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아아 허탄한 사람아! (출 23:1, 약 2:20)

  • 잡초 잡초
  • 772
  • 0

첨부 1


아아 허탄한 사람아! (출 23:1, 약 2: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공동번역성경은 “아아 어리석은 사람아”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허사를 경영합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여호와의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버리자 하도다”(시2:1-3) 허사란 인간의 죄성과 죄에서 나오는 일의 허무함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허탄한 사람은 어리석어 허망한 짓을 합니다. 다윗은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치도 아니하리이다”(시26:4)라고 기도했습니다. 

  누가 허탄한 사람일까? 

  󰊱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거나 따르는 사람입니다.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출23:1)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허망한 풍설이란 “헛된 소문”입니다. 헛된 소문을 퍼뜨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허망한 풍설로 인해 국정이 마비되고 국회가 문을 닫고 광화문 거리가 촛불을 앞세운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이 두 달을 넘기고 있습니다. 쇠파이프가 등장하고 경찰차가 불타는 동안 기름값은 치솟고 경제는 추락하고 있습니다. 

  광우병이 무엇이냐? 소가 소를 먹어 소가 미친 병입니다. 사람이 인육을 먹는 식인종들 중에 광인병이 있었습니다. 소가 육골분을 먹으면 성장이 빠릅니다. 그러나 소가 미칩니다. 소는 반추동물로 풀을 먹고 새김질을 해야 합니다. 

  헛된 소문의 발단은 MBC PD 수첩에서 시작되었습니다. 4월 29일 광우병 프로그램을 방송하면서 아래사 빈슨이라는 미국 여성이 인간 광우병으로 죽은 것처럼 소개했습니다. 주저앉은 소를 보여주면서 광우병인 것처럼 말했습니다. 이 보도를 지켜본 10대 청소년들이 “우리가 어른이 되면 광우병으로 죽겠구나”하는 두려움이 생겨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갔습니다. 

  문제는 방송된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지금까지 미국에서 육골분 사료를 금지한 이후 광우병으로 확인된 소가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1년에 잡는 소가 700만 마리가 넘으며 세계 96개국에서 미국산 쇠고기를 제한 없이 수입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쌀을 먹듯이 미국 사람들은 쇠고기를 주식처럼 먹고 있습니다. 미국 인구가 3억이나 되는데 지금까지 한 명도 광우병에 걸린 사람이 없습니다. 미국 식품 의약청은 세계에서 가장 철저한 기관으로 인정받습니다. 

  증삼살인(曾參殺人)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공자의 제자 중에 증삼이라는 제자가 있었는데, 그는 어머니로부터 신임을 받는 언행이 신중한 효자였습니다.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베를 짜고 있는데 이웃 사람이 헐레벌떡 달려와서 “증삼이가 살인했대요”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조금 후에 친척이자 신분이 있는 사람이 와서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이번에도 증삼이가 그럴리가 없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친척이 나간 후에 또 한 사람이 달려와 “당신 아들이 살인죄로 체포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베틀에서 내려오는 증삼이 어머니에게 당신도 위험하니 피신하라고 권했습니다. 당시는 살인자의 가족도 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있는 사이에 증삼이가 돌아와 새파랗게 질려 있는 어머니를 보고 “공부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들었는데, 어떤 사람이 사람을 죽였는데 그 흉악범의 이름이 저와 같아서 사람들은 제가 살인한 줄로 알고 있더군요”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휴우’하고 안도의 숨을 쉬며 “너를 믿었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 내 마음도 흔들리더라 헛소문이 무서워”라고 했습니다. 

  헛소문을 내는 사람도 허탄한 사람이고, 헛소문을 동조하는 것도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시류(時流)를 좇지 말고 과학적 진실을 말하고 따라야 합니다. 항상 진리를 쫓는 빛의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 믿는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여기서 말하는 허탄한 사람은 믿음이 있다면서 행함이 없는 자를 말합니다.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은 믿음이지 행위가 아닙니다. 그러나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7)고 했습니다. 천둥이 번개를 따르는 것처럼 믿음에는 행위가 따릅니다. 믿음만이 믿는 자를 의롭게 합니다. 그러나 행함이 없는 독자적인 믿음은 없습니다. 

  믿음은 그 열매를 통해 나타나야 합니다. 바위산을 무너뜨리고자 할 때, 그 바위에 조그만 구멍을 뚫고, 그 구멍 안에 화약을 가득 채웁니다. 그 다음에 전기가 연결된 선을 그 구멍 속에 집어넣습니다. 신호에 따라 전류가 전달되면 그 바위산은 큰 소리를 내며 폭발하여 무너집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산을 옮깁니다. 믿음이란 실천에 옮겨져야 합니다. 불은 붙어야 타고 불은 타야 불입니다. 

  양초에 불을 붙이면 촛불이 타오릅니다. 촛불은 빛과 열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촛불이 꺼지면 빛도 열도 모두 없어집니다. 한가지가 없으면 다른 한가지도 없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허망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는 행위도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습니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음과 그의 아내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약속하신 그것을 능히 이루실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습니다(롬4:18-22).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말만한 것이 아니라 행동하고 실천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고향을 떠났으며,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드렸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만이 평가를 받고 의로 여김을 받습니다. 

