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FTA든 정치든 경제든 비즈니스든 냉정하게 생각하고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이깁니다. 협상력은 정보에 좌우되고 끈기에 좌우됩니다. 얼굴빛 바뀌지 않고 대화할 수 있는 능력, 맘에 들지 않는 사람과도 같이 식사할 수 있는 능력, 내 말을 하기 전에 남의 말을 들을 수 있는 능력, 이것은 상식이에요. 굳이 신앙을 말할 필요 없이 상식에 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예수님을 논하지 않고 상식에 속하는 것인데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에 고등종교를 말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게다가 한 술 더 뜨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에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간호사가 울분과 정의감을 느꼈다고 말씀드렸지요.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에 도덕적인 의미를 부여하면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 되고 무서운 것이 됩니다. 이제는 내 의견에 반대하는 자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이단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쇠고기 수입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 식품위생학적인 문제요, 국가 정책상의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식품위생의 차원에서 국가 정책이 차원에서 접근하면 됩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런데 저는 쇠고기 수입 문제에 신앙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을 봤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오늘날 이 땅에 계셨으면 반대집회에 참석할 것이다 이런 논리입니다. 이거야말로 예수님의 이름을 도용하는 것입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현대 자유신학자들이 범한 실수가 이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디까지나 사람의 말을 하면서 사람이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인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고 싶은 말, 사람의 생각, 사람의 사상, 사람의 철학을 말하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그러나 그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사람의 말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차라리 그냥 이것은 내 의견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정직하고 정확합니다. 왜 주제넘게 거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입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범하는 실수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은 이십일 세기의 세계화를 거부하고 과거로 회기하기를 원하고 있는데 거기까지는 제가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러나 비행기에 폭탄을 설치하면서 이건 알라의 뜻이다 이런 말은 제발 좀 안했으면 좋겠습니까. 어떻게 그게 알라의 뜻입니까. 왜 그런 일에 알라의 이름을 들먹입니까. 그냥 이건 내 뜻이다, 이건 내가 원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정직한 것이고 정확한 것인데 얼마나 자기의 사상과 의견에 자신이 없으면 알라의 이름을 빌어서 거기에 신빙성을 더하려고 하겠습니까. 

  진짜 믿음은 우리의 열정이든 우리의 정성이든 우리의 신실함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내가 순수하고 신실하고 열심만 있으면 믿음이 성립될 줄로 생각하는데 그게 믿음에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믿음인 것은 아닙니다. 순수하고 열심이 있는 사람도 얼마든지 틀립니다. 틀린 것은 틀린 것입니다. 착한 사람은 착한대로 틀리고 나쁜 사람은 나쁜 대로 틀립니다. 틀리는 건 마찬가지에요. 착한 사람도 틀리고 나쁜 사람도 틀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우리의 속담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건 성경적인 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감동케 하는 것은 우리의 지성이 아니고 우리의 믿음입니다. 거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6절 말씀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지, 우리의 착함도 아니고 우리의 열정도 아니고 정성도 아니에요.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여러분의 정성으로 하나님을 움직이려고 하지 말고 여러분의 믿음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진짜 믿음은 무엇이고 그것은 어디에서 오느냐, 진짜 믿음을 우리가 어떻게 얻을 수 있느냐. 로마서 10장 17절이 그것을 아주 정확하게 규명하고 있는데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faith cometh by hearing, and hearing by the word of Christ'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 다시 말하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을 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리라고 믿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 기초한 것이 믿음입니다. 

