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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택받은 창조적 소수 (눅 6: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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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받은 창조적 소수 (눅 6:12~19)


한 나그네가 프랑스 접경 알프스 산맥을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나그네는 황량하고 메마른 불모지를 보며 탄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땅이로군!” 
그 곳은 풀 한포기 없는 죽은 땅이었습니다. 
나그네는 그 광야에서 등이 굽은 노인을 만났습니다. 
노인은 도토리가 가득 담긴 가방에서 도토리를 꺼내 쇠 지팡이로 땅에 구멍을 낸 후 도토리를 심고 있었습니다. 
나그네가 노인에게 다가가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노인은 대답했습니다. 
“내가 심은 도토리가 싹이 나면 이곳은 아름다운 숲으로 변할 것입니다.” 
나그네는 노인에게 무모한 일을 그만 하라고 충고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25년 후 우연히 그 곳을 방문한 나그네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곳은 울창한 숲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새들의 노래와 꽃들의 향기가 가득한 축복의 땅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사랑과 희생이 황무지를 축복의 땅으로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국가, 사회, 가정은 창조적인 소수에 의해 새롭게 창조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예수님께서 열 두 사도를 선택하시는 내용입니다. 
당신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시기 위하여 함께 동역할 사람들을 세우셨습니다. 
어두운 역사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창조적인 소수를 세우셨습니다.   

1.먼저 성경은 그 ‘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성령의 충만하심을 입었습니다. 광야에서 40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습니다.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로 돌아가시어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소문은 사방으로 퍼졌나갔습니다.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많은 사람들이 칭송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말씀에는 권세가 있었습니다. 귀신들린 사람들에게서 귀신이 물러가고, 수많은 병든 자들이 고침을 받습니다. 이 놀라운 광경을 듣고 본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들의 삶의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로 결심하였습니다.(눅5:17)
그러나 이때부터 예수님을 향한 칭송이 경계로 바뀝니다.(눅4:24) 
경계하던 사람들이 시비를 겁니다.(눅6:2)  
시비하던 사람들이 모여 분노하며,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까 대책을 논의합니다.(눅6:11) 

오늘의 성경은 “이 때에”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그 열 두 명의 사도를 선택하신 때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 일에 상당한 저항이 일어나고 있는 때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칭송이 경계로 바뀌고, 시비하고, 분노하며 처지의 방법을 논의하게 된 이유입니다.  예수그리스도와 그를 추종하는 자들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데반과 야고보가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하고, 베드로와 사도들이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고, 협박을 당하는 것이 그들의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주님의 선포에 있었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천국은 누구나 원하는 것이지만 회개는 원치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자신들의 삶을 송두리째 돌이켜야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전존재와 삶에 개혁이 일어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영적인 싸움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의 바른 삶을 권고합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방해를 받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2:12, 20,21입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행실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느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때는 하나님의 자녀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조금씩 힘들어지는 때입니다. 방송, 매스콤, 인터넷이 공개적으로 반기독교적인 성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기가 쉽지 않는 상황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그러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저항이 있었습니다. 강력한 저항 속에서 순교자들이 나왔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졌습니다. 우리나라도 대동강변에서 토마스의 피 흘림으로 시작되어 일제시대와 육이오 때에 수많은 순교자들이 피를 흘렸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것입니다. 
기독교는 박해 속에서 망하지 않고 도리어 새롭게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더욱 영적으로 새로워집니다. 내적으로 더욱 결속이 됩니다. 

중국의 경우를 보면 이 사실은 더욱 확연합니다. 모택동의 문화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기독교복음이 140여 년 동안 전해졌고, 당시 8만여 명의 선교사들이 활동하였으나 기독교인은 고작 100만 명이 채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문화혁명이 일어나 모든 선교사들이 추방되고, 그나마 세워졌던 교회당마저 문을 닫은 채 30여년이 흘렀습니다. 그런 어둠의 터널을 지나고 등소평시대가 열리면서 굳게 닫혔던 교회의 문이 열리게 되자 기독교인은 300만 명이 넘었습니다. 

그 이후 30여년이 채 못 된 지금 중국기독교인의 수는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최근에 7천만 명이라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반대세력이 강하게 일어나는 “이 때에” 열두 사도를 세우셨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세우기 위하여 주님은 운명을 같이 할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나는 저와 여러분들이 바로 이 일을 위하여 선택되는 영광이 있기를 바랍니다. 


2.“이 때에”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복음6:12 말씀입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세상의 저항이 심각할 때에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영적인 저항을 이기는 길은 기도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셔야하는  고난의 현실 앞에서 어떻게 피할 것인가를 대책을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힘 있는 사람들에게 줄을 댈 수 있는지를 찾아다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산으로 가셔서 밤새워 기도하셨습니다. 