  믿음은 마음가짐이고 행위는 몸의 활동입니다. 믿음은 행위를 일으키는 영혼이고, 행위는 영혼의 활동입니다. 어떤 일도 하지 않는 믿음은 하나님도 그의 믿음을 알 수 없고 사람도 그의 믿음을 알 수 없습니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책이 있는데 몸은 답을 알고 있습니다. 믿음이 몸을 움직이고 몸이 움직인 결과를 거두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보이느냐?”고 묻는 이가 있습니다. 살아 있는 믿음은 보입니다. 안 보이는 것은 없어서입니다. 있다면 보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메고 오는 네 사람에게서 믿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향해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막2:11)고 하셨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행함이 없으면 허탄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죄라고 말합니다. 말로 하지 말고 몸으로 하는 것이 옳습니다. 중국 고대 격언 중에 “나는 듣고 잊는다. 나는  보고 기억한다. 나는 행하고 이해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행하고 이해하기 바랍니다. 


  󰊳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감사치도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롬1:21) 

  현대인의 특징은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학생을 부르면 1,2학년은 “저요?”라고 대답합니다. 3,4학년은 “나요?” 5,6학년은 “왜요?”라고 대답합니다. 선생님에 대한 존경이 자라 갈수록 떨어집니다. 

  허탄한 사람은 생각이 허망합니다. 하나님을 귀히 여기지 않습니다. 허탄한 사람은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미련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말씀에 복종함으로 영혼의 법칙으로 여깁니다. “삼가 말씀에 주의하는 자는 좋은 것을 얻나니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잠16:20) 

  소크라테스는 불의한 재판에서 내려진 판결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사형 받지 않고 도망치도록 도와주는 친구가 있었지만, 법률에 불복종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친구들의 도망하라는 요청까지 거절하고 독배를 마셨습니다. 국법이 불복종하는 자들에 의해 무시된다면 어찌 국가가 존립할 수 있겠습니까?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며 불의한 판결에 복종한 것입니다. 법이 권위를 잃으면 나라가 법에 의해 다스려질 수 없습니다. 

  큰배의 앞 부분에 용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풍랑을 만났을 때 중심을 잡아주는 쇠뭉치입니다. 어찌 보면 배를 가볍게 해야 할 것 같은데 오히려 무거운 쇠뭉치를 매달고 다닙니다. 용골은 안전한 항해를 위해 꼭 필요한 무게 중심입니다. 국가의 중심을 잡아주고 우리의 영혼의 닻이 되는 중심이 필요합니다. 법률이란 문자로 쓰여진 규정입니다. 모든 국민이 그 법을 지킬 때 국가가 세워지고 발전합니다. 

  교회가 승리하지 못하고 부흥하지 못하는 경우는 하나님의 뜻에 거역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주도하고 있어서입니다. 거역의 정신이 지옥문을 열 수는 있으나 천국문은 못 엽니다. 민수기 16장에 보면 고라와 그 일당이 모세에게 거역했다가 땅이 입을 벌려 그들은 모두 삼켰습니다. 사람들은 권위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모릅니다. 거역은 사망의 원리, 사탄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은 거역의 죄를 중죄로 가혹하게 다스리십니다. 권위에 대항하면 하나님이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오늘의 모든 혼란은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 원인입니다. 우리시대의 분리, 분열은 모두 거역에서 나온 것입니다. 머리의 권위 없이는 몸의 통일이 불가능합니다. 지도자는 권위를 행사할 줄 알아야 하고 백성은 권위에 순종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라도 교회도 혼란에 빠집니다.  

  허탄한 사람은 “감사치도 아니하고 그 생각이 허망하여”진다고 했습니다. 허탄한 사람은 생각이 잘못된 곳으로 빗나갑니다. 사단이 노리는 것은 우리의 생각입니다. 불평하게 하고 원망하게 합니다. 허탄한 사람은 생각이 허탄합니다. 반항하고 짜증내고 분노하게 합니다. 그것은 곧 마귀 전술로 자기 스스로 불행하게 하고 자멸하게 합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3:15)고 하십니다.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다”(욥15:31)고 했습니다. 어느 대학 강사가 인터넷 방송에 전경으로 가장하고 글을 올렸습니다. “더 이상 이명박의 개 노릇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상부에서는 시민들을 개 패듯이 패라는 명령만 귀따갑게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글은 한 시간 동안 접속이 중단될 정도로 무섭게 퍼져 나갔습니다. 날조된 풍설로 선동한 것입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와 지키는 자의 수고가 허사입니다”(시127:1) 하나님이 없는 사람 허탄한 사람입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믿는다고 하면서 행함이 없으면 허탄한 사람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과 같습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딤전4:7) 

 “아아 허탄한 사람아!” 하나님을 알되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감사하며 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