  모세는 어떻게 해서 가나안 땅을 얻을 줄로 믿었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어떻게 해서 물 위를 걸을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그에게 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오라고 말씀하지 않았다면 베드로에게 아무리 순수함이 있든 열정이 있든 간에 물위를 걷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익사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을 약속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시리라’ 그 이외에도 많은 죄사함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장차 천국에 갈 것을 무슨 근거로 믿느냐? 예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는 너희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영접하여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아버지 집, 천국에 우리가 거할 처소를 예비하신다고 말씀하셨고 우리를 영접하여 주님 계신 곳에 우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천국을 믿는 것이고 죄사함을 믿는 것이고 우리의 믿음은 우리의 정성에 기초한 것도 아니고 우리의 착함에 기초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것입니다. 거기에서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 받을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 주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라라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그 이외에도 수백 가지 약속의 말씀을 나열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소원에서 오는 게 아니라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지 않은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건 가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는 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믿음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오늘 본문 1절 말씀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정의-definition입니다. 믿음은 무엇이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바라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 바라는 것이 있어야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라는 것 자체는 믿음이 아니고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믿음이에요. 

실상, 이것은 영어로 하면 substance, 헬라어로 하면 휘포스타시스 라는 말인데 휘포스타시스 라는 말은 원래 침전물, 건뎅이라는 말입니다. 또 임대계약서-lease 라는 뜻도 있습니다. 계약서는 실제 부동산을 대신합니다. 대표합니다. 어느 누가 아파트를 빌려줄 때 여기 있습니다. 여기서 행복하게 사십시오. 그런 식으로 빌려줍니까. 아니지요. 계약서를 써서 임대든 판매든 매매든 계약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아파트를 파는 사람이 아파트를 지고 와서 전달해 주는 게 아니고 아파트를 사는 사람이 그것을 전달받는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계약서로 매매를 합니다. 때문에 계약서, 그 종이가 건물, 그것이 아파트든 집이든 무엇이든 그것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실상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바라는 것이 아직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음이 있을 때 그 믿음이 내 바라는 것의 실상, 그 계약서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막연한 소원이든 우리의 생각이든 의견이든 정열이든 그런 것이 아니고 확실한 실상을 말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이러한 실상이 있다면 그대로 될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아직 이러한 실상이 없다면 서둘러서 그것을 얻으셔야 됩니다. 우리의 강열한 소원이든 욕망이든 의견이든 편견이든 주장은 그 자체는 믿음이 아니에요. 그것은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습니다. 거기에는 실상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의견을 좇아 살지 말고 사람의 생각을 좇아 살지 말고 우리의 믿음을 좇아서 살아야 됩니다. 우리의 믿음, 각자 자기의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요즘 날씨가 많이 덥지요. 그래서 예배당 안에 에어컨을 사방에 틀어놨는데 에어컨에서 나오는 시원한 바람이 여러분의 앉은 자리로 전달됩니다.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시원한 기운이 여러분에게 전달될 수 있습니까.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공기가 있기 때문에 에어컨 팬이 돌아가면서 시원한 공기가 여러분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믿음이 있을 때 믿음이 팬과 같아서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안 보여요.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람과 같습니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바람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바람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풍력발전을 하면 바람으로 에너지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안 보이기 때문에 안 계시다고 말하는 것은 미련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에너지, 공기, 산소, 사랑, 기쁨, 평화, 지혜, 아이디어, 특허, 지적재산, 이런 것은 눈에 보이지 않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데서 시작하지만 그러나 그 결과는 눈에 보이는 것이 됩니다. 지적재산권은 사람이 상상력 창의력 지혜에서 시작하지만 그 결과는 눈에 보이는 돈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이에요. 빛도 프리즘을 통과시키면 평소에 보지 못했던 일곱 가지 색깔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의 프리즘을 통해서 하나님께 접근하면 이전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다양한 속성과 성품과 능력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내가 경험할 수 있는 차원으로 나타나게 하는 역할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뭐라고 설명했느냐면 ‘성령의 나타남-manifestation of the holy Spirit’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성령의 은사를 통하여 당신을 나타내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당신의 선하심, 당신의 약속과 성취, 은혜, 당신의 지혜, 사랑, 이런 것을 통하여 당신을 드러내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을 업신여기면 안됩니다. 믿음을 폄하하면 안됩니다. 믿음은 실상이요, 증거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좀 더 많이 갖고 의견은 좀 더 줄여야 됩니다. 말은 적게 하고 더 많이 귀를 기울여 들어야 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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