마태복음26:37-39입니다.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쌔 고민하여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있으라 하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고”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할 힘을 얻습니다. 
기도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을 보면서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지금이 70년대 80년대의 민주화투쟁을 해야 했던 상황처럼 시국이 심각합니까? 광주사태가 일어났던 때처럼 위기입니까? 누가 광우병으로 피해를 입었습니까? 성직자들이 거리로 나가 시위를 해야 할 만큼 절망적입니까? 
누구를 원망하거나 탓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실 때 마음이 고민하여 심히 슬프고 괴로웠던 것처럼 오늘 저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참으로 슬프고 안타깝습니다. 
지금은 기도해야할 때입니다. 
한국교회여 깨어 기도합시다. 사랑하는 성도여! 깨어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전능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기도하는 자들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습니다. 기도하며 나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보다 앞서지 마십시오. 하나님보다 앞서지 마십시오. 
더디더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가야합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슬프고 고통스러울 때 밤새워 기도하셨습니다.
 
빌립보서4:6,7에 말씀하십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3.기도하신 예수님은 열두 사도들을 선택하십니다. 

누가복음6:13입니다.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기도로 밤을 밝힌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던 사람들 중에 열둘을 선택하십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열 두 사도는 많은 제자들 중에서 선택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는 기도하시기 전에도 기도 후에도 이미 많았습니다. 
자신의 삶의 필요를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많습니다. 
 
예수님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5천명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본 사람들은 앞 다투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 대다수는 오래지 않아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남은 열 두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6:67-70입니다.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라.”

열두 사도는 예수님의 특별한 선택입니다. 
예수님께서 정말 중요한 때는 열 둘 중에서 또 세 명을 따로 세우셨습니다. 창조적 소수라고 하겠습니다. 
누가 주님의 선택받을 창조적 소수입니까? 
아내의 말을 듣지 않는 한 사람-
많은 남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사회를 보던 사람이 말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아내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 사람은 우편에 아내의 말을 듣는 사람은 좌편에 서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겸연쩍어 하면서도 다 죄편으로 가서 섰습니다. 그런데 단 한 사람만이 우편에 서섰습니다. 사람들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사회자가 다가가서 조용히 물어보았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혼자 여기 서 계십니까? 아내의 말을 정말 듣지 않으십니까? 그 사람이 아주 난처한 모습으로 대답했습니다. “실은 오늘 아침 집에서 나오는데 아내가 절대로 사람이 많이 가눈 곳에는 가지 말라고 해서입니다.” 
이 사람이 창조적 소수입니까? 

주님은 열 두 제자 가운데 세 명의 제자를 특별히 선택하여 부르신 일이 세 번 있습니다. 그 일을 통하여 선택하심의 조건을 생각합니다.    

1) 마태복음9:18-26에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가실 때입니다. 
회당장 의 많은 기도로 그 딸을 회복을 위하여 가시는 길에 그 딸이 죽었다는 전갈이 왔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따르던 제자들의 수를 세 명으로 줄입니다. 함께 가시는 예수님 때문에 받을 비난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입니다. 
누가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입니까? 
나를 위하여 고난 받으신 예수님, 십자가까지 부끄러워하지 않으신 예수님 위하여 기꺼이 욕을 먹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바로 당신이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2)마태복음17:1-8에 변화산에 올라가실 때입니다. 
진정한 영적인 삶을 위하여 산의 정상에까지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영적인 깊은 경험을 위하여 기도의 산에 오를 수 있는 사람입니다. 

3)마태복음26:31-46에 겟세마네에 가실 때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았지만 그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진정한 영적인 능력을 얻기 위하여 기도의 동산에서 함께 밤을 새울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실행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그 기도의 동산으로 우리를 함께 가기를 원하십니다.   

영국의 역사철학자 아놀드 토인비(1889.4.14-1975.10.22)는 1934-1961년에 걸쳐 12권의 ‘역사의 연구’를 출판하였습니다. 이 책을 통해서 그는 인간 역사의 과정에서 26개 문명의 등장과 쇠퇴를 검토하였습니다. 
“문명은 엘리트지도자로 이루어진 창조적 소수의 지도 아래 도전에 성공적으로 대응함으로써 등장한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문명은 그 지도자들의 창조적으로 대응하기를 멈추었을 때, 쇠퇴하며 민족주의 , 군국주의, 전체적 소수의 독제정치 등의 죄악에 의해 몰락한다.”고 보았습니다.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는 바로 저와 여러분을 통하여 주님이 이루실 것입니다. 
어려운 현실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며 
창조적인 소수로 선택받아 당신! 
주님과 함께 어디든지 가며, 
주님을 위하여 기꺼이 고난도 받고, 
주님을 더욱 깊이 알아 영적으로 성숙하며, 
주님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당신을 통하여 주님은 축복하실 것입니다.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맛 잃은 세상에 살맛나게 하는 소금으로! 
모범을 잃은 세상에 산 위의 동내처럼 모범을 보이는! 

오늘의 선택받은 창조적소수인 당신에게 주